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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어디에 둘까? (롬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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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40대 청 장년층 천 여명을 상대로 실시한 어떤 여론조사에 따 르면 '당신은 행복합니까' 라고 물었을때 무려 80% 이상의 응답자가 행복하 다고 대답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희망적인 현상이라고 봅니다. 만 일 국민 대다수가 '나는 불행합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 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희망이 없고 암담한 일일 것입니다. '금년은 희망이 있다.' '우리나라는 희망찬 나라이다.' 라는 기대감을 가지는 것은 좋은 것이고 긍정적인 것입니다. 희망이란 좋은 일 오기를 기대할 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새 대 통령과 새 정부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병을 고치고 새 한국을 건설하자는데 대하여 이를 지지하고 적극 협력하기를 원하며 또한 그 러한 과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침체된 국가경제 가 속히 활력을 되찾고 크게 성장하여 GNP가 12,000불 혹은 그 이상까지 달 성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또한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모두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도록 분배 정의가 실현되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오랫만에 시작되는 문민정치에 모든 사람들은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민족의 염원인 통일도 속히 달성되기를 기대합니다. 최근에 중소기업이 수없이 쓰러진다고 하는데 사업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분들이 모두 다 자살해 죽기만 하는 것이 아 니라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재기할 기대와 희망을 품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나라의 희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좋은 일 오기를 바라는 개대감으로 행복한 마음을 가지 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희망을 가집시다. 물론 이러한 기대감과 행복은 그냥 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게으름과 안일에서 깨어 일어나 땀흘려 열심히 일 해야 할 것이고 사치 낭비 과소비를 극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쓰레기부터 줄이고 자원을 재생하는데 모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할 것이며 정치도 이제는 정말 국민들을 위하는 '생활 정치를' 해 주어야 하고 정부와 국민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바람직한 목표를 향하여 나간다 면 행복은 반드시 달성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목표가 분명하고 희망을 가진다면 않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를 이렇게 축복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희망이라는 말은 '기대를 동반한 욕망'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희망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 그러니까 희망을 가져야 됩니다. 희망이 있어야 동기가 유발되며 동기가 있어야 목적이 달성됩니다. 만일 희 망이 없다면 의욕도 용기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생각들을 아니할 것이며 아무 목적도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희망이 없을 때 빨리 죽는다고 합니다. 친한 친구간에 농담 한 마디도 사람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별스럽지 않은 병으로 입원했는데 친구가 농담으로 '자네는 석달 만에 죽을꺼야' 했더니 그것이 그만 자 기 암시가 되여 '나는 석달만에 죽는데'라고 되풀이 생각하고 그것이 마음 에 걸려 고민하더니 병세가 점점 악화되여서 정말 석달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희망이 없을 때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희망이 보이면 사람은 즉시 소생하는 것입니다. 그러 니까 우리는 자기에게 희망을 암시해야 됩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기지게 를 하면서 '아이구 죽겠다' 그러지 말고 '참 기분좋다', '참 아름답다', '참 희망차다', '참 감사하다', '다 잘될거야', '오늘도 좋은 날이다', 그렇게 반복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건강하다' 라고하면 정말 건강해집니다. '나는 아름답다' 그러면 여자분들 모두 기가 막힌 미인들이 되실 것입니다. 희망은 기대를 동반한 욕망이며 희망은 인간에게 열열한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믿는대로 된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희망보다 더 크고 강열한 동기이며 희망을 실제화하는 놀라운 힘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될 것 입니다. 그리고 믿는대로 되고야 만다는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인생은 동기 가 있어야 노력을 하게됩니다. 그러니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 합니까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이 동기를 부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소망의 하나님'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은 모 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안에서 우리에게 충만케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능 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게 항상 희망을 제시 하십니다. 목표를 제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힘차게 달려 나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것은 하나의 희망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동기를 부여하신 것 입니다. 희망이 동기를 유발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목표를 우리 힘으로 달성 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살 때에 행복했습니까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매일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짜 만 나'를 주워 먹느라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시간이 아주 늦어진 것입니다.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무려 40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사람들에게 좋아서 만나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화가 나서 주신 겁니다. 또 굶 어 죽어서는 안될테니까 그저 목숨만 살도록 연명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 니까 도대체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0년간 만나 를 먹으면서 사실은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40년간은 아 무 의욕이나 목적이 없이 그냥 놀고 먹기만 했던 세월입니다. 마땅히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목적지인 가나안을 향해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희망을 다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조차 깨닫지 못하고 불평하면서 희망없이 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금년 한 해를 살아 갈때 열심히 뛰고 노력하려면 희망과 그것을 달성하려는 동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희망과 목표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표를 향해 힘껏 뛰어가야 될 것입니다. 운동경기에서는 선수가 뛰는 것이지 코치가 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 다고 코치가 필요없습니까 사실 선수는 코치가 지시하는 대로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코치에 의해서 되는 것이지만 뛰는 것은 선수들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경기장에서 뛰어 가야할 선수들이고 하나님은 코치이십니다. 하나님 은 인간 스스로가 자유롭게 행하도록 두시되 반드시 조종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만일 코치이신 하나님이 직접 경기자로서 뛰 신다면 그 경기는 아주 싱겁고 하나마나한 경기가 될 것입니다. 게임이 않될 테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수인 우리들에게 목표를 제시하시고 코치 하십니다. 인생의 경기는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유능한 코치를 모신 우리들은 넉넉히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희망을 주시고 동기를 유발 하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 목표를 반드시 이루도록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 이 한 해도 희망을 가지고 시작하는데 그 희망이 어떤 희망입니까 우리 가 성경에서 보면 사람들이 가지는 희망이란 참으로 다양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소개되는 사람들이 가졌던 소망 가운데는 개인적인 소망 일시적인 소망 땅에 속한 소망들도 많았습니다. 갈급한 사람들의 물을 얻기 위한 절실한 소망으로부터 배고플때 양식을 구 하는 일,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일,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일, 물질의 복 을 받기 위한 일, 그런 일로부터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는 소망'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주 저급한 소망으로부터 아주 고상한 최고의 소망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이런 여러가지 기대와 요구와 희망을 바 라보며 살아왔고 또 그 희망들을 결국 하나님안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다 각각 희망들이 있겠지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바라며 어디에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하는 것인가 소망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소망중에는 아주 그릇된 소망도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뱀에 유혹으로 인하여 하나님처럼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했던 교만한 생각이었습니다. '여자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헤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한 나무인지라.' (창 3:6) 그들은 그러한 기대와 욕구가 끓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그릇된 욕망이어서 결국 인간은 그것 때문에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지라.' (창6:2)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 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옹위하고 보필하는 사명을 띤 사람과 다른 영적 존재들인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여자 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영이 육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천사였지만 육체로 타락하여 세상에서 120년 이상은 수명을 누리 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발았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결 국 하나님의 아들들을 육체적 사람으로 전락시킨다는 말이 아닐까요 육체의 소욕은 육체에 따른 열매를 거둘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신령한 영적생활 을 하는 사람이 육체적 소욕을 이기지 못하여 타락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신령한 소원을 가진 엘리사같은 분도 생각할 수 있읍니다. 엘리사는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의 제자였습니다. 제자 엘리사는 자기의 스승 엘리야의 모든 것을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에게는 스승보다 더 큰 영감이 자기에게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단순 한 희망이 아니라 열렬하고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할 시간이 왔을 때 엘리사는 그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감을 받으려고 악착같이 따라갔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데 너는 여기 머물러라. 여호와께서 나 를 베델로 보내신다.' 고 하였을 때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르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왕 하 2:2) 라고 했습니다. 베델로 가면 베델로 따라오고 여리고로 가면 여리고로 따라오고 요단으로 가면 요단으로 따라옵니다. 도저히 떼어 놓을래야 떼여 놓을 수 없는 귀찮은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도대체 '네가 소원하는게 무어냐' 고 물 었습니다.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 다' 라고 하였습니다. 참 뱃짱도 좋고 꿈도 큽니다. 어떻게 보면 건방지기까 지 합니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 시는 것을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 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엘리사는 자기의 큰 스승 엘리야의 두루마기 를 인계받아 엘리야보다 더 큰 예연자로 활동하지 않았습니까 엘리야의 영 감을 갑절이나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소원과 바램은 얼마나 신령한 것입니까
이런 은혜 이런 축복 이런 은사 이런 능력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냥 주시는 것 이 아닙니다. 열렬하고 뜨거운 소원 끈질긴 기도 염치불구하고 달라고 하는 간구가 있을 때 주십니다. 아주 강렬하고 뜨거운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저는 개인 기도할 때 그 분보다 더 훌륭한 목사가 될 수 있게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쁜 일이 아니지 않습 니까 신령한 소원은 얼마든지 가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천사들이란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들인데 이들이 사람의 딸들 의 육체적 매력에 매혹 되어 육체와 혈육이 되고 말았다는 것과,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감히 자기 스승보다 영감을 갑절이나 더 받게 해 달라고 한 것은 얼마나 다릅니까 세베데의 두 아들의 소원은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좌 우편에 앉는 것이였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세속적인 영광만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보다는 차라리 좀 서툴고 믿음직한 것은 못되었지만 베드로와 같이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 하였나 이다.'(눅 22:33)라고 장담한 말이 얼마나 더 훌륭합니까 그것은 신령한 소 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한해에 어떤 소원과 희망을 지니려고 하십니까 혹시 그 소원은 너무 저급한 것이 아닙니까 그 소원과 희망이 과연 보람 있고 의미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까 그 소원과 그 희망이 참으 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신령한 소원입니까 그 소원이 과연 하나님 의 뜻을 땅에 이루게 할만한 것입니까 과연 우리는 어떠한 소원 어떠한 희망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희 망을 어디에 두시려고 합니까 우리는 희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소망의 하나님' 이라고 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안에서 너희에 게 충만케 하사 성령님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말 에서는 '所望'과 '希望'을 크게 구별하지 않고 쓰고 있는데 우리말 사전에 서는 희망(Hope)을 '이루고 얻고자 바라는 것'이라고, 소망(Wish, Desire)은 '바라는 바 그것과 관계된 태도' 라고 각각 풀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본 문의 말씀을 영어성경 번역판에서는 하나님은 희망의 원천(Source of hope) 희망을 주시는분(Giver of hope) 희망의 샘(Fountain of hope)이라고 번 역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희망'은 세속적 용어이고 '소망'은 종교적인 개념을 담은 용 어라고도 하는데 과연 여기서 소망이란 단순히 '바라는 바'(희망사항)가 아 니고 바라는 바와 관계된 '인간의 태도'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소망을 전적으로 보호하시고 이루어 나가도록 도우시고 인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 소망을 참으로 소망되게 할 수 있는 태도와 역할과 반응과 노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맹목적 기계적으로 인간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반응과 태도에 따라서 그 소망을 이루게도 또는 이루지 못하게도 하십니다. 연초에 토정비결 같은 것이나 보고 무엇이 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항상 의롭고 참된 목적 을 이루어 나가시는 주체자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운명의 하나님'이 아니고 '소망의 하나님'입니다. 금년 일년동안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던지 무슨 일을 당하던지 또한 어떤 시련이 오던지 그런 것에 연연하고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것은 다 무시해 버리고 다만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소망의 하나님을 믿고 나의 태도 를 바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 신다' 고 하였고 또한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 소망이 넘치게 하실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금년 한 해도 믿음 안에서 여러분의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지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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