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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출14:1-12,롬14:1-12,마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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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미움'이라는 말의 그 느낌과 의미를 한 마디로 어떻게 풀이 할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 대답 또한 다 양할 것입니다. 유행가나 복음성가에도 사랑과 미움을 노래한 것이 엄청 나게 많습니다. TV드라마도 과반수 이상이 사랑과 미움을 주제로 하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많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사랑과 미움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 습니다. 그랬더니, "사랑이란 언제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며, 그 반대 가 미움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랑은 오래도록 기 억하고 있어야 할 일이고, 미움은 하루빨리 잊어버려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에, '불행의 원인이 욕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욕심에서 파생된 것 중에는 '미움'이 있습니다. 미움이 그 마음속에 가득할 경우,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마음속에 사랑이 많을 때에는 행복한 사람이 되겠지요.
그런고로, 사랑의 마음은 오래 간직하도록 해야 하고, 미운 마음은 빨 리 사라지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 려, 그 반대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래도록 기억하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할 일은 쉽게 잊고, 하루속히 잊어버려야 할 일은 잘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미움은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잘 해결되지 않습니다. 잊으려고 하면 더욱 생각나는 것이 미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로, 우리는 잊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9월 10일자 신문을 보니, 김영삼 전대통령과 이회창 총재에관 한 박스 기사가 나란히 실려있었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말들을 모아놓은 기사였습니다. 두 분 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두 분은 대통령과 국무총리로 함께 일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분이 앙숙이 되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사를 대하는 제 마음은 아주 착잡했습니다. 그런 잡스런 기사를 실어놓고 있는 신문도 못마땅했거니와, 그와 같은 기사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두 분의 태도가 적잖이 실망스러웠습니다. 한 분은 대통령을 지낸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장차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인데, 어찌 그 마음들 이 그토록 좁아터질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는 두 분인데도 서로 미워하며 다투는 것을 보면, 미운 감정은 누구에게 나 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미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미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 의 잘못을 잘 깨닫지 못하고 상대방의 허물만 보기 때문입니다. 혹 자신 의 잘못을 안다 할지라도,자기 잘못은 별스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방의 잘못은 아주 크게 부풀려서 평가하는 버릇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에게는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수 있는 권리가 없다(롬14:10)고 말했습니다. 특히,믿음 약한 사람이 잘못 을 범했을 때, 크게 나무라지 말고 따듯하게 대해야 한다(롬14:1)고 했 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형제의 잘못이나 허물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1.정죄하기를 밥먹듯이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다툼으로써, 자신은 물론이요 남들이 볼 때에도 창피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누 구나 빠짐없이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 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일을 보고(報告)하게 된다고, 바울은 로마서 14 장 1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부분 남의 문제를 가지고 비판하거나 흉을 보고 있습니다. 물론, 형제의 앞날이 걱정되어서 애정을 가지고 거론하는 것 이라면, 그리 탓할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애정 없이 비난 을 위한 비판을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독교를 모르는 이가 그런 다면 몰라도, 어떻게 '용서와 사랑'을 기본적인 신앙 덕목으로 삼고 살아 야 할 기독교인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일까요
1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망각하고 있기 때 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를 지을 때마다, 예언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름아닌 출애굽 사건입니다. 오랫동안 애 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구출하 셔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특히, 홍해바다 사건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바닷물을 갈라서 이 스라엘 백성이 무사히 건널 수 있게 하신 다음, 다시 물이 합쳐지게 하 심으로써 뒤쫓아오는 애굽 사람들을 모두 수장(水葬)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애굽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놀라운 은혜를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뿐만 아니라, 우상을 섬김으로써 주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사건은 그야말 로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평생 죄의 종살이를 하다가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주의 피로 구원하여 영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셨 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불쌍하게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사망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는 속죄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그의 피로 우리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구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 은혜를 갚아나가야 합니다. 어 떻게 말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할 때에, 그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2하지만,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데 아주 인색하기 그지없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용 서는 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신하가 왕에게 1억 원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신하는 빚 갚을 능력이 없어서, 왕은 그의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감옥에 갇혀야만 했다.
그런데, 그 신하는 백만 원밖에 빚지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신하는 그 사람에게 '당장 돈을 내놓아라'고 다그쳤다. 빚진 사람은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그 신하는 들은 체 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왕은 그 신하를 불러들여서 "이 악독하고 뻔뻔한 놈아, 네가 애걸하기에 불쌍히 여기고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주었더니, 너는 그 몇 푼 안 되는 것 때문에 사람을 옥에 가둔단 말이야!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게 아니냐"하고 야단쳤다. 왕은 탕감해주었던 돈을 다시 갚도록 하고, 그 신하를 감옥에 가두었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신하는 우리 자신을 말 합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갚아도 도저히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하나님 께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무조건 용서함으로써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용서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일 은 아주 쉽게 해도, 이웃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은 무척 오랫동안 자기 자신과 씨름을 해도 성사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끝까지 용서하지 못할 경우에는,
3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가 무효화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산 결과를 보고해야 합니다. 물론, 잘 한 것도 보고해야 하겠지만, 잘못한 것도 낱낱이 보고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동 안 자신이 지은 죄도 다 탕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갈 때까지 형제에 대한 미운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갈 경우, 우리의 구원은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서로가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진심으로 네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마 18:35)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단 형제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앞서 말씀드린 주님의 예화를 통해서 깨달았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미움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미움은 사라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해야, 그 마음에 기쁨과 평화 가 임하게 됩니다. 물론, 내가 먼저 타인으로부터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그가 꼭 내 마음에 들어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허물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훌륭하고 잘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거나 사랑할 때에는 무슨 조건이나 이유를 따져서는 안 됩니다. 달이 태양 빛을 받아 되쏘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서,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눠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다른 형제 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권리가 없다(롬14:10)는 사실입니다.심판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만일 우리가 형제를 비난하 거나 정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월권행위가 되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형제를 심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직접 자신 이 죄 짓는 것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있으되 심판할 권한은 없다는 것 을 알고, 우리는 그 권한을 거꾸로 행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서로 상대방의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롬14:8)이라고 하 면서, 우리가 무엇을 먹거나 행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먹든지, 또는 무슨 일을 행하든지, 내 기준을 가지고 심판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과 관련이 된 것이라면, 더더욱 우리에게는 정죄할 권리 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두 주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날이 이르기 전까지 우리는 서로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가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줘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다른 형제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그 은혜는 유효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형제를 비난 하고 심판하면서 정죄할 경우에는, 그 용서의 은총은 무효가 된다는 것 을 명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헛되지 않도록, 서로 용 서하고 사랑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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