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율법의 완성 (롬13:8-14)
본문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크리스찬의 의무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는 국가에 대한 크리스찬의 의무에 관하여 언급한 후에 오늘 본문에서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찬들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지지 말라고 말합니다. 8절에 보면 "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울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집에서 자동차를 살 때 우리처럼 현금을 다 지불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집이나 자동차 가격의 20-30%정도를 지불하고 나머지는 은행에서 돈을 빌려 사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찬들 가운데는 8절 말씀에 의거하여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이나 자동차를 사지 않는 것이 성서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믿는 분들은 은행의 크레딧 카드를 사용하는 것도 비성서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중국에 선교사로 갔던 유명한 J.Hudson Taylor나 Charles Spurgeon 목사님같은 분들은 은행이나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비성서적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값비싼 이자를 요구하는 착취 행위를 금하고 있으나,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말씀(마 25:27)에서 보면 정당한 은행활동과 투자 그리고 이윤을 취하는 행위를 허락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빚지지 말라고 말할 때 빚진다는 헬라말의 동사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남에게 빚을지는 생활을 해서는 안되며 남에게 값아야 할 돈이 있다면 약속한대로 값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크리스찬들은 다른 사람에게 항상 사랑의 빚진자 처럼 살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내가 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의 빚진자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내 죄를 사라하시고 나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내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갚지 못할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 주님은 내가 지켜야만 하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나에게 영생과 구원을 주신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항상 사랑의 빚진자처럼 살아야 마땅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내가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저 분에게 진 빚을 빨리 갚아야 할터인데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우리는 스스로 다짐해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직장이나, 학교나, 상점이나, 교회나,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8절 중간쯤에서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저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또한 10절 중간 이하에서도 ".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이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이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데, 왜 그렇습니까 마태복음 23장 37-40절에 보면 바리세인들중 어느 한 율번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표준 새번역: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있다." 고 하셨습니다. 즉 모든 계명과 율법은 하나님을 사라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두 계명에 요약될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셨는데, 1계명으로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이 지켜야할 계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1로부터 제4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한다면,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1계명으로부터 4계명까즈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으로 요약될수 있는것입니다. 십계명중 5계명으로부터 마지막 열번째 계명은 이웃에 대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을 말합니다. 제5로부터 제10에 이르기까지의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으로 압출될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이웃을 사랑한다면, 부모님을 사랑할것이며, 우리가 정말 이웃을 사랑한다면,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탐욕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과 율법은 1) 하나님을 사랑하고 2)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요약되고, 압출될 수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율법을 다 행함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이 되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9절말씀에서 말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들었느니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3f장과 성경전체에서 보면 사랑은 무엇을 행하고, 사랑은 무엇을 행치 않는지를 알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선을 원하며 그것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도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인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나라"고 말합니다.
즉 사랑이란 나 자신에게 행복과 안전과, 번영과 성장이 중요한 것처럼, 상대방의 행복, 그의 안전, 그의 번영과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이루워지기 위하여 행돋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자면 TV가 하나만 있는 집에서 남편이 축구시합이나, 야구시합 또는 농구시합을 보느라고 TV를 하루 저녁내내 차지했다면, 아내에게도 그녀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볼수 있도록 균등한 기회를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직장의 상사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기를 원한다면 , 나도 그를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며, 동료들에게 상사를 비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교역자가 나의 영적인 필요성에 좀더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면, 나도 그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기도하여, 그분에 관하여 험담을 말하지 않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분을 변호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점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 5장 21절 이하에는 그리스도가 교회릉 위하여 생명을 주시듯이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아내는 남편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에베소 5장 29절에 보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의 육체적, 정서적인,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필요를 공급하며 채워주고, 나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돌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갑작스러운 태풍이 몰아닥침으로 거센 바람과 비가 산꼭대기 바위위에 있는 독수리의 둥어리에 거세게 내려칠 때, 어미 독수리는 라개를 펴서 새끼들을 차거운 비와 거센 바람으로부터 보호해주며, 배고픈 새끼들에게 어미 독수리는 먹이를 공급해줍니다. 마친가지로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학교교육과 과외활동, 그리고 건전한 여가활동의 기회를 공급해주며 그들로 하여금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성장케하며, 아울러 자녀들을 불건전한 비디오나 TV Program이나 음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고 지켜주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험과 죄의 시험이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주며, 그들의 건전한 필요성을 채워주며 양육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나의 베푸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수 있습니까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은 우리가 그 사람을 좋아하건 싫어하건간에 관계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이기에 행하여만 합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를 질머지시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할수만 있거든 십자가의 잔이 그에게서 피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자신의 뜻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질머지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나는 일만 달란트의 죄를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영원히 갚지못할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사랑해야만 할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의지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성령님께서는 그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서 우러나오게 하십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의 항상 사랑의 빚진자처럼 살아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11절과 12절 전반부에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역사의 심판자로 재림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는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시작이 있으며 종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의 날을 정하셨습니다. 그날이 하루 하루 더 가깝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에 내 생전에 이루워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 삶의 마지막날이 날마다 순간수간마다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함으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사랑의 기회와 순간들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소중한 시간과 기회를 낭비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에베소 5장 14절에도 " 잠 자는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갚어야 할것입니다. 의사소통인 케뮤니케이션을 성인들에게 가르치는 반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어려운 과제물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오는 한주간동안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서 사랑한다고 말을 하되, 반드시 전에 한번도 그 말을 그에게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그런 말을 한적이 없는 사람에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뭐 그리힘든 일이겠는가 생각할지 모르지만, 수강생들은 대부분 35살이상의 남자들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는 것을 배우며 자란세대인 것을 생각하면 쉬운 과제물이 아니었습니다. 35세 이상의 남자들은 마음속의 감정을 나타내거나 특히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우며 자란 세대들이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숙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음주 그 학습반이 다시 모였을 때, 선생님은 수강생들에게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키가 큰 남자가 일어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지난주에 우리에게 이러한 숙제를 주었을 때 난 무척 화가 났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말을 해야할 대상을 갖고 있지 않았을뿐더러 선생님이 나의 사생활에 간섭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만 하는가 너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양심이 저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상은 몇 년전에 나는 아버지와 어떤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 그 이후로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지내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때나 다른 불가피한 가족 모임을 제외하고는 서로 마주치기를 피해왔습니다.
나는 그동안 멀어졌던 아버지에게 가서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만 한다고 나 자신을 설득했습니다. 내가 집에서 이 결정을 아내에게 말하자 아내도 너무나 기뻐하는 것이 었습니다. 이튿날 나는 아버지댁으로 전화를 해서 오후 퇴근시간에 잠시들리겠다고 말을 남겼습니다. 오후 5시반에 난 아버지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문을 열러 나오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나오시면 나 자신이 겁쟁이가 되어 어머니에게 대신 그 말을 하게 될까봐 겁이 났던 것입니다. 다행히 아버지가 문을 여셨습니다. 난 시간을 끌 필요도 없이 곧장 문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왔어요."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부드러워지며, 주름살이 사라지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셨어요. 아버지는 가까이 와 나를 껴안으면서 말하기를 "아들아,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단다." 그 순간은 너무나 소증한 순간이었기에 아버지와 나는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그런 감동적인 순간들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그게 아닙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한 이틀 후에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셔서 의식불명의 상태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심장병을 심하게 앓으시면서도 내게도 아무 말씀도 안하셨던 것입니다. 이 커뮤니케이션반에 참석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일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다면 나는 두 번다시 그러한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간을 내서 지금 당장하십시오. 여러분이 해야만 하는 일을. 크리스토퍼 몰리라는 사람을 다음과 같은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면, 모두가 전화기에 달려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그리고는 더듬거리며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때보다 가까웠음이나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바울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다른 사람들에게 갚기 위하여 하여야 할 일들이 있다고 합니다. 12절 중간이후를 보면 ".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가 버려야 할 어두움의 일들이 무엇인지를 바울은 13절에서 말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로 옷입는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14절에 보면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옷을 입습니다. 옷은 하루종일 나의 일부가 되어 내가 어디를 가던지 같이 가며, 무엇을 하던지 나와 함께 행합니다. 옷은 나를 덮어주며 나의 피부를 보호하며 다른 사람에게 단정하게 보이도록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침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하루종일 내가 어디를 가던지 주님과 동행하며, 무엇을 하던지 주님과 함께 행하며, 주님으로 하여금 나를 보호해 주시도록 하며, 내가 하나님과 사람앞에 단정하게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도록 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옷을 입고 옷안에서 사는 것처럼, 하루종일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혐오하는 문둥병자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으사 그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고 한다면, 혐오감이 가는 사람들,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되면 주님의 능력, 주님의 사랑, 주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있게될 것입니다. 살인자, 깽단원들, 강도들, 사기횡령자, 마약밀수자들, 흉악범이 대부분인 그들곁에 아무도 가기를 원치 않았지만, 죄수들이 야구나 농구시합을 할 때에는 소장의 아내와 세명의 자녀들은 항상 그들과 함께 앉아서 관람을 하며 응원을 했습니다. 소장의 아내는 죄수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항상 베풀었기에 죄수들은 그녀를 자기들의 어머니로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973년 어느날 소장님의 아내가 갑짜기 차사고로 죽게 되어 그녀의 장례식이 감옥부근에 있는 교회에서 있게 되었습니다. 장례식 아침 SIng Sing 감옥의 모든 죄수들은 감옥 입구에 다 모였습니다. 죄수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간수들은 다 알았습니다. 그들은 소장님 부인의 장례식에 참여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감옥의 부소장은 죄수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걸어나가서 교회에 가서 장례식 예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숫자를 세지 않겠고, 감시하는 간수도 보내지 않겠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신뢰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한사람도 탈영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은 미국의 감옥역사상 처음이요. 마지막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사랑은 이처럼 놀라운 기적을 이룹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이나, 공장이나, 학교나 병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빚진자로서 그를 바라보십시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때보다 가까웠음을 알고 오늘 사랑의 빚을 갚으십시다. 오늘 어두움의 일을 벗고, 날마다 예수그리스도로 옷입고 오늘도 사랑을 행하여 기적을 맛보며 사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찬들 가운데는 8절 말씀에 의거하여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이나 자동차를 사지 않는 것이 성서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믿는 분들은 은행의 크레딧 카드를 사용하는 것도 비성서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중국에 선교사로 갔던 유명한 J.Hudson Taylor나 Charles Spurgeon 목사님같은 분들은 은행이나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비성서적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값비싼 이자를 요구하는 착취 행위를 금하고 있으나,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말씀(마 25:27)에서 보면 정당한 은행활동과 투자 그리고 이윤을 취하는 행위를 허락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빚지지 말라고 말할 때 빚진다는 헬라말의 동사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남에게 빚을지는 생활을 해서는 안되며 남에게 값아야 할 돈이 있다면 약속한대로 값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크리스찬들은 다른 사람에게 항상 사랑의 빚진자 처럼 살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내가 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의 빚진자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내 죄를 사라하시고 나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내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갚지 못할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 주님은 내가 지켜야만 하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나에게 영생과 구원을 주신 주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항상 사랑의 빚진자처럼 살아야 마땅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내가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저 분에게 진 빚을 빨리 갚아야 할터인데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우리는 스스로 다짐해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직장이나, 학교나, 상점이나, 교회나,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8절 중간쯤에서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저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또한 10절 중간 이하에서도 ".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이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이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데, 왜 그렇습니까 마태복음 23장 37-40절에 보면 바리세인들중 어느 한 율번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표준 새번역: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있다." 고 하셨습니다. 즉 모든 계명과 율법은 하나님을 사라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두 계명에 요약될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셨는데, 1계명으로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이 지켜야할 계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1로부터 제4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한다면,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1계명으로부터 4계명까즈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으로 요약될수 있는것입니다. 십계명중 5계명으로부터 마지막 열번째 계명은 이웃에 대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을 말합니다. 제5로부터 제10에 이르기까지의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으로 압출될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이웃을 사랑한다면, 부모님을 사랑할것이며, 우리가 정말 이웃을 사랑한다면,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탐욕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과 율법은 1) 하나님을 사랑하고 2)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요약되고, 압출될 수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율법을 다 행함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이 되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9절말씀에서 말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들었느니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3f장과 성경전체에서 보면 사랑은 무엇을 행하고, 사랑은 무엇을 행치 않는지를 알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선을 원하며 그것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도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인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나라"고 말합니다.
즉 사랑이란 나 자신에게 행복과 안전과, 번영과 성장이 중요한 것처럼, 상대방의 행복, 그의 안전, 그의 번영과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이루워지기 위하여 행돋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자면 TV가 하나만 있는 집에서 남편이 축구시합이나, 야구시합 또는 농구시합을 보느라고 TV를 하루 저녁내내 차지했다면, 아내에게도 그녀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볼수 있도록 균등한 기회를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직장의 상사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기를 원한다면 , 나도 그를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며, 동료들에게 상사를 비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교역자가 나의 영적인 필요성에 좀더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면, 나도 그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기도하여, 그분에 관하여 험담을 말하지 않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분을 변호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점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 5장 21절 이하에는 그리스도가 교회릉 위하여 생명을 주시듯이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아내는 남편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에베소 5장 29절에 보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의 육체적, 정서적인,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필요를 공급하며 채워주고, 나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돌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갑작스러운 태풍이 몰아닥침으로 거센 바람과 비가 산꼭대기 바위위에 있는 독수리의 둥어리에 거세게 내려칠 때, 어미 독수리는 라개를 펴서 새끼들을 차거운 비와 거센 바람으로부터 보호해주며, 배고픈 새끼들에게 어미 독수리는 먹이를 공급해줍니다. 마친가지로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학교교육과 과외활동, 그리고 건전한 여가활동의 기회를 공급해주며 그들로 하여금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성장케하며, 아울러 자녀들을 불건전한 비디오나 TV Program이나 음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고 지켜주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험과 죄의 시험이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주며, 그들의 건전한 필요성을 채워주며 양육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나의 베푸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수 있습니까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은 우리가 그 사람을 좋아하건 싫어하건간에 관계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이기에 행하여만 합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를 질머지시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할수만 있거든 십자가의 잔이 그에게서 피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자신의 뜻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질머지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나는 일만 달란트의 죄를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영원히 갚지못할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사랑해야만 할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의지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성령님께서는 그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서 우러나오게 하십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의 항상 사랑의 빚진자처럼 살아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11절과 12절 전반부에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역사의 심판자로 재림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는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시작이 있으며 종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의 날을 정하셨습니다. 그날이 하루 하루 더 가깝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에 내 생전에 이루워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 삶의 마지막날이 날마다 순간수간마다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함으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사랑의 기회와 순간들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소중한 시간과 기회를 낭비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에베소 5장 14절에도 " 잠 자는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갚어야 할것입니다. 의사소통인 케뮤니케이션을 성인들에게 가르치는 반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어려운 과제물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오는 한주간동안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서 사랑한다고 말을 하되, 반드시 전에 한번도 그 말을 그에게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그런 말을 한적이 없는 사람에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뭐 그리힘든 일이겠는가 생각할지 모르지만, 수강생들은 대부분 35살이상의 남자들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는 것을 배우며 자란세대인 것을 생각하면 쉬운 과제물이 아니었습니다. 35세 이상의 남자들은 마음속의 감정을 나타내거나 특히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우며 자란 세대들이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숙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음주 그 학습반이 다시 모였을 때, 선생님은 수강생들에게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키가 큰 남자가 일어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지난주에 우리에게 이러한 숙제를 주었을 때 난 무척 화가 났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말을 해야할 대상을 갖고 있지 않았을뿐더러 선생님이 나의 사생활에 간섭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만 하는가 너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양심이 저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상은 몇 년전에 나는 아버지와 어떤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 그 이후로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지내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때나 다른 불가피한 가족 모임을 제외하고는 서로 마주치기를 피해왔습니다.
나는 그동안 멀어졌던 아버지에게 가서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만 한다고 나 자신을 설득했습니다. 내가 집에서 이 결정을 아내에게 말하자 아내도 너무나 기뻐하는 것이 었습니다. 이튿날 나는 아버지댁으로 전화를 해서 오후 퇴근시간에 잠시들리겠다고 말을 남겼습니다. 오후 5시반에 난 아버지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문을 열러 나오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나오시면 나 자신이 겁쟁이가 되어 어머니에게 대신 그 말을 하게 될까봐 겁이 났던 것입니다. 다행히 아버지가 문을 여셨습니다. 난 시간을 끌 필요도 없이 곧장 문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왔어요."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부드러워지며, 주름살이 사라지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셨어요. 아버지는 가까이 와 나를 껴안으면서 말하기를 "아들아,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단다." 그 순간은 너무나 소증한 순간이었기에 아버지와 나는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그런 감동적인 순간들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그게 아닙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한 이틀 후에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셔서 의식불명의 상태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심장병을 심하게 앓으시면서도 내게도 아무 말씀도 안하셨던 것입니다. 이 커뮤니케이션반에 참석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일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다면 나는 두 번다시 그러한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간을 내서 지금 당장하십시오. 여러분이 해야만 하는 일을. 크리스토퍼 몰리라는 사람을 다음과 같은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면, 모두가 전화기에 달려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그리고는 더듬거리며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때보다 가까웠음이나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바울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다른 사람들에게 갚기 위하여 하여야 할 일들이 있다고 합니다. 12절 중간이후를 보면 ".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가 버려야 할 어두움의 일들이 무엇인지를 바울은 13절에서 말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로 옷입는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14절에 보면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옷을 입습니다. 옷은 하루종일 나의 일부가 되어 내가 어디를 가던지 같이 가며, 무엇을 하던지 나와 함께 행합니다. 옷은 나를 덮어주며 나의 피부를 보호하며 다른 사람에게 단정하게 보이도록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침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하루종일 내가 어디를 가던지 주님과 동행하며, 무엇을 하던지 주님과 함께 행하며, 주님으로 하여금 나를 보호해 주시도록 하며, 내가 하나님과 사람앞에 단정하게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도록 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옷을 입고 옷안에서 사는 것처럼, 하루종일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혐오하는 문둥병자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으사 그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고 한다면, 혐오감이 가는 사람들,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되면 주님의 능력, 주님의 사랑, 주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있게될 것입니다. 살인자, 깽단원들, 강도들, 사기횡령자, 마약밀수자들, 흉악범이 대부분인 그들곁에 아무도 가기를 원치 않았지만, 죄수들이 야구나 농구시합을 할 때에는 소장의 아내와 세명의 자녀들은 항상 그들과 함께 앉아서 관람을 하며 응원을 했습니다. 소장의 아내는 죄수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항상 베풀었기에 죄수들은 그녀를 자기들의 어머니로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973년 어느날 소장님의 아내가 갑짜기 차사고로 죽게 되어 그녀의 장례식이 감옥부근에 있는 교회에서 있게 되었습니다. 장례식 아침 SIng Sing 감옥의 모든 죄수들은 감옥 입구에 다 모였습니다. 죄수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간수들은 다 알았습니다. 그들은 소장님 부인의 장례식에 참여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감옥의 부소장은 죄수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걸어나가서 교회에 가서 장례식 예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숫자를 세지 않겠고, 감시하는 간수도 보내지 않겠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신뢰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한사람도 탈영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은 미국의 감옥역사상 처음이요. 마지막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사랑은 이처럼 놀라운 기적을 이룹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이나, 공장이나, 학교나 병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빚진자로서 그를 바라보십시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때보다 가까웠음을 알고 오늘 사랑의 빚을 갚으십시다. 오늘 어두움의 일을 벗고, 날마다 예수그리스도로 옷입고 오늘도 사랑을 행하여 기적을 맛보며 사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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