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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표상 (롬14: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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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회는 우상신전에 제물로 받쳐졌던 고기를 크리스챤이 먹을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와, 문제를 가지고 성도들간에 의견 대립이 있었습니다. 강한자들 즉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리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존재도 하지 않는 우상신들에게 받쳐졌던 고기를 성도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으며, 반면에 율법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약한자들은 크리스챤은 우상신전에 제물로 받쳐졌던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 크리스챤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가운데 우상신전에 받쳐진 고기를 자유롭게 먹을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하신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는 말씀처럼, 우상 신전에 받쳐진 제물 자체는 부정한 것이 아님을 믿었습니다. 내가 자유롭게 고기를 먹을수 있다고 먹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성도들 앞에서 과시하는 자세로 고기를 먹음으로, 나의 행동이 그들의 신앙성장에 걸림돌이나 장애물이되게 해서는 안된다는것입니다.
13-14절을 보면:"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역사상 가장 뛰어난 설교자 가운데 한분인 영국의 챨스 스펄전 목사님은 그 당시 15,000명 내지 2만명이 모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런던에서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주일날 설교를 하면 월요일 런던의 조간신문은 물론 그의 설교전문이 실렸습니다. 런던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가 전신으로 전달되어 뉴욕과 보스톤, 그리고 오스트랄리아의 주요 일간지의 월요일 조간지의 전면에 실렸습니다. 그는 당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세계적으로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펼젼목사님은 담배를 좋아해, 늘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런던시내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어느 담배가게의 유리에 쓰여진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 광고에 의하면 "우리 가게에서는 챨스 스펼전목사님이 사랑하며 피우는 씨가 브랜드를 팝니다." 스펼전 목사님은 담배를 피우는 것은 신앙의 본질과는 아무관계가 없는것으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이 광고문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의 씨가를 피우는 행동으로 인하여 혹시나 담배 피우는 것을 죄로 생각하는 다른 형제들의 믿음의 성장에 걸림돌이 나 장애물이 되는 것은 아니겠는가 나 혼자 담배 피우는 것은 괜찮은데, 많은 젊은이들이 나를 role model로 하여 모두가 담배를 피우면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랜 생각끝에 목사님은 평소에 그렇게도 즐기던 씨가 피우는 것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담배 피우는 것은 구원과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문제로, 자유롭게 씨가를 피울수 있다고 믿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의 한 가족, 한 형제자매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형제, 자매라 할지라도 서로 받아주며, 상대방의 견해와 의견을 존중하며 경청하는 자세를 가져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특히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의 선물을 누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율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관대하게 받아주며, 그들의 신앙성장을 방해하는 행동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는 나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말에 Nobless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특권을 누리는 귀족층의 사람들은 그렇치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너그럽게, 관대하게 대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다툴 때, 나이먹은 형이 어린동생에게 져주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Der Klugere gibt nach(The one who is more intelligent yields)라는 말, 즉 현명한자가 양보를 한다는 말을 해준다고 합니다. 바울의 생각에는 신앙적으로 좀더 성숙한 사람이 아직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아니면 유치하다고 무시하거나 비판하지말고 그들의 믿음이 성장할수 있도록 붙잡아 주어야 하며 그들을 위하여 나의 자유를 제한할수 있어야 한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기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해야만 하는 것은 서로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19-21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나니, 식물(음식)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 서로 덕을 세운다는 것은, 서로의 믿음이 성장할수 있도록 해준다는 말입니다. 초신자들 가운데는 기독교인이 된다음에도 날 잡아서 이사가고, 날잡아서 결혼도하며, 날 잡아서 개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무날이나 다 주님이 함께해주시는 날이요, 모든 날이 다 복된 날인데, 안믿다가 처음 예수믿는분들가운데는 아직도 마음이 꺼림칙하여 운수가 좋다는 날을 잡으려고 합니다. 또한 주님의 은총을 깊히 체험하지 못한 분들가운데에는 신앙생활을 율법적으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과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이 아니고, 좀더 노력하고 힘쓰지 않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고 저주가 내릴 것을 두려워합니다. 심지어 감기에 걸려도, '아이쿠, 내가 주일을 범했더니 감기에 걸렸구나'라고 율법주의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종교개혁가 마틴루터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프신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율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수도원에서 수도사생활을할 때, 그는 철두철미하게 금욕생활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철야기도, 금식을 다반사로 했으며, 장시간의 독서, 그리고 저녁에 잘때에는 담요를 덥지않고 잠을 잠으로 거의 얼어죽을 정도로 지내는 엄한 고행의 생활을 했습니다. 루터는 또한 철두철미하게 죄를 고백하려고 했습니다. 고해는 수도원의 일상적인 생활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수도사들의 죄의 고백은 1-2분이면 끝나는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고해실에서 4-6시간이나 죄를 고백하느라고 그것을 듣는 신부를 미치게끔 만들었다고 합니다. 루터의 죄고백이란, 어제저녁 불을끄고 잠을 자야하는 시간에 촛불을 키고 성경을 몇시간 더 읽었습니다. 어제 점심시간에 나의 음식을 다먹은후, 필립형제가 감자 샐라드를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먹고싶다는 탐심을 가졌습니다. 어제는 너무나 추워 담요 한장을 더 덮고 잤습니다 등등 죄같지 않는 죄를 루터는 낫낫히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의 스승인 Staupiz 박사는 몇시간이고 계속되는 루터의 고해성사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 화를 내면서 루터를 꾸짓었습니다. "여보게나, 그리스도께 사죄를 받고 싶거든, 용서받을만한 죄를 가지고 오게. 이 따위 시시한 죄대신, 부모를 살인했다던가, 신성모독죄를 지었다든가, 간음했다던가, 강도질을 했다던가 그러한 죄같은 죄를 가지고 오게나." 이렇게 율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루터는 로마서 1장 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자신이 선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이제는 구원받기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사랑과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된것입니다. 바울은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나,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나, 다 같이 성장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성숙하고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안에서 성장하고,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지식에서 성장해야만 한다는것입니다. 성숙하고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 사랑으로 인내하며, 이해하며, 받아주는일에서 성장해야만 하고, 연약한 믿음, 율법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산지식에서 성장하여 크리스챤의 자유를 누릴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우상에 받쳐진 고기를 먹을수 있다고 생각하는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8장 1절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것입니다. 연약한 믿음, 율법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베드로 후서 3장 18절에 보면 "오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사랑안에서, 연약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산 지식에서 성장해야만 합니다.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독일의 힛틀러 정권으로 부터 박해를 받아 미국으로 피난하여 정착한 세계적인 폴 틸릭이란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곳에 청빙을 받아 공개강연을 수없이 했는데, 때로는 청중들로부터 매우 유치할 정도의 질문을 받을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틸릭은 매우 시시한 질문이라 할지라도 그 질문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틸릭이 그 시시한 질문을 다른 말로 풀이하면 너무나 심오하고 깊은 의미를 가진 질문으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틸릭이 심오한 질문으로 변화된 그 질문에 해답을 주게되면, 모든 청중들이 숨을죽이고 폴 틸릭이 제시하는 삶의 깊은 통찰력과 새로운 이해와 지혜를 얻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토론을 벌일때가 있습니다. 그러할때 우리는 내 주장이 관철되기 위하여 힘을 씁니까 아니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문제를 새롭게 이해할수 있도록 도와줍니까 내가 토론에서 이기며, 나의 머리의 명석함을 증명하려 합니까 아니면 상대방이 더 넒은 시야를 가지고 문제를 바라볼수 있도록 도우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선물을 그에게 주기를 원하는것입니까
믿음의 성도들은 서로 사랑과 은혜가운데 성장할수 있도록 도아야 합니다. 또한 크리스챤들은 모든일에서 믿음으로 행해야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의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세워주는 행동이어야 할것입니다. 우상신전에 받쳐졌던 고기를 먹는일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으면, 믿음으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기를 먹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의심하면서 먹으면, 자기에게 죄가 되는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의 행동은 사회의 여론이나, 다른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신앙에 입각해야 합니다. 22-23절을 보면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옮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어떠한 결정을 내려 행동할때에는
1) 성령님의 조명아래, 내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서에 입각한 행동인가를 확인해야하며,
2) 내 행동이 다른 믿음의 형제, 자매의 성장에 도움이 될것잊지, 아니면 혹시나 그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여 결정을 내려야 할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시는 은혜가운데 나의 결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이웃에게 덕이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믿음으로 행할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본질적인 중요한 문제이고 무엇이 부수적인 문제인지 분별할수 있어야겠습니다. 우상신전에 받쳐졌던 고기와 포도주를 먹고 마실수 있느냐, 먹고 마셔서는 안되느냐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고 부수적인 이차적인 문제들입니다. 중요한 문제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수적인 문제에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정죄하며 비판하기 보다는, 그의 생각과 견해도 존중해 줄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시민된 성도들은 무엇인가 세상사람들과는 다른점이 있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외국의 교회에서는 피아노를 예배당안의 어느 위치에 놓을것인가를 놓고 논쟁하다가, 그만 교회가 갈라졌다고 합니다. 또한 어느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교회당안에 놓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교회당안에 놓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부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세속적인 것이기에 교회당안에 놓아서는 안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논쟁이 격화되면서, 양측에서 주먹싸움까지 벌어지게 되었고, 세상 법정에 서로 고소하게 되는 일까지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나라 사역에 먹고 마시는 문제, 피아노를 어디에다 놓느냐, 크리스마스 트리를 놓을수 있느냐, 안되느냐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것은 우리들의 삶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와, 평강과 기쁨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17-19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래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님으로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예수님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시기에 우리가 의로운자가 된것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내 의가 되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의로 옷입힘을 받았기에 의로운 자가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으니,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수있어야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수있습니까 예수님이 내 삶속에 나타나게 하시면 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분이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무엇을 줄까" 라는 음성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장의 승진과 사업의 번영, 자녀들의 성공, 건강, 집, 좋은 배우자등을 원할터인데, 토마스 아 켐피스는 "주님,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더 바라는 것이 없나이다"라고 소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제가 되어 "그리스도를 본받기"라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경건서적가운데 하나를 그가 저술하게 되었습니다. 내 삶속에서 이기심이나, 정욕과 탐심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타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우리 크리스챤의 삶속에서 또한 하나님의 평강이 나타나야만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안 믿는 사람보다 오히려 더 근심과 걱정하며 염려해서는 안될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최후 만찬을 나누시면서 그가 하나님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갈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날은 스승이 없는 삶이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도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19세기말 미국의 부유한 사업가 호라티오 Spafford는 자기 아내와 네 딸을 유럽으로 여행을 보냈습니다. 여행도중, 대서양의 거센 폭풍을 만나, 그들은 난파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네 딸은 모두 바다에서 실종되었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아내는 "혼자만 살았어요"라는 단두 마디를 전보로 보냈습니다. 그 이듬해에 스페포드 부부는 똑같은 코스로 여행을 했습니다. 난파지점에 이르렀을 때, 스페포드는 배 가장자리에서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거기서 그가 적었던 다음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내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당면한 슬픔을 뛰어넘어, 신앙의 진리를 자신의 삶속에서 적용시켰습니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네 내영혼 평안해 내영혼 내영혼 평안해."후에 스페포드 부부는 두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서 잃은 네 딸을 대신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페포드 부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그 하늘의 평강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고 담대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우리의 삶속에 흔들리지 않는 평강이 있어야겠습니다.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목사였던 존 플레쳐는 성자로 존경을 받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그를 방문했던 어떤 사람이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인 사람을 보러갔다. 거기서 나는 천국에 들어가기 직전인 사람을 보았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넘쳤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크리스챤의 삶속에 기쁨이 있어야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는데,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감격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외형적인 상황이나 조건에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지나간 13년간 침대에 누어있어야만 하는 어느 여인이 있습니다. 극심한 관절염으로 인하여 그녀의 뼈의 마디 마디가 다 분리되었습니다. 손을 움직이거나 들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는 미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참된 기쁨은 외부적인 조건이나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삶의 상황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염려와 걱정과 근심에 쌓여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하나님의 의가 없으며 걱정, 도덕성이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때로 절망하게 되며 나 지신에게도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기 않음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세계2차대전때 독일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에는 과거지향적인 사람들고 미래지향적인 사람들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했던 그 시절을 이야기하고 그리워하며 과거이야기를 하는 과거지향적인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수용소 생활에서 제일 먼저 죽었으며, 반면에 미래를 이야기하며 내가 만약 살아서 나간다면 명예와 권세와 부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닌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삶, 그리고 나의 가정과 행복한 삶을 살겠다고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처럼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운때 모두가 평강을 빼앗기고 기쁨을 상실하고 부패와 부정속에서 살아가는 때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인해서 예수가 내 삶의 충만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간직하고 많은 사람에게 평강을 줄 수 있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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