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벨의열매와씨 (계2:18-29)
본문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을 하고난 후에 하는 짓이란 선민 이스라엘을 세상에 팔아먹는 짓입니다. 그렇다고 옛날 고려의 공민왕처럼 백성들을 중 국의 노예로 상납한다는 말이 아니라-차라리 그러면 눈으로 보이니 그것이 죄라고 느끼기나 하지만-영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훼방하고 방해하 며 저지하는 짓을 서슴지 않으니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 매국 행위를 했 습니다. 열왕기에 보면 대치되는 인물 묘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 엘리야 이세벨의 대리자 아합 이 두 사람이 치열한 대치를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반역 행위라고 공박 을 하는데 지금에 우리야 역사적인 결론을 보고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선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구나 하고 알지 그 때 그 당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 말을 할 수가 있겠느냐 여러분 3년 병에 효자 없다고 , 3년 감음에 좋아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원인이야 젖혀 두고라도 우선 당장 굶어 죽게 되었으니 그 상황을 그렇게 만든 아합과 이세벨을 원망하 겠습니까 아니면 비를 내려 주지 못하도록 한 엘리야를 원망하겠습니까 엘리야죠 엘리야가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하는 말만 하지 않았다면 때를 맞춰 우로가 내려 들판에는 먹을 것이 풍성할 터인데 엘리야 그 방정맞은 입이 비가 내리지 못하도록 말을 해 가지고 이 환난 이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아니라고요 아니라고 말한 분 책임질 수 있습니까 한참 잘나 가던 사업이 쫄땅 망 했습니다.
마누라는 친정으로 자식은 고아원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할 상 황이라면 당신은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이 사건과 환경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이 사건과 환경이 오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보고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방향을 찾으시겠습니까 말 장난이 아니라 속 중심에서 나오는 진실에서 대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 양심상 옛날처럼 사업이 잘되게 해 달 라고 기도하지는 않더라도 자식과 마누라 한방에서 자고 싶다는 생각 안들 겠어요 들지요 . 그러면 고 기도를 한단 말입니다.(이 환경을 개선해 달 라고.) 그러면 우리 가족 한방에서 살면서 서로 얼굴이나 보게 해 주셨 으면 하는 고 바램은 인본주의에서 나온 임시 세상의 안식입니다. 고것이 평화입니다. 이 속에 천국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준 목적이 빠 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다 속에 빠지며 주님을 부른 것과 같습니다. 이 런 상태의 사람이 아합의 시대에 산다면 엘리야를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네가 아합과 같은 이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와 같은 이 사람이 되어라 하는 이것인데 우리가 성경 들고 하는 말이란 아합 이놈은 나쁜 놈이다. 왜 우상을 들고와서 섬겼으니까. 나는 좋은 놈이다. 왜 예수님 잘 믿으니까. 헌금 많이 하지 , 봉사 많이 하지 , 주일 엄수 잘하지 , 경건 생활하지 , 뭐하나 걸릴게 없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더 열심히 이렇게 살자!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 하사 더욱더 풍성한 은혜로 보답해 주실 것이다. 바알 믿으며 잘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쁘고 예수 믿으며 잘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괜찬습니까 하나님이 들 어가는 떡반죽 나가는 떡반죽 막 퍼부어 주십니까 성경 어디에도 물질 적 보상을 목적으로 한 말씀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그렇게 말하 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기도하는 자는, 가르치는 자는 다 이세벨을 따라 나선 바알 숭배자들입니다. 1 . 바알의 열매가 씨를 맺는다. 이스라엘에 비가 3년 6개월 동안 내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 비가 오지 않은 이유가 뭐냐 아합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이다. 비가 오게 하려면 아합이 이세벨의 목을 치고 바알과 아세라의 산당을 허물고 바알 숭배자들을 죽여야 한다. 맞습니까 그러면 속은 그대로 두고 종교적인 과오(過誤)만 회개를 하면 하나님이 용서를 합니까 예를 들어 당신이 아합인데 회개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정말 참 하나님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헛된 우상 바알을 섬겼 습니다. 이제 제가 잘못을 깨닫고 저와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 왔으니 하나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로를 내려 초목이 풍성하게 하여 주시 고 이 땅에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다면 하나님 이 이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 말입니다. 마치 이 기도는 남편이 바람난 아내를 여관방에서 끌어내어 가지고 실큰 두들겨 팻더니 울며불며 "내가 잘못했소 다시는 안 그러고 오직 당신만 사랑하것소."라고 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남편이 원하는 것은 아내의 잘못했다는 말입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 와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하나님께 제사 지내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나라 를 만드는 것이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면 바알보다 더 잘살게 해 준다고, 아세라 보다 더 많이 자식새끼 낳게 해 준다고 하셨습니까 아 니지요 분명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종교적 개심이 아니라 본 성적으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단일이 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아합은 이것을 자기 자신이 이루고 백성들이 이루도록 하여야 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흥하고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1)바알의 씨가 싹을 틔우고 결론 적으로 이세벨과 접 붙은 아합은 망했습니다.
남편 버리고 샛서방 얻어서 도망을 갔던 여자는 패가 망신을 하고 수치 를 당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세벨과 낳은 그 죄악의 새끼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에 그 씨가 싹을 틔웠고 두아디라에 싹을 틔운 씨가 결실을 맺어 오늘 우리에게 또 싹을 틔웠습니다. 그 씨는 바로 이세벨의 사상이고 이세벨의 목적이고 이세벨의 누림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이 이세벨과 음행(이스라엘은 영원한 하나님의 신부이다.) 한 것처럼 우리 기독 자들이 세상과 결혼을 하였는데 이 아합이 걸어 가고 있는 멸망에 길을 성경이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두아디라 교회가 똑같은 짓을 하였더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야 네 가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이 아합이 이세벨과 음행한 멸망의 길과 똑같은 길이다. 회개를 하여라. 라고 말씀을 해 주시고 또한 20세기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말씀해 주십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가 르 치는 교 훈-+ 이세벨 하나님 (비진리) (참진리)-+-+ 종 교 성 교 훈 성 누 림 성 사 역 성 목적성 추구성-+--+ 하나의 같은 모양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 임시 세상을 누리자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 영원 세상을 누리자 자, 여러분이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 전도자가 "우리 기도를 하자"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무엇입니까"하고 당신이 물으면 "기도는 하나님과 성도가 나누는 영적 대화다." 라는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기도(祈禱-빌기(祈) 빌도(禱)-)이니 나의 소원을 하나님께 말씀 드 리는 것이구나."라고 이해를 합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일반적으로 쓰는 기도라는 말과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라는 말이 같습니까 말의 의미적으로-+ 사상적으로 목적적으로 추구성적으로-+ +-육적인 욕구 충족 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이 그렇게 가르쳤다 라고 믿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나 이세벨이 가르쳐 준 기도나 기독교 내에서는 똑 같단 말입니다. 서로 문패가 틀린 것이 아니 라 이름도 똑 같고 하는 일도 똑 같고 보여주는 행동도 똑 같은데 사망의 길,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교훈은 입에 넣으면 달고 먹으면 좋고 누우면 포근한 사건과 환경을 주고 그것을 목적하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 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고 거룩한 종교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초신 자가 먹을 말씀이 있고 연단 된 신자가 먹을 말씀이 있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아이를 낳으면 젖 대신에 구적 물 퍼 먹입니까 이해하기 쉽도록 가르쳐 주는 것과 엉뚱한 것으로 가르 쳐 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예를 듭시다. 이 글을 읽으신 분 중에 기도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계신 분 10명만 계시면 오늘저녘 짜장면을 사겠습니다. 없단 말입니다. 왜 없느냐 타락한 기본 성으로 기도라는 개념을 잡았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 기도가 빌기자에다 빌도자를 쓰는데 절에가서 기도하는 내용이나 삼 신 당에 가서 기도하는 내용이나 성모마리아 한테 가서 기도하는 내용이나 예수한테 가서 기도하는 내용이나 똑 같다면 이게 옛사람이 하는 기도입니 까 거듭난 새사람이 하는 기도입니까 빌고 빌고 빌고 빌고 또 빌어서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이 기도를 모세가 했습니까 엘리야가 했습니까 아니면 세레요한이 했습니까 성경에 누가 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으며 하라고 가르 치고 있으며 예배후에 하는 목사님의 축도가 임시세상것이냐 그 말입니다. 타락한 옛사람적 개념으로 예수를 믿고 타락한 개념으로 예수를 전 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자가 타락한 개념으로 예수를 받아들이고 다시 전도하기를 타락한 개념으로 예수를 전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도개 삐 방망이를 들고서 이 집 저 집 쫓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민들레 홀씨라는 말을 하시죠 노래 가사가 아니라 민들레 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세벨이라는 여자 하나가 이스라엘에 바알의 씨를 들고 와서 퍼트렸더니 그 씨가 종래에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퍼져서 내가 죽도록 충성 봉사하며 예수를 전하여도 예수는 온데간데없고 바알만 전하였다는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지금 구원받았다 받지 못했다 그 말을 하는 게 아 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의문 자체를 제기하지 못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았는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 시는 구원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구렁이를 제주도 은갈치인줄 알고 예쁘게 포장을 해서 계장님 댁에 선물을 하였더니 계장님은 과장님에게 과장님은 사장님 에 댁에 사장님은 또 장관에게 장관은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과 같단 말입니다. 왜 그것이 제주에서 나는 은갈치 인줄 아니까. 포장지에 그렇게 써 있으니까 하지만 신앙은 포장이나 상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물이 중요합니다.
2) 씨의 종자를 알자 여러분 농사를 지어 보셨습니까 저는 농부에 아들이라 농사짓는 광경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 의 농사의 성패는 어떤 품종의 씨를 선택을 해서 심느냐 하는 것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래서 벼라는 품종 하나에도 씨가 수천 가지가 넘습니다. 그 지역의 토양과 기후와 풍향에 따라 각기 다른 씨가 선택되고 기 해의 절기에 따라 다른 씨가 선택됩니다. 호박을 예로 듭시다. 호박도 길 따란 호박 둥근 호박 주먹 호박 그리고 약재로 쓰는 늙은 호 박 등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호박의 씨도 모양이 제 각각이라는 것입니다. 볍씨도 마찬가지이고 옥수수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이 씨를 분별하고 구별할 줄 아는 실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건(밭)이 왔을 때 그것을 대처하고자 하는 중심 목 적(씨가)이 영적인 것이냐 육적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것 다 몰라도 구원 도리 면에서는 전문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말입니다. 내가 지금 받는 교훈이 생명 교훈이냐 사망 교훈이냐 잘 알 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또 지금 내가 주는 교훈이 살리는 교훈이냐 죽이는 교훈이냐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모르니까 예수를 죽였지 않습니까 생명 교훈이 생명 교훈인지 구별하고 분별할 수 있는 실력이 없으면 예수(진리)팔고 죽이는 결과가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결론 옥수수 씨는 다 같은 옥수수 씨인데 이 옥수수 씨가 어린애 이빨 빠지듯 듬성듬성 알이 밖혀있는 그런 옥수수 씨냐 아니면 슈퍼 옥수수 씨냐 아 니면 옛날 할머니가 쪄 주시던 찰 옥수수 씨냐 하는 것을 분별하고 구별 하고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은 옥수수 계통에 전문가가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바른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 교훈에 전문 가가 되어야 합니다. 주먹구구 식으로 예수 이름 붙이고 정교단 간판 붙 이고 교리적으로 한치 어긋남이 없고 도덕적 윤리적 흠이 없으면 그것이 다 옳은 진리 교훈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로서 이 것이 임시 세상에서 맺은 씨냐 아니면 영원 세상에서 맺은 씨냐 하는 씨의 근원을 분별,구별을 하여서 선한 씨 의로운 씨 만을 골라서 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만큼의 이룰 구원을 주셨는데 가르치는 교훈이 요 만큼 밖에 이루지 못하도록 하였다면 이만큼을 요만큼으로 격감시키도록 가르친 교훈이 비진리 교훈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찰 옥수수 씨다 그래서 얻어(교훈을 받아)다가 심었 더니 그것을 밭에다 심어 보니 사료용 옥수수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료용 옥수수인지 찰 옥수수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나는 또 종자를 다른 사람에게 찰옥수수 씨라고 나누어 줬습니다.(교훈을 전하여 준다.) 그러면 알고 주었건 모르고 주었건, 또 모르고 받았건 알고 받았건 간에 밭에 심은 옥수수는 사료용입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손해는 누가 보느냐 바로 그 옥수수 씨를 분별하고 가려내고 판단하지 못한 밭 주인에 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한해 농사를 망친 것도 망친 것이지만 남의 농 사망친것 까지 책임을 져야 한단 말입니다. 까놓고 바리새인 중 누구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싶어서 죽였습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모르니까 죽였지. "하지만 나는 몰랐어요. 한 번만 용서해 줘요." 그런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실이 지워 집 니까 한 예를 듭시다. 당장 내일이라도 예수님이 재림 하셔가지고 "아무개야 내가 너에게 3천만 원을 주고 3십억원을 벌 수 있도록 조치하여 놓았는데 얼마를 벌었느냐"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 찐 옥 수수 장사를 하려고 옥수수를 심었는데 사료용 옥수수를 심어서 쫄딱 망하 고 젖소 키우는 사료를 만들려고 사료용 옥수수를 심었는데 찰 옥수수를 심어서 쫄딱 망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겨우 본전치기 3천만 원만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착하고 의로운 종아 수고했다. 이리 와서 나 와 함께 먹고 마시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성도 나에게 이루라고 예정하였던 그 구원을 내가 외면하였다는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상대가 속아 주어야 변명의 여지라도 있는데 상대는 창조자 시니 변명을 못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과 마음속 깊은 것까지 나눌 수 있는 인격자로서 영원 세상에서의 교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목적하시는 것은 신앙 인격의 성숙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궁극적 목적인 만큼 현재 우리 성도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이러한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차원 높은 구원을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가로막 고 이것이 아닌 임시적인 평화와 안위와 안락과 복락을 보여주며 이것이 전부 인양 가르치는 교훈이 이세벨의 교훈이고 위에서 언급한 씨입니다. 비록 겉 모양은 똑같으나 속 알맹이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 때 우리는 그 것을 분별하고 구별하여 가려낼 수 있는 영적 실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 진리의 말씀을 먹고 싹 틔우고 꽃피워 결실 맺는 아름다운 나 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누라는 친정으로 자식은 고아원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할 상 황이라면 당신은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이 사건과 환경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이 사건과 환경이 오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보고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방향을 찾으시겠습니까 말 장난이 아니라 속 중심에서 나오는 진실에서 대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 양심상 옛날처럼 사업이 잘되게 해 달 라고 기도하지는 않더라도 자식과 마누라 한방에서 자고 싶다는 생각 안들 겠어요 들지요 . 그러면 고 기도를 한단 말입니다.(이 환경을 개선해 달 라고.) 그러면 우리 가족 한방에서 살면서 서로 얼굴이나 보게 해 주셨 으면 하는 고 바램은 인본주의에서 나온 임시 세상의 안식입니다. 고것이 평화입니다. 이 속에 천국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준 목적이 빠 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다 속에 빠지며 주님을 부른 것과 같습니다. 이 런 상태의 사람이 아합의 시대에 산다면 엘리야를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네가 아합과 같은 이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와 같은 이 사람이 되어라 하는 이것인데 우리가 성경 들고 하는 말이란 아합 이놈은 나쁜 놈이다. 왜 우상을 들고와서 섬겼으니까. 나는 좋은 놈이다. 왜 예수님 잘 믿으니까. 헌금 많이 하지 , 봉사 많이 하지 , 주일 엄수 잘하지 , 경건 생활하지 , 뭐하나 걸릴게 없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더 열심히 이렇게 살자!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 하사 더욱더 풍성한 은혜로 보답해 주실 것이다. 바알 믿으며 잘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쁘고 예수 믿으며 잘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괜찬습니까 하나님이 들 어가는 떡반죽 나가는 떡반죽 막 퍼부어 주십니까 성경 어디에도 물질 적 보상을 목적으로 한 말씀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그렇게 말하 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기도하는 자는, 가르치는 자는 다 이세벨을 따라 나선 바알 숭배자들입니다. 1 . 바알의 열매가 씨를 맺는다. 이스라엘에 비가 3년 6개월 동안 내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 비가 오지 않은 이유가 뭐냐 아합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이다. 비가 오게 하려면 아합이 이세벨의 목을 치고 바알과 아세라의 산당을 허물고 바알 숭배자들을 죽여야 한다. 맞습니까 그러면 속은 그대로 두고 종교적인 과오(過誤)만 회개를 하면 하나님이 용서를 합니까 예를 들어 당신이 아합인데 회개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정말 참 하나님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헛된 우상 바알을 섬겼 습니다. 이제 제가 잘못을 깨닫고 저와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 왔으니 하나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로를 내려 초목이 풍성하게 하여 주시 고 이 땅에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다면 하나님 이 이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 말입니다. 마치 이 기도는 남편이 바람난 아내를 여관방에서 끌어내어 가지고 실큰 두들겨 팻더니 울며불며 "내가 잘못했소 다시는 안 그러고 오직 당신만 사랑하것소."라고 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남편이 원하는 것은 아내의 잘못했다는 말입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 와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하나님께 제사 지내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나라 를 만드는 것이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면 바알보다 더 잘살게 해 준다고, 아세라 보다 더 많이 자식새끼 낳게 해 준다고 하셨습니까 아 니지요 분명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종교적 개심이 아니라 본 성적으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단일이 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아합은 이것을 자기 자신이 이루고 백성들이 이루도록 하여야 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흥하고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1)바알의 씨가 싹을 틔우고 결론 적으로 이세벨과 접 붙은 아합은 망했습니다.
남편 버리고 샛서방 얻어서 도망을 갔던 여자는 패가 망신을 하고 수치 를 당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세벨과 낳은 그 죄악의 새끼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에 그 씨가 싹을 틔웠고 두아디라에 싹을 틔운 씨가 결실을 맺어 오늘 우리에게 또 싹을 틔웠습니다. 그 씨는 바로 이세벨의 사상이고 이세벨의 목적이고 이세벨의 누림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이 이세벨과 음행(이스라엘은 영원한 하나님의 신부이다.) 한 것처럼 우리 기독 자들이 세상과 결혼을 하였는데 이 아합이 걸어 가고 있는 멸망에 길을 성경이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두아디라 교회가 똑같은 짓을 하였더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야 네 가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이 아합이 이세벨과 음행한 멸망의 길과 똑같은 길이다. 회개를 하여라. 라고 말씀을 해 주시고 또한 20세기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말씀해 주십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가 르 치는 교 훈-+ 이세벨 하나님 (비진리) (참진리)-+-+ 종 교 성 교 훈 성 누 림 성 사 역 성 목적성 추구성-+--+ 하나의 같은 모양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 임시 세상을 누리자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 영원 세상을 누리자 자, 여러분이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 전도자가 "우리 기도를 하자"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무엇입니까"하고 당신이 물으면 "기도는 하나님과 성도가 나누는 영적 대화다." 라는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기도(祈禱-빌기(祈) 빌도(禱)-)이니 나의 소원을 하나님께 말씀 드 리는 것이구나."라고 이해를 합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일반적으로 쓰는 기도라는 말과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라는 말이 같습니까 말의 의미적으로-+ 사상적으로 목적적으로 추구성적으로-+ +-육적인 욕구 충족 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이 그렇게 가르쳤다 라고 믿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나 이세벨이 가르쳐 준 기도나 기독교 내에서는 똑 같단 말입니다. 서로 문패가 틀린 것이 아니 라 이름도 똑 같고 하는 일도 똑 같고 보여주는 행동도 똑 같은데 사망의 길,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교훈은 입에 넣으면 달고 먹으면 좋고 누우면 포근한 사건과 환경을 주고 그것을 목적하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 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고 거룩한 종교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초신 자가 먹을 말씀이 있고 연단 된 신자가 먹을 말씀이 있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아이를 낳으면 젖 대신에 구적 물 퍼 먹입니까 이해하기 쉽도록 가르쳐 주는 것과 엉뚱한 것으로 가르 쳐 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예를 듭시다. 이 글을 읽으신 분 중에 기도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계신 분 10명만 계시면 오늘저녘 짜장면을 사겠습니다. 없단 말입니다. 왜 없느냐 타락한 기본 성으로 기도라는 개념을 잡았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 기도가 빌기자에다 빌도자를 쓰는데 절에가서 기도하는 내용이나 삼 신 당에 가서 기도하는 내용이나 성모마리아 한테 가서 기도하는 내용이나 예수한테 가서 기도하는 내용이나 똑 같다면 이게 옛사람이 하는 기도입니 까 거듭난 새사람이 하는 기도입니까 빌고 빌고 빌고 빌고 또 빌어서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이 기도를 모세가 했습니까 엘리야가 했습니까 아니면 세레요한이 했습니까 성경에 누가 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으며 하라고 가르 치고 있으며 예배후에 하는 목사님의 축도가 임시세상것이냐 그 말입니다. 타락한 옛사람적 개념으로 예수를 믿고 타락한 개념으로 예수를 전 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자가 타락한 개념으로 예수를 받아들이고 다시 전도하기를 타락한 개념으로 예수를 전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도개 삐 방망이를 들고서 이 집 저 집 쫓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민들레 홀씨라는 말을 하시죠 노래 가사가 아니라 민들레 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세벨이라는 여자 하나가 이스라엘에 바알의 씨를 들고 와서 퍼트렸더니 그 씨가 종래에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퍼져서 내가 죽도록 충성 봉사하며 예수를 전하여도 예수는 온데간데없고 바알만 전하였다는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지금 구원받았다 받지 못했다 그 말을 하는 게 아 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의문 자체를 제기하지 못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았는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 시는 구원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구렁이를 제주도 은갈치인줄 알고 예쁘게 포장을 해서 계장님 댁에 선물을 하였더니 계장님은 과장님에게 과장님은 사장님 에 댁에 사장님은 또 장관에게 장관은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과 같단 말입니다. 왜 그것이 제주에서 나는 은갈치 인줄 아니까. 포장지에 그렇게 써 있으니까 하지만 신앙은 포장이나 상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물이 중요합니다.
2) 씨의 종자를 알자 여러분 농사를 지어 보셨습니까 저는 농부에 아들이라 농사짓는 광경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 의 농사의 성패는 어떤 품종의 씨를 선택을 해서 심느냐 하는 것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래서 벼라는 품종 하나에도 씨가 수천 가지가 넘습니다. 그 지역의 토양과 기후와 풍향에 따라 각기 다른 씨가 선택되고 기 해의 절기에 따라 다른 씨가 선택됩니다. 호박을 예로 듭시다. 호박도 길 따란 호박 둥근 호박 주먹 호박 그리고 약재로 쓰는 늙은 호 박 등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호박의 씨도 모양이 제 각각이라는 것입니다. 볍씨도 마찬가지이고 옥수수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이 씨를 분별하고 구별할 줄 아는 실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건(밭)이 왔을 때 그것을 대처하고자 하는 중심 목 적(씨가)이 영적인 것이냐 육적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것 다 몰라도 구원 도리 면에서는 전문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말입니다. 내가 지금 받는 교훈이 생명 교훈이냐 사망 교훈이냐 잘 알 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또 지금 내가 주는 교훈이 살리는 교훈이냐 죽이는 교훈이냐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모르니까 예수를 죽였지 않습니까 생명 교훈이 생명 교훈인지 구별하고 분별할 수 있는 실력이 없으면 예수(진리)팔고 죽이는 결과가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결론 옥수수 씨는 다 같은 옥수수 씨인데 이 옥수수 씨가 어린애 이빨 빠지듯 듬성듬성 알이 밖혀있는 그런 옥수수 씨냐 아니면 슈퍼 옥수수 씨냐 아 니면 옛날 할머니가 쪄 주시던 찰 옥수수 씨냐 하는 것을 분별하고 구별 하고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은 옥수수 계통에 전문가가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바른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 교훈에 전문 가가 되어야 합니다. 주먹구구 식으로 예수 이름 붙이고 정교단 간판 붙 이고 교리적으로 한치 어긋남이 없고 도덕적 윤리적 흠이 없으면 그것이 다 옳은 진리 교훈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로서 이 것이 임시 세상에서 맺은 씨냐 아니면 영원 세상에서 맺은 씨냐 하는 씨의 근원을 분별,구별을 하여서 선한 씨 의로운 씨 만을 골라서 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만큼의 이룰 구원을 주셨는데 가르치는 교훈이 요 만큼 밖에 이루지 못하도록 하였다면 이만큼을 요만큼으로 격감시키도록 가르친 교훈이 비진리 교훈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찰 옥수수 씨다 그래서 얻어(교훈을 받아)다가 심었 더니 그것을 밭에다 심어 보니 사료용 옥수수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료용 옥수수인지 찰 옥수수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나는 또 종자를 다른 사람에게 찰옥수수 씨라고 나누어 줬습니다.(교훈을 전하여 준다.) 그러면 알고 주었건 모르고 주었건, 또 모르고 받았건 알고 받았건 간에 밭에 심은 옥수수는 사료용입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손해는 누가 보느냐 바로 그 옥수수 씨를 분별하고 가려내고 판단하지 못한 밭 주인에 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한해 농사를 망친 것도 망친 것이지만 남의 농 사망친것 까지 책임을 져야 한단 말입니다. 까놓고 바리새인 중 누구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싶어서 죽였습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모르니까 죽였지. "하지만 나는 몰랐어요. 한 번만 용서해 줘요." 그런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실이 지워 집 니까 한 예를 듭시다. 당장 내일이라도 예수님이 재림 하셔가지고 "아무개야 내가 너에게 3천만 원을 주고 3십억원을 벌 수 있도록 조치하여 놓았는데 얼마를 벌었느냐"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 찐 옥 수수 장사를 하려고 옥수수를 심었는데 사료용 옥수수를 심어서 쫄딱 망하 고 젖소 키우는 사료를 만들려고 사료용 옥수수를 심었는데 찰 옥수수를 심어서 쫄딱 망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겨우 본전치기 3천만 원만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착하고 의로운 종아 수고했다. 이리 와서 나 와 함께 먹고 마시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성도 나에게 이루라고 예정하였던 그 구원을 내가 외면하였다는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상대가 속아 주어야 변명의 여지라도 있는데 상대는 창조자 시니 변명을 못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과 마음속 깊은 것까지 나눌 수 있는 인격자로서 영원 세상에서의 교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목적하시는 것은 신앙 인격의 성숙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궁극적 목적인 만큼 현재 우리 성도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이러한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차원 높은 구원을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가로막 고 이것이 아닌 임시적인 평화와 안위와 안락과 복락을 보여주며 이것이 전부 인양 가르치는 교훈이 이세벨의 교훈이고 위에서 언급한 씨입니다. 비록 겉 모양은 똑같으나 속 알맹이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 때 우리는 그 것을 분별하고 구별하여 가려낼 수 있는 영적 실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 진리의 말씀을 먹고 싹 틔우고 꽃피워 결실 맺는 아름다운 나 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