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삶 (롬12:1-2)
본문
성도는 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과거 세상 줄을 모두 끊어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 온 자들이 성도입니다. 과거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자기 몸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내어 맡기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피조물들을 섬겼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이러한 인간의 불의와 불경건 위에 나타났습니다(롬1:18-32). 그러나 이제 삶의 방식을 바꾼 이후에는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을 다 죽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새 생활이라고 하고 성도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있을 때에는 인간의 정욕대로 살았고 애굽의 우상에 절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고 세상에 빠져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하심을 받아 애굽 땅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날 우리들이 세상에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고 이스라엘 민족이 건넜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0년간 훈련과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세상에 젖었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살도록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교회에서 우리들이 성도로서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하게 사는 훈련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40년 광야 생활 중에 모세에게 대적하고 원망하다가 낙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과거 죄를 범하고 우상을 섬기던 생활을 그리워했고, 성도로써 거룩하게 살기보다는 육신의 정욕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을 선동하여 함께 죄악에 빠져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의 히브리 말로 성도란 하씨드 라는 말과 카도쉬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씨드라는 말은 “경건한, 위대한, 거룩한 자비로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커도쉬라는 말도 “거룩한, 성스러운, 신적인”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란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한 거룩하고 성스럽고 자비한 자들이며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를 헐라어로는 하기오스라는 말인데 이 말도 “거룩한 의 백성” “거룩한 무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성도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도 즉, 영어로 "saints"는 일반 신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일반 성도를 신자, 또는 형제라고 부르지 성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부를 수 있는 성도는 영적인 인물 또는 특별히 거룩하게 살아간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 성자라고 불린 자들은 그들의 행위가 온전히 거룩하고 성스러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반 신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들의 이름 앞에 성자를 붙여서 “성 베드로, 성 프란시스, 성 어거스틴, 성 모니카” 등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에서는 성자 숭배 사상을 가지게 하여 그들에게 촛불을 밝히고 그들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우상 숭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도란 용어가 본래의 의미를 거의 잃고 교회에 나온 사람들을 무조건 성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즉 아직 거듭나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하여 구원에 확신도 없고, 거룩하고 성스럽게 살지도 않은 사람들을 교회에 나온다고 하여 무조건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구원의 확신도 없고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자들처럼 아주 거룩하고 성스럽게 살지는 못하여도, 즉,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자의 수준에 들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모든 기독교인은 성도라고 불리는 것은 잘못된 말은 아닙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으시고 거룩하다 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무리인 성도가 된 것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성도가 되었음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롬1:7에서 보면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노라.” 라고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내가 헌신하고 충성하고, 또한 내가 수련을 닦고 고행을 하여 하나님의 가룩한 백성인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의 피로 우리들의 죄를 모두 씻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고, 거룩한 백성 성도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요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는데 우리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들은 모든 죄를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성도로 부르셨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늘 부족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넘어지고 시험에 빠지고 죄를 범하며 살아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십자가의 은혜로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늘 잊어버리지 않고 간직할 것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거룩한 성도다.” 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 중에 가장 중요한 믿음이 바로 자신을 하나님께서 사도로 부르셨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바울은 사도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12제 중에 한 사람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바울을 제자로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가르치신 12제자만이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며, 초대 교회의 사도는 교회의 대표자들 이였고 권위자들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사도라고 불릴 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전 후서1:1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고 하였고, 갈1:1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도가 되었다.” 고하였으며. 그 외에 바울이 기록한 성경 모두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믿음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성도로 부르셨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성도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성도가 된 우리들은 성도답게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자랑으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사도처럼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도처럼 생명을 받쳐 복음을 전하며 산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은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복음만 위하여 생명을 받친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도라고 믿고 사도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라고 부름을 받은 우리는 성도로서 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따르는 책임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몸과 행실이 거룩해야 합니다.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몸입니다.-죄악으로 물들어 있었던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는 친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으며 마침내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바 된 것입니다(고전6:19).
그러므로 그 누구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또 다시 우리의 몸을 죄악으로 병들게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죄악에서 저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내 몸만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를 미워한다면 이는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 되는 것이며 성도들끼리 서로 흉을 보고 공격한다면 성도로서 거룩한 삶이 아니며 우리를 피로 사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도의 몸은 성령님의 전입니다. 오늘도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몸 안에 거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 항상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의 걱정과 염려들을 다 맡아 감당하시며 우리에게 평강에서 평강으로 인도 받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성령님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예수를 따르는 삶 자체를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도록 우리 몸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실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받으실 몸으로 만들려면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 몸은 음란과 부정과 정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골3:5).
그러므로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며 위엣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뜻에 일치된 행실을 가질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3. 성도는 거룩한 산 제사에 힘써야 합니다(예배의 삶). 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말하는 것이며 예배는 성도의 가장 기본입니다. 어느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힘들게 병실과 복도 그리고 계단을 청소를 합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가 힘들에 일하시는 것을 본 어느 의사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힘드시지요. 일요일에도 일을 하십니까” “아닙니다.” “일요일에는 밀린 잠도 주무시고 푹쉬시겠네요” “아닙니다. ”일요일에는 손자들을 데리고 교회에 가기 때문에 더 일찍 일어납니다.” 질문을 한 의사는 한심하다고 생각을 하고 “아니 이렇게 매일 일하시고 일요일 하루는 쉬셔야지요 어떻게 몸이 견디겠습니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아닙니다. 나는 주일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엿새를 일할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할머니는 주일날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므로 힘을 얻고 일주일 동안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성도라고 불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성도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산 제사는 무엇입니까 거룩한 제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우리들도 거룩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서만이 거룩해 집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는 항상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닮을 때 우리는 온전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는 순종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수한 제사보다 단 한번의 순종의 제사를 더 귀히 여기셨습니다(삼상15:22). 우리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때 거룩한 산 제사가 될 것입니다. 영적 예배에 힘써야 합니다. 영적인 예배란 맹목적인 예배가 아니라, 그저 교회에 나와서 아무런 의미 없이 찬송하고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예배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셔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 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영적인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애인끼리 만나서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를 나누듯이 그러한 감정으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감사와 찬송으로 우리의 마음을 드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영적인 예배입니다.
4. 성도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세대는 어떤 세상입니까
1) 이 세대는 악하고 음란합니다 마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세상은 한마디로 악하고 음란한 곳입니다. 죄악이 관영하고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온갖 더러운 일들이 자행되어지는 곳입니다. 오늘 이 세상이 악하고 음란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여러분들이 잘 알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그리워하고 세상에서 음란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해서는 안될 것이며 그들에게 빠져들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본받아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물들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야 하며 도리어 음란하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들불이 되소 소금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2) 새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새롭게 변화를 받아 하셨습니다. 아직 죄악 가운데 있는 성도라고 한다면 변화 받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까 성도는 악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가증한 세상의 풍속과 죄악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악의 생활과 습관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악을 향하여 달음질한다고 하여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방향을 바꾸고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 마음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들을 점점 더 닮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의 가치관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여 순종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비결은 오로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입니다. 시인 윤동주 선생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새 피조물로 지음 받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로서 살아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성도는 늘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분별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있을 때에는 인간의 정욕대로 살았고 애굽의 우상에 절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고 세상에 빠져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하심을 받아 애굽 땅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날 우리들이 세상에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고 이스라엘 민족이 건넜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0년간 훈련과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세상에 젖었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살도록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교회에서 우리들이 성도로서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하게 사는 훈련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40년 광야 생활 중에 모세에게 대적하고 원망하다가 낙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과거 죄를 범하고 우상을 섬기던 생활을 그리워했고, 성도로써 거룩하게 살기보다는 육신의 정욕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을 선동하여 함께 죄악에 빠져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의 히브리 말로 성도란 하씨드 라는 말과 카도쉬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씨드라는 말은 “경건한, 위대한, 거룩한 자비로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커도쉬라는 말도 “거룩한, 성스러운, 신적인”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란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한 거룩하고 성스럽고 자비한 자들이며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를 헐라어로는 하기오스라는 말인데 이 말도 “거룩한 의 백성” “거룩한 무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성도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도 즉, 영어로 "saints"는 일반 신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일반 성도를 신자, 또는 형제라고 부르지 성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부를 수 있는 성도는 영적인 인물 또는 특별히 거룩하게 살아간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 성자라고 불린 자들은 그들의 행위가 온전히 거룩하고 성스러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반 신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들의 이름 앞에 성자를 붙여서 “성 베드로, 성 프란시스, 성 어거스틴, 성 모니카” 등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에서는 성자 숭배 사상을 가지게 하여 그들에게 촛불을 밝히고 그들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우상 숭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도란 용어가 본래의 의미를 거의 잃고 교회에 나온 사람들을 무조건 성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즉 아직 거듭나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하여 구원에 확신도 없고, 거룩하고 성스럽게 살지도 않은 사람들을 교회에 나온다고 하여 무조건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구원의 확신도 없고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자들처럼 아주 거룩하고 성스럽게 살지는 못하여도, 즉, 천주교에서 말하는 성자의 수준에 들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모든 기독교인은 성도라고 불리는 것은 잘못된 말은 아닙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으시고 거룩하다 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무리인 성도가 된 것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성도가 되었음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롬1:7에서 보면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노라.” 라고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내가 헌신하고 충성하고, 또한 내가 수련을 닦고 고행을 하여 하나님의 가룩한 백성인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의 피로 우리들의 죄를 모두 씻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고, 거룩한 백성 성도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요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는데 우리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들은 모든 죄를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성도로 부르셨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늘 부족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넘어지고 시험에 빠지고 죄를 범하며 살아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십자가의 은혜로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늘 잊어버리지 않고 간직할 것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거룩한 성도다.” 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 중에 가장 중요한 믿음이 바로 자신을 하나님께서 사도로 부르셨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바울은 사도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12제 중에 한 사람도 아니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바울을 제자로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가르치신 12제자만이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며, 초대 교회의 사도는 교회의 대표자들 이였고 권위자들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사도라고 불릴 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전 후서1:1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고 하였고, 갈1:1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도가 되었다.” 고하였으며. 그 외에 바울이 기록한 성경 모두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믿음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성도로 부르셨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성도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성도가 된 우리들은 성도답게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자랑으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사도처럼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도처럼 생명을 받쳐 복음을 전하며 산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은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복음만 위하여 생명을 받친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도라고 믿고 사도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라고 부름을 받은 우리는 성도로서 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따르는 책임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몸과 행실이 거룩해야 합니다.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몸입니다.-죄악으로 물들어 있었던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는 친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으며 마침내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바 된 것입니다(고전6:19).
그러므로 그 누구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또 다시 우리의 몸을 죄악으로 병들게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죄악에서 저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내 몸만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다른 성도를 미워한다면 이는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 되는 것이며 성도들끼리 서로 흉을 보고 공격한다면 성도로서 거룩한 삶이 아니며 우리를 피로 사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도의 몸은 성령님의 전입니다. 오늘도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몸 안에 거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 항상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의 걱정과 염려들을 다 맡아 감당하시며 우리에게 평강에서 평강으로 인도 받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성령님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예수를 따르는 삶 자체를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도록 우리 몸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실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받으실 몸으로 만들려면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 몸은 음란과 부정과 정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골3:5).
그러므로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며 위엣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뜻에 일치된 행실을 가질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3. 성도는 거룩한 산 제사에 힘써야 합니다(예배의 삶). 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말하는 것이며 예배는 성도의 가장 기본입니다. 어느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힘들게 병실과 복도 그리고 계단을 청소를 합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가 힘들에 일하시는 것을 본 어느 의사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힘드시지요. 일요일에도 일을 하십니까” “아닙니다.” “일요일에는 밀린 잠도 주무시고 푹쉬시겠네요” “아닙니다. ”일요일에는 손자들을 데리고 교회에 가기 때문에 더 일찍 일어납니다.” 질문을 한 의사는 한심하다고 생각을 하고 “아니 이렇게 매일 일하시고 일요일 하루는 쉬셔야지요 어떻게 몸이 견디겠습니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아닙니다. 나는 주일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엿새를 일할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할머니는 주일날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므로 힘을 얻고 일주일 동안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성도라고 불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성도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산 제사는 무엇입니까 거룩한 제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우리들도 거룩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서만이 거룩해 집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는 항상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닮을 때 우리는 온전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는 순종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수한 제사보다 단 한번의 순종의 제사를 더 귀히 여기셨습니다(삼상15:22). 우리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때 거룩한 산 제사가 될 것입니다. 영적 예배에 힘써야 합니다. 영적인 예배란 맹목적인 예배가 아니라, 그저 교회에 나와서 아무런 의미 없이 찬송하고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예배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셔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 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영적인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애인끼리 만나서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를 나누듯이 그러한 감정으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감사와 찬송으로 우리의 마음을 드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영적인 예배입니다.
4. 성도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세대는 어떤 세상입니까
1) 이 세대는 악하고 음란합니다 마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세상은 한마디로 악하고 음란한 곳입니다. 죄악이 관영하고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온갖 더러운 일들이 자행되어지는 곳입니다. 오늘 이 세상이 악하고 음란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여러분들이 잘 알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그리워하고 세상에서 음란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해서는 안될 것이며 그들에게 빠져들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본받아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물들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야 하며 도리어 음란하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들불이 되소 소금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2) 새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새롭게 변화를 받아 하셨습니다. 아직 죄악 가운데 있는 성도라고 한다면 변화 받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까 성도는 악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가증한 세상의 풍속과 죄악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악의 생활과 습관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악을 향하여 달음질한다고 하여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방향을 바꾸고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 마음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들을 점점 더 닮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의 가치관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여 순종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비결은 오로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입니다. 시인 윤동주 선생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새 피조물로 지음 받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로서 살아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성도는 늘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분별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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