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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았는가? (롬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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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을 길러 내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과목들 중에 설교학이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그 설교학 첫 장을 들추어 보면, “무엇보다도 설교를 잘 하려면 그것을 듣는 청중의 수준과 반응을 잘 알아야만 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가 누구와 대화를 하더라도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되는 것처럼,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잘 알아야 된다는 것은 너무도 타당한 일반 논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얼마 전 어느 교계 잡지에는 일주일에 적어도 서너차례는 설교를 해야만 하는 목사님들에게 “설교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상이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싣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보면 첫 번째 대상이 교회의 장로님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장로님들은 신앙면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수준이 높고 박식하시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답변들을 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교회의 나이 많으신 권사님들이었느데, 아마도 권사님들은 설교를 하도 많이 들어서 설교 듣는 수준과 실력이 매우 높기 때문인줄로 압니다. 세 번째로, 설교하기 힘든 대상은 소위 엘리트 계통의 젊은층인 것으로 통계 숫자가 나왔습니다. 사실 요즈음 젊은 분들은 아는 것도 많고 머리 회전도 빠르기 때문에 웬만한 설교를 해가지고는 좀처럼 반응을 얻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똑같은 설문조사를 저에게 했더라면, 솔직히 말해서 저로서는 이 세 종류의 계층이 그렇게 힘든 대상이라고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그대신 저에게는 제일 설교하기 힘든 세종류의 청중이 있다고 따로 대답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 청중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제가 설교를 준비할때부터의 모든 과정을 다 아실뿐만 아니라 앉고 일어서는 것,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까지도 다 훤히 다 아시기 때문에 내 설교를 다 친히 듣고 계실 것을 생각하니 실로 설교할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청중은 죄송합니다만 저의 집 사람입니다. 제 아내는 십여년 이상 저와 같이 살면서 제 성격과 행동과 모든 인격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역시 힘겹고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청중은 곧 제자신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있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자신이 설교하고 자신이 그것을 집접 들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때에는 보람되고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때에는 고통스럽고도 괴로운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말씀을 늘 전해야 하는 목사님에게도 남 모르는 고통과 괴로움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메시지의 내용을 노골적으로 거부해버리는 층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때에는 사사건건 꼬집힘과 시달림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오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약점과 연약함이 그대로 노출되어질 수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설교자의 위기와 도전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이 제목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에게 자신의 과거와 현재적인 삶을 엄숙하게 되돌아 보게 하는 강한 도전적인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봉독해드린 본문 말씀들 중에서 10개의 질문들을 골라 여러 성도님들에게 던져 보고자 합니다. 이 질문들을 하나씩 들어 가면서 마음속으로 답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 첫 번째 질문은 9절 상반절 말씀의 내용대로 “나는 진심으로 나 자신과 이웃을 거짓없이 사랑하면서 살았는가”입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사랑처럼 흔하게 많이 사용하면서도 사랑처럼 어렵고 복잡한 단어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면, 아마도 명확하게 한마디로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 됩니다. 혹 어떤 사람은,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혹은 “남 몰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서로를 아껴주는 것이다.”,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라는 등의 말로 답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것 하나도 만족할만한 답변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더 정확하고 솔직한 정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이것은 사랑의 진실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성이란 변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지속히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번 사랑한다고 말하면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 ㅣ곧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중간에 마음이 변하거나 헤어지는 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주는 사랑으로 출발했다가 도중에 받는 사랑으로 바꾸려고 하는 경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늘같은 사랑으로 출발했다가 좁쌀 같은 사랑으로 끝내려고 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처음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사이에서는 “오 나의 햇빛!”, “오 나의 바다!”, “오 나의 천사!”라는 황홀한 표현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햇빛이 검은 먹구름으로 가려지고 바다에는 성난 물결이 높이 일게 될 때 “아 사랑이란 이런 것이구나”, “결국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뒤늦게 깨닫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여러 성도님들은 그동안 자신과 자신의 식구들과 이웃들과 그리고 우리 주님을 얼마나 거짓없이 사랑하면서 살아오셨습니까 요한 계시록에 보면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는 “처음 샤ㅏ랑을 가지라”는 명령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즉, 원점으로 돌아가 또 다시 처음 사랑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처음에 지녔던 그 순수하고 진실되고 뜨거운 사랑에로 돌이키지 않는 한 결국 우리는 무서운 사랑의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만 할 것입니다.
2. 두 번째 질문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였는가(9절)”입니다. 우리는 선에 속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악을 사랑하기도 하고 죄를 사랑하기도 합니다. 뱅겔(Bengel)이란 주석가는 말하기를 “악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대개 우리들은 잘못된 것을 보면서도 못본체하고 그것이 악인줄 알면서도 적당히 넘겨 버리는 사람을 가리켜 “너그러운 사람,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때가 종종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이나 덕이 아니라 악을 방관해 버림으로써 결국에는 무서운 결과를 빚게 하는 또 하나의 무서운 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여기에 어떤 위급한 병을 앓고 있는 어떤 환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러나 의사는 그 환자가 큰 충격을 받거나 아픔을 느끼게 될까 봐 적당히 진통제나 놔주고 집으로 돌려 보내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그 의사는 그 사람을 간접적으로 죽인 살인자라고 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 환자를 사랑한다면 당장에 수술대에 올려 놓고 병든 부위를 서슴없이 잘라 내어야만 할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때로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고쳐야할 것에 대해 고치라고 지적했는데, 그것을 듣기 싫어하고 급기야는 온갖 악평을 하면서 모든 책임을 전가시켜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판단이나 비방을 두려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선악간에 나를 판단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결코 미워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악에 대해서는 사자와 같고, 선에 대해서는 양과 같이 살아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세 번째 질문은 10절 말씀에서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였는가”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말은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때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조건적인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베드로가 조건적인 사랑을 한다고 대답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양을 먹이고 치라고 말씀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베드로의 답변이 너무나도 진실되고 솔직한 고백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 믿는 성도는 아무리 아가페 사랑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실제로 필레오 사랑밖에는 되는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실제로는 존건적인 필레오 사랑을 하면서도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을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한낮 가증스러운 위선 밖에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아가페는 아가페, 필레오는 필레오로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사랑하라는 것이 본문 말씀의 요지인 줄 압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고 우애해야할 결정적인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못난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성도님들은 이 말씀 앞에서 지금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4. 네 번째 질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겼는가입니다.(11) 기독교의 진리는 명상이나 이론에 있지 않고 실천과 행동에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은 불행화게도 일찍이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아 염세사상과 체면 문화에 깊이 뿌리가 밖혀져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손에 흙이나 안 묻히고 놀고 먹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요 출세인 것처럼 간주되어져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농사를 짓고 기계를 만들고 장사를 하는 것은 모두 천인들이 하는 것으로 제도화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서구나 미국, 일본들에 비해 후진국 신세를 못 면하고 있는 것도 실상 따지고 보면, 게르름이 미화되어져온 국민의식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한마디로 게으름은 가정과 나라를 망하게 하는 암적인 요인일뿐만 아니라 “이마에 땀을 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정면적인 거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주님을 섬기게 되 때에는 부지런히 열심을 품어야만 합니다. 성도들이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이 매우 힘들다고 하는데, 아무리 일찍 나와 보아도 택시 기사들은 벌써 다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푼 돈을 벌기 위해서도 그렇게 열심인데, 주님을 섬기는 일에 게을러서야 되겠습니까 잠은 잘수록 더 많아지고, 머리는 쓰지 않으면 안 쓸수록 더욱 나빠지게 됩니다. 게으른 것은 일종의 악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언제가 마지막 날에 “악하고 게으른 종”을 반드시 심판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받은 바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면서 부지런히, 열심히 주님을 섬기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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