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왕이신 그리스도 (계5:1)

본문

역사의 행로를 찾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20세기말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를 쳐다보면 사람들은 역사의 의미와 그 종말에 관해 새로운 질문들을 하고 있습니다. 신문들과 뉴스 그리고 우리 주의에 일어나는 일들을 볼 때 우리 기독인들도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재고하게 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들 앞에 쉬운 대답은 없겠습니다만 한가지 해답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발견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정경들 가운데서 다소 소외시 되어 온 책입니다. 수년전 미국에서 미국 정신의 패쇠(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어떤 여성께서 저에게 그 책이 참 훌륭하고 좋은 책이라고 장황하게 자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그 책의 한 부분에 관해 질문을 했더니 그 분이 하는 말이 “아 그 책을 읽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도 그런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독인 뿐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에 관한 여러 풍문을 들어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만 좀처럼 읽혀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로 읽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그 책의 본질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은 구체적인 사건을 세세히 열거하거나 시간이나 날짜, 혹은 사람들이나 지명들을 보여주는 하나의 역사책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인들도 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여러 짐승들이나 상징의 감추인 의미를 세세히 찾아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계시록은 예언의 책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한 책입니다,. 예언인 까닭에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감추어진 구체적인 사실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인 계시록은 오늘 우리에게 역사에서 하나님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역사를 성취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후 집에 가셔서 이 책을 다시 읽어보시면 이런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 책을 읽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이 책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지 여러분에게 해가 갈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의 주제가 주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성취로 이끌고 가고 있는 것이라면 이 주제의 가장 핵심적인 초점은 바로 오늘 본문인 5장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본문에 나타나는 여러 상징과 생물들을 해독하는 일을 접어 두고 본문의 초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에 우리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한 두루마리 책이 있는 것을 봅니다. 계시록 4장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본문 5장에서 이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 오른 손에 두루마리 책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이 책 속에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지표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이는 바로 새 언약의 책입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책을 펼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이 책을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라야 했고 그 계획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천사로부터 아니 보좌로부터 큰 음성이 났습니다. 누가.합당하냐 천지가 침묵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일에 앞서서 크게 울고 말았습니다. 사도 요한의 순간의 감정이 폭발한 것일까 요한은 이보다 더 근본적인 심오한 체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목적이 없는 세계, 의미가 없는 세계, 그리스도가 없는 세계 앞에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익스피어는 삶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삶이란 바보의 이야기로 번뇌와 소음이 가득하고 무상을 의미한다’ 이와 비슷하게 천상 천하에서 책을 펴거나 보기에 합당한 자가 없기로 요한은 울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전도자의 교훈을 실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이로 인해 요한을 통곡하였습니다. 요한은 이 일이 연극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요한이 만난 세계는 그리스도가 없는 세계로 인해 그는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관찰하면 요한은 천상 천하에 합당한 자가 없다는 사실을 보고 있었을 뿐아니라 자기 자신도 이 일에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함께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그리스도에게로 나아 오는 일에 주요한 요구는 바로 우리 자신을 전혀 이 일에 합당하지 못한 인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제가 속한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에 소속할 때 확인하는 내용 중 하나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혐오하며 겸손하게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며 그를 신앙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에 쓰기에는 상당히 심한 말 같습니다. 그리스도에 비추어 자신을 혐오해 보셨습니까 우리 모두가 합당치 못한 이들인 것은 깨닫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은 자기 존중(self-esteem)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자신들을 너무 높이 평가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스스로를 너무 낮게 평가하지 말라는 말은 성경에 절대로 없습니다. 최근 서점에서 유행하는 책을 살펴보던 중 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한 책의 저자는 인간이 소유한 무한한 자기 가치를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인간은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죽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한 내용과 비슷한 것 같지만 실상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그와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죽음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결단코 우리 인간이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 외아들 그리스도를 보내어 죽게 하사 우리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혐오의 대상이었고 그 코에 악취였으며 비참하고 부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쳐다볼 수도 없는 거룩한 눈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지옥에 합당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런 합당치 않은 이들을 위해 절대적으로 오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합당하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이들은 이 사실을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대성통곡이 갑자기 중단되었습니다. 그는 실존적 고뇌로 영원히 연민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소망이 없이 영원히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걱정이 기대와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장로 중의 한 사람이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울지 말라. 사자가 이기었다. 그가 합당하시다 그 장로는 요한에게 이 사자는 유다의 지파이며 다윗의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왕의 혈통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제 이 책을 펴기에 합당한 왕을 쳐다보았습니다. 요한의 눈에 보여진 이는 어린양이었습니다. 이 양은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이 어란 양은 보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그 책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이 있던 장소,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편에 앉았습니다. 요한이 지금 하늘 보좌에서 목격하고 있는 장면은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의 대관식입니다. 이 대관식이 거행된 때는 언제입니까 요한이 목격하고 있는 장면은 언제 일어났습니까 우리는 자주 요한계시록을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계시한 책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2장의 경우 비전을 통해 그리스도의 탄생을 목격하는 요한의 경우는 확실히 미래의 되어질 일이 아니었습니다. 계시록은 자주 과거 사건에 대한 천상적 국면을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받은 비전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직후 하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천상(天上)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취된 그리스도의 대관식을 사도행전 2장 29절로 36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의 값을 치르신 주님은 주님의 책이 있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요한이 오늘 보고 있는 장면은 약 50년 전에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보다 중요한 일은 왜 이 일이 일어났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합당하시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나아가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합당하시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는 하늘에서 그 아버지와 함께 하였던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우리와 같이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았으나 결단코 시험에 빠진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경배하였습니다. 그는 우상을 만든 일이 없었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았습니다. 항상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그 부모를 공경하였습니다.,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거짓말이나 탐심을 가져 본 일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순간마다 그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했고 그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인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는 사람에게 멸시를 받고 버리운 바 되었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사 마침내 만유의 주로, 왕 중 왕으로 관쓰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여 수치를 당함으로 그는 높아지셨습니다. 만민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입술로 그를 주님으로 고백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그 분은 합당하십니다., 고통의 일들을 통해 순종을 배웠고 따라서 그 머리에 영예로운 관 씌우심을 당하였습니다.
C. S 루이스(Lewis)가 쓴 책 가운데 나르니아의 역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라는 소설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어린아이들이 옷장을 통해 나르니아의 세계로 가게 됩니다. 이 아이들이 나르니아의 세계로 왔을 때 거기에는 하얀 마녀가 그 세계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르니아의 세계를 루이스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르니아는 크리스마스가 없는 끝없는 거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이 경험했던 일종의 무의미와 절망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 같습니다. 끝없는 겨울, 춥고 메마르며 생명이 약동할 수 없는 장소, 크리스마스가 없는 곳. 그리스도가 없는, 삶의 재미가 없는, 차가운 무상의 장소. 그러나 이런 나르니아에 사자인 아슬란(Aslan)이 나타나자 상황을 완전히 달라집니다. “해빙이 시작되었습니다”라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나르니아를 뒤덮고 있던 하얀 눈은 서서히 녹아들기 시작하고 물방울들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강물이 다시 흐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자 우리 영혼에 해빙이 시작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서 재정의 되었습니다. 이제 영원한 크리스마스가 도래한 것입니다.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그 백성의 마음에 영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역사를 주관하시며 세상이 그 분 구주의 삶, 죽음, 부활, 통치 아래에서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빙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리스도는 그의 왕국을 확장시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통치와 그의 합당하심이 이룬 일들은 무엇입니까 본문 9절의 새 노래는 새로운 구 속의 질서를 뜻합니다. 내용을 자세히 보십시오. 어린양은 죽임을 당한 까닭에 책을 펴기에 합당하시다. 죽임을 당한 까닭에 그 어린양은 각처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마치 은행에 구원을 위한 돈을 많이 예금해 놓고 우리가 원할 때 구원을 위해 꺼내어 쓴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을 피로 샀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사신 바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그의 첫 편지에서 말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너희는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행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목격하고 있는 세계, 보좌가 있는 세계, 그것이 우리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집이요 우리는 그 세계의 시민입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가장 위안을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것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가져다줍니까 하이델베그(Heidelberg)신조는 이렇게 묻습니다. ‘삶과 죽음에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답하기를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어린양이 합당하시다는 새 노래를 천군 천사와 함께 부르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이 사실을 예배를 통해 나타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 모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특별한 할 일이 없어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늘 이것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 땅과 하늘을 다스리시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그 안에서 성취시키시며 매듭지으시는 이를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비추인 빛으로 해빙은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드리신 그 분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호흡하며 오늘 이 아침에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 아멘.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85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