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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남은 자 (롬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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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나라사람들은 자녀들을 키우면서 그 자녀가 만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꿈을 간직할 수 있도록 교육한다고 합니다. 예를들면 구약에 있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가지고 가르치면서 이렇게 자 녀들에게 말을 한다고 합니다. "얘야,이스라엘과 불레셋이 싸울을 할 때에 골리앗이라고 하는 굉장한 거인이 나타났거든,그 때에 사울하고 이스라엘 군대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니 그들은 골리앗을 보고는 야-너무 커서 상대해서 싸우기는 틀렸어! 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다윗은 골리앗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니 '그 놈 커서 물맷돌을 잘 맞 아 주겠구나!'그렇게 생각했대. 어린이들이 어려서부터 이런 식으로 들으면서 자라니까 자연히 보는 시각이 다 를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그런식으로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비록 예수 믿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 을 핍박하는 자기 동족을 향해서 절망을 하지 않는 것을 다시한번 볼 수 있습니다.자기동족의 구원 받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낙관해야 한다는 것이 바울 자신 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 심정을 1절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롬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지금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기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절대로 그렇 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나처럼 악하고, 나처럼 핍팍하고 나만큼 기독교를 향해서 이를 간 사람이 어디있느냐, 나같은 골 수분자 유대인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부르셨는데 이스라엘을 버려 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하나 제시하는 것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버림을 받은 것처럼 느껴질 만한 암담한 시기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아합 시대가 대료적인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왕의 유혹을 받아서 모든 백성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일에 빠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타락했습니다.당시에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가 사방을 둘러보니,하나님을 찾고 경배하는 자는 자기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그래서 하나님 앞에 너무너무 절 망해서 이렇게 부르짖는 것을 봅니다.-3절입니다-(롬 11: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까 이스라 엘 백성의 구원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아마 이 때에 하나님은 미소를 띠우셨든 지 아니면,껄껄 웃으시면서 대답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4절을 봅니다.-(롬 11: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 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엘리아야,네가 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 우상숭배에 빠진 것 같지, 네가 보 기에는 이스라엘 나라에 이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사라져 버린 것 같지,그렇지 않아! 내가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내가 버리수가 있겠느냐 너는 모르지남 내가 가만히 숨겨 놓고,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고,아세라에 무릎 꿇지 않은 사람 7천을 내가 남겨 놓은 것을 네가 아느냐 엘리야가 그 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겠습니까 바울은 이 사건을 놓고 이제 결론을 이야기합니다. (롬 11:5) 그런즉 이와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이 남겨 놓은 7천 명이 아직도 있다는 것입니다. 6절에-(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무슨 뜻입니까-오늘도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그들은 선을 행해서가 아니 고,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값없이 주는 선물이 더 이상 값없이 주는 것이 될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남겨 놓은 사람은 철저히 하나님 주시는 은혜로 남아 있다는 것을 바울이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참담하게 보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세계에도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가 도도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바울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남은자라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역사에 꺼지지 않고 이어져 오는 희망 의 상징이었습니다.남은자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이었습니다. 동시에 남은자는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하나 가르쳐 줍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민족이 구원 받는 법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교회가 전부 구원 받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산돌교회라고 해서 우리 교회의 120명 교인이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구원을 얻는다. 이것은 우리의 이상입니다. 저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적 으로 볼 때에 그렇지를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작은 산돌교회 안에서도 구원 받 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은 남은자 뿐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이 성경 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다 택함을 받은 것 아니냐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예,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택함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여러번 확인했습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 동족을 쳐다보면서 절망을 하는 태도를 버 려야 합니다. 비록 이스라엘 민족하고 우리 한민족하고는 성격상 다릅니다만 그러나 우리나라 백성을 볼 때에,아무리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고,성적으로 타락하고 도덕적으 로 문란하다 할찌라도 우리는 절망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들을 보고,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져도 하나님이 남겨 놓은 7천명은 있다-할렐루야! 여러분이 7천명입니다. 한국교회가 7천명입니다. 아무리 정치가 문란하고 남북이 대결을 해서,반세기 동안 너무나 피곤한 하루하루를 살아왔습니다만,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 에 남은자를 보존하고 계신다' 그 남은 자가 나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북한데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 정권이 아무리 성도들을 핍박하고,교회 를 박살내고,지난 50년동안 말로 다할 수 없는 핍박을 가했다고 할찌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세계 어느 민족치고 공산주의 때문에 북한 동포 만큼,속고 또 속고 핍박 당한 민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하나님 이 그 가운데 주체 사상에 무릎 꿇지 아니한 7천 명을 남겨 놓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북한 정권은 어느날 갑자기 아합의 정권이 무너지듯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그 때가 되면 남은자들이 드디어 승리하고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면서 우리 앞에 나타 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동족을 향해서도 우리는 절망하지 맙시다. 두번째 단계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 놓은 자느 구원을 받고 나면,그 외의 사람은 어떻게 되느 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끝까지 믿지 아니하는 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는 것인 가 이 문제를 7절 이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어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고,그 결과 그들은 완악해졌다고 합니다.
(롬 11: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 하심을 입은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롬 11:8)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 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완악해집니다. 완악이라는 말은 영적인 일 에 대해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의 말의 의미는 일을 많이 하면 손에 못이 박인다고 하는데 그 못이라는 살갗은 굳어져서 바늘로 찔러 도 감각이 없습니다. 이것이 완악이라는 말이 갖는 의밉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완악해졌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령한 일에 대해서 마음이 안열리는 것이요, 신령한 말을 아무리 해도 은혜를 받지 못하는 무감각,어두움 흩트러진 마음,어두운 마음을 완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지금 앞에 놓고 생각을 해야할 입장에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7절을 다시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했지만 그 것을 얻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싶 은 데도 못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은 데도 못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완악해진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에게 있다 고 볼수 있지요 이것을 좀더 증명할 수 있는 귀절이 그 다음에 또 나옵니다. 완악하게 된 이유가 우리 자신의 부패한 성품으로서 설명이 안 됩니다.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8절에 가서 하나님이 .주셨다 라고 연결을 하면 그 중간에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혼미한 심령,모지 못할 눈,듣지 못할 귀를 주셨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사람은 자동적을 완악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동 적으로 완악해 지는 그 것으로서 구원 받지 못하는 설명을 다할 수 없습니다. 여 기에는 분명히 다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자연적으로 완악해 지는 그것도 문제가 있지만,하나님께서 아예 마음을 막아 버리고,눈을 막아 버리고,귀를 막아 버려서 도무지 복음에 대해서 귀를 열고 들을 수가 없도록 하셧다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깨닫게 하는 것이 은혭니다. 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열려서 받아 들이게 하는 것이 은혭니다. 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눈으로 볼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은혭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은혜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고, 예수님의 놀라운 부 활의 멧세지를 들을 때에 귀가 열렸고,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른 것을 확인 했을 때,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은혜를 주시지 아니할 뿐 만 아니라,그 은 혜를 받을까 싶어서 눈도,귀도 다 막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이해 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고 마음이 굳어지게 만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9절에서-바울은 다윗의 글을 이용해 가지고 참 기가 막힌 말을 했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가 되고,덫이 되고,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 서.
여러분! 내가 본래 악해서 복음을 듣지 않았다. 그것도 이유가 됩니다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들을수 있는 또 볼 수 있는 모든 은혜를 차단해 버리고 더 악 해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듣지 못한다하는 것을 지금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양상으로 세상을 사는지 압니까 밥상을 놓고 삽니다. 밥상이 무엇인가하면-그들의 관심사가 잘먹고 잘살고 즐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관심사가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먹 고,취하고,즐길수 있는 부유한 환경이 전적으로 그들을 멸망케하는 덫이 되어 버 렸고,올무가 된다는 이야깁니다. 이런의미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요와 형통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이해가 되십니까 어떤 사람, 돈을 그렇게 많이 모으지 않았다면 분명히 예수 믿고 돌아왔을지 몰 라요. 어머니가 그렇게 일생동안 예수를 잘 믿었는데도 아들은 돈을 너무 많이 벌 어 가지고 재벌이 된 그 것 때문에 평생 예수 믿지 못하고 죽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모아 재벌이 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냐 여러분! 이런 것을 가지고 축복이라고 떠드는 거짓 지도자들의 말을 믿지 마십 시요.그것은 저줍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아니야-내가 구원은 못 받아도 좋으니 돈만 좀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써 봤으면 좋겠다.그렇게 생각한다면 죄송 한 이야기입니다만, 여러분도 하나님이 버리신 사람인줄 몰라요. 그러나 우리 중에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는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을 제가 확실히 믿어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 돈 때문에 예수를 못 믿었다. 그 돈이 밥상이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국회의원을 할려고,이 사람 저 사람에게 환심을 사려다 보니까 예수를 못 믿었다. 그 사람은 그 국회의원이 밥상이 된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에 교회에 나와서 졸고, 딴 청을 피는 사람들 보면,돈이 많아 요.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눈을 감고, 친구 만날 생각 골프칠 생각이 꽉 차 있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일수록 돈을 잘 벌어요. 하는 일마다 슬슬 잘 풀리는 것 같아요. 몰래 술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큰소리 치면서 사는 사람들 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목사가 그 집에 가서 '하나님, 이 집에 주신 축복을 감사합니다'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비추어 볼 때 그것은 감사할 문제가 아닙니다. 밥상의 올무요 덫인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결국은 그 것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하고 만다고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버렸다고 밖에 말하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과 형통 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세가 되면 밥상이 올무가 되어 망할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이미 예 언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8-39절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 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 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이 귀와 눈을 막아 버린 것이지요. 먹고 마시는 것이 무엇이 죄입니까 장가가고 시집 가는 것이 무엇이 죄입니까
그런데 그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것 밖에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악한 사람의 특징이요.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은 사람의 생활입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실이 또 하나있습니다. 하나님이 못 믿도록 해서 완악하 게 되었고, 하나님이 듣지 못하도록 해서 못 들었는데,
그렇다면 책임은 하나님이 져야 하지 않겠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은 완악해서 믿지 아니한 사람이 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이해 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은혜 안 주셔서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 습니까' 이런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남자가 친구에게 꼬여서 밤 중에 술집엘 갔습니다. 여자를 옆에 놓고 취하 도록 술을 마시고 핸들을 잡고 사람을 치어서 사람을 죽였다고 합시다. 경찰서에 가서 술이 깬 이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왜 탓하느냐 나를 술집에 데리고 간 친 구를 벌 주어야지' 통합니까 또는 '나는 술 취해서 그 사람을 잘 못 보았다. 술 때문에 그런 것을 어떻게 하느냐' 변명이 됩니까 안 통합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사람이 나중에 이러니 저러니 변명할 수 없는 것이 이 술취한 사람하고 똑 같습니다.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어떤 사람을 버리셨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합니다.유식하다는 사람일수록 거부 반응이 굉장히 거셉니다. 그런 하나님이면 나는 믿을 필요가 없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 가운데도 하나님에 대해서 거부 반응이 약간이라도 있다면 여러분 스스로 논리적으로 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무슨 모순에 빠졌 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버리셨고, 구원 받지 못하도록 귀를 막았다 하는 말을 들을 때에-노 하던 사람인데,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셔서 창세 전부터 당신을 선택하시고,믿음 좋은 당신의 아내를 통해서 예수 믿게 하신 것 감사합니까 그러면 기분 좋아서 고개를 끄덕끄덕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창세전에 선택 받았다는 것은-자기 때문에 선택 받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선택에는 상대적으로 비선택 받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선택 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선택 받은 것이 자랑스럽 고,감사할 이유가 아무도 없지요. 있는 사람모두가 선택을 받았다든지,한 사람 밖 에 없는데 나 혼자만 선택을 받았다던지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은혜가 아닙니다. 그런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이 버리셨다는데 대해서 여러분들이 반발을 하시면 안됩니다. 나같은 미련한 놈을 택하여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다고 한다면,버림 받은 사람에게 들을 귀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도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같은 설교를 한자리에서 들어도요, 100명 중에 10명은 참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 고 받아 들이는 데,나머지는 비웃고 헐뜯습니다.
이런 현상을 단지 마음이 악해서 라고만 해석할 수 있습니까 마음이 악하기는 똑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듣고, 하나는 거부 하니까-이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결국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어떤 역사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듣게 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듣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가 복음을 전할 때에 자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들을귀 있는 자들은 들을 찌니라-우리는 이 말을 그냥 해보는 소리로 지 나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수만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어도 그 가운데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제 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세상에 오셔서 그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데도 하나님이 듣도록하신 자들 만이 듣지 모든 무리들이 다 듣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주님이 이미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에, 아멘이 나옵니까 그 말씀이 달고, 그 말씀이 생수 처럼 기쁨을 샘 솟게 합니까-귀한 축복을 받은 것으로 알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악인들의 뜻을 얼마든지 선하게 바꾸실 수가 있다.
그런데 왜 바꾸시지 않으실까 그의 뜻이 다른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다른데는 무엇인가 그 것은 우리는 모른다. 하나님 만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이 문제를 파고 들고,고민하는 것은 쓸 데없는 고통 만 당한 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봅니다.-어떻게 부족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수 있겠어요. 내가 모른다고 어떻게 하나님이 잘못 되었다고 감 히 말할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이 문제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이 왜 버리셨을까하는 것 보다 더 수수께끼 같고,알 수 없는 일이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왜 택했을까'하는 것입니다. 왜 믿고 싶어 하지도 않은 나를 택해서,들을 귀를 주시고, 보는 눈을 주셨는가 왜 깨닫는 마음을 주셨을까 버림 받은 사람에게 대해서 대답이 안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대해서도 대답이 안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함을 받지 못한 자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마시고 나 같은 놈을 구원 해 준 것에 대해서 신경쓰자 그 것입니다. 이렇게 신경을 쓰면 우리는 겸손하게 됩니다. 입을 다물게 됩니다.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한 수수께끼도 풀지 못하는 주 제에 남의 구원 받지 못한 문제를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말할 여유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보면 신기할 때가 많습니다. 생긴 것을 보아도 잘난 것이 없고, 머리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 보다 잘 된 것이 있느냐 하면 그 것도 아니고, 성격까지 괴팎해서 접근 하기도 싫어요.별로 관심을 끌지 못해요.
그런데 믿음 하나는 말할수 없이 좋다 이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분명히 말할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는 보는 눈을 주 시고, 듣는 귀를 주셔서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 그 숙제를 풀 수 있습니까 '하나님도 좀 눈이 뭐셨지 저런 사람을 택하시다니'라고 밖에는 더 할 말이 없어요. 그러면 눈이 멀어서 택한 사람이 누굽니까 이 기가 막힌 구원의 도리를 깨달은 사람치고 하나님 앞에 감격하지 않은 사람 이 없습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버림 받은 자를 가지고 자꾸 뭔가 헐뜯기를 원하지만, 자기 자신의 구원 문제가 너무 신기스러워서 정말 감격하고 하나님 앞 에 흐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감격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감사해서 찬송이 넘치고, 길을 가다가도 기쁘고 넘치는 환희가 있습니까 이 감격이 있는 사람은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감격이 샘솟듯이 솟아 나기를 바랍니다. 주 찬양해-해 뜨는데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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