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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종인 인류 (롬3:9-18)

본문

1. 문단속이 허술한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거나 아녀자를 겁탈하는 짓이 악한 범죄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만한 일인데, 온갖 궤변과 공갈 협박으로 남의 나라를 통째로 삼키고도 아주 좋은 일을 해 주었다고 주장하는 간사한 섬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간교하고도 무자비한 착취와 학대에 시달리던 우리 조상들이, 1919년 3월 1일에 평화적인 시위를 하면서 자주 독립을 외치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고, 살해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비폭력 무저항의 평화적 시위를 함으로써, 온 세계에 독립의 열망과 자유에 대한 간절한 염원 그리고 평화적 공존의 고귀한 정신을 강렬하게 심어 준 지도 벌써 7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손들이 나라 도둑질에 대해 회개하기는커녕, 여전히 궤변만 늘어놓고 있고, 심지어 독도까지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참 자유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형태의 종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2.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류 성경은 모든 인류를 죄의 종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죄 아래”는 휘포 하마르티안(φ’ μαρταν)으로서 ‘죄의 장중에’, ‘죄의 권세 아래’, ‘죄의 지배 하에’ 등을 의미합니다. 여기의 “죄” 곧 하마르티안이란 단순히 윤리 도덕 또는 법률상의 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영적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표적에서 빗나간 성향과 생각, 말과 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의로워지려고 한 의지까지도 죄임을 깨닫고 참회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올바른 깨달음이요, 올바른 회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창조주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과 무관한 인간의 도덕적 의지란 분명히 죄입니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종교적 의지 역시 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듣고 산에 올라간 뒤에, 백성들이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한편으론 조르고, 한편으론 위협해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인도 봄베이의 힌두교 성자인 구루 키산 코다리는 호랑이 우리에 들어가기 전에 요가를 통해 호랑이들을 무력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의 평정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이어서 자신을 호랑이들로부터 방어해 줄 에너지 벽이 자신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데, 어떤 동물도 이 벽을 뚫을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코다리는 자신의 신앙심을 과시하기 위해, 공포에 질린 200명의 추종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호랑이 우리로 당당하게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코다리는 이내 에너지 벽이 뚫린 것을 감지하고, 공포에 질렸으며 달려드는 호랑이들에 주먹으로 맞섰지만 별 효과는 없었습니다. 그는 주문과 저주를 퍼부으면서 계속 대항했습니다. 그러나, 한순간 민첩하게 달려든 호랑이가 목을 무는 바람에 죽고 말았습니다. 안 된 얘기지만, 하나님을 떠난 자기 우상화의 비참한 말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가 하마르티안 곧 죄라면, 자기 의를 추구하는 도덕적 의지와 자기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적 의지는 자기 우상화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자기 우상화의 형태는 일을 통한 자기 성취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취 의지나 성취 의욕이 강하면 강할 수록, 그만큼 더 일의 지배를 받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실상 일을 한다기보다는 일에 매여 살거나, 일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일 중독증 환자까지 생겨나고 있지 않습니까 섭리자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일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지, 결코 일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피조물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오히려 지배를 받는 것은 자기 비하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 말고도 인간을 지배하는 세력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을 믿지 않는 인류란, 알든 모르든 간에, 하나같이 다양한 형태의 주인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근심 걱정에 매여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한의 감정에 얽매여 홧병까지 만들어 사는 사람이 있고;평소에는 점잖다가도 술만 들어가면 정신없이 날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아내의 지시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과거의 공로에 얽매여 하나님의 축복의 미래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의 실패에 얽매여 하나님의 축복의 미래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나 생각이 아니라 자기의 선입관이나 편견이나 아집에 지배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종살이 말고도 재물의 노예, 쾌락의 노예, 권력의 노예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하나님에 의해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된 인간의 자기 비하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모든 인류는 다 자기 우상화, 혹은 자기 비하라는 죄의 종인 것입니다. 자기 상실이죠 여러분, 온 세상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부여받은 우리가 종 노릇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얼간이가 아프리카의 허름한 여관에 들게 됐는데, 방이 없어 흑인과 한방을 쓰게 됐습니다. “내일 아침 6시에 깨워주세요.”라고 주인에게 부탁한 뒤 곯아 떨어졌습니다. 코 고는 소리에 옆에서 자던 흑인이 잠을 깨게 됐습니다. 보니까 웬 누런 녀석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간이 얼굴에 검정 구두약을 발라 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이 얼간이를 깨웠습니다. 일어난 얼간이가 세수를 하려고 거울을 보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댔습니다. “이 씨, 나를 깨워 달랬더니 검둥이를 깨웠네…” 유식자나 무식자, 성자나 불신자, 부자나 가난한 자, 권세자나 서민 할 것 없이 자기가 정말 누군지 모르고 종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와 같이 죄의 종 노릇하는 인간의 실상에 대해 성경은,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온갖 끔찍한 죄의 종 노릇을 하며 파멸과 고생과 멸망의 길을 치달려가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주님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진정 하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열국 지배 야욕의 종 노릇에서 해방되고, 한국이 진정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원한의 종 노릇에서 해방될 때에 비로소 두 나라 사이에 자유와 평화와 사랑의 선린 관계가 이뤄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본이 한국과 주변국에 대해 저지른 거짓과 위선과 총칼에 의한 끔찍한 만행들을 직시할 때에 참 회개가 가능하고, 한국이 그들의 만행에 의한 끔찍한 참상을 낱낱이 기억할 때에 비로소 무엇을 어떻게 용서해 줄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맺음말 요한복음 8:36에 보면,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목숨과 살아갈 터전을 거저 받았습니다. 더욱이, 성령님의 역사를 좇아 주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누릴 영생까지 얻었습니다. 이 귀한 생명을 가지고 죄의 종 노릇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자주적 삶을 사는 유일한 길은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순종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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