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받아들이는 사람 (롬4:13-25)
본문
인간의 삶은 좋을 때와 나쁜 때가 있고 형통할 때와 곤고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사람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재의 삶의 목적을 갖고 하나님 뜻을 좇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사회가 이렇게 어려워졌는데, 이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의 영향이 너무 큽니다. 몇일 전 27세인 강종렬씨가 32세인 김 은영씨를 칼로 무참하게 죽이고, 사건현장에 달려온 주방장도 칼로 찌르고 도망치다가 여관에서 인질극을 벌였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잡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다른 사건과 다른 점은 그가 그저 살기 싫어서 이런 짓을 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서 자기도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해서 그 일을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죽으려 한다면 여러 가지 길이 있는데도 그는 이런 끔찍한 일을 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길도 모르기에 다른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자신도 죽게 되었습니다. 착한 마음을 먹고 잘 살려고 하면서 운전면허증도 얻었다고 하는데 한 번 음주운전으로 걸렀다고 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안되는 것이 나의 길이다' 하면서 공연히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아임에프 시대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오히려 십대입니다. 십대들은 국가적으로 거품 경제속에서 풍성하게 살다가, 그저 흥청망청 살다가, 집에서나 밖에서나 마음껏 먹고 놀다가, 이제 아임에프를 만나서는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오십년대 태어난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을 만났을 때 당연히 잘 감당을 하는 것 같으나. 젊은 세대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대학 2학년생들이 22만오천명이 휴학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수인가요 큰 대학도 전체 학생수가 이만명 정도인데, 지금 얼마나 많은 수의 학생이 휴학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공부는 왜 하는가요 어려운 때를 준비하는 것이 공부입니다. 지식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준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뇌에 지식을 저장하여서 사회에 봉사하고 자신에게도 좋은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래서 어려울수록 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얼마나 많은 여대생들이 윤락녀로 뛰어 들어서 그만 기존 윤락녀들이 살기 어려울 정도라고 합니다. 대학생 여학생, 가정주부도 윤락가에 달려드니 참 안타깝습니다. 대학생이 강도질하고 있고 대학생 사기절도범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십대, 이십대가 몸은 건강해지고 고생은 할 줄 모르고 용기도 없는데, 세대가 달라져서 오히려 머리 회전은 빠르고 컴퓨터에 손을 대기에 또 다른 범죄를 일으켜 큰 사회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가요 가정에도 많은 가정주부들이 이발소에 면도사로 들어가서 퇴폐한 일을 한다고 하고, 단란주점에도 주부들이 반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돈을 벌어서 자녀를 교육시키려 한다고 합니다. 몸을 팔아서 자녀공부를 시키면 자녀가 성공할 수 있습니까 남편을 돕는다고 몸을 팔아서 되는 것인가요 가정을 지키려고 한다면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만 지켜지는 것이 가정입니까 우리는 국민들이 너무 문제를 잘못 알고 해결하려고 있습니다. 밀라노에서 몇몇이 모여 질문을 하며 토론을 했습니다. 헬라문명속에서는 토의를 많이 했는데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수 있는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했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이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가 바로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성자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면, 그는 오늘날까지 기독교가 세계로 확대되는 교량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전파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첫째 사도바울이고, 그 다음이 어거스틴이고, 또 1300년 후에 태어난 마틴 루터입니다. 사도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했다면, 어거스틴은 신학 기초를 다짐으로 인하여 복음을 세계로 뻗어나가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 어거스틴이 처음에는 어떤 문제를 갖고 행복한 삶에 대한 질문을 하다가 고민하며 대답을 얻지 못하다가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도 대체로 처음 기독교를 찾는 것은 작은 문제로 인해서이고 그로 인해 주님을 만나게 되고 나중에 큰 일을 합니다. 행복은 언제나 지속됩니까 아닙니다. 어제는 행복했다가 오늘은 그 행복이 쨍그랑 깨질 때도 있습니다. 시장 통로에 있는 유리그릇과 같이 늘 깨질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깨지고 무너지고, 자동차가 선 하나만 넘어서도 산산조각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행복이 그 이상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약한 행복의 소망도 우리 주님을 만날때에는 주님이 주시는 참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할 때 누리는 행복은 영원히 행복한 것입니다. 십 년전에도 기뻤던 것처럼 오늘날도 만족하고 살게 됩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지금과 똑같은 행복과 평안을 누릴줄 믿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크시기 때문에 우리앞에 있는 어떠한 장애물, 어려움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동일한 것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세상권세는 오래 못가나 주의 교회는 왕성하리라. 세상 어떤 것도 왕성할 수 없으나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고 왕성하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과 평화와 은혜는 언제나 동일하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서 능치 못함이 없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국가과 가정,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 은헤를 받는 자만이 큰 일하였고, 큰 인물이 되었고 어려움을 이길수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천년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천년 동안에 문화의 차이가 심하지 않고, 또 특별한 지식, 장비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었으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릅니다. 국제정세가 그렇습니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십 여년사이에 중국이 변했습니다. 유교 사회인 중국이 지금 만리장성처럼 혼란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공장이 들어선 지가 사년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가정이 붕괴되고 있다고 합니다. 소련도 그렇습니다. 십여 년 전에 소련에 갔을 때만 해도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민스카에 갈 때까지동안에 자동차로 삼십 시간을 가는데 사람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황량하던 땅이 년 사이에 경제적인 붕괴와 사상, 정치적으로 붕괴되는 것이 겉잡을 수 없습니다. 태풍처럼 변화가 엄청나게 몰아 닦치고 있습니다. 이 변화 속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이겨 나갈수 있는가요 그전처럼 살 수 있는, 이전의 격언이 지금은 전혀 안 통합니다. 지금은 이전의 시대가 아닙니다. 너무 변화가 많습니다. 모르면 상팔자가 아니라 모르면 죽는 시대입니다. 신문에서 57살의 법대 교수가 몇 년동안 제자하고 동성연애를 했습니다. 성 관계는 학교에서 했다고 했습니다. 이 학생이 졸업해서 나가서 살다가 잘 안 되어서 교수를 호텔로 유인했습니다. 거기서 교수를 협박해서 비디오를 찍어서 돈내놔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교수가 돈을 안 주니까 그만 산으로 유인해서 글쎄 그 제자가 교수를 생매장해서 죽였습니다. 누가 그들의 부인인지 모르지만, 학교를 보내어서 교수와 제자들이 동성 연애를 한다는 놀라운 소리에 우리가 설 자리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깊이 깊이 이 사회에 퍼져있는 이 사회의 악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땅에서 해결할 수 업습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도덕, 정치, 정신도 모두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을 받을 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화를, 지식을 따라 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농촌에서 비가 오면, 비가 물길을 타고 아래로 내려갈 때, 우리 논으로 물이 들어오도록 물길을 열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바다 물결같이 내게 임하도록 마음을 열어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결같은, 강물같은 하나님 은혜가 내게 흐를 때, 소낙비와 같은 은혜가 임합니다. 선지자들은 장마비와 같다고 했습니다. 은혜가 내릴 때 내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은혜를 받는 민족이 세계적인 민족이 되었습니다.
로마도 그랬고 영국도, 미국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드림으로 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인간의 문명이 아닙니다. 인류의 발달한 문명은 언젠가는 쇠하고 끝났으나, 영적인 문명을 받아들일 때 영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다른 종교는 내가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은총을 받아들릴 때 내가 영적으로 삽니다. 예수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은 3장은 '인자도 들린다. 저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받아들이는 종교입니다. 나아만이 받아들임으로 문둥병을 고치고, 베드로도 받아 들임으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림으로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한계 사항이 있습니다. 끝까지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을 기를 때도 자녀 문제로 낙심하면 안됩니다. 공부를 안하기도, 집을 뛰쳐 나가기도 방항하기도 하고 거짓말하기도 남의 것을 훔치기도 합니다. 술마시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매 주일마다 이런 일이 많아서 울면서 저를 찾아오는 일이 많습니다. 매주일마다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애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천사로 태어나서 크는 애들이 없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어찌 거짓말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여름밤 소나기만 오면 집에 있는 마늘을 다 훔쳐다가 팔고 했습니다. 이 마늘을 사는 집은 교회학교 부장선생님이었어요. 저는 어렸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사는 부장님은 더 나빠요. 아버지가 담배 팔아서 그 돈을 장롱에 감췄는데, 그 돈을 훔쳐서 땅을 사러 갔다가 돈을 다 뺏긴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도 열여덟 살에 사생아를 낳았고요. 서른이 넘어서 예수를 만나서 큰 일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어려서는 방탕하다가 커서 주님을 만나면 주님의 빛으로 자신을 비추면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때 저를 유혹했던 사람도 지금은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너무 꾸짖지 말고 그들의 잘못된 길을 주님의 길로 인도하십시다. '그래도 괜찮다' 고 하시고 주님께 가 보세요. 교인 한분이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딸을 성폭행한 남자애를, 만일 그 교인이 합의를 안해 주면 감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아이에게 책 열권을 읽어라고 했답니다. 그 애는 수지맞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이 있습니다.
서른 살 넘도록 방탕하다가 회개한 것을 이 책에 기록해습니다. 이것보다 더 귀한 책이 없습니다. 철저한 회개가 큰 인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없고, 오히려 어려서 잘못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나중에 깨닫고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네 살까지 말도 못했고, 미국 상원의 육십퍼센트가 학업 성적이 평균 이하였습니다. 우리가 공부 못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조금 잘못 실수 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주께 나아가는 것, 주님을 만나는 것,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교인 하나가 제일은행에서 실직되었다가 백화점에서 29평 아파트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실직되었다고 집에만 있지 말고 백화점이라도 가 보세요. 하나님은 은혜의 바다요, 축복의 태산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눈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도움이 주께로서 오는 것입니다. 한없이 능력있는 주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이 능력있게 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능력은 그릇만큼 있습니다. 하루종일 비가 오면 그릇마다 채워지는데, 양푼을 갖다 놓으면 양푼만큼, 바가지는 바가지 만큼, 큰 독을 내놓으면 그만큼 채워지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사람들이 더 큰 그릇을 내 놓고 기대를 갖고 기다리다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배드리는 자리도 똑같습니다. 심령은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만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의심하며, 교만한 사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요 우리는 오늘도 교만한 마음을 내 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되신 말씀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주의 크신 사랑을 받아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짐을 벗으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인생의 삶이 사십대는 사십대로, 육십대는 육십대로 살수록 무거워지는 삶의 짐은 주께 내려놓고 힘을 얻으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 의심하는 마음을 벗고 은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고향을 떠나 친척을 떠나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시면서 아브라함을 육십세에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이 유전자를 이어받은 유럽이 복을 받아드리는 그 이유 하나로 잘 됩니다. 우리는 너무 의심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을 많아 받았습니다. 아들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이가 구십이 되었는데도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내어 '하늘을 봐라. 뭐가 보이나' '별들이 보입니다.' '별들이 많으냐' '별이 너무 많습니다.' '너에게 너의 자손들이 많게 하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었지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그렇게 될줄 믿습니다. 사천 년전의 아브라함이 이렇게 복을 받았다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서 저주는 저주대로 하고, 불평, 원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입을 크게 열어'야 합니다. 마리아도 '계집종이오니 그대로 될지어다' 라고 할 때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에 주께서 동행하시기를 원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고향사람들이 주님을 받아드리지 않으니 한가지 은혜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요셉이지' '재하고 장난쳤었는데.' 하면서 받아 들이지 않으니까 주님께서는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 고향 사람들이 받아 들였다면 뉴욕의 맨하탄과 같았을 것을 하지만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영접하면 복을 빌어주고 영접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도 털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받아들이는 심령을 찾아가서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문제, 시험, 앞날도 내가 다 알고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서 복된 삶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가 다른 사건과 다른 점은 그가 그저 살기 싫어서 이런 짓을 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서 자기도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해서 그 일을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죽으려 한다면 여러 가지 길이 있는데도 그는 이런 끔찍한 일을 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길도 모르기에 다른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자신도 죽게 되었습니다. 착한 마음을 먹고 잘 살려고 하면서 운전면허증도 얻었다고 하는데 한 번 음주운전으로 걸렀다고 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안되는 것이 나의 길이다' 하면서 공연히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아임에프 시대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오히려 십대입니다. 십대들은 국가적으로 거품 경제속에서 풍성하게 살다가, 그저 흥청망청 살다가, 집에서나 밖에서나 마음껏 먹고 놀다가, 이제 아임에프를 만나서는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오십년대 태어난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을 만났을 때 당연히 잘 감당을 하는 것 같으나. 젊은 세대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대학 2학년생들이 22만오천명이 휴학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수인가요 큰 대학도 전체 학생수가 이만명 정도인데, 지금 얼마나 많은 수의 학생이 휴학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공부는 왜 하는가요 어려운 때를 준비하는 것이 공부입니다. 지식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준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뇌에 지식을 저장하여서 사회에 봉사하고 자신에게도 좋은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래서 어려울수록 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얼마나 많은 여대생들이 윤락녀로 뛰어 들어서 그만 기존 윤락녀들이 살기 어려울 정도라고 합니다. 대학생 여학생, 가정주부도 윤락가에 달려드니 참 안타깝습니다. 대학생이 강도질하고 있고 대학생 사기절도범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십대, 이십대가 몸은 건강해지고 고생은 할 줄 모르고 용기도 없는데, 세대가 달라져서 오히려 머리 회전은 빠르고 컴퓨터에 손을 대기에 또 다른 범죄를 일으켜 큰 사회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가요 가정에도 많은 가정주부들이 이발소에 면도사로 들어가서 퇴폐한 일을 한다고 하고, 단란주점에도 주부들이 반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돈을 벌어서 자녀를 교육시키려 한다고 합니다. 몸을 팔아서 자녀공부를 시키면 자녀가 성공할 수 있습니까 남편을 돕는다고 몸을 팔아서 되는 것인가요 가정을 지키려고 한다면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만 지켜지는 것이 가정입니까 우리는 국민들이 너무 문제를 잘못 알고 해결하려고 있습니다. 밀라노에서 몇몇이 모여 질문을 하며 토론을 했습니다. 헬라문명속에서는 토의를 많이 했는데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수 있는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했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이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가 바로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성자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면, 그는 오늘날까지 기독교가 세계로 확대되는 교량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전파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첫째 사도바울이고, 그 다음이 어거스틴이고, 또 1300년 후에 태어난 마틴 루터입니다. 사도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했다면, 어거스틴은 신학 기초를 다짐으로 인하여 복음을 세계로 뻗어나가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 어거스틴이 처음에는 어떤 문제를 갖고 행복한 삶에 대한 질문을 하다가 고민하며 대답을 얻지 못하다가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도 대체로 처음 기독교를 찾는 것은 작은 문제로 인해서이고 그로 인해 주님을 만나게 되고 나중에 큰 일을 합니다. 행복은 언제나 지속됩니까 아닙니다. 어제는 행복했다가 오늘은 그 행복이 쨍그랑 깨질 때도 있습니다. 시장 통로에 있는 유리그릇과 같이 늘 깨질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깨지고 무너지고, 자동차가 선 하나만 넘어서도 산산조각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행복이 그 이상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약한 행복의 소망도 우리 주님을 만날때에는 주님이 주시는 참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할 때 누리는 행복은 영원히 행복한 것입니다. 십 년전에도 기뻤던 것처럼 오늘날도 만족하고 살게 됩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지금과 똑같은 행복과 평안을 누릴줄 믿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크시기 때문에 우리앞에 있는 어떠한 장애물, 어려움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동일한 것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세상권세는 오래 못가나 주의 교회는 왕성하리라. 세상 어떤 것도 왕성할 수 없으나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고 왕성하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과 평화와 은혜는 언제나 동일하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서 능치 못함이 없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국가과 가정,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 은헤를 받는 자만이 큰 일하였고, 큰 인물이 되었고 어려움을 이길수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천년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천년 동안에 문화의 차이가 심하지 않고, 또 특별한 지식, 장비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었으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릅니다. 국제정세가 그렇습니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십 여년사이에 중국이 변했습니다. 유교 사회인 중국이 지금 만리장성처럼 혼란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공장이 들어선 지가 사년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가정이 붕괴되고 있다고 합니다. 소련도 그렇습니다. 십여 년 전에 소련에 갔을 때만 해도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민스카에 갈 때까지동안에 자동차로 삼십 시간을 가는데 사람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황량하던 땅이 년 사이에 경제적인 붕괴와 사상, 정치적으로 붕괴되는 것이 겉잡을 수 없습니다. 태풍처럼 변화가 엄청나게 몰아 닦치고 있습니다. 이 변화 속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이겨 나갈수 있는가요 그전처럼 살 수 있는, 이전의 격언이 지금은 전혀 안 통합니다. 지금은 이전의 시대가 아닙니다. 너무 변화가 많습니다. 모르면 상팔자가 아니라 모르면 죽는 시대입니다. 신문에서 57살의 법대 교수가 몇 년동안 제자하고 동성연애를 했습니다. 성 관계는 학교에서 했다고 했습니다. 이 학생이 졸업해서 나가서 살다가 잘 안 되어서 교수를 호텔로 유인했습니다. 거기서 교수를 협박해서 비디오를 찍어서 돈내놔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교수가 돈을 안 주니까 그만 산으로 유인해서 글쎄 그 제자가 교수를 생매장해서 죽였습니다. 누가 그들의 부인인지 모르지만, 학교를 보내어서 교수와 제자들이 동성 연애를 한다는 놀라운 소리에 우리가 설 자리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깊이 깊이 이 사회에 퍼져있는 이 사회의 악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땅에서 해결할 수 업습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도덕, 정치, 정신도 모두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을 받을 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화를, 지식을 따라 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농촌에서 비가 오면, 비가 물길을 타고 아래로 내려갈 때, 우리 논으로 물이 들어오도록 물길을 열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바다 물결같이 내게 임하도록 마음을 열어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결같은, 강물같은 하나님 은혜가 내게 흐를 때, 소낙비와 같은 은혜가 임합니다. 선지자들은 장마비와 같다고 했습니다. 은혜가 내릴 때 내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은혜를 받는 민족이 세계적인 민족이 되었습니다.
로마도 그랬고 영국도, 미국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드림으로 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인간의 문명이 아닙니다. 인류의 발달한 문명은 언젠가는 쇠하고 끝났으나, 영적인 문명을 받아들일 때 영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다른 종교는 내가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은총을 받아들릴 때 내가 영적으로 삽니다. 예수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은 3장은 '인자도 들린다. 저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받아들이는 종교입니다. 나아만이 받아들임으로 문둥병을 고치고, 베드로도 받아 들임으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림으로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한계 사항이 있습니다. 끝까지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을 기를 때도 자녀 문제로 낙심하면 안됩니다. 공부를 안하기도, 집을 뛰쳐 나가기도 방항하기도 하고 거짓말하기도 남의 것을 훔치기도 합니다. 술마시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매 주일마다 이런 일이 많아서 울면서 저를 찾아오는 일이 많습니다. 매주일마다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애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천사로 태어나서 크는 애들이 없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어찌 거짓말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여름밤 소나기만 오면 집에 있는 마늘을 다 훔쳐다가 팔고 했습니다. 이 마늘을 사는 집은 교회학교 부장선생님이었어요. 저는 어렸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사는 부장님은 더 나빠요. 아버지가 담배 팔아서 그 돈을 장롱에 감췄는데, 그 돈을 훔쳐서 땅을 사러 갔다가 돈을 다 뺏긴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도 열여덟 살에 사생아를 낳았고요. 서른이 넘어서 예수를 만나서 큰 일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어려서는 방탕하다가 커서 주님을 만나면 주님의 빛으로 자신을 비추면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때 저를 유혹했던 사람도 지금은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너무 꾸짖지 말고 그들의 잘못된 길을 주님의 길로 인도하십시다. '그래도 괜찮다' 고 하시고 주님께 가 보세요. 교인 한분이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딸을 성폭행한 남자애를, 만일 그 교인이 합의를 안해 주면 감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아이에게 책 열권을 읽어라고 했답니다. 그 애는 수지맞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이 있습니다.
서른 살 넘도록 방탕하다가 회개한 것을 이 책에 기록해습니다. 이것보다 더 귀한 책이 없습니다. 철저한 회개가 큰 인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없고, 오히려 어려서 잘못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나중에 깨닫고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네 살까지 말도 못했고, 미국 상원의 육십퍼센트가 학업 성적이 평균 이하였습니다. 우리가 공부 못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조금 잘못 실수 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주께 나아가는 것, 주님을 만나는 것,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교인 하나가 제일은행에서 실직되었다가 백화점에서 29평 아파트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실직되었다고 집에만 있지 말고 백화점이라도 가 보세요. 하나님은 은혜의 바다요, 축복의 태산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눈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도움이 주께로서 오는 것입니다. 한없이 능력있는 주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이 능력있게 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능력은 그릇만큼 있습니다. 하루종일 비가 오면 그릇마다 채워지는데, 양푼을 갖다 놓으면 양푼만큼, 바가지는 바가지 만큼, 큰 독을 내놓으면 그만큼 채워지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사람들이 더 큰 그릇을 내 놓고 기대를 갖고 기다리다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배드리는 자리도 똑같습니다. 심령은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만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의심하며, 교만한 사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요 우리는 오늘도 교만한 마음을 내 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 복되신 말씀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주의 크신 사랑을 받아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짐을 벗으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인생의 삶이 사십대는 사십대로, 육십대는 육십대로 살수록 무거워지는 삶의 짐은 주께 내려놓고 힘을 얻으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 의심하는 마음을 벗고 은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고향을 떠나 친척을 떠나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시면서 아브라함을 육십세에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이 유전자를 이어받은 유럽이 복을 받아드리는 그 이유 하나로 잘 됩니다. 우리는 너무 의심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을 많아 받았습니다. 아들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이가 구십이 되었는데도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내어 '하늘을 봐라. 뭐가 보이나' '별들이 보입니다.' '별들이 많으냐' '별이 너무 많습니다.' '너에게 너의 자손들이 많게 하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었지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그렇게 될줄 믿습니다. 사천 년전의 아브라함이 이렇게 복을 받았다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서 저주는 저주대로 하고, 불평, 원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입을 크게 열어'야 합니다. 마리아도 '계집종이오니 그대로 될지어다' 라고 할 때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에 주께서 동행하시기를 원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고향사람들이 주님을 받아드리지 않으니 한가지 은혜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요셉이지' '재하고 장난쳤었는데.' 하면서 받아 들이지 않으니까 주님께서는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 고향 사람들이 받아 들였다면 뉴욕의 맨하탄과 같았을 것을 하지만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영접하면 복을 빌어주고 영접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도 털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받아들이는 심령을 찾아가서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문제, 시험, 앞날도 내가 다 알고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서 복된 삶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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