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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것 (롬1:1-7)

본문

인생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디에 속하여 몸담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매주 중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어디에 몸담는가 하는 일에 매우 신중을 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몸담을 것인가에 대하여 크게 두가지로 구분해 보라고 하면 우리는 대부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구분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사회와 환경에 따라서 천차 만별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독일인 친구가 한국에 와서 자신들의 습관대로 헤어질 때 아무여자에게나 입마추려 한다면 우리들은 잘못된 일이라고 혀를 찰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똑같은 행동이 한 지역에서는 아름다운 인사로 여겨지지만 한 지역에서는 악한 행동으로 비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의 자녀를 보고 아이 고녀석 요망지다라고 칭찬의 말을 해 줍니다. 하지만 육지에 가서 아이 고녀석 요망지다라고 한다면 커다란 봉변을 당하게 됩니다. 실제로 제주출신 어떤 목사님께서 육지에 첫 목회를 나간 첫날 똑같은 말을 했다가 봉변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분하여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몸담고 사는 것과 하나님 밖으로 나가 사는 것으로 구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사는 삶과 하나님 밖에 사는 삶에는 지극히 상반되는 결과가 예비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 몸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이라는 영원한 소망이 예비되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라는 암울한 미래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안에 몸담고 살아갈 수 있을 까요 성경은 애석하게도 그 권한이 우리에게 부여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로마서 1장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을 부르심을 입은 자, 그리고 택정함을 입은자로 소개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역시 부르심을 입은자라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부르심을 입었다는 의미의 클레토스라는 단어는 뽑다라는 의미의 클레로오라는 동사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뽑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존재에 의해 뽑혀서 선택되어 불리어 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택되어진 존재들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지칭하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밖으로라는 의미의 접두사 엑크와 뽑혀지다, 부르심을 받다, 구분되어지다라는 의미의 클레시아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사람들로 부터 구분되어 뽑혀나온 사람들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단어 입니다. 여기에서 부르심을 받은 이라는 단어는
첫째로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흔히 자의적으로 나 자신이 믿기로 결단하여 하나님께로 나온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 처음 나올 때에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등록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단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삶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가 결단하도록 이끄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은 교만할만한 어떤 이유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의해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의 모든 삶과 생명까지도 이미 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지는 존재가 되었음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이 모든 물질들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쓰라고 우리에게 위탁하여 주신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고 스스로 깨닫는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물질에 대한 사고가 변환 되어야 합니다. 똑같은 곳에 사용하는 물질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그 사용하는 의미가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쓰여진 물질들은 이제 하나님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힘을 모으는데 사용한다는 의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래 저래 똑같은 곳에 같은 금액이 나가기는 마찬가지 인데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렇게 하여 건강해진 몸을 어떤곳에 사용할 것인가 하는데에 그 사고의 촛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나 물질이나 그 모든 것의 운용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자로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것으로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속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으로서 우리가 갖는 권리는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권리 한가지를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죄의길로 부터 벗어나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우리에게 부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으로 택정받음에는 권리도 당연한 것이지만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에 따르는 의무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으로 택정받은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의무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그 의무를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 1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았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것으로 택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싯점에서 하나님의 복음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의 희랍어 원어는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로서 좋은이라는 의미의 접두어인 유와 소식이라는 의미의 앙겔로스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소식, 혹은 복된 소식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여기서 소식이라는 말은 바로 전파되어지는 소리의 뜻이 그 근본에 깔려져 있는 단어입니다. 전파되어지지 않는 소식은 이미 그 가치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구원의 복된 소식을 만방에 알리는 역할을 우리에게 맡기시려고 불러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온세상에 전파해야 할 복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모든 인간은 죄로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과 의사를 교통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짓고 에덴에서 추방되는 순간 하나님과 인간과의 의사소통의 통로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망각한 채 한없이 자신의 길 즉 죽음의 길로만 줄달음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 인간을 죽음의 길로부터 이끌어 내시고 당신과 다시 의사를 소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둘째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어진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특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다름이아니라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를 세상으로 보내어 그 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을 다시 연결시키는 유일한 방법을 실행시키셨던 것입니다. 수도승과 개미에 대한 예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다시 연결시키고 우리를 죽음의 길로 부터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심으로 죄인이던 인간들이 죽음으로 부터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셋째로 우리를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보혈을 통한 구원을 의지하는 방법외에는 그 어떤 길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종교다원주의라는 사상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그 어떤 종교든지 지고의 한 신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름만 다를 뿐 각 종교가 믿는 신은 하나뿐이요, 어떤 종교를 통해서든 똑같은 종교적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들은 한라산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많은 등산로중 하나를 이용해서 오를 수 있다. 등산객들 마다 서로 다른 등산로를 통해 등산하지만 결국에는 정상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오직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길 밖에는 없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여주신 다는 사실과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바로 복음의 내용입니다. 바로 이 내용을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택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입으로 전한다고 해서하나님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복음이 수려한 언변과 광고술로서 전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구지 여러모로 부족한 우리들을 불러 세우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 광고계의 기라성 같은 베터랑들을 사서 그들에게 일당을 주고 맡겼다면 너무도 쉽게 되었을 테니까요. 하나님의 복음은 몸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구원사역을 베푸실 때 일일이 몸으로 행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예수는 실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신 분이었습니다.
때문에 요한복음 1장 39절에 보면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된 안드레가 예수님을 찾아가 예수님에 대해 알기를 원할 때, 그 분은 단 한마디 와 보라!라는 대답으로 그 모든 대답을 대신하셨습니다. 결국 하룻밤을 예수님과 함께 지새운 안드레는 예수님께 완전히 사로잡힌자가 되었고, 바로 다음날 아침 자신의 형제인 베드로를 주님앞에 인도하는 놀라운 일을 해 냈습니다. 이 기록은 과연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접촉해보고 그분의 삶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 어떤 이들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의 것으로 택정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모든 사람들이 매료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통해 나를 믿는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라고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인지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알지 못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못냈던 것은 아닙니다. 사고의 전환, 곧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 택정함을 받아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항상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라는 확고한 결단이 서지 않는 한 그것을 실행하기란 너무나도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열매에 대한 예화 이시간 자신을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죄악과 세상 쾌락에 빠져서 죽음의 길로 달려 갈 수 밖에 없던 나를 당신 아들의 귀한 피로 붙잡아주시고 택정하셔서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주시고그 귀한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나는 과연 얼마나 그 복음을 전파하는 자리를 충실히 지켰습니까 이 시간 나의 가장 친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물어볼 때에 다른 구구한 설명이 필요없이 와 보라!하고 꺼리낌없이 대답할 수 있습니까 이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속에서 열매를 찾기 원하십니다. 우리 이제 마음의 귀를 활짝열고 나를 불러 세워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주시고 복음의 일군으로 세우셔서 그 열래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니님의 음성을 들어 봅시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네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내 너를 택하여 나의것으로 삼은 것은 너를 나의것으로 만들어 주었던 그 복음을 세상에 전하라 한 것이거늘 넌 지금 무얼 하느냐, 넌 지금 내게 어떤 열매를 주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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