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종교개혁 (롬11:33-36)
본문
역사의 1세기는 실로 신앙의 영웅들이 활거 하던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저 나사렛 사람 예수의 제자들이 성령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를 복음으로 불을 질러 놓아 버린 시대였습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난 16세기는 또한 번 세계사를 진동시킨 역사적인 대사건들이 일어난 시대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도 시대 이후 가장 큰 복음의 불을 질러 버린 종교개혁 운동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 사람 마틴 루터였고 또한 사람이 바로 프랑스 사람 요한 칼빈이었습니다. 흔히들 종교개혁을 평할 때 루터는 종교개혁의 행동적 주역을 주동자(promoter)로 보는가 하면 칼빈을 사상적 주역을 맡은 사상가(brain)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이요, 칼빈은 종교개혁을 신학적으로 정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루터에 의하여 시작된 종교개혁이 칼빈에 의하여 다듬어지고 사상적으로 체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루터보다도 칼빈이 한 시대 늦게 출생한 것이(1509. 7. 10) 결코 우연한 것은 아닙니다. 광부의 집에 태어난 루터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귀족적 가정의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루터의 아버지가 루터의 성직(신부) 투신을 극렬히 반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칼빈의 아버지는 그 아들을 신부로 만들기 위하여 파리에 있는 라 마르슈 학교(College de La Marche)를 거쳐 몽테규(College Montaigu) 학교에서 라틴어를 통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칼빈의 아버지가 그 교구의 감독과 다툰 일이 있은 후,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기 위하여 올레안(orleans)대학으로 전학시켜 버렸습니다. 칼빈의 천재성은 이미 이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531년에 그의 아버지가 별세하자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파리 왕실 대학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전공하였습니다. 1532년, 2월에 23세의 나이로 올레안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는 1540년 8월 친구 부첼의 권고로 이델렛트 드 부르(Idelette de Bure)라는 두 남매가 있는 과부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녀는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아름다운 용모와 내성적인 성품으로 죽을 때까지 칼빈의 훌륭한 내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칼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가 죽은 후 칼빈은 자기의 남은 생을 홀로 보냈습니다.
I. 그의 회심(돌연한 회심 체험) 그가 언제 회개를 하고 로마 카톨릭에서 개종하여 종교개혁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 자기의 개심 체험을 약간 언급한 것뿐입니다. 거기서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법률 공부를 하고 있었으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밀한 섭리로서 다른 길로 나의 가던 길을 돌리셨다. 아직도 내가 교황 종교의 미신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돌연한 회심으로 나이에 비하여 완고하였던 나의 마음을 인도하여 주셨다"는 고백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회심은 아마 1532년부터 33년 사이에 곧, 그의 나이 23-24세 어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 때 그는 세네카의 관용론(De clementia)의 주해를 출판하여 명성이 일고 있을 때였습니다.
Ⅱ. 종교 개혁 운동에 가담하게 된 경우 그는 1533년 11월 1일 그의 절친한 친구 니콜라스 콥(Nicholas Cop)이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는 취임 연설문을 초안하게 된 것이 그가 일약 개혁자로 뛰어들게 된 경우가 됩니다. 그 친구 학장의 연설은 복음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인데,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게 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연설은 당시 파리 카톨릭 권력자들에게 일종의 선전포고문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칼빈의 친구 총장도 이단자로 낙인이 찍히고 칼빈은 거기에 동조자로 함께 파리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때는 이미 프랑스 파리를 위시하여 전역에서 신교도 박해가 맹렬했고,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는 수많은 신교도들을 화형에 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Ⅲ. 바젤에서의 기독교 강요 저술 프랑스에서 추방을 당한 칼빈은 국제도시 바젤로 도망갔습니다. 거기에서 틸ㄹ(Louis de Tillet) 신부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 집에 있는 훌륭한 도서관에서 연구에 몰두하면서 저 유명한 기독교강요를(Institutes of the christian Rrlegion) 저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책이 1536년 3월 곧 칼빈이 27세 되던 해 처음 출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책 서문에서 당시 개신교 박해의 선봉장이었던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글'을 써서 개혁주의 운동의 목적을 밝히고, 순교한 수많은 친구들의 신앙 정신을 밝히고, 개혁주의 신앙을 변증한바 있습니다. 이 책은 그 후 계속해서 수정 증보의 과정을 거쳐 1559년에는 라틴어 판으로, 1560년에는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는데 전 4권 80장의 걸작품이었습니다. 제 1권은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 제 2권은 그리스도론, 제 3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유효하게 하는 성령님론(구원론), 제 4권은 교회론, 은혜의 방편(성례론), 국가 정부론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개신교의 신학적 대전(大典)이 되었고, 지금까지 전 성경에 나타난 진리를 발견하는 신학 작업에 이 책을 능가하는 사상이 없었습니다. 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야말로 개신교의 보루요, 종교개혁의 위대한 산물이요, 개혁주의 신학의 요람이요, 또한 위대한 진리의 유산이 된 것입니다.
Ⅳ.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1차 체류) 기독교 강요를 출판한 후 그는 이태리 여행길에 올랐습니다(1536 봄). 거기에서 복음주의에 동조하는 동지들을 만나 개혁 운동을 약속 받고, 비밀리에 고향 파리를 방문하려 하였습니다. 고향에 가서 동생 안토니(Antonie)와 누이 마리아를 데리고 바젤이나, 스트라스ㅂ으로 가려고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1536년 7월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로 가는 길에 뜻밖에 독일과 프랑스간의 전쟁이 일어나, 불가불 제네바로 들러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네바에서 하룻밤만 묶고 갈 예정이었는데, 바로 그날 밤에 칼빈이 묶고 있던 숙소에 뜻밖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다름 아닌 개혁자 윌리암 파렐(W.Farel)이었습니다. 그는 베른(Bern)에서 이미 개혁 운동을 성공시키고 지금 제네바에 와서 로마와 접전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는 칼빈보다 20세나 높은 연장자로 칼빈의 인물됨을 익히 알고, 찾아와 자기와 함께 제네바에서 개혁 사역을 해 줄 것을 강청하였습니다. 물론 칼빈은 예측치 못한 파렐의 청구를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의 장면을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파렐은 복음 사업을 위한 비상한 열심에 불타 있었다. 그는 나를 붙잡기 위하여 몹시 애를 썼다. 나의 뜻은 조용히 학문을 연구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역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을 듣자 그는 자기의 강청을 가지고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저주하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 내가 이렇게 절박한 필요를 눈앞에 보면서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조용한 생활과 학문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두려움을 느껴 계획했던 여행을 포기하고 말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칼빈이 '제네바의 개혁자'로 역사의 기록이 되고만 경우였습니다. 이 때는 벌써 제네바시가 개신교로 기울어지고 제네바 시의회까지도(200인 의회) 천주교의 미사를 금지하도록 가결을 할 정도였습니다(153
5. 8). 이제 제네바는 개혁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기에 칼빈을 제네바 무대에 서게 한 것입니다. 나중에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로부터 제네바시의 목사로 인정을 받았으나,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칼빈과 파렐의 개혁운동을 반대하여 저들을 추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초점은 칼빈은 교회를 정치권(제네바 시의회)으로부터 분리시켜야 된다는 주장에 저들이 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1538년 4월 시의회는 저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하였고, 파렐과 칼빈은 급히 도망자의 신세로 제네바로 떠나야만 하였습니다. 그가 제네바에 머문지 2년이었습니다.
Ⅴ. 스트라스ㅂ의 칼빈 그후 파렐은 뇌샤텔로 도망가서 죽을 때까지(1565) 거기서 활동하였고, 칼빈은 바젤로 가려 했으나, 개혁자 부처의 절박한 요청 때문에 또 계획을 바꾸어 스트라스ㅂ으로 갔습니다(1538. 9). 칼빈은 여기에서 프랑스에서 피난 온 피난민 교회 목회를 하면서 저술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고 있는 많은 종교 개혁자들과 폭 넓은 교제를 갖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개혁자 부서(Buccer)와 카피토(capito), 멜랑톤(Melanchton)과 같이 친교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기독교 강요를 증보하여 출판하였고(1539), 로마서 주석을 썼습니다. 그리고 로마 교회 주교 사도레토(Jacopo Sadoreto)에게 보낸 유명한 반박문도 썼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도 여기에서 3년간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가난하고 고달픈 육신의 삶이었으나 영적으로 부요했고, 또 가정을 이룬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Ⅵ.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2차 체류) 칼빈을 추방한 제네바는 모든 면에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마침내 칼빈이 다시 필요한 제네바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추방했던 제네바 시의회는 다시 칼빈을 초청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고 이 소식을 들은 파렐은 또 다시 칼빈이 제네바로 되돌아가야 된다고 간곡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1541년 9월 13일에 칼빈은 그곳에서 추방된지 3년만에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칼빈의 나이 32세였을 때입니다. 그 때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던 1564년 5월 27일까지 23년간을 제네바에서 자기 삶을 불태웠습니다. 이제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개혁 사업들을 간추려 봅니다.
1. 먼저 그는 성 베드로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어 설교 사역을 중심하고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격주로 거의 매일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제네바에서만 2304회를 넘었습니다. 그 설교는 듣는 이에게 감화와 감동을 주었고 그 설교의 영향은 전 스위스, 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은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임했고 설교의 속삭임은 나팔의 권위를 나타내었다고 하였습니다.
2. 그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제네바를 만들기 위해 교회 헌법을 제정하고 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설교 직분을 전담하는 목사 목사와 협력하여 교회 행정(치리)을 담당하는 장로 교회 재정 봉사를 담당하는 집사직을 두었습니다.
3. 교리 문답서를 작성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철두철미하게 교리적 훈련을 받도록 하므로 성경이 신자들의 생활 원리가 되게 했습니다.
4. 그리고 끊임없는 저작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1542년 문답 형식으로 된 신앙 교육서(Cateohisme)를 작성했는데, 그 순서는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성례(세례와 성찬) 교리순으로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교회의 기도와 찬송의 형식이라고 되어 있는 예배 모범서도 작성했습니다.
5. 1556년부터는 제네바 시를 위하여 3대 실천 강령을 제창하고 실시하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에 의한 교회 생활의 질서와 규칙을 지킬 것,
둘째는 제네바 시에 좋은 교육 기관을 세우는 것,
셋째는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6. 1559년에는 제네바 아카데미(Academy)를 설립하여 그 제자 베자(1519-1605)에게 모든 운영 책임을 위임하였다. 그 학교가 개교된 이래 5년간
1,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칼빈의 강의를 들으려고 스위스는 물론이고 프랑스, 독일, 영국, 헝가리, 이태리, 폴란드, 스페인 등지에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들은 칼빈의 강의 노트를 가지고 모국으로 돌아가 그것을 개혁 운동의 길잡이로 삼았습니다. 그 출신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요한 낙스(John Knox)였습니다. 이 학교에서 배운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구라파 영계의 혜성 같은 존재들이 나왔습니다.
7. 아카데미의 창설이 끝나자 당국의 호의를 받는 중에 교회법을 다시 개정(1561)하여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키고, 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살도록 교회의 감독직을 재정하였습니다.
8. 1564년에는 '목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 등의 수많은 글을 썼는데 그 저서의 방대함은 칼빈 전집 59권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9. 칼빈주의 운동의 영향은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운동은 마침내 프랑스에서는 저 유명한 유그노(Hugnots)운동을 일으켜 1552년에 파리대회에서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화란에서는 칼빈주의 신학자 부라이(Guy de Bray)에 의하여 벨직신경(1561)이 채택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었고 영국에서는 칼빈주의 영향을 받아 '39개 신조'를 채택하고 나중에 저 유명한 청교도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독일 남부 지역에는 칼빈주의 일색으로 저 유명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채택되고, 스위스에는 칼빈주의 신학자 불링거(Bullinger)의 활약으로 츄리히, 바젤, 베른 등지에서 칼빈주의 폭풍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VI. 칼빈의 사상과 최후 칼빈은 '주님의 일은 신속하고 성실하게'라는 목표를 정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기도하고 성경을 강해 하면서 설교하다가 그의 인생이 끝나게 됩니다. 그는 1509년에 프랑스 북부 지역인 노욘에서 출생하여 1564년 5월 27일을 한 생애로, 55년을 살았습니다. 그가 떠나기전 그 해 2월 6일까지 설교를 계속했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여전인 4월 20일이 교회 예배 참석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임종을 지켜보는 친구들에게 "존경하는 여러분! 나의 무거운 짐을 여러분이 친절하게 함께 져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리며, 내가 여러분께 가르친 교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의 말씀을 전파하겠다는 것 외에 아무런 생각도 가지지 않고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만 위대하고, 만 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십니다"고 했습니다. 그의 중심 사상은 이렇게 '절대 하신 하나님 사상',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높이는 하나님 중심 사상'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광야의 소리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는 죤 낙스의 말을 빌리면, '사도 시대 이래 지상에 결코 있어 본 일이 없는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를 만든 분'이였습니다. 에밀 레오나드(Emile-G. Leonard)의 말을 따르면 칼빈은 제네바에서 '새로운 인간형, 곧 개혁파를 주조(만듦)하는데 성공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칼빈의 생애는 바로 로마서 11장 36절대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 돌아감이라 영광이 세세에 그에게 있으리로다. 아멘 하는 말씀에 기초했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 교회와 교단과 신학교는 이러한 칼빈의 후예들입니다.
그것은 루터에 의하여 시작된 종교개혁이 칼빈에 의하여 다듬어지고 사상적으로 체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루터보다도 칼빈이 한 시대 늦게 출생한 것이(1509. 7. 10) 결코 우연한 것은 아닙니다. 광부의 집에 태어난 루터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귀족적 가정의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루터의 아버지가 루터의 성직(신부) 투신을 극렬히 반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칼빈의 아버지는 그 아들을 신부로 만들기 위하여 파리에 있는 라 마르슈 학교(College de La Marche)를 거쳐 몽테규(College Montaigu) 학교에서 라틴어를 통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칼빈의 아버지가 그 교구의 감독과 다툰 일이 있은 후,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기 위하여 올레안(orleans)대학으로 전학시켜 버렸습니다. 칼빈의 천재성은 이미 이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531년에 그의 아버지가 별세하자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파리 왕실 대학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전공하였습니다. 1532년, 2월에 23세의 나이로 올레안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는 1540년 8월 친구 부첼의 권고로 이델렛트 드 부르(Idelette de Bure)라는 두 남매가 있는 과부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녀는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아름다운 용모와 내성적인 성품으로 죽을 때까지 칼빈의 훌륭한 내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칼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가 죽은 후 칼빈은 자기의 남은 생을 홀로 보냈습니다.
I. 그의 회심(돌연한 회심 체험) 그가 언제 회개를 하고 로마 카톨릭에서 개종하여 종교개혁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 자기의 개심 체험을 약간 언급한 것뿐입니다. 거기서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법률 공부를 하고 있었으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밀한 섭리로서 다른 길로 나의 가던 길을 돌리셨다. 아직도 내가 교황 종교의 미신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돌연한 회심으로 나이에 비하여 완고하였던 나의 마음을 인도하여 주셨다"는 고백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회심은 아마 1532년부터 33년 사이에 곧, 그의 나이 23-24세 어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 때 그는 세네카의 관용론(De clementia)의 주해를 출판하여 명성이 일고 있을 때였습니다.
Ⅱ. 종교 개혁 운동에 가담하게 된 경우 그는 1533년 11월 1일 그의 절친한 친구 니콜라스 콥(Nicholas Cop)이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는 취임 연설문을 초안하게 된 것이 그가 일약 개혁자로 뛰어들게 된 경우가 됩니다. 그 친구 학장의 연설은 복음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인데,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게 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연설은 당시 파리 카톨릭 권력자들에게 일종의 선전포고문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칼빈의 친구 총장도 이단자로 낙인이 찍히고 칼빈은 거기에 동조자로 함께 파리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때는 이미 프랑스 파리를 위시하여 전역에서 신교도 박해가 맹렬했고,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는 수많은 신교도들을 화형에 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Ⅲ. 바젤에서의 기독교 강요 저술 프랑스에서 추방을 당한 칼빈은 국제도시 바젤로 도망갔습니다. 거기에서 틸ㄹ(Louis de Tillet) 신부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 집에 있는 훌륭한 도서관에서 연구에 몰두하면서 저 유명한 기독교강요를(Institutes of the christian Rrlegion) 저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책이 1536년 3월 곧 칼빈이 27세 되던 해 처음 출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책 서문에서 당시 개신교 박해의 선봉장이었던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글'을 써서 개혁주의 운동의 목적을 밝히고, 순교한 수많은 친구들의 신앙 정신을 밝히고, 개혁주의 신앙을 변증한바 있습니다. 이 책은 그 후 계속해서 수정 증보의 과정을 거쳐 1559년에는 라틴어 판으로, 1560년에는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는데 전 4권 80장의 걸작품이었습니다. 제 1권은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 제 2권은 그리스도론, 제 3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유효하게 하는 성령님론(구원론), 제 4권은 교회론, 은혜의 방편(성례론), 국가 정부론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개신교의 신학적 대전(大典)이 되었고, 지금까지 전 성경에 나타난 진리를 발견하는 신학 작업에 이 책을 능가하는 사상이 없었습니다. 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야말로 개신교의 보루요, 종교개혁의 위대한 산물이요, 개혁주의 신학의 요람이요, 또한 위대한 진리의 유산이 된 것입니다.
Ⅳ.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1차 체류) 기독교 강요를 출판한 후 그는 이태리 여행길에 올랐습니다(1536 봄). 거기에서 복음주의에 동조하는 동지들을 만나 개혁 운동을 약속 받고, 비밀리에 고향 파리를 방문하려 하였습니다. 고향에 가서 동생 안토니(Antonie)와 누이 마리아를 데리고 바젤이나, 스트라스ㅂ으로 가려고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1536년 7월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로 가는 길에 뜻밖에 독일과 프랑스간의 전쟁이 일어나, 불가불 제네바로 들러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네바에서 하룻밤만 묶고 갈 예정이었는데, 바로 그날 밤에 칼빈이 묶고 있던 숙소에 뜻밖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다름 아닌 개혁자 윌리암 파렐(W.Farel)이었습니다. 그는 베른(Bern)에서 이미 개혁 운동을 성공시키고 지금 제네바에 와서 로마와 접전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는 칼빈보다 20세나 높은 연장자로 칼빈의 인물됨을 익히 알고, 찾아와 자기와 함께 제네바에서 개혁 사역을 해 줄 것을 강청하였습니다. 물론 칼빈은 예측치 못한 파렐의 청구를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의 장면을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파렐은 복음 사업을 위한 비상한 열심에 불타 있었다. 그는 나를 붙잡기 위하여 몹시 애를 썼다. 나의 뜻은 조용히 학문을 연구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역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을 듣자 그는 자기의 강청을 가지고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저주하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 내가 이렇게 절박한 필요를 눈앞에 보면서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조용한 생활과 학문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두려움을 느껴 계획했던 여행을 포기하고 말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칼빈이 '제네바의 개혁자'로 역사의 기록이 되고만 경우였습니다. 이 때는 벌써 제네바시가 개신교로 기울어지고 제네바 시의회까지도(200인 의회) 천주교의 미사를 금지하도록 가결을 할 정도였습니다(153
5. 8). 이제 제네바는 개혁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기에 칼빈을 제네바 무대에 서게 한 것입니다. 나중에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로부터 제네바시의 목사로 인정을 받았으나,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칼빈과 파렐의 개혁운동을 반대하여 저들을 추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초점은 칼빈은 교회를 정치권(제네바 시의회)으로부터 분리시켜야 된다는 주장에 저들이 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1538년 4월 시의회는 저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하였고, 파렐과 칼빈은 급히 도망자의 신세로 제네바로 떠나야만 하였습니다. 그가 제네바에 머문지 2년이었습니다.
Ⅴ. 스트라스ㅂ의 칼빈 그후 파렐은 뇌샤텔로 도망가서 죽을 때까지(1565) 거기서 활동하였고, 칼빈은 바젤로 가려 했으나, 개혁자 부처의 절박한 요청 때문에 또 계획을 바꾸어 스트라스ㅂ으로 갔습니다(1538. 9). 칼빈은 여기에서 프랑스에서 피난 온 피난민 교회 목회를 하면서 저술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고 있는 많은 종교 개혁자들과 폭 넓은 교제를 갖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개혁자 부서(Buccer)와 카피토(capito), 멜랑톤(Melanchton)과 같이 친교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기독교 강요를 증보하여 출판하였고(1539), 로마서 주석을 썼습니다. 그리고 로마 교회 주교 사도레토(Jacopo Sadoreto)에게 보낸 유명한 반박문도 썼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도 여기에서 3년간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가난하고 고달픈 육신의 삶이었으나 영적으로 부요했고, 또 가정을 이룬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Ⅵ.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2차 체류) 칼빈을 추방한 제네바는 모든 면에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마침내 칼빈이 다시 필요한 제네바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추방했던 제네바 시의회는 다시 칼빈을 초청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고 이 소식을 들은 파렐은 또 다시 칼빈이 제네바로 되돌아가야 된다고 간곡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1541년 9월 13일에 칼빈은 그곳에서 추방된지 3년만에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칼빈의 나이 32세였을 때입니다. 그 때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던 1564년 5월 27일까지 23년간을 제네바에서 자기 삶을 불태웠습니다. 이제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개혁 사업들을 간추려 봅니다.
1. 먼저 그는 성 베드로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어 설교 사역을 중심하고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격주로 거의 매일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제네바에서만 2304회를 넘었습니다. 그 설교는 듣는 이에게 감화와 감동을 주었고 그 설교의 영향은 전 스위스, 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은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임했고 설교의 속삭임은 나팔의 권위를 나타내었다고 하였습니다.
2. 그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제네바를 만들기 위해 교회 헌법을 제정하고 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설교 직분을 전담하는 목사 목사와 협력하여 교회 행정(치리)을 담당하는 장로 교회 재정 봉사를 담당하는 집사직을 두었습니다.
3. 교리 문답서를 작성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철두철미하게 교리적 훈련을 받도록 하므로 성경이 신자들의 생활 원리가 되게 했습니다.
4. 그리고 끊임없는 저작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1542년 문답 형식으로 된 신앙 교육서(Cateohisme)를 작성했는데, 그 순서는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성례(세례와 성찬) 교리순으로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교회의 기도와 찬송의 형식이라고 되어 있는 예배 모범서도 작성했습니다.
5. 1556년부터는 제네바 시를 위하여 3대 실천 강령을 제창하고 실시하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에 의한 교회 생활의 질서와 규칙을 지킬 것,
둘째는 제네바 시에 좋은 교육 기관을 세우는 것,
셋째는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6. 1559년에는 제네바 아카데미(Academy)를 설립하여 그 제자 베자(1519-1605)에게 모든 운영 책임을 위임하였다. 그 학교가 개교된 이래 5년간
1,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칼빈의 강의를 들으려고 스위스는 물론이고 프랑스, 독일, 영국, 헝가리, 이태리, 폴란드, 스페인 등지에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들은 칼빈의 강의 노트를 가지고 모국으로 돌아가 그것을 개혁 운동의 길잡이로 삼았습니다. 그 출신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요한 낙스(John Knox)였습니다. 이 학교에서 배운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구라파 영계의 혜성 같은 존재들이 나왔습니다.
7. 아카데미의 창설이 끝나자 당국의 호의를 받는 중에 교회법을 다시 개정(1561)하여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키고, 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살도록 교회의 감독직을 재정하였습니다.
8. 1564년에는 '목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 등의 수많은 글을 썼는데 그 저서의 방대함은 칼빈 전집 59권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9. 칼빈주의 운동의 영향은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운동은 마침내 프랑스에서는 저 유명한 유그노(Hugnots)운동을 일으켜 1552년에 파리대회에서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화란에서는 칼빈주의 신학자 부라이(Guy de Bray)에 의하여 벨직신경(1561)이 채택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었고 영국에서는 칼빈주의 영향을 받아 '39개 신조'를 채택하고 나중에 저 유명한 청교도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독일 남부 지역에는 칼빈주의 일색으로 저 유명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채택되고, 스위스에는 칼빈주의 신학자 불링거(Bullinger)의 활약으로 츄리히, 바젤, 베른 등지에서 칼빈주의 폭풍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VI. 칼빈의 사상과 최후 칼빈은 '주님의 일은 신속하고 성실하게'라는 목표를 정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기도하고 성경을 강해 하면서 설교하다가 그의 인생이 끝나게 됩니다. 그는 1509년에 프랑스 북부 지역인 노욘에서 출생하여 1564년 5월 27일을 한 생애로, 55년을 살았습니다. 그가 떠나기전 그 해 2월 6일까지 설교를 계속했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여전인 4월 20일이 교회 예배 참석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임종을 지켜보는 친구들에게 "존경하는 여러분! 나의 무거운 짐을 여러분이 친절하게 함께 져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리며, 내가 여러분께 가르친 교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의 말씀을 전파하겠다는 것 외에 아무런 생각도 가지지 않고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만 위대하고, 만 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십니다"고 했습니다. 그의 중심 사상은 이렇게 '절대 하신 하나님 사상',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높이는 하나님 중심 사상'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광야의 소리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는 죤 낙스의 말을 빌리면, '사도 시대 이래 지상에 결코 있어 본 일이 없는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를 만든 분'이였습니다. 에밀 레오나드(Emile-G. Leonard)의 말을 따르면 칼빈은 제네바에서 '새로운 인간형, 곧 개혁파를 주조(만듦)하는데 성공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칼빈의 생애는 바로 로마서 11장 36절대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 돌아감이라 영광이 세세에 그에게 있으리로다. 아멘 하는 말씀에 기초했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 교회와 교단과 신학교는 이러한 칼빈의 후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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