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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소리를 듣자 (롬1:18-25)

본문

모든 만유 안에서 발견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실체 구원의 소리를 듣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다 보면 하나님의 절대진리와 만나게 되는데, 그 절대진리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실체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모든 만사의 본을 응시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하지 못함은 우리가 인간의 시끄러운 소리에 묻혀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심령을 죽이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기울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 한 송이 꽃에서도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모든 만유와 만사의 본질을 응시하기만 하면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실체를 우리가 발견하지 못함은 우리가 너무나도 하나님을 외면하고-왜곡하고, 소실시키고-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단순한 사고로 지각함을 인하여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 을 의식하려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 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답은 다름 아닌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있어서 우리가 품어 왔던 의문, 즉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 하려 하지 않는 것인가,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인 가에 대한 해답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스스로를 돌아볼 때 하나님을 발견하려 하지 않는 존재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발견치 못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까 결론은 간단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혹 믿지 않는 강퍅한 영혼들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창조받은 것일까라는 의문의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도 계셨을텐데, 이제 그 의문에 대한 해답 이 풀리셨을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서 핑계치 못합니다. 즉, 나는 미련해서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자신의 불신앙의 이유 에 대한 변명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하려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 이 처한 죄적 현실이 탄생시킨 비극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 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실체를 왜곡하고 소실시켜 버리는 존재 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아멘으로 받으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으 로 공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죄악이 탄생시킨 이 비극의 써클 안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죄적 현실이 탄생시킨 비극의 결과 본문 말씀인 로마서 1장 18절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 나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불의가 다름 아닌 인간이 처한 죄악적 현실, 곧 죄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불 의로 인하여 진리를 막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저의 이 말에 나는 진리를 동경하며 사모하고 있는데, 왜 내가 진리를 막고 있는 자가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도 계실텐데, 인간은 죄악의 비극으로 떨어진 후로는 진리를 막는, 진실을 왜곡하고 소멸시키는 처절한 위치로 떨어져 버렸기 때문에 진리를 막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 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한 답이 로마서 1장 19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 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지만, 본래 인간은 어떤 피조물과도 다르게 창조받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인간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 지각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받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나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류 역사의 중심이 되는 존재로 서, 단순한 피조물이라는 의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 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을 스스로가 하나님을 찾 고, 의지하고, 찬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떨어 졌을지라도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스스로의 지각으로 말미 암아, 진리를 향하는 본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가 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1장 19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 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스스로 지각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만한 가능성, 즉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본능과 함께 모든 만물 안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느낄 수 있는 지각을 허락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알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보이고 계시다는 이 말씀을 우리가 피할 수 없음은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 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 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모든 만유 안에 하나님의 실체 가 나타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실체를 보지 못함 은 우리가 하나님의 실체를 보려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못하는 사람이건 누구 도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는 핑계치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섭리 로마서 1장 21절에서 23절의 말씀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 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 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 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 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라는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로마서 1장 18절로 25절까지의 본문 말씀은 인류 역사 의 진실을 적나라하면서 아주 함축성 있게 기록해 놓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선지자적 비젼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인류는 이 때까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왔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 을 서로 욕되게 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2장 24절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욕되게 하셨으니라는 이 말씀은 요한 계시록 22장 11절의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라는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섭리는 불합 리하거나,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섭리는 명확하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신 까닭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요, 스스로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 입니다.
로마서 2장 5절을 보면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 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방식이 참으로 무섭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2장 5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가 지은 죄의 결국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날 스스로가 심판받을 증거 를 제공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섭리 방식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심판의 증거를 우리 머리 위 에 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 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신 것, 이것이 인간이 처한 비극이면서도 진실인 것입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 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로마서 1장-25절) 수많은 사상가들의 외침이 헛됨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여기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밥상 앞에서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해님을 주심으로 인하여 햇빛을 주시고, 구름을 주심 으로 인하여 물을 주셔서 아름다운 곡식이 자라나게 하셔서 저에게 이런 귀한 음식을 먹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라는 기도를 드렸 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아이는 만유 안에 있는 본질을 그 밥을 통 하여 응시하면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아이 가 영적인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그와 같은 기도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 아이는 비록 한 순간이 나마 하나님을 제대로 의식한 것입니다. 그 아이는 만유 안의 본질 을 밥이라는 양식을 통해서 응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체험한 그 선상은 어떤 위대한 사상가가 사색을 통해서 얻은 그 결과보다 훨씬 위대한 선상인 것입니다. 거기에 바로 구원이 있습니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수많은 사색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제시하려고 했지만, 거기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길은 누가 하나님을 의식하느냐 의식하지 못하느냐, 누가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바라보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갈리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한 어린 아이의 기도 속에 담긴 본질의 응시를 통한 하나님 의 실체의 발견을 통해 우리 자신은 얼마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역사 속의 인물 중에는 수많은 사상가 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을 쾌락과 같은 선상으로 본 사상 가가 있는가 하면, 신은 죽었다고 하면서 초인을 지향한 사상가도 있었으며, 자연으로 돌아가자고는 하면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 사상가도 있었고, 지혜, 덕, 법, 이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이상주의의 실현을 바라보았던 사상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이 정립한 사상이론이 연역적이건, 귀납적이건, 결론은 헛됨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 하리라.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 라.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때란 예수 그리스도로 인 하여 온전히 우리에게 임재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임하는 때입니다. 우리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왕국이, 하나님의 나라 와 의가 온전히 확립되지 아니하면 온전한 것은 탄생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이전의 모든 사상가들이 걸었던 길이 모두 헛된 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 되었다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실체가 부분적이 아닌 온전한 것 으로 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실체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불교도 나 름대로 우주 속의 나라는 본질을 성찰을 통해서 탐구하는 종교 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무(無)만 있을 뿐, 윤회의 써클 안에서 모든 사건의 결과가 칼마에 의한 것일 뿐, 실체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본질에 기여하려고 했던 불교도 결국 이 철학적 삶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갈망한 진정 한 자유의 차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나 확립되는 차원 입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진실로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 만을 바라보고 끝까지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의 나라와 그 의만을 바라보는 것, 이 차원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사색의 차원보다도 더 위대한 차원입니다.
꽃 한 송이에서도, 양식 한 끼에서도, 그 안에 담긴 본질의 응시를 통해 하나님의 실체를 발 견함으로써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만 있다면, 그것같이 복 된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만유와 만사를 통해 하나님을 의식함으로써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로마서 1장 22절-23절의 기록된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 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수많은 사람 들이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 려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 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결과를 초래했 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인간과 환경이라는 구도 안에서 정확히 바라보지 않으면, 모든 것은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헛된 외침의 사상 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인간과 환경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참으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 습니다. 즉, 구원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진행되는 하나님의 섭리의 선상 잠시 요한 계시록 21장 23절로 25절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 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우리가 바라 보고 있는 영화로운 천국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말씀대로 해나 달이 쓸 데 없음은 영원한 빛, 소멸되지 않는 빛, 누구도 소실시킬 수 없는 선상에 있는 빛이 비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중요한 것이 그 빛의 진실이 바로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 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린 양은 그 등이 되신다고 말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영광은 절대성이요, 빛을 비추는 그릇으로 서의 등이신 어린 양은 절대성의 빛을 발하기 위한 상대성이신 것입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바로 이 어린 양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처소라면 그 처소의 빛나는 영광은 누구를 통해서 받으실 영광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우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그 빛은 인간의 빛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빛나는 빛 인 것입니다. 어린 양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뜻하며, 그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 속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 대성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 양의 권세를 힘입은 자들입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홀로 다 이루시고, 홀로 다 영광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양의 자리로 오셔서 그 권세를 우리에게 주 신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통해 그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에 서였습니다.
이렇듯, 어린 양이 등이라는 개념에 우리가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빛의 등이 되는 자들이 며, 또한 우리는 이 빛과 하나된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성이면서도 결국은 빛의 포화상태로 하나님께 빛을 돌려드리는 역사를 이루는 자인 것입니다. 빛이 비추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은 광범위한 정의들 을 갖고 있는데-하나님의 섭리로부터 해서 수많은 뜻이 나올 수 있는데-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선상을 우리가 하나님의 빛이 비추는 선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빛이 비추매 어두움이 깨 닫지 못하더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가 어두움에 비춰졌지 만, 어두움에 그 빛을 왜곡시키고, 소실시키고 말았다.라는 뜻의 말씀으로서, 이 말씀은 요한복음 11장 9절과 10절에 나와 있는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 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 족하느니라.라는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 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요한복음11장9-10절)여기 서 말씀하고 있는 낮 열두 시라는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 애 사역기간 그 당시의 시간을 나타내 주는 시간이지만, 우리가 이 시간을 거기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 의 선상은 절대로 인간의 늘어진 시간대와 동일시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낮 열두 시라는 시간적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고 계셨던 그 당시의 시간뿐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 적용되는 모든 시간대를 의미하는 시간적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 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 리는 영원히 진행되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섭리의 선상이 낮 열두 시인 것입니다. 우리는 낮 열두 시에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실족할 수 없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선상에 있는 자들-빛을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의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빛이 없는 시간대에 다니고 있는 까닭에 빛 을 받지 못한고로 빛을 왜곡시키고, 소실시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낮 열두 시, 즉 빛이 비추는 시간대에 속한 자 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학이나 철학, 그 어떤 것도 부분적인 것일 뿐,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의 나라, 그리스도의 의가 이루어지지 아 니하면 온전한 것이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 와 하나님의 의를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함축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되어 그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것만이 모든 부분적인 것을 폐할 수 있는 길입니다. 모든 부분적인 것을 폐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거기에 있는데, 바로 우리가 그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잠시 우리가 탄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탄식을 즐겨라, 탄식의 바다에 빠져라! 우리는 왜 탄식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진실을 위하여 탄식합니다.
그런데, 이 탄식은 우리 인간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 속에서도 탄식이 표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유가 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며, 만유 위에 계시니라.(골로새서3장 11 절) 지금 만유 위에 하나님의 섭리가 표출되고 있습니다. 시대적 진실을 드러내는 별은 그 별을 보는 자 안에서 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별의 진실은 그 별을 보는 자들에게서 그 진실을 드러내 게 하는 무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 떠 있는 별 에 대해서 우리뿐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도 반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피조물 안에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실이 드 러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귀에는 구원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가 되니까 처처에서 자연재해로 인한 시 대적인 징조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들 도 하나님의 섭리에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모든 인류의 역사가 움직여지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모든 자연 만물도 구원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있고 구원을 갈망하는 소리를 내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섭 리에 대한 반응은 우리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탄식을 즐겨라! 탄식의 바다에 빠져라!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이 말에 참 희한한 말을 하는구 나!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텐데, 탄식을 즐기라는 저의 말을 절 망에 빠지라는 말로 듣는다면, 아직도 그는 탄식의 진수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탄식을 즐기라는 것은, 탄식의 바다에 빠지라는 것은 절망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고 구원(진실)을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으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 나된 자들이기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는 자들입니다. 단, 구원(진실)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으로써 구원이 다가오는 소리와 구원을 갈망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올바른 탄식의 위치에 서 있는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모든 것의 본질을 응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실체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 올바른 탄식의 자세이다.) 여기 두 사람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한 사람은 바다의 넓고 푸 름만을 바라보고, 또한 사람은 그 바닷물의 용적을 자신의 몸으로 느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만물과 호흡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은 바다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천지차이를 보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있는 자라면, 시대적인 진실을 가르는 별을 바라보고 있는 자라면, 우리는 지금 모든 것으로부터 들 려오는 구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두 가지로 들려 오는 구원의 소리 탄식의 위치에서만 들릴 수 있는 구원의 소리는 지금 우리에게 두 가지, 즉 구원이 다가오는 소리와 구원을 갈망하는 소리로 들립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 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은 나와 떨어진 곳에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으 면서 계속적으로 나에게 임하는 구원의 역사, 그것을 우리가 믿음의 삶에서 늘 체험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안에 속해 있 음은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구원이 밀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 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는 말을 담대히 외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천국이 다가오는 소리를-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펼쳐지는 소리를-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왕국, 그 나라와 그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는 것이 천국이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담대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군중의 소리와도 같다.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19장 6절 말씀 참 조)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군중의 소리와도, 많은 물소리와도 같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역사의 스케일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모든 만유와 만사에 메아리치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증 거해 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를 드리고 있으며, 우주 속에 메아리치는 하나님의 음성에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렇듯, 모든 만유와 만사에 하나님의 음성이 메아리치 고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표출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도 같고,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다.라는 표현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서는 구원의 소리가 들려야 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구원의 소리를 듣고 있는 자들입니다. 인생사를 끝냄으로써 죽음으로 이룰 수 있는 구원이 아닌 더 높은 차원의 몸의 구속을 바라고 있는 우리는-주님께서 처소를 예비 하시고 나를 데리러 오시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는-구원의 소리를 듣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그 구원이 다가오는 위대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가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구원이 다가오고 있는 소리뿐 아니라, 구원 을 갈망하는 소리 또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 지 소리는 나에게 들려오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나에게서-내 안에 서-표출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구원을 갈망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이 다가오는 소리 또한 듣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이 두 가지 소리는 항상 같은 선상에서 들리게 되어 있기 때 문입니다. 이렇듯, 이 두 가지 구원의 소리는 항상 같이 들려지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탄식이 가져오는 묘미인 것입니다. 저는 쉬 시들어 버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면서, 힘없이 죽어가는 생물 들을 보면서 그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의 처한 그 헛됨이라는 비극의 써클 속에 들어와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는 이유 로마서 8장 18절로 25절까지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생각건 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 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 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 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 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 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 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 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잠시 생각해 봅시다. 에덴의 모든 식물들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철에 따라 인간이 필요한 아름다운 열매만을 맺었으며,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상황은 급변하고 말았습니다. 그 급변한 상황을 창세기 3장 17절-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해 놓 고 있습니다.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 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 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 을 먹고 필경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땅 은 우리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습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 게 됨으로써 부득불 인간과 원치 않는 대립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 이 바로 인간의 죄로 인하여 초래된 결과인 것입니다. 즉, 인간의 죄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은 요한 계시록 22장 3절의 말씀과 같이 다시는 저주가 없는 곳입니다. 더 이상 아 픔도, 해함도 없는, 땅이 우리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컹퀴를 내지 않는, 바로 이 세계가 그리스도의 왕국의 모습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 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 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65:25 절) 로마서 8장 18절로 25절까지의 말씀은 참으로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8장 19절-20절) 여기서 피 조물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어린 양의 권세를 입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할 그리스도께서 속한 모든 자들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의 왕국의 일을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요, 그 나라의 그 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고대함을 통해 피조물들도 그 나라가 도래할 것을 고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라는 말씀 속에 담긴 의미는 지금 피조물들이 인간이 처한 헛됨이라는 비극의 써클 안에 갇혀 있지만, 이것은 피조물이 원하는 바가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비극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피조물이 바라는 것은 기록된 말씀과 같이 썩어짐의 종노 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피조물 이 바란다는 것은, 이 썩을 비극의 저주에서 풀려나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에 이르기를 원하는 탄식을 피조물이 표출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만물을 통해서 구원을 갈망하는 소리를 듣 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모든 피조물들은 모든 저주에서 풀려나 온전한 세계가 오기를 고대하는 탄식을 표출시키고 있습니다. 즉, 그 나라의 그 의가 사탄 을 멸망시키기를, 다시는 저주가 없고 엉겅퀴를 내기 않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도래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가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 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로마서 8장 23절)
피조물이 우리와 함께 탄식한다는 것은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진실을 바라보며 진실한 탄식을 올리는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 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 라.(로마서 8장 23절) 피조물뿐 아니요,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 를 받은 우리까지도 탄식을 하는데, 그 이유는 몸의 구속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우리와 함께 탄식함의 이유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위한 것임을, 허무한 데 굴복하 지 않기 위한 것임을, 비극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임을 알아 야 합니다. 우리는 이 탄식의 선상에 있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말씀 하고 있는 몸의 구속의 기다림이란 우리를 죽게 만들고, 노쇠하게 만들고, 썩게 만드는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즉,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이제 공중 권세를 잡은 모든 마귀가 박멸되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빛만이 나타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장 24절-25절) 기록된 말씀과 같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소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소망은 탄식의 자세에서 표출된 구원이 다가오는 소리, 구원을 갈망하는 소리를 들 음으로 말미암아 탄생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면, 참음으로 기다려야(탄식해야) 합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씀에 담긴 뜻 요한복음 12장 25절에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릴 것 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 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같이 역설적인 말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위대함은 한 치도 구원을 세상 과 융합시키지 않고 구원의 길을 똑바로 제시함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 라.라는 말씀을 우리가 흔히 내 몸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리는 자가 되어야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로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말씀은 그런 뜻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극적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 라.라는 이 말씀은 죽음으로써 드리면 영생하도록 보존된다. 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완전히 정의내리고 있는데, 이 말씀은 말 그대로 지금 생명을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탄식하는 자만이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야 합니다.
왜냐하면 탄식하는 자만이, 시대의 진실을 가르는 별을 보는 자만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 시대에 주시는 구원이 다가오는, 구원을 갈망하는 소리를 희망(소망)으로써 표출시 키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비극을 간파한 자입니다. 비극을 간파하고 구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미워합니다. 구원이 다가오는 소리, 구원을 갈망하는 소리를 듣는 자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몸의 구속을 바라고 있는 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 기록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표현은 너무나도 오묘하며, 절묘한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을 미워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깊으신 차원에 들어갈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역설적인 표현 속에 참된 구원의 길이 있는데, 이 시대가 이 의미를 너무나 희석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것을 생각 하게끔 하는 말씀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함은 이 세상과 연합하기 위함에서입니다. 이 세상 모든 자들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에게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 길은 구원의 길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위치에 서 있어야만 됩니다. 이 미워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미움이라는 단어자체로만 해석할 것이 아닙니다. 비극을 간파할 수 있는 자, 탄식의 위치에 서서 구원의 두 가지 소리인 구원이 다가오는 소리와 구원을 갈망하는 소리를 듣고 표출시키는 자, 바로 그 자가 세상을 미워하여 영생하도록 보존 할 자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개념을 이 세상에서는 무조건 못 되어야 되는 그런 개념으로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일은 탄식의 위치에서 진실을 바 라보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상대성을 이루는 요소일 뿐, 그 핵심 자체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믿음과 행함 은 상대성을 이루는 요소일 뿐, 핵심 그 자체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자리를 주셨는데, 이 믿음의 자리는 인간 에게 주신 구원의 자리입니다. 지금 우리는 믿음의 자리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자리에서 바 라보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주 독특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즉, 홀 로 높이 들리우신 100%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란 것입니다. 이렇 듯, 믿음의 사람의 시야 속에는 100% 예수 그리스도만이 거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100%의 믿음인 것입니다. 인간나를 죽이고 믿음 의 자리 안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100% 바라보는 것이 100%의 믿음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높이 들리우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믿음의 자리에서 서서 홀 로 높이 들리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지 않는 믿음은 없습니다. (단,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추구했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는 믿음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100% 믿음으로 인하여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함께 그 의가 나타나는 역사, 이 의가 진정한 핵심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립보서 3장 9절)라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중에 같이 나타나는 이 의가 산을 옮 기는, 병든 자를 고치는, 천지를 뒤바꾸는 역사를 일으키는 것임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의의 역사는 인간의 의의 역사가 아닙니다. 100%의 믿음의 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함께 드러나는 의, 이 의 속에는 인간나의 존재가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4절에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 와 함께 하나님 앞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인간이 감취어지고, 하나님 이 드러나는 역사입니다. 인간의 의가 산을 옮기거나 병든 자를 고치거나 하는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함께 그 영광 중에 드러나는 의로써 산을 옮기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의가 바 로 이의인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믿음의 자리를 인간의 의로 말뚝 박으려 했습니다. 즉, 율법에서 난 의로써 자신들의 믿음과 행함을 흔적이나 공로로 쌓아 놓은 탑처 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믿음과 행함은 상대성 을 이루는 요소(자리)일 뿐, 핵심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게 믿음의 자리를 주심은 이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에서였습니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는 의입니다. 믿음은 상대성을 이루는 요소, 즉 자리인데, 이 의가 새로운 믿음의 자리를 계속적으로 탄생시킵니다. 즉, 이 의가 믿음의 자 리에서 계속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을 바라보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자리가 있는데, 결과적으로 믿음이 의를 위한 상대성의 자리의 틀의 확대를 이루어 가면서 더 큰 스케일의 역사를 벌리게끔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이 상대성의 자리를 회 복해야 합니다. 왜냐 그래야만 사역의 틀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자리에서 주님,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주님 께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의지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중에 같 이 나타난 그 의가 산을 옮기는 역사, 병든 자를 고치는 역사 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의 자리에 있음으로써 내 공로로 무슨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계실 뿐, 내가 없습니다. 믿음은 의를 위한 상 대성의 자리로만 인식을 해야 합니다. 왜냐 그렇지 않으면 우리 또한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우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그리스도의 영광 중에 드러난 의, 그 의 안에 나의 존재가 있습니다. 믿음의 자리는 이 의로 인하여 연속적으 로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냅니다.
마치 샬롬, 라파, 닛시의 굴레 속에서 닛시의 역사가 새로운 샬롬의 역사를 창조하듯이 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서는 구원의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그 구원의 소리는 구원이 다가오는 소리와 구원을 갈망하는 소리로 들리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체를 만유와 만사를 통해서 발견해야 될 자들이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낮 열두 시에 속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섭리의 빛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또한 우리는 탄식을 해야만 되는 자들인데, 탄식의 바다에 빠지라.라는 말은 절망의 자리에 빠지 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의 본질을 응시함으로써 하나님을 바라 보라는 말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의 이루어짐을 통하여 모든 저주가 풀리게 되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라는 계시록의 말씀과 같이, 그곳에는 이전에 있던 모든 것이 다 없어진 까닭에 저주나, 상함이나, 해함이 없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인데, 우리는 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피조물들의 탄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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