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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요한의 고난 (계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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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곱 교회에 보내는 마지막 인사말로서 요한 자신이 처한 모습과 이 계시를 일곱 교회에 전하게 된 동기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사도요한이 이 놀라운 계시를 받은 것은 편안한 가운데 있을 때 이 계시가 임하지 아니했다. 예수로 인하여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음성을 듣는 영광을 차지한 것이다 아름다운 진주는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다. 조개 속에 모래가 들어가면 조개는 그 모래 때문에 아파서 액을 쏟아내고 또 모래가 들어오면 또 아파서 진액을 쏟아내고 그러기를 수백번  그런 고통 가운데서 아름다운 진주는 만들어진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고난 속에서태어난다. 하나님의 깊은 계시는 아방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골방의 고난 속에서 아픔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의 계시는 임한다. 예수님을 만난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만났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계시를 본 그 밧모 섬은 사도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유배 된 곳이었다. 유배지가 좋을 리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 눈에는 그 곳이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고립된 지역이었지만 사도 요한 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축복의 장소였다.
성도 여러분 ! 우리에게 찾아온 고난이 있습니까 그것은 곧 축복입니다. 사도 요한 같이 고난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 놀라운 계시를 볼 수 있었던 것은 7가지 신앙 모습이 사도 요한 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사도 요한의 7가지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가지자.
첫째 . 너희 형제요.
 나 요한은 사도라고 밝히지 않고 형제라고 밝히고 있다. 친숙한 의미를 주고 있는 말이다. 예수 안에서 함께 고난과 핍박을 함께 동참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당시의 모든 교회는 로마 핍박에 환난을 당하고 있을 때 였다.
 형제 그리스도인들 간에 호칭되던 공통된 명칭이다. 예수 안에서 한 지체가 되는 밀접한 관계를 뜻한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90세된 노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얼마든지 "나 사도 요한은 "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구의 대 사도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가 당시에 고난을 당하는 교회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겸손한 사도 요한 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 예수 안에서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육적인 형제보다도 더 뜨겁고 진한 형제애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들을 보면 너무 아니다. 작은 교회는 그래도 별로 인데 큰 교회는 서로가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서로 보고도 인사도 없다. 교회 안에서부터 형제애가 전혀 없다. 목사들도 권위주의는 있어도 겸손한 모습과 형제애는 보기가 힘들다. 사도 요한은 아마 예수님의 모습을 잊지 않고 닮으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예수 안에서 진정한 형제는 어떤 것이지 성경은 밝히고 있다.
1. 출생의 근원이 같아야 한다. (히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육신적인 형제도 그 출생의 근원이 같을 때 형제가 되듯이 믿음의 형제도 한 아버지로 말미암아 야만 한다.
2.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어야 한다.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3. 위급할 때 돕는 자이다. (잠17:17)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육신의 형제들도 위급할 때에 서로 도우듯이 믿음의 형제들도 위급할 때 서로 도우는 형제가 되어야 한다.
4. 연합하고 동거해야 한다. (시133:1) "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육신의 형제가 함께 살 듯이 믿음의 형제도 그리스도 몸이신 교회에서 함께 동거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5. 서로 우애해야 한다. (벧후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육신의 형제들도 우애가 있듯이 믿음의  있어야만 한다. 이런 형제애 사랑으로 지금 사도 요한은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계시록의 편지를 쓰고있는 것이다. 믿음의 형제를 사랑해서 이 놀라운 계시를 알려주고 있는 사도 요한의 편지를 일곱 교회 성도들이 감사하게 받고 깨달은 다면 다행이지만 저들이 받지 않은 다면 깨달음이 없다면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 이 편지는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진실로 깨닫고 재림 예수 소망 삼고 준비 한자들이 되기를 축원. 두 번째:예수의 환난과 나라에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사도 요한은 예수로 인한 여러 고난에 동참한자였고 그런 고난을 이제껏 잘 참아온 자였다. 그것은 곧 예수님 나라에 동참한 거 였다. 예수님 제자중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에 가장 많은 고난을 당했을 것이다. 그 고난을 참고 지금 밧모섬에서 성도들의 고난과 함께 동참하고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환난나라참음" 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 졌음을 나타낸다. 환난 예수 안에서 온전히 충성할 때 나타나는 고난을 가리킨다 나라 메시야적 통치의 축복을 말한다. 참음 충성된 자들에게 요구되는 적극적인 인내를 가리킨다. 사도요한은 예수 때문에 조금 고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의 환난이라고 했다.  나라라고 했다.  참음이라고 했다. 사도 요한과 일곱 교회 성도들은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의 나라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 예수 때문에 참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예수의 사랑을 버릴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을 보면 무조건 어렵고 힘들면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고난과 징계를 잘 구분해야 할 것이다. 예수 때문에 당한 것은 분명히 고난이다. 그러나 내가 죄를 지어서 어려움이 오는 것은 고난이라기 보다는 징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이 술을 팔고 담배를 팔고 하면서 어려움이 올 때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고난으로 보면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이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내게 찾아오는 어려움을 그리스도 고난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죄에대한 하나님의 징계일수가 있다. (벧전4:14-16)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의 환난이다. 오직 예수 때문에 찾아오는 고난이 우리에게 있을 때 성경은 기뻐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징계라면 우리는 기뻐해서는 안될 것이다. 철저한 회개부터 해야 할 것이다. 예수 때문에 인해서 당하는 환난을 잘 참고이기는 자는 예수님 나라에 동참한자와 같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자가 되자. (벧전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교회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말씀대로도 살지 않고. 교회를 위한 삶도 아니면서 나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다고 한다면 다시 한번 내가 진실로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지 자신의 마음에 조용히 물어보자 ! 사순절 기간이고 주님의 고난 주간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 고난, 핍박, 멸시,를 다 감당 하셨다. 우리도 내가 재림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을 위한 그 어떤 고난도 동참하는 자가 되자. 이 시대 고난을 싫어하는 자들이 많다. 고난이 오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 가 버린다. 이런 자들이 어찌 예수의 환난을 동참할 수 있겠는가 어찌 예수의 나라에 동참 할 수 있겠는가 어찌 오래 참음 속에 동참  재림 신앙을 가진 사도 요한의 모습을 우리도 가지려면 예수 안에서 오는 그 어떤 고난도 참고 인내해야만 한다. 재림 신앙은 아무나 갖는 신앙이 아니다. 예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찾아오는 그 어떤 고난도 환난도 각오를 하고 믿는 신앙이 재림 신앙이다. 주님을 위한 길이라면 죽음까지도 가야 하는 것이 재림 신앙이다. 적당주의로 예수 믿는 자들은 재림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재림 신앙을 가진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하나 뿐인 목숨을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서 바칠 수 있었다. 성도 여러분 재림 신앙은 우리의 신앙을 강하게 하여 준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두려워하지 마시고 예수로 인해서 오는 환난 담대히 받아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사도요한과 일곱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예수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환난을 당하고 있다. 사도 요한만 편하게 있고 성도들만 환난을 당하고 있는게 아니라 사도 요한 역시 밧모섬에서 말할 수 없는 환난을 겪고 있다.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모두 같은 환난과 고난을 당하며 믿음으로 참고이기고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살아 생전에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도 일곱교회 성도들이 함께 당했던 환난 우리도 모두 같이 당하게 될 것이다. (마24:21-22)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요16:33-33) "세상에 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 세 번째:"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 지금 사도 요한이 있는 장소가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밧모섬이라는 곳에 있는데 그 곳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해서 밧모섬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섬이라는 곳에 유배되어서 갇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최악의 악 조건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곳이 바로 사도 요한과 은밀히 만날 수 있는 장소 였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거하고 있습니까 편안하다! 편안하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복음 증거를 말한다. 밧모섬 송진이라는 뜻이다. 밧모섬이 섬은 에베소에서 약64km 정도 떨어진 해상에 있었다 이 섬은 길이가 16km. 넓이가 9.6km. 섬에는 산들이 300m 가량 솟아있는 고립되고 천박하고 바위투성이인 섬이었다. 사도 요한은 복음 증거 때문에 바위투성이 인 섬에 고립된 상태에 있었다. 밧모섬은 휴양지가 아니다. 당시 중죄를 지은 죄인들을 유배시켜 죽을 때까지 중노동을 시키는 곳이다.
 송진은 나무에 태양이 내리쬘 때 나무들이 견딜 수 없어서 나오는 진액이다. 밧모섬에 있는 사도 요한의 환난이 어떠한지 말해주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사도요한이 기거했다는 동굴은 지옥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의 처참한 장소였지만 사도요한에게 있어서는 하늘로 가는 문이었다. 때로는 고난과 박해가 인간에게 하나님과 만나는 계기가 된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수없이 볼 수 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때는 고향을 떠나서 허허벌판 광야에서 외롭고 고난 가운데 있을 때였다. 모세가 하나님을 불타는 가시덤블에서 만날 수 있었던 때도 애굽의 왕자을 버리고 광야에서 외롭고 천한 목동을 할 때였다. 엘리야가 호렙산 굴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외롭고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였다.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 영광의 모습을 본 것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외롭고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였다. 다니엘 역시 바벨론 포로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젊음을 바치며 외롭고 고난 가운데서 초림 예수를 만났다. 사도바울도 고난과 핍박과 외로움 가운데서 신약성경의 절반 가까운 13권을 기록했다. 그 중에서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서는 감옥에서 기록한것이어서 옥중 서신으로 불리고 있다. 존 번연도 국법을 어기고 복음을 설교한 죄로 베드포드 감옥에 갇혀 12년간의 옥중생활에서 성경 다음으로 유명한 "천로역정"을 기록했다. 마르틴 루터도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엄청난 일을 하고 순교했다. 예수님 제자 12명도 외로움과 핍박이 오히려 예수님을 위해 살게 했다. 그들도 모두 순교로 생을 마쳤다. 초대교회 성도들 역시 고난과 핍박이 오히려 예수를 더욱 뜨겁게 믿게 했고 하나 뿐인 목숨까지도 예수를 위해 아낌없이 바쳤다. 그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강하게 했을까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고난보다는 예수님이 더 보였기 때문이다. 인간들 눈에는 그 고난이 저주 같을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하늘로 가는 문이었다. 이 시대 성도들이 너무나 고난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복만 추구하고 있다. 복 받아서 뭘하겠다는 건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쓰겠다고 요구하는가 하나님을 속이지 말자 ! 우리의 마음속까지 다 보고 계신다. 요 2:25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신다고 했다. 고난도 모르고 고난이라면 깜짝 놀래는 자들이 축복을 해주면 예수를 위해서 살겠다고 한다  하나님은 속지 아니 하신다.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행14:2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 (롬8:17)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사도요한이 기도하던 동굴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데 주먹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바위에 움푹 패어 있다고 한다. 90세의 노구의 몸으로 기도하다가 일어날 때 바위를 잡았다. 너무 많이 잡아서 구멍이 났다는 얘기가 있다. 또 사도요한의 초상화를 보면 이마에 혹이 나와있다. 너무나 고통이 심해서 이마를 바위에 대고 기도하다 보니까 군살이 생겨서 혹이 대었다고 전해진다. 밧모섬의 이름 뜻인 송진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에 그 환난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90세의 노구로 몸으로 사도 요한은 짐승처럼 취급을 받으면서 고통을 겪었다. 밧모섬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다에 던져 버렸다. 고기 밥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지옥 같은 곳이었지만 서도 요한 에게 놀라운 장소였고 시간이었고 영광이었다. 여러분에게 어떤 고난이 있습니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고 더욱 강해지는 신앙인 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저 역시 생각해 보면 내가 도시에 나가서 바삐 목회를 했더라면 이 종말의 비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너무 바쁘면 성경 연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골에서 비록 고난을 겪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전파 할 수 있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고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존 번연은 "하나님은 내가 덧셈을 할 때 뺄셈을 하시고 내가 뺄 샘을 할 때 하나님은 덧셈을 하신다 " 우리의 고난 뺄셈 같지만 하나님은 덧셈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90세의 노구의 늙은이에게 내린 고난과 핍박은 인간의 눈으로는 저주 같지 보였지만 그 고난은 마지막 사도요한에게 준비된 축복이었다. 고난의 밧모섬은 바로 축복의 장소였다. '결론' 사도 요한의 7가지 형편중 3가지만 살펴보았다. 아이들이 성장할 때 수 없이 많이 아픈다. 병원도 여러번 다니게 되고.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아이들이 한번씩 아프고 나면 어른스러워 진 것을 보게 된다. 우리의 믿음 생활에도 고난이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온실에서 자란 꽃은 비바람과 햇빛에 약하다. 고난과 핍박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두려워 안된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 뜻을 발견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을 사용하신다.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갈 때 사람들은 사도요한의 형편을 불쌍히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곳 영광의 길이었다. 우리의 가는 길 비록 고달프고 힘들고 고난의 길일지라도 절대로 가다가 돌아서면 안된다. 사도요한은 후에 밧모섬에서 나와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요한은 또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잡힌다. 그리고 독사 굴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죽지않자 끓는 물 속에 집어넣었다.  사도요한은 죽지 안했다. 그러나 요한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사도 요한은 들것에 실려 살아가면서도 그리스도 모임에 나가서 복음을 외쳤다. 사도요한의 설교는 항상 "서로 사랑하라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사도 요한의 최후 모습이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예수를 위해 살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 사랑을 받은 자는 그 어떤 고난도 핍박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내 몸보다 더 사랑하십니까  가 내 삶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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