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내가 집시다 (롬15:1-8)
본문
어떤 장삿군 4명이 목화를 사서 창고에 쌓아 두었는데 쥐가 그것을 자 꾸 망쳐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생각 끝에 서로 돈을 합하여 고양이 한 마리를 사들였습니다. 이때 고양이의 소유 문제가 나오게 되자 그 네 사람들은 가만히 아이디어를 낸 끝에 각기 다리 하나씩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하루는 고양이가 다리 하나를 다쳤습니다. 그 다리의 임자인 장삿군은 서둘러 기름 밴 붕대를 거기에 감아 주었습니다. 얼마 후 고양이는 난로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던지 그만 기름 붕대에 불이 옮겨 붙었고 뜨거워서 미친 듯이 목화 위를 뒹굴었기 때문에 창고 안의 목화는 순식간에 온통 다 타 버 리고 말았습니다. 붕대 감긴 다리의 소유자 이외의 나머지 세 장삿군은 다 타 버린 목화 를 변상할 것을 요구하며 소송을 냈습니다. 이때 재판관은 이런 판결을 했 다고 합니다. "고양이의 나머지 세 다리가 불붙은 다리를 끌고 다니지 않 았던들 목화는 불에 타지 않았을 것이므로 목화를 망친 책임은 오히려 나머 지 세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든 권리만을 누리려 하고 거기에 수반되는 책임 은 남에게 돌리려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불행이나 실패가 모 두 다른 사람의 탓인 양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길을 가다가 돌에 부딪혀 넘어지고도 돌멩이를 원망하며 또 길을 닦은 사람을 원망합니다. 운전자가 부주의로 사람을 다치게 하고도 행인의 잘못 때문에 그렇게 되었 다고 책임을 전가하기에 바쁩니다. 저도 몇 년 전 지금 타는 차 전에 차를 탈 때 차를 출고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준 고속도로에서 공사중 이라 차들이 나란히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백미러로 보니까 조금 빈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멀리서 봉고트럭이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여유가 있어서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로 제 차를 조금 비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차 운전사는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재 차가 조금 비껴서 세 워진 것을 보지 못하고 그냥 와서 부딪힌 것입니다. 옆으로 부딪혔는데 앞 범퍼만 달랑 떨어진 것입니다. 이제 서로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차를 부딪힌 사람이 먼저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우선 뒤에 차들에게 방해가 되니 차를 치우고 얘기 하자며 그의 말을 가로막고 트렁크에서 페인트를 꺼내서 사고난 자리에서 바퀴마다 칠을 하고 차를 치우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운전사가 하는 말 이 얼마면 되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아마 제가 그자에서 그 운전사가 큰 소리 칠 때 머뭇거렸다면 분명 자신의 과실임에도 저에게 책임을 물렸을 것 입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나라에 무슨 어려운 사건이 발생 하면 그 사건을 수습하는 일보다도 그것이 어느 부서의 책임인가를 구분 지 으려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합니다. 더욱이 내 부서의 일이 아 니면 그 협조도 미흡해지기 일 수입니다. 결국 사건의 해결은 그만큼 늦어 지고 시기를 놓칠 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몇 년 동안 계속된 대형 사고의 수습 순서가 그랬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기는 커녕 더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경제위기 한파에 허덕이는 우리 경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정치권의 모습도 매 한가지입니다. 남을 질타하기 이전에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정책에 대한 논의가 먼저 되어야 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 고 대선후보자들이 하시는 말씀을 보면 당신들이 무슨 도깨비 방망이라도 쥐고 있으신 듯 뚜렷한 대책을 제시하기보다는 무조건 집권하며 어느 기간 에 해결하겠다는 말뿐입니다. 더욱이 서거가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검증되지 아니한 이야기들을 자기 당에 유리한 내용이라고 여겨지면 책임없 이 무조건 발표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것이 유언비어라고 지더라도 선거 가 끝난 다음에야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선된 다음에는 그저 '그 때 그 일을 유감스럽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몇 표라 도 더 얻는다면 윤리도 도덕도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대선 후보 모두가 나라가 이 지경이 된 데에 책임을 져야 마땅하신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즉 책임을 면할 분이 한 사람도 없는데, 가만히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당신 은 잘못이 없고 다 '저 후보' 때문에, '저 후보'가 잘못해서 나라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 뿐입니다. 그저 책임을 전가하기에만 급급합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습이 교회에서도 똑 같이 그런 현상으 로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행사가 잘 되면 그것은 우리 부서에서 또는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주장하려 하고 만약 행사가 예정대로 효 과를 거두지 못하면 누가 그렇게 계획을 했으며 왜 그렇게 생각이 모자라는 일들을 했느냐고 책임을 떠넘기며 질책을 하기가 바쁩니다. 결국 내 책임 은 아니라며 책임을 떼어 넘기며 항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 상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들이나 내가 했다고 떠 드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행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라는 것 입니다. 거의 비협조적이었다는 것이지요. 한 때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한 비자금 사건도 그렇습니다. 부정한 돈을 받았으면 국민에게 깨끗하게 사과하고 잘못했다는 한 마디로 끝났으면 좋았 을 것을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았다느니, 내가 여러분들의 잘못 을 안고 들어 갈 테니 이제 정신을 차리라는 투의 표현은 썩 어울리지 않았 다고 여겨집니다. 또 돈을 주신 분들도 그렇습니다. 그 분들은 무슨 떡을 잡수시기에 떡 값이 그렇게 비싼 것입니까 수십억 수백 억이 어떻게 떡값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니까 받았다, 달라니까 주었다. 다 쓸데없는 말입니다. 그저 '잘못했습니다'하는 한 마디면 됩니다. 왜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거나 회피하려고 합니까 내가 저지른 짐은 내가 지고 가야 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을 탓하는 우리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에게 그런 돈이 쥐어지지 않고, 그런 권력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 중 몇 사람이나 그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혹 유혹에서 벗어 난다고 해도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 게 돌아갈 것입니까 우리 주변에는 분위기에 따라 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말을 바꾸기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제는 독재자라고 몰아 붙이던 분을 이제는 경제 발전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면서 그 분의 자제를 자기 당에 영입하려고 혈 안들이 되었었습니다. 결국 자제들이 당을 결정함으로 마무리가 되었긴 합니다만 너무 가식적인 표현들입니다.
너도나도 그 분의 생가는 왜 찾습니 까 정책도 수시로 변하고, 국민과의 약속도 언제 변할지 모르는 약속들만 하고 있습니다. 약속을 했어도 마음이 변하면 국민의 뜻이라고 하면서 언제 변할지 모르는 약속이 수두룩합니다. 국민이 언제 불렀습니까 자신의 추종 자들이 부른 것뿐이지요. 자기의 마음이 약속하던 때와는 달라진 것이지요. 옳은 길은 뒤로하고 그저 국민의 뜻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의견이 소신도 없이 바뀌곤 한다면 그것은 지도자로서는 자격이 부족한 모습이라고 봅니다. 적어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면 백성들에게 끌려 다니기보다는 뚜렷 한 국가관과 지도력을 가지고 국민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됩니다.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됩니다. 초지일관 지조를 지킨 사람만이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일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서로 짐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잘못되 었을 때 수술을 하자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보면 아주 잘라 버리자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민족은 한 공동체인데 어찌 다른 지체같이 여기느냐 말입니다. 잘라 버려야 할 정도로 석은 것은 아닐 터인데 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 지체라고 하면서도 왜 그리 서로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까 내가 짐을 지지 아니하면 반드 시 다른 누군가가 지어야 할 터인데도 말입니다. 서로 짐을 지고 감싸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지체 중에 가끔 이빨이 혀를 깨물어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혀를 깨 물은 이빨을 당장에 다 빼어 버릴 것 입니까 그렇지는 않지 않습니까 서로 사랑하며 짐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당신은 약 한 사람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는 약한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겸손하므로 실제사람들은 자기가 약한 곳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서두에는 "우리 강 한 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사도 바울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를 강한 자라고 말하는데는 반대할 사람이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바울 사도라면 강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강한 자에게서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으니 바울 이외에 누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장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해서는 1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을 먹으면 안된 다던가, 무엇을 마시면 안된다는 것에 매이면 안됩니다. 음식물에 대해서 신앙에 의한 자유 확보가 된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방 사람, 유대인의 구분이 없이 강한 자란 신앙을 가지고 그 생활을 관철시킬 수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로마서 를 읽고 그 내용을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성격의 강함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격이 약하므로 믿음도 약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입니다. 성격과 신앙은 구별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를 볼 때 보통으로는 약한 편에 문제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강한 자 편에 문제가 더 많이 느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강 한 자나 약한 자가 공동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강한 자가 짐을 지는 것이 당 연합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여기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융화로 서로 상대방 을 기쁘게 하고 덕을 세우는데 힘쓸 것을 권하고 그 본으로 그리스도의 자 아 희생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강한 자이시지만 약한 우리를 위하여 친히 짐을 지신 분이십니다.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이 말씀에 "마땅히 빚지다"는 뜻이 있는 낱말로 강조하고 있습니다(마 18:28, 30). 약점은 본문에만 나타나 있는 낱 말이며 복수로서 여러 가지 약점을 담당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약점이란 십자가를 지듯이 짐을 대신 지라는 말입니다. 눅 14:27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것이 곧 형제의 약점을 담당한다는 말입니다. 강한 자는 약한자의 약점을 대신 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권리가 아닌 의 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심의 사건은 우리가 져야 할 짐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기로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 은 짐을 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약한 자의 짐을 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짐은 아무나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내가 당신의 짐을 지고 간다고 해서 그 짐이 내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언젠가 전직 대통령 중에 비자금 문제로 구속된 분이 인터뷰에서 "내가 여러분들의 불신, 분노, .등을 다 지고 가겠으니 여러분들은 화합하십시요"라 고 했지만 어디 그 분이 그렇게 말하신다고 해서 짐을 다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신도 죄인이면서 무슨 죄를 대신 지겠다는 말입니까 짐은 질 짐이 없는 사람이 져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여러분들의 죄를 지고 갑니다 이제 바르게 사십시 오"라고 한다고 여러분의 죄가 제에게 전가됩니까 죄를 대신 질 수 있는 분은 죄가 없는 분이라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짐을 질 수 있겠습니까
첫째로, 내가 강한 자가 되어야 집을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는 것 도 강한 자가 참는 것으로 약한 자에게는 참을 것이 없습니다. 역시 아는 자가 모르는 자의 짐을 져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어떻게 짐을 지 겠습니까 내가 남을 용서할 때도 내가 강한 자로서 너를 용서한다 해야 용서이지, 약한 자가 무슨 용서입니까 내가 부자인데도 불구하고 이웃을 위해서 가난하게 될 때, 그것이 사랑이요 미덕입니다. 본래 가난한 자가 가 난한 것은 덕이 아닙니다. 같은 말이지만 유식하면서 무식해야 덕이지 무 식하면서 무식한 것은 역시 무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하다고 하는 것 이 우선입니다.
그러므로 짐을 지기 위해서는 우선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바에는 신앙적으로,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바에서 신앙적으로, 즉 믿음으로 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조금 도 어렵게 표현하면 우리의 모든 행위를 성서적으로 해석해 서 자신만만해야 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성서적인 해석을 가지고 확신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약점 을 덮어 주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짐을 지려고 하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1절 하반절에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즉 남을 먼저 생각해 야 덕을 이룰 수 있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짐을 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해서는 덕은 깨어지고 맙니다. 우리 나라 야담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승이 친구들과 술자리를 같이 했었습니다. 술 좌석에는 정승의 애첩과 기생들이 함께 있었는데 갑자기 부는 바람에 불이 꺼졌습니다. 이 때 정승의 친구 한 사람이 정승의 애첩의 손을 잡았는데, 그 기생은 화를 발끈내며 어둠 속에서 자기 손을 잡은 사람의 갓 끈을 끊었습니다. 그리고서 하는 말이 "빨리 불을 켜세요.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서 그 사람의 갓 끈을 끊었으니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하며 불켜기를 재 촉했습니다. 이 때 정승이 "우리 다같이 갓 끈을 끊읍시다."라고 제의해서 모두 끈을 끊고 불을 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친구들인데 이것을 밝혀서 어찌하겠습니까 물론 애첩은 정승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친 구를 찾아내어 망신을 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 실은 모르는 것이 낫지 기쁠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기쁨만을 위하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기 쉽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 려는 마음을 없애야만 덕있는 사람이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의 실수는 늘 나만을 생각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타적(利他的) 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셋째로, 이웃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2)." 이웃을 먼저 기쁘게 하고 그들이 기뻐할 때에 그 기쁨 속에서 자기 기쁨을 찾는 수준의 인격이 라야 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덕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남 을 울려 놓고 기뻐하는 잔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덕 있는 사람은 상대방 을 기쁘게 해 놓고야 내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를 기쁘게 하지 않고 남편이 기쁠 수 없으며, 남편을 기쁘게 하지 않고서는 아내가 기쁠 수 없습니다. 만약 부득이해서 한 쪽만 기뻐해야 한다면 내가 양보하고 상대 방에게만 기쁨이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덕이요, 강한 자로서 짐을 져주는 자세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난국을 타계하는데 있어서서나, 새로이 시작한 교회를 섬 기는 일에 있어서나 서로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서로 짐을 나누어짐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 가실 수 있기 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차 운전사는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재 차가 조금 비껴서 세 워진 것을 보지 못하고 그냥 와서 부딪힌 것입니다. 옆으로 부딪혔는데 앞 범퍼만 달랑 떨어진 것입니다. 이제 서로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차를 부딪힌 사람이 먼저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우선 뒤에 차들에게 방해가 되니 차를 치우고 얘기 하자며 그의 말을 가로막고 트렁크에서 페인트를 꺼내서 사고난 자리에서 바퀴마다 칠을 하고 차를 치우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운전사가 하는 말 이 얼마면 되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아마 제가 그자에서 그 운전사가 큰 소리 칠 때 머뭇거렸다면 분명 자신의 과실임에도 저에게 책임을 물렸을 것 입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나라에 무슨 어려운 사건이 발생 하면 그 사건을 수습하는 일보다도 그것이 어느 부서의 책임인가를 구분 지 으려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합니다. 더욱이 내 부서의 일이 아 니면 그 협조도 미흡해지기 일 수입니다. 결국 사건의 해결은 그만큼 늦어 지고 시기를 놓칠 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몇 년 동안 계속된 대형 사고의 수습 순서가 그랬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기는 커녕 더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경제위기 한파에 허덕이는 우리 경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정치권의 모습도 매 한가지입니다. 남을 질타하기 이전에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정책에 대한 논의가 먼저 되어야 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 고 대선후보자들이 하시는 말씀을 보면 당신들이 무슨 도깨비 방망이라도 쥐고 있으신 듯 뚜렷한 대책을 제시하기보다는 무조건 집권하며 어느 기간 에 해결하겠다는 말뿐입니다. 더욱이 서거가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검증되지 아니한 이야기들을 자기 당에 유리한 내용이라고 여겨지면 책임없 이 무조건 발표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것이 유언비어라고 지더라도 선거 가 끝난 다음에야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선된 다음에는 그저 '그 때 그 일을 유감스럽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몇 표라 도 더 얻는다면 윤리도 도덕도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대선 후보 모두가 나라가 이 지경이 된 데에 책임을 져야 마땅하신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즉 책임을 면할 분이 한 사람도 없는데, 가만히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당신 은 잘못이 없고 다 '저 후보' 때문에, '저 후보'가 잘못해서 나라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 뿐입니다. 그저 책임을 전가하기에만 급급합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습이 교회에서도 똑 같이 그런 현상으 로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행사가 잘 되면 그것은 우리 부서에서 또는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주장하려 하고 만약 행사가 예정대로 효 과를 거두지 못하면 누가 그렇게 계획을 했으며 왜 그렇게 생각이 모자라는 일들을 했느냐고 책임을 떠넘기며 질책을 하기가 바쁩니다. 결국 내 책임 은 아니라며 책임을 떼어 넘기며 항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 상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들이나 내가 했다고 떠 드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행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라는 것 입니다. 거의 비협조적이었다는 것이지요. 한 때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한 비자금 사건도 그렇습니다. 부정한 돈을 받았으면 국민에게 깨끗하게 사과하고 잘못했다는 한 마디로 끝났으면 좋았 을 것을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았다느니, 내가 여러분들의 잘못 을 안고 들어 갈 테니 이제 정신을 차리라는 투의 표현은 썩 어울리지 않았 다고 여겨집니다. 또 돈을 주신 분들도 그렇습니다. 그 분들은 무슨 떡을 잡수시기에 떡 값이 그렇게 비싼 것입니까 수십억 수백 억이 어떻게 떡값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니까 받았다, 달라니까 주었다. 다 쓸데없는 말입니다. 그저 '잘못했습니다'하는 한 마디면 됩니다. 왜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거나 회피하려고 합니까 내가 저지른 짐은 내가 지고 가야 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을 탓하는 우리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에게 그런 돈이 쥐어지지 않고, 그런 권력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 중 몇 사람이나 그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혹 유혹에서 벗어 난다고 해도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 게 돌아갈 것입니까 우리 주변에는 분위기에 따라 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말을 바꾸기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제는 독재자라고 몰아 붙이던 분을 이제는 경제 발전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면서 그 분의 자제를 자기 당에 영입하려고 혈 안들이 되었었습니다. 결국 자제들이 당을 결정함으로 마무리가 되었긴 합니다만 너무 가식적인 표현들입니다.
너도나도 그 분의 생가는 왜 찾습니 까 정책도 수시로 변하고, 국민과의 약속도 언제 변할지 모르는 약속들만 하고 있습니다. 약속을 했어도 마음이 변하면 국민의 뜻이라고 하면서 언제 변할지 모르는 약속이 수두룩합니다. 국민이 언제 불렀습니까 자신의 추종 자들이 부른 것뿐이지요. 자기의 마음이 약속하던 때와는 달라진 것이지요. 옳은 길은 뒤로하고 그저 국민의 뜻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의견이 소신도 없이 바뀌곤 한다면 그것은 지도자로서는 자격이 부족한 모습이라고 봅니다. 적어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면 백성들에게 끌려 다니기보다는 뚜렷 한 국가관과 지도력을 가지고 국민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됩니다.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됩니다. 초지일관 지조를 지킨 사람만이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일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서로 짐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잘못되 었을 때 수술을 하자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보면 아주 잘라 버리자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민족은 한 공동체인데 어찌 다른 지체같이 여기느냐 말입니다. 잘라 버려야 할 정도로 석은 것은 아닐 터인데 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 지체라고 하면서도 왜 그리 서로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까 내가 짐을 지지 아니하면 반드 시 다른 누군가가 지어야 할 터인데도 말입니다. 서로 짐을 지고 감싸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지체 중에 가끔 이빨이 혀를 깨물어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혀를 깨 물은 이빨을 당장에 다 빼어 버릴 것 입니까 그렇지는 않지 않습니까 서로 사랑하며 짐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당신은 약 한 사람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는 약한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겸손하므로 실제사람들은 자기가 약한 곳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서두에는 "우리 강 한 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사도 바울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를 강한 자라고 말하는데는 반대할 사람이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바울 사도라면 강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강한 자에게서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으니 바울 이외에 누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장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해서는 1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을 먹으면 안된 다던가, 무엇을 마시면 안된다는 것에 매이면 안됩니다. 음식물에 대해서 신앙에 의한 자유 확보가 된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방 사람, 유대인의 구분이 없이 강한 자란 신앙을 가지고 그 생활을 관철시킬 수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로마서 를 읽고 그 내용을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성격의 강함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격이 약하므로 믿음도 약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입니다. 성격과 신앙은 구별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를 볼 때 보통으로는 약한 편에 문제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강한 자 편에 문제가 더 많이 느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강 한 자나 약한 자가 공동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강한 자가 짐을 지는 것이 당 연합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여기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융화로 서로 상대방 을 기쁘게 하고 덕을 세우는데 힘쓸 것을 권하고 그 본으로 그리스도의 자 아 희생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강한 자이시지만 약한 우리를 위하여 친히 짐을 지신 분이십니다.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이 말씀에 "마땅히 빚지다"는 뜻이 있는 낱말로 강조하고 있습니다(마 18:28, 30). 약점은 본문에만 나타나 있는 낱 말이며 복수로서 여러 가지 약점을 담당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약점이란 십자가를 지듯이 짐을 대신 지라는 말입니다. 눅 14:27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것이 곧 형제의 약점을 담당한다는 말입니다. 강한 자는 약한자의 약점을 대신 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권리가 아닌 의 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심의 사건은 우리가 져야 할 짐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기로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 은 짐을 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약한 자의 짐을 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짐은 아무나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내가 당신의 짐을 지고 간다고 해서 그 짐이 내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언젠가 전직 대통령 중에 비자금 문제로 구속된 분이 인터뷰에서 "내가 여러분들의 불신, 분노, .등을 다 지고 가겠으니 여러분들은 화합하십시요"라 고 했지만 어디 그 분이 그렇게 말하신다고 해서 짐을 다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신도 죄인이면서 무슨 죄를 대신 지겠다는 말입니까 짐은 질 짐이 없는 사람이 져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여러분들의 죄를 지고 갑니다 이제 바르게 사십시 오"라고 한다고 여러분의 죄가 제에게 전가됩니까 죄를 대신 질 수 있는 분은 죄가 없는 분이라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짐을 질 수 있겠습니까
첫째로, 내가 강한 자가 되어야 집을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는 것 도 강한 자가 참는 것으로 약한 자에게는 참을 것이 없습니다. 역시 아는 자가 모르는 자의 짐을 져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어떻게 짐을 지 겠습니까 내가 남을 용서할 때도 내가 강한 자로서 너를 용서한다 해야 용서이지, 약한 자가 무슨 용서입니까 내가 부자인데도 불구하고 이웃을 위해서 가난하게 될 때, 그것이 사랑이요 미덕입니다. 본래 가난한 자가 가 난한 것은 덕이 아닙니다. 같은 말이지만 유식하면서 무식해야 덕이지 무 식하면서 무식한 것은 역시 무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하다고 하는 것 이 우선입니다.
그러므로 짐을 지기 위해서는 우선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바에는 신앙적으로,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바에서 신앙적으로, 즉 믿음으로 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조금 도 어렵게 표현하면 우리의 모든 행위를 성서적으로 해석해 서 자신만만해야 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성서적인 해석을 가지고 확신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약점 을 덮어 주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짐을 지려고 하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1절 하반절에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즉 남을 먼저 생각해 야 덕을 이룰 수 있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짐을 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해서는 덕은 깨어지고 맙니다. 우리 나라 야담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승이 친구들과 술자리를 같이 했었습니다. 술 좌석에는 정승의 애첩과 기생들이 함께 있었는데 갑자기 부는 바람에 불이 꺼졌습니다. 이 때 정승의 친구 한 사람이 정승의 애첩의 손을 잡았는데, 그 기생은 화를 발끈내며 어둠 속에서 자기 손을 잡은 사람의 갓 끈을 끊었습니다. 그리고서 하는 말이 "빨리 불을 켜세요.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서 그 사람의 갓 끈을 끊었으니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하며 불켜기를 재 촉했습니다. 이 때 정승이 "우리 다같이 갓 끈을 끊읍시다."라고 제의해서 모두 끈을 끊고 불을 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친구들인데 이것을 밝혀서 어찌하겠습니까 물론 애첩은 정승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친 구를 찾아내어 망신을 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 실은 모르는 것이 낫지 기쁠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기쁨만을 위하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기 쉽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 려는 마음을 없애야만 덕있는 사람이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의 실수는 늘 나만을 생각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타적(利他的) 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셋째로, 이웃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2)." 이웃을 먼저 기쁘게 하고 그들이 기뻐할 때에 그 기쁨 속에서 자기 기쁨을 찾는 수준의 인격이 라야 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덕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남 을 울려 놓고 기뻐하는 잔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덕 있는 사람은 상대방 을 기쁘게 해 놓고야 내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를 기쁘게 하지 않고 남편이 기쁠 수 없으며, 남편을 기쁘게 하지 않고서는 아내가 기쁠 수 없습니다. 만약 부득이해서 한 쪽만 기뻐해야 한다면 내가 양보하고 상대 방에게만 기쁨이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덕이요, 강한 자로서 짐을 져주는 자세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난국을 타계하는데 있어서서나, 새로이 시작한 교회를 섬 기는 일에 있어서나 서로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서로 짐을 나누어짐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 가실 수 있기 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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