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성과 다양성 (롬14:1-2)
본문
어느 특정한 교단에 속하지 않은 초교파적인 신학교를 졸업한 전도사가 농촌지역에 위치한 작은교회의 초빙을 받아서 사역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교단에 속하지 않은 독립교회였는데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불리우는 교단의 영향을 받아, 예배의식이 매우 특이했습니다. 그들은 예배시에 찬송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찬송가 가사를 작사한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일수도 있으며, 믿음이 있다한들 신학적인 내용이 좋치않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일반 찬송가를 예배시에 부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교회는 피아노나, 오르간이 없을뿐더러, 기타나 현대악기가 없는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그들은 시편 1편부터 150편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편의 가사에다가 주후 초대교회와 중세기의 멜로디를 부쳐 피아노나 오르간의 반주없이 시편만을 노래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주일날을 주님의 날이라고 부르지 않고, 안식일이라고 불렀고, 안식일에는 아침에는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가족들과 성경을 읽으며 지내다가, 저녁에 다시모여 예배드리는 교회였습니다. 주일날은 즐겁고 기뿐날이 되지못하고, 자유로운 활동이 제한되는 매우 율법적인 날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분위기속에서 그 전도사님은 그의 삶이 숨이막히고 답답해져, 지혜가 많은 어느 선배목사님에게 장거리전화로 사정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선배목사님은 그 젊은 전도사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섬기는 교회교인들의 신앙의 신조와 그들의 신앙형태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그들의 믿음을 오히려 격려해주어라고 충고를 주었다고 합니다. 선배목사님은 오늘 본문말씀에 의거해서 젊은 전도사에게 조언을 준것입니다. 그 선배 목사님의 충고는 바울이 오늘 본문말씀에서 로마성도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과 같은 내용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사역하는 당시 로마교회는 형제들간에 서로 의견이 대립되어있었습니다. 교회가 강한자와 약한자로 나누어져있었습니다.
약한자들은 누구입니까 약한자들은 유대인 크리스챤들을 의미합니다. 유대계 크리스챤들은 우상신전에 제물로 받쳐졌던 고기는 먹으면 안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당시 시장에서 팔리는 고기는 거의다 우상신전에 일단 제물로 받쳐졌다가, 시장에 내어다 팔리는 것들이었습니다. 유대계 크리스챤들은 우상신전에 제물로 받쳐졌던 고기는 더렵혀진 고기이기에, 그 고기를 먹으면 먹는 사람들의 영이 더렵혀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반면에 강한자들, 즉 이방인 크리스챤들은 우상신전에 제물로 받쳐졌던 고기를 먹은들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상신이란 존재하지도 않으며, 어리석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신에게 받친 고기를 먹은들, 우리 크리스챤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로마교회에서 성도들간에 의견이 나누어진 문제들중 다른 하나는 안식일과 유대인들의 특별한 명절과 절기를 지키는 문제였습니다. 초대교회 크리스챤들중 유대계통의 사람들은 주일날을 자유와 기쁨의 날보다는 유대교의 안식일처럼 율법적으로 지켜야 되는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또한 크리스챤들도 유대인들의 모든 명절과 절기와 특별한 날들을 철저하게 다 지켜야 온전한 신앙인이 된다고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안식일과 명절과 절기때 지켜야할 율례와 규례가 수백수천개나 되어 안식일과 명절과 절기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들을 속박하는 부담스러운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이방인 크리스챤들은 유대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일날을 주님이 부활승리하신 기쁜날로 지키며, 유대인들의 명절과 절기에는 구애 받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말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너희들과 다른 견해와 의견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존중하여, 그들의 말에도 경청하며, 그들의 믿음도 격려해주어야 한다. 서로의 다름을 오히려 기뻐하며 축하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구원에 이르는 문제에 관하여는 명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크리스챤의 삶을 살어갈 때, 성경에서 명확하게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말해주지 않는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즉 성경에서 이것은 흑이다 이것은 백이다 라고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회색의 문제에 봉착할때가 많이있습니다. 이러할때에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성경전체의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각자 자신의 살아온 삶의 경험과 배경과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합니다. 사람들마다 삶을 살아온 배경과 교육, 경험과 철학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할때에도 각각 다르게 해석할수가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크리스챤들이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들을 가지게 되는것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이 당면한 문제인 우상신전에서 제물로 받쳐진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되느냐, 유대인들의 절기와 명절을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하느냐 안지켜도 되느냐는 문제는 성경에 명확하게 대답이 나와있지 않은 문제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정확한 해답이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각자가 다르게 생각할수 있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는 정확한 해답을 주지만, 부수적인 문제들에 관하여는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기를 먹느냐 안먹느냐, 절기와 명절을 지켜야 되느냐 안지켜도 되느냐의 문제는 기독교신앙에서 중대한 교리나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고 부수적인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부수적인 문제에 관하여 성도들는 너그러운 태도와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바울은 생각합니다. 내 생각과 내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견해는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태도와 자세를 가져서는 아니된다는 것입니다. 그
러하기에 바울은 강한 크리스챤들, 즉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를 누리며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주님이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와 자유를 육신을 위한 이기적인 동기로 사용해서는 아니되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아직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있는 형제들을 웃읍게 보거나, 무시하거나, 편협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만 권면의 말씀을 주지 않고, 약한 자들, 즉 율법에 매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권면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성경에서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 부수적인 문제에서 율법과 규례를 엄하게 지키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그렇치 않은 성도들을 믿음과 열심히 없다고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당신들이 믿는 것이 성서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십시요. 그러나 여러분과 다르게 믿는 사람들을 우리처럼 철저하게 신앙생활하지 않고 미지근하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믿는다고 비판하거나, 율법적으로 신앙생활 하지 않는다고 믿음이 없다고 정죄하지 마십시요. 라고 바울은 연약한자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당시의 로마교회처럼 오늘 우리도 부수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성도들끼리 분열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챤으로 술을 마시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크리스챤도 저녁식사 때 포도주 한잔정도는 해도 좋다고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적임 문제를 떠나서 경건절제의 입장에서 크리스챤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또한 크리스챤은 담배를 피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느분들은 흡연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아무관계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James McCord 학장님은 씨가를 피웠습니다. 또한 세계적인 신학자였던 Karl Barth도 입에 씨가를 물고 있었을때가 많았습니다. 신앙문제를 떠나서 경건절제의 측면에서 금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이 됩니다. 흡연은 건강의 가장해로운 습관입니다. 내 몸을 내가 해치는 습관입니다. 내가 흡연함으로 나의 건강뿐만 아니라, 나의 아내, 자녀들과, 이웃의 건강까지도 해치게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의 흡연은심각합니다. 담배를 피우면 두뇌에 산소가 부족하고 두뇌활동이 저하되어 학습에도 지장이 많게되며 학교성적도 떨어지게 됩니다. 사교춤을 가지고 찬반으로 기독교인들이 찬반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기도할때 묵상기도가 최상의 수준의 기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소리내어 기도하는 통성기도가 뜨거운 기도요, 묵상기도는 냉냉한 기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드릴때 엄숙하게 경건하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예배드릴때에는 일어서서 손을드로 찬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음악을 가지고 교인들간에 의견이 나누어질때가 많습니다. 오르간에 맞추어 고전적인 찬송가를 부르기를 좋아하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현대악기에 맞추어 경배와 찬양곡을 부르기를 좋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음악문제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되기도 하고, 목사님이 쫏겨나기도 합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목사님들 간에도 골프를 치는분들이 있습니다. 성직자로서 지금 한국상황에서 골프를 치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치 않느냐 의견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성과 폭력이 어느정도 노출된 PG(부모의 지도가 필요한 영화)급의 영화도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며, PG수준의 영화는 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부수적인 문제를 가지고 의견이 나누어져 있는 문제들을 손꼽으라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의 런던에는 설교의 왕자라고 불리우는 챨스 스펼전 목사님과 다른 유명한 설교자인 죠셉 파커목사님이 런던에서 목회사역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두 목사님은 목회사역 초기에는 사이가 매우 좋아 강단도 서로 교환하며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어떤 문제를 가지고 사이가 멀어지며, 서로 비난하게되었습니다. 스편전목사님은 죠셉파커 목사님이 극장출입을 한다고 영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죠셉 파커목사님은 스 스편전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본이되지 못하고 씨가를 피운다고, 흡연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어느분이 옳습니까 두분다 잘못되었다고 말할수도 있고, 두분다 옳다고도 말할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 5절 후반부에서 말합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각자 신양양심대로 행하되, 중요한것은 6절에 나오는 거처럼 나의 행동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일이 되냐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내 생각과 반대되는 다른 사람의 의견과 견해라도 존중하며, 그들의 말에 경청하며, 그들의 믿음을 격려해주어야하는 이유를 7-9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니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사나 죽으나 영원히 그리스도의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태어나 한 피를 나눈 형제와 자매들이기에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견해와 의견도 존중해주는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세상의 기관들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기관은 신분과 지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군에 있는 병사는 그의 계급과 신분에 따라 복종하며 행동합니다. 마찬가지로 회사에서도 신입사원, 계장, 대리 부장, 이사, 상무, 사장등의 신분에 따라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세상의 기관에서의 신분과 계급은 능력과 기여도와 성과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나의 신분은 힘쓰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으로 얻어집니다. 가정에서 내가 아들이되고 딸이되는 것은 태어남으로 결정이 됩니다.
가정에서는 내가 머리가 명석하지 못하고, 신체가 허약하고, 외모가 보잘것없다고, 쫏겨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는 신체가 허약하고, 병든 자식은 건강한 자녀보다 부모의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게됩니다. John Wesley의 어머니 스잔나는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 가운데 내가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구요 나는 병든 아이가 나을때까지 그 아이를 가장 많이 사랑합니다. 집을 떠난 아이가 집에 돌아올때까지 그 아이를 가장 사랑합니다. 가정안에서는 내가 누구를 좋아하기에 그가 나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와 자매는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John Updike라는 유명한 작가는 가정이란 우리가 누구를 좋하하고 싫어하고의 차원을 넘어서 어떻게 사랑 할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곳이며, 무관심과, 경쟁, 그리고 심지어 반감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서로 공존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곳이라는 정의를 내린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한가족인 교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며 받아줄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21-27절까지를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너는 내게 필요 없다고 하거나 머리가 발에게 너는 내게 필요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몸 가운데 약해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더 필요합니다. 우리는 몸 가운에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부분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또 별로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더욱 아름답게 꾸밉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부분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찮은 부분을 더욱 귀하게 여겨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몸 안에 분열이 없이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다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몸의 각 지체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란,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인 Robert Frost에의하면, 우리가 돌아가야만 했을 때 항상 우리를 받아주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을 식구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훈련장으로 만드셔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나아가 사랑을 실천할수 있도록 하십니다. 가정에서는 서로 다른 점을 감추려고 하지 않고 서로 다른점을 축하하고 기뻐해야만 합니다. 가정은 우리가 선택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정에 단지 태어날 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교회안으로 태어났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한가족으로 태어난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다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가장의 한 형제자매이기에 우리는 서로의 다른점을 비난하고 무시하기 보다는 서로의 다른점을 존중하며, 축하하고 기뻐할수 있어야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신앙공동체란 내가 가장 함께 살기 싫은 사람과 더불어 항상 같이 사는 곳이라고 정의를 내린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주님의 것이요, 하나님 가족의 한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함으로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의 말도 존중해주며, 그의 의견에도 경청하며, 우리의 다름을 덥어두기 보다는 서로의 차이점, 다양성을 기뻐하며 축하할수 있어야만 합니다. 성도들이 나의 생각과 전혀 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비난하기 보다는, 서로 존중하며, 상대방의 말에 경청하며, 서로의 믿음을 격려하며, 차이점을 기뻐할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심판자 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재림하시는 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과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잘못과 죄, 즉 형제를 정죄하며 자매를 무시하며, 형제를 없신여긴 자세와 태도를 심판받게 될것입니다.
10-12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 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 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끓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 그들의 약함, 나와 다른점을 예린한 눈으로 파헤치고 비난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항상 자기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 교만,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함을 구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할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외식하는 자여(위선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기독교 잡지사에서 목사님들을 상대로 교회안에서 가장 말썽을 많이 이르키는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을했다고 합니다. 1위는 40일 금식기도한 사람 이고 2위는 철야기도 잘하는 사람이고 3위는 신학공부한 장로님이라는 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40일 금식기도는 보통사람이 잘하지 못하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할수 있습니다. 철야기도도 기도의 은사를 받은분들이 잘합니다. 40일 금식기도와 철야기도는 본인들의 영적성장에 큰 풀러스가 되는 매우 축복된 일들입니다.
그런데 교회안에서 이러한 분들이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은 그들의 영적인 교만과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자세입니다. 산에서 40일 금식기도나 철야기도회를 마치고 교회에 돌아오면, 신앙적으로 더욱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심판하는 자세를 가지는 경우가 많이 있게됩니다. 우리 목사님은 영력이 부족해, 우리 장로님들은 더 기도해야만 해! 라고 말하며 심판자의 자세에서 남의 믿음을 함부러 정죄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교회에 덕을 끼치기 보다는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이 있는것입니다.
또한 신학공부하신 장로님들은 목사의 사역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목회자를 협력하는 자가 되지 못하고 목사의 설교와 가르침을 항상 비판하는 자세에 서기 쉽기 때문에 신학공부한 장로님들이 교회에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것입니다. Philip Yancey 라는 유명한 기독교 문필가이며 사상가는 젊은 시절에 크리스챤들이란 위선자들이요, 말씀대로 살지못하는 이중인격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위선자들의 집합소인 교회를 멀리할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생각하기를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나와 같은 사람으로 구성되었다면, 우리 교회는 어떠한 교회가 될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고 합니다. 깊히 생각하는 동안에 그는 겸손해지지 않을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위선과 이중인격성을 그는 누구보다 더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다른 사람들을 냉혹하게 비판하던 자신을 회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의 깊은 곳까지도 아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최종 심판자가가 되실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중요한 교리나 신학의 문제에서는 교회는 통일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In essentials, unity).그러나 중요하지 않은 부수적인 문제, 즉 성경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명확하게 해을 주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나와 다르게 생각할수 있는 자유를 주며(In non-essentials, liberty), 그러나 모든 문제에서사랑으로 행하는(In all things, charity)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나와 반대의 생각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때가 만습니다. 그러할때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하며, 그들의 말에 경청하며,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며, 나와 다른 그들로 인하여 기뻐하며, 서로 축하함으로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의 사랑을 더욱더 나누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교단에 속하지 않은 독립교회였는데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불리우는 교단의 영향을 받아, 예배의식이 매우 특이했습니다. 그들은 예배시에 찬송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찬송가 가사를 작사한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일수도 있으며, 믿음이 있다한들 신학적인 내용이 좋치않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일반 찬송가를 예배시에 부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교회는 피아노나, 오르간이 없을뿐더러, 기타나 현대악기가 없는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그들은 시편 1편부터 150편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편의 가사에다가 주후 초대교회와 중세기의 멜로디를 부쳐 피아노나 오르간의 반주없이 시편만을 노래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주일날을 주님의 날이라고 부르지 않고, 안식일이라고 불렀고, 안식일에는 아침에는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가족들과 성경을 읽으며 지내다가, 저녁에 다시모여 예배드리는 교회였습니다. 주일날은 즐겁고 기뿐날이 되지못하고, 자유로운 활동이 제한되는 매우 율법적인 날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분위기속에서 그 전도사님은 그의 삶이 숨이막히고 답답해져, 지혜가 많은 어느 선배목사님에게 장거리전화로 사정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선배목사님은 그 젊은 전도사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섬기는 교회교인들의 신앙의 신조와 그들의 신앙형태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그들의 믿음을 오히려 격려해주어라고 충고를 주었다고 합니다. 선배목사님은 오늘 본문말씀에 의거해서 젊은 전도사에게 조언을 준것입니다. 그 선배 목사님의 충고는 바울이 오늘 본문말씀에서 로마성도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과 같은 내용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사역하는 당시 로마교회는 형제들간에 서로 의견이 대립되어있었습니다. 교회가 강한자와 약한자로 나누어져있었습니다.
약한자들은 누구입니까 약한자들은 유대인 크리스챤들을 의미합니다. 유대계 크리스챤들은 우상신전에 제물로 받쳐졌던 고기는 먹으면 안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당시 시장에서 팔리는 고기는 거의다 우상신전에 일단 제물로 받쳐졌다가, 시장에 내어다 팔리는 것들이었습니다. 유대계 크리스챤들은 우상신전에 제물로 받쳐졌던 고기는 더렵혀진 고기이기에, 그 고기를 먹으면 먹는 사람들의 영이 더렵혀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반면에 강한자들, 즉 이방인 크리스챤들은 우상신전에 제물로 받쳐졌던 고기를 먹은들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상신이란 존재하지도 않으며, 어리석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신에게 받친 고기를 먹은들, 우리 크리스챤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로마교회에서 성도들간에 의견이 나누어진 문제들중 다른 하나는 안식일과 유대인들의 특별한 명절과 절기를 지키는 문제였습니다. 초대교회 크리스챤들중 유대계통의 사람들은 주일날을 자유와 기쁨의 날보다는 유대교의 안식일처럼 율법적으로 지켜야 되는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또한 크리스챤들도 유대인들의 모든 명절과 절기와 특별한 날들을 철저하게 다 지켜야 온전한 신앙인이 된다고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안식일과 명절과 절기때 지켜야할 율례와 규례가 수백수천개나 되어 안식일과 명절과 절기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들을 속박하는 부담스러운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이방인 크리스챤들은 유대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일날을 주님이 부활승리하신 기쁜날로 지키며, 유대인들의 명절과 절기에는 구애 받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말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너희들과 다른 견해와 의견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존중하여, 그들의 말에도 경청하며, 그들의 믿음도 격려해주어야 한다. 서로의 다름을 오히려 기뻐하며 축하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구원에 이르는 문제에 관하여는 명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크리스챤의 삶을 살어갈 때, 성경에서 명확하게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말해주지 않는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즉 성경에서 이것은 흑이다 이것은 백이다 라고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회색의 문제에 봉착할때가 많이있습니다. 이러할때에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성경전체의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각자 자신의 살아온 삶의 경험과 배경과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합니다. 사람들마다 삶을 살아온 배경과 교육, 경험과 철학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할때에도 각각 다르게 해석할수가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크리스챤들이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들을 가지게 되는것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이 당면한 문제인 우상신전에서 제물로 받쳐진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되느냐, 유대인들의 절기와 명절을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하느냐 안지켜도 되느냐는 문제는 성경에 명확하게 대답이 나와있지 않은 문제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정확한 해답이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각자가 다르게 생각할수 있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는 정확한 해답을 주지만, 부수적인 문제들에 관하여는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기를 먹느냐 안먹느냐, 절기와 명절을 지켜야 되느냐 안지켜도 되느냐의 문제는 기독교신앙에서 중대한 교리나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고 부수적인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부수적인 문제에 관하여 성도들는 너그러운 태도와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바울은 생각합니다. 내 생각과 내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견해는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태도와 자세를 가져서는 아니된다는 것입니다. 그
러하기에 바울은 강한 크리스챤들, 즉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를 누리며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주님이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와 자유를 육신을 위한 이기적인 동기로 사용해서는 아니되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아직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있는 형제들을 웃읍게 보거나, 무시하거나, 편협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만 권면의 말씀을 주지 않고, 약한 자들, 즉 율법에 매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권면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성경에서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 부수적인 문제에서 율법과 규례를 엄하게 지키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그렇치 않은 성도들을 믿음과 열심히 없다고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당신들이 믿는 것이 성서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십시요. 그러나 여러분과 다르게 믿는 사람들을 우리처럼 철저하게 신앙생활하지 않고 미지근하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믿는다고 비판하거나, 율법적으로 신앙생활 하지 않는다고 믿음이 없다고 정죄하지 마십시요. 라고 바울은 연약한자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당시의 로마교회처럼 오늘 우리도 부수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성도들끼리 분열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챤으로 술을 마시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크리스챤도 저녁식사 때 포도주 한잔정도는 해도 좋다고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적임 문제를 떠나서 경건절제의 입장에서 크리스챤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또한 크리스챤은 담배를 피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느분들은 흡연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아무관계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James McCord 학장님은 씨가를 피웠습니다. 또한 세계적인 신학자였던 Karl Barth도 입에 씨가를 물고 있었을때가 많았습니다. 신앙문제를 떠나서 경건절제의 측면에서 금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이 됩니다. 흡연은 건강의 가장해로운 습관입니다. 내 몸을 내가 해치는 습관입니다. 내가 흡연함으로 나의 건강뿐만 아니라, 나의 아내, 자녀들과, 이웃의 건강까지도 해치게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의 흡연은심각합니다. 담배를 피우면 두뇌에 산소가 부족하고 두뇌활동이 저하되어 학습에도 지장이 많게되며 학교성적도 떨어지게 됩니다. 사교춤을 가지고 찬반으로 기독교인들이 찬반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기도할때 묵상기도가 최상의 수준의 기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소리내어 기도하는 통성기도가 뜨거운 기도요, 묵상기도는 냉냉한 기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드릴때 엄숙하게 경건하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예배드릴때에는 일어서서 손을드로 찬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음악을 가지고 교인들간에 의견이 나누어질때가 많습니다. 오르간에 맞추어 고전적인 찬송가를 부르기를 좋아하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현대악기에 맞추어 경배와 찬양곡을 부르기를 좋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음악문제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되기도 하고, 목사님이 쫏겨나기도 합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목사님들 간에도 골프를 치는분들이 있습니다. 성직자로서 지금 한국상황에서 골프를 치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치 않느냐 의견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성과 폭력이 어느정도 노출된 PG(부모의 지도가 필요한 영화)급의 영화도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며, PG수준의 영화는 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부수적인 문제를 가지고 의견이 나누어져 있는 문제들을 손꼽으라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의 런던에는 설교의 왕자라고 불리우는 챨스 스펼전 목사님과 다른 유명한 설교자인 죠셉 파커목사님이 런던에서 목회사역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두 목사님은 목회사역 초기에는 사이가 매우 좋아 강단도 서로 교환하며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어떤 문제를 가지고 사이가 멀어지며, 서로 비난하게되었습니다. 스편전목사님은 죠셉파커 목사님이 극장출입을 한다고 영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죠셉 파커목사님은 스 스편전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본이되지 못하고 씨가를 피운다고, 흡연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어느분이 옳습니까 두분다 잘못되었다고 말할수도 있고, 두분다 옳다고도 말할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 5절 후반부에서 말합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각자 신양양심대로 행하되, 중요한것은 6절에 나오는 거처럼 나의 행동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일이 되냐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내 생각과 반대되는 다른 사람의 의견과 견해라도 존중하며, 그들의 말에 경청하며, 그들의 믿음을 격려해주어야하는 이유를 7-9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니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사나 죽으나 영원히 그리스도의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태어나 한 피를 나눈 형제와 자매들이기에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견해와 의견도 존중해주는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세상의 기관들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기관은 신분과 지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군에 있는 병사는 그의 계급과 신분에 따라 복종하며 행동합니다. 마찬가지로 회사에서도 신입사원, 계장, 대리 부장, 이사, 상무, 사장등의 신분에 따라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세상의 기관에서의 신분과 계급은 능력과 기여도와 성과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나의 신분은 힘쓰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으로 얻어집니다. 가정에서 내가 아들이되고 딸이되는 것은 태어남으로 결정이 됩니다.
가정에서는 내가 머리가 명석하지 못하고, 신체가 허약하고, 외모가 보잘것없다고, 쫏겨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는 신체가 허약하고, 병든 자식은 건강한 자녀보다 부모의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게됩니다. John Wesley의 어머니 스잔나는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 가운데 내가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구요 나는 병든 아이가 나을때까지 그 아이를 가장 많이 사랑합니다. 집을 떠난 아이가 집에 돌아올때까지 그 아이를 가장 사랑합니다. 가정안에서는 내가 누구를 좋아하기에 그가 나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와 자매는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John Updike라는 유명한 작가는 가정이란 우리가 누구를 좋하하고 싫어하고의 차원을 넘어서 어떻게 사랑 할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곳이며, 무관심과, 경쟁, 그리고 심지어 반감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서로 공존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곳이라는 정의를 내린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한가족인 교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며 받아줄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21-27절까지를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너는 내게 필요 없다고 하거나 머리가 발에게 너는 내게 필요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몸 가운데 약해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더 필요합니다. 우리는 몸 가운에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부분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또 별로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더욱 아름답게 꾸밉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부분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찮은 부분을 더욱 귀하게 여겨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몸 안에 분열이 없이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다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몸의 각 지체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란,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인 Robert Frost에의하면, 우리가 돌아가야만 했을 때 항상 우리를 받아주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을 식구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훈련장으로 만드셔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나아가 사랑을 실천할수 있도록 하십니다. 가정에서는 서로 다른 점을 감추려고 하지 않고 서로 다른점을 축하하고 기뻐해야만 합니다. 가정은 우리가 선택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정에 단지 태어날 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교회안으로 태어났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한가족으로 태어난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다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가장의 한 형제자매이기에 우리는 서로의 다른점을 비난하고 무시하기 보다는 서로의 다른점을 존중하며, 축하하고 기뻐할수 있어야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신앙공동체란 내가 가장 함께 살기 싫은 사람과 더불어 항상 같이 사는 곳이라고 정의를 내린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주님의 것이요, 하나님 가족의 한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함으로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의 말도 존중해주며, 그의 의견에도 경청하며, 우리의 다름을 덥어두기 보다는 서로의 차이점, 다양성을 기뻐하며 축하할수 있어야만 합니다. 성도들이 나의 생각과 전혀 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비난하기 보다는, 서로 존중하며, 상대방의 말에 경청하며, 서로의 믿음을 격려하며, 차이점을 기뻐할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심판자 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재림하시는 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과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잘못과 죄, 즉 형제를 정죄하며 자매를 무시하며, 형제를 없신여긴 자세와 태도를 심판받게 될것입니다.
10-12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 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 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끓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 그들의 약함, 나와 다른점을 예린한 눈으로 파헤치고 비난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항상 자기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 교만,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함을 구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할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외식하는 자여(위선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기독교 잡지사에서 목사님들을 상대로 교회안에서 가장 말썽을 많이 이르키는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을했다고 합니다. 1위는 40일 금식기도한 사람 이고 2위는 철야기도 잘하는 사람이고 3위는 신학공부한 장로님이라는 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40일 금식기도는 보통사람이 잘하지 못하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할수 있습니다. 철야기도도 기도의 은사를 받은분들이 잘합니다. 40일 금식기도와 철야기도는 본인들의 영적성장에 큰 풀러스가 되는 매우 축복된 일들입니다.
그런데 교회안에서 이러한 분들이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은 그들의 영적인 교만과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자세입니다. 산에서 40일 금식기도나 철야기도회를 마치고 교회에 돌아오면, 신앙적으로 더욱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심판하는 자세를 가지는 경우가 많이 있게됩니다. 우리 목사님은 영력이 부족해, 우리 장로님들은 더 기도해야만 해! 라고 말하며 심판자의 자세에서 남의 믿음을 함부러 정죄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교회에 덕을 끼치기 보다는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이 있는것입니다.
또한 신학공부하신 장로님들은 목사의 사역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목회자를 협력하는 자가 되지 못하고 목사의 설교와 가르침을 항상 비판하는 자세에 서기 쉽기 때문에 신학공부한 장로님들이 교회에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것입니다. Philip Yancey 라는 유명한 기독교 문필가이며 사상가는 젊은 시절에 크리스챤들이란 위선자들이요, 말씀대로 살지못하는 이중인격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위선자들의 집합소인 교회를 멀리할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생각하기를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나와 같은 사람으로 구성되었다면, 우리 교회는 어떠한 교회가 될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고 합니다. 깊히 생각하는 동안에 그는 겸손해지지 않을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위선과 이중인격성을 그는 누구보다 더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다른 사람들을 냉혹하게 비판하던 자신을 회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의 깊은 곳까지도 아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최종 심판자가가 되실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중요한 교리나 신학의 문제에서는 교회는 통일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In essentials, unity).그러나 중요하지 않은 부수적인 문제, 즉 성경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명확하게 해을 주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며, 나와 다르게 생각할수 있는 자유를 주며(In non-essentials, liberty), 그러나 모든 문제에서사랑으로 행하는(In all things, charity)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나와 반대의 생각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때가 만습니다. 그러할때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하며, 그들의 말에 경청하며,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며, 나와 다른 그들로 인하여 기뻐하며, 서로 축하함으로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의 사랑을 더욱더 나누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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