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종교개혁 (롬1:16-17)
본문
10월 4째주는 전세계 모든 개신교가 종교개혁 기념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1517년 10월 31일에 종교개혁자 루터가 독일 웨던벌 교회당 정문에다가 95개조 항 의문을 써 붙이고(대자보) 종교개혁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개혁운동의 내용은 당 시 로마캐토릭이 본래의 기독교 진리에서 너무 변질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기독교인 초 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사 도행전 교회)로 되돌아가자는 복고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계역사를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역사의 구분에 따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주후 1년-590년까지를 고대 교회사라고 하고 주후 590년-1517 년 까지를 중세 교회사라 하며 주후 1517년 이후 현대까지를 근세 교회사라고 합니다. 그
리고 주후 590년-1517년 까지를 중세 로마 캐토릭 교회시대라고 하며 이
1,000년의 중세사를 암흑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대교회는 그런대로 원형교회가 보전되어 전승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들과 사도들을 이은 속사도들과 교부까지는 약간의 변질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전통적 기독교가 전승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 와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레고 리 1세가 주후 590년에 교황의 지위에 오르면서 로마 캐토릭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캐토릭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도입하여 신학과 철학을 조화 시켜보 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자연과 은총, 신앙과 이성이라는 그들의 주제였습니다. 여기서 스콜라 신학 또는 스콜라 철학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중세 캐토릭은 본 래의 기독교에서 변질되어 교리와 도덕과 정치가 극도로 타락하여 교회가 암흑시대가 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배하에 있는 국가와 사회도 전반적으로 암흑시대가 되어 버 렸습니다. 이리하여 뜻을 가진 사람들이 개혁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하여 많은 수가 캐톡릭에 의해 사형되어 지므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 16세기 초에 여러가지 좋은 조 건때문에 루터와 칼빈에 의하여 종교개혁을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은 오직 은 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캐토릭을 향해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개혁자들의 신학을 정리하면 성경의 권위와 이신득의와 만인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란 오직 성경과 같은 의미로서 당시 캐토릭이 성경권위 보다 교회의 권위를 동격 또는 더 위의 권위로 삼는데 대한 반대로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절대권 위라는 것입니다. 이신득의란 오직은혜, 오직믿음과 같은 것으로 성경과 구원얻는 일 에는 사람의 공로가 전혀없는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로 된다는 것입니다. 만인 제사 장이란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라는 말인데 이는 천주교가 성직자(신부)를 중보자 위치 로 만들고 성례전을 방편으로 한 주입은혜를 시행하는데 대한 반대였습니다. 로마 캐토릭은 아담이 상실한 만인 3중직(메시야 직)을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하여 성도에게 주신 것을 교회(성직자)가 모두 찾이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중세교회는 신부 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으며 교리적으로 볼때 캐토릭은 성경적인 기독교라고 할수 없 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가 차매 개혁자들을 통하여 본래의 기독교 로 회복하고 돌아가는 일을 성공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개혁운동에 행동 적인 역활은 루터가 우위였지만 신학사상을 정립한 사람은 칼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대표자는 칼빈이라고 말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신학 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교회정치는 민주정치(장로정치)로 시행했습니다.
이 때부터 개 혁교회는 현재와 같은 평신도를 대표하는 장로제도가 생겼습니다. 참으로 종교개혁은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세 계사의 큰흐름을 바꾸어 놓은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500주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캐토릭은 중세대 교리 그대로이며 개신 교회는 개혁신학이 퇴조 또는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현대 기독교에 대하여
1) 하나님을 믿지 않는 기독교이며
2)종교적 체험이 없는 기독교이며
3) 변화되어진 그리스도인이 없는 기독교이며
4) 성경적 어법을 사용하지 않는 기독교라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 개신교안에서 변질된 기독교는 중세 캐토릭의 변질보다 더 악변 화 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세 캐토릭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었 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신인과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성부, 성자, 성령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개신교내 자유주의 신학은 삼 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며 예수의 신인되심과 메시야(그리스도) 되심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중세 캐토릭은 무신론이 아니었는데 현재 기독교의 자유는 무신론이 되었습니다. 물론 캐토릭의 일부도 자유주의 신학이 있어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개 혁주의 보수교회와 보수적인 캐토릭은 최소한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거의일치를 볼수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의 캐토릭도 많이 변질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는 우리 개신교 특히 개혁을 외쳤던 개혁교회가 또 다시 계속 개 혁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 특히 한국의 개혁교회는 개혁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개혁은 개혁신학(장로교 신학)을 고수하려고 하는 개혁교회의 운동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개혁이란 일반사회 특히 정치계에서 사용된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일반사회와 정치계에서 사용된 개혁은 지금까지의 것은 잘못되었으니 새로운 무엇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고로 사회적 의미의 개혁은 진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사용하는 개혁의 의미는 옛것을 지키자는 보수의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는 시대에 따라 새로운 무엇으로 바꾸어지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하여 의미 완성된 종교이기 때문에 또 다른 진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완성된 종교의 진리를 지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입니다. 개혁은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옛것의 재생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와 개혁은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교회만이 가질수 있는 말입니다. 불행 하게도 교회안에서 변질되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질된 진리들을 본래의 것 으로 재생회복하여 본래의 진리를 지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져 가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 한국교회는 어떤 형편에 있는가
첫째는 자유신학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18세기 이후 독일을 중심하고 일어났던 각종 자유주의 신학이 우리 한국 교회에 들어 와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구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하며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신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구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 가 없는 신론이며 신자유주의 신학은 신이 없는 기독론이라는 말합니다. 비유컨대 구 자유주의 신학은 휘발유없는 자동차와 같고 신자유주의 신학은 휘발유없는 자도차와 같다고 할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를 격하시키고 반대로 이성과 인간의 권위를 최고로 내세우는 것이며 신학을 윤리학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회각계에서 포스트 모던이즘(탈 현대주의)이 있는데 신학계에서도 신학 적 포스트 모던이즘이 있습니다. 사신신학, 살신신학, 혁명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종교다원주의, 뉴 에이지운동등 은 모두 포스트모던이즘이 낳은 무신론적인 신학입니다. 두번째는 신비주의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성령님충만을 빙자하여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용납할수 없는 것들이 난무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한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보다 신비주의 신앙으로부터 크게 위협을 받는 다고 할수 있습니다. 성령님충만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하여 여러가지 이단이 나옵니다. 성령님충만하면 직통계시를 받고 방언, 입신, 신유, 예언등을 할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3 의 종교개혁이라고 하면서 성령님충만을 강조하는 신오순절 운동은 개혁주의 신학을 크 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신학은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동일하게 보지 않고 분리 시 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성령님이요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영이시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성령님운동은 결국 직통계시, 방언, 신유, 입신, 투신, 예언, 기복 산앙으로 나타나며 시한부 종말론이 되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신오순절주의 운 동에 크게 감염되어 뒤죽박죽되어 버렸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초대 예루살렘교회와 개혁자들이 회복한 개혁교회의 모습이 점점 살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되었는가 호주 개혁주의신학교 조직신학교수 클라스 루니아와 카나다의 켈프 대학교 W.스탠포드 리이드 교수는 다음의 몇가지를 말했습니다.
1. 교회가 이단심문에 등한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변질되거나 부정될때 이것을 피할수 없고 피해서도 안됩니다. 교회는 마땅히 권징을 행해야 합니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 30장은 교회가 반드시 권징(치리)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개혁자들은 지상조직 교회의 3대 표식가운데 하나는 권징(그리스도의 왕권)이라 했습니다. 교회의 교리와 도덕의 순결과 거룩을 지키기위해서는 권징이 필요합니다.
2. 교회가 건전한 교리 설교를 등한시 했다는 것입니다. 대요리 문답 159문답에는 성직자가 반드시 건전한 교리를 설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사역에 수종을 들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은 바른 교리를 전파하되 부지런히 때 을 얻든지 못 얻든지 명백하게 . 하나님의 영광 그들의 회심, 건덕과 구원을 목 표로 설교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리설교보다 윤리와 축복의 설교로 가득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수십년을 믿어도 믿는바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이 변질될수 밖에 없습니다.
3. 교회가 그 시대적 사상영역에서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로나 복음의 적용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방법상 다 를수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토착화 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약간 토착화 할수 있습니다.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10세기 꿈속에 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골수분자 공산주의는 20세기에 살면서 19세기에 있었던 사회문제를 꿈꾸고 있으니 망 할수 밖에 없습니다.
4. 성직자의 자질문제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결코 성직자보다 앞서지도 못하며 뒤서지 않습니다. 교회는 성직자와 정비례합니다. 성직자가 바른 신학을 가져야 교회가 바른 교회가 됩니다. 성직자가 인간이 되 어야 하고 학자가되어야 하고 성자가 되어야 하고 신자가 되어야 하며 마지막에 목사 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새로워져야 하며 오늘의 종교개혁을 해야 합니다. 개혁자 칼빈 목사님은 개는 그의 주인이 공격을 받을때 짓는다. 만일 하나님의 진리가 공격을 받는 데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침묵한다면 나는 겁쟁이가 될것이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이 변질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 인 교회를 전승보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역사의 구분에 따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주후 1년-590년까지를 고대 교회사라고 하고 주후 590년-1517 년 까지를 중세 교회사라 하며 주후 1517년 이후 현대까지를 근세 교회사라고 합니다. 그
리고 주후 590년-1517년 까지를 중세 로마 캐토릭 교회시대라고 하며 이
1,000년의 중세사를 암흑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대교회는 그런대로 원형교회가 보전되어 전승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들과 사도들을 이은 속사도들과 교부까지는 약간의 변질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전통적 기독교가 전승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 와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레고 리 1세가 주후 590년에 교황의 지위에 오르면서 로마 캐토릭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캐토릭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도입하여 신학과 철학을 조화 시켜보 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자연과 은총, 신앙과 이성이라는 그들의 주제였습니다. 여기서 스콜라 신학 또는 스콜라 철학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중세 캐토릭은 본 래의 기독교에서 변질되어 교리와 도덕과 정치가 극도로 타락하여 교회가 암흑시대가 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배하에 있는 국가와 사회도 전반적으로 암흑시대가 되어 버 렸습니다. 이리하여 뜻을 가진 사람들이 개혁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하여 많은 수가 캐톡릭에 의해 사형되어 지므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 16세기 초에 여러가지 좋은 조 건때문에 루터와 칼빈에 의하여 종교개혁을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은 오직 은 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캐토릭을 향해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개혁자들의 신학을 정리하면 성경의 권위와 이신득의와 만인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란 오직 성경과 같은 의미로서 당시 캐토릭이 성경권위 보다 교회의 권위를 동격 또는 더 위의 권위로 삼는데 대한 반대로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절대권 위라는 것입니다. 이신득의란 오직은혜, 오직믿음과 같은 것으로 성경과 구원얻는 일 에는 사람의 공로가 전혀없는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로 된다는 것입니다. 만인 제사 장이란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라는 말인데 이는 천주교가 성직자(신부)를 중보자 위치 로 만들고 성례전을 방편으로 한 주입은혜를 시행하는데 대한 반대였습니다. 로마 캐토릭은 아담이 상실한 만인 3중직(메시야 직)을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하여 성도에게 주신 것을 교회(성직자)가 모두 찾이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중세교회는 신부 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으며 교리적으로 볼때 캐토릭은 성경적인 기독교라고 할수 없 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가 차매 개혁자들을 통하여 본래의 기독교 로 회복하고 돌아가는 일을 성공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개혁운동에 행동 적인 역활은 루터가 우위였지만 신학사상을 정립한 사람은 칼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대표자는 칼빈이라고 말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신학 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교회정치는 민주정치(장로정치)로 시행했습니다.
이 때부터 개 혁교회는 현재와 같은 평신도를 대표하는 장로제도가 생겼습니다. 참으로 종교개혁은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세 계사의 큰흐름을 바꾸어 놓은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500주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캐토릭은 중세대 교리 그대로이며 개신 교회는 개혁신학이 퇴조 또는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현대 기독교에 대하여
1) 하나님을 믿지 않는 기독교이며
2)종교적 체험이 없는 기독교이며
3) 변화되어진 그리스도인이 없는 기독교이며
4) 성경적 어법을 사용하지 않는 기독교라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 개신교안에서 변질된 기독교는 중세 캐토릭의 변질보다 더 악변 화 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세 캐토릭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었 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신인과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성부, 성자, 성령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개신교내 자유주의 신학은 삼 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며 예수의 신인되심과 메시야(그리스도) 되심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중세 캐토릭은 무신론이 아니었는데 현재 기독교의 자유는 무신론이 되었습니다. 물론 캐토릭의 일부도 자유주의 신학이 있어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개 혁주의 보수교회와 보수적인 캐토릭은 최소한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거의일치를 볼수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의 캐토릭도 많이 변질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는 우리 개신교 특히 개혁을 외쳤던 개혁교회가 또 다시 계속 개 혁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 특히 한국의 개혁교회는 개혁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개혁은 개혁신학(장로교 신학)을 고수하려고 하는 개혁교회의 운동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개혁이란 일반사회 특히 정치계에서 사용된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일반사회와 정치계에서 사용된 개혁은 지금까지의 것은 잘못되었으니 새로운 무엇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고로 사회적 의미의 개혁은 진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사용하는 개혁의 의미는 옛것을 지키자는 보수의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는 시대에 따라 새로운 무엇으로 바꾸어지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하여 의미 완성된 종교이기 때문에 또 다른 진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완성된 종교의 진리를 지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입니다. 개혁은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옛것의 재생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와 개혁은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교회만이 가질수 있는 말입니다. 불행 하게도 교회안에서 변질되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질된 진리들을 본래의 것 으로 재생회복하여 본래의 진리를 지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져 가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 한국교회는 어떤 형편에 있는가
첫째는 자유신학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18세기 이후 독일을 중심하고 일어났던 각종 자유주의 신학이 우리 한국 교회에 들어 와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구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하며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신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구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 가 없는 신론이며 신자유주의 신학은 신이 없는 기독론이라는 말합니다. 비유컨대 구 자유주의 신학은 휘발유없는 자동차와 같고 신자유주의 신학은 휘발유없는 자도차와 같다고 할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를 격하시키고 반대로 이성과 인간의 권위를 최고로 내세우는 것이며 신학을 윤리학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회각계에서 포스트 모던이즘(탈 현대주의)이 있는데 신학계에서도 신학 적 포스트 모던이즘이 있습니다. 사신신학, 살신신학, 혁명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종교다원주의, 뉴 에이지운동등 은 모두 포스트모던이즘이 낳은 무신론적인 신학입니다. 두번째는 신비주의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성령님충만을 빙자하여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용납할수 없는 것들이 난무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한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보다 신비주의 신앙으로부터 크게 위협을 받는 다고 할수 있습니다. 성령님충만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하여 여러가지 이단이 나옵니다. 성령님충만하면 직통계시를 받고 방언, 입신, 신유, 예언등을 할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3 의 종교개혁이라고 하면서 성령님충만을 강조하는 신오순절 운동은 개혁주의 신학을 크 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신학은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동일하게 보지 않고 분리 시 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성령님이요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영이시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성령님운동은 결국 직통계시, 방언, 신유, 입신, 투신, 예언, 기복 산앙으로 나타나며 시한부 종말론이 되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신오순절주의 운 동에 크게 감염되어 뒤죽박죽되어 버렸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초대 예루살렘교회와 개혁자들이 회복한 개혁교회의 모습이 점점 살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되었는가 호주 개혁주의신학교 조직신학교수 클라스 루니아와 카나다의 켈프 대학교 W.스탠포드 리이드 교수는 다음의 몇가지를 말했습니다.
1. 교회가 이단심문에 등한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변질되거나 부정될때 이것을 피할수 없고 피해서도 안됩니다. 교회는 마땅히 권징을 행해야 합니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 30장은 교회가 반드시 권징(치리)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개혁자들은 지상조직 교회의 3대 표식가운데 하나는 권징(그리스도의 왕권)이라 했습니다. 교회의 교리와 도덕의 순결과 거룩을 지키기위해서는 권징이 필요합니다.
2. 교회가 건전한 교리 설교를 등한시 했다는 것입니다. 대요리 문답 159문답에는 성직자가 반드시 건전한 교리를 설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사역에 수종을 들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은 바른 교리를 전파하되 부지런히 때 을 얻든지 못 얻든지 명백하게 . 하나님의 영광 그들의 회심, 건덕과 구원을 목 표로 설교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리설교보다 윤리와 축복의 설교로 가득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수십년을 믿어도 믿는바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이 변질될수 밖에 없습니다.
3. 교회가 그 시대적 사상영역에서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로나 복음의 적용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방법상 다 를수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토착화 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약간 토착화 할수 있습니다.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10세기 꿈속에 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골수분자 공산주의는 20세기에 살면서 19세기에 있었던 사회문제를 꿈꾸고 있으니 망 할수 밖에 없습니다.
4. 성직자의 자질문제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결코 성직자보다 앞서지도 못하며 뒤서지 않습니다. 교회는 성직자와 정비례합니다. 성직자가 바른 신학을 가져야 교회가 바른 교회가 됩니다. 성직자가 인간이 되 어야 하고 학자가되어야 하고 성자가 되어야 하고 신자가 되어야 하며 마지막에 목사 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새로워져야 하며 오늘의 종교개혁을 해야 합니다. 개혁자 칼빈 목사님은 개는 그의 주인이 공격을 받을때 짓는다. 만일 하나님의 진리가 공격을 받는 데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침묵한다면 나는 겁쟁이가 될것이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이 변질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 인 교회를 전승보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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