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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나무를잘라서 (계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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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세벨의 교훈이란 이방 종교나 우상을 들고 와서 섬기자고 하는 표면적 종교 다원주의가 아닌 지상천국(地上天 國)을 건설하고자 하는 사상적 이질성을 들고 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의 목적(충분한 설명은 되지못하겠지만 이하 인생관(人生 觀)이라고 표현하자)에서 비롯되었고 이 목적성이 아합과 같은 죄인을 낳는 것입니다. 지상천국 그러니까 몹시도 생소한 단어인 듯 싶고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로 여겨질지 모르나 현재적 삶에서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게, 정신적으로는 좀더 안락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목적이 바로 지상천국 주의 에서 비롯된 사상입니다. 하여 향상된 삶과 질을 얻고자 하는 바램 혹은 안주하고자 하는 그 자체가 지상천국 주의입니다. 따라서 이 죄는 나폴레 옹이든 아니면 나폴레옹이 다스리던 나라안의 거지든, 불로초를 먹고자 하 던 진시황제든 아니면 불로초를 캐러갔던 신하든 구원의 본질을 놓쳤다는 점에서는 차등이나,차별이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웃나라를 침략하고자 노 심초사(勞心焦思) 하는 것이나 거지가 빵 한 조각 훔펴먹기 위해 노심초사 (勞心焦思)하는 것이나 인생 전부를 걸고 그것에 목적하는 삶을 사는 죄의 본질 면에서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의 창조 목적을 상실 하였다는 점에서 같고 영원한 것을 망각하였다는 데서 같고 임시적인 것을 취하여 만족하고자 하였다는 것에서 같기 때문에 그것이 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합 저놈은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하지 말고 내가 나쁜 놈이라고 가슴을 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주제는 임시적이고 가견적인 세상 것을 목적하고 추구하며 누리 고자 하는 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나무를 예수님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인위적인 평화를 갈망했던 자들이 장차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볼 것 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을 협박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여러분을 겁주거나 꼬시거나 훈계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하는 말이 진리 적인가 비 진리 적인가 하는 판단은 여러분 스스로가 하십시오.
왜냐하면 구원이란 여러분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 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6-18 현재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그 열매는 어느 나무에서 맺은 것이고 그 나무는 어디에다 뿌리를 박고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열매-+ +-는 종교에다 뿌리를 박은 나무에서 열리고 도덕적인 열매는 도덕에다 뿌리를 박은 사상적나무에서 열리고 윤리적인 열매는 윤리적으로만 사는 인생에서 열리고 사회경제적 열매 이 땅이 최고 인줄 알고 발버둥치는데서 열리고 정치노선적 열매-+ +-하나님의 힘이 되었던 귀신의 힘이 되었든 세상 을 좋게 꾸며 보자 하는데서 열린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악한 열매를 심판하시는가 우리는 일상적으로 결과를 놓고 회개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에 다니는 처녀가 유부남과 사랑을 하게 되었다 칩시다. 그리고 넘지 못 할 선까지 넘어 버렸습니다. 아이도 생겨서 산부인과에 가서 중절 수술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처녀가 회개를 하는데 유부남을 사랑한 죄, 간음한 죄, 생명을 죽인 죄 이 죄들을 회개합니다. "하나님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 물론 이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며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죄의 자각이 있어야 그 길을 다시 걷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양심의 가책을 꼭 느껴야 합니다. 이것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그 처녀는 양심에 화인 맞 은 자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유부남을 사랑 한 죄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이며 예수를 믿는 그 처녀가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육체적 임시의 사랑) 이 둘의 사랑이 있는데 택자인 이 처녀가 사랑의 가치 기준을 어디에다 두고 있느냐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시 고자 하는 아가페적 사랑은 무시되고 자기가 가지고자 하는 애로스적 사랑 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눈으로 보지 않아 도 뻔한 일 아닙니까 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이하 구원도리-救援道理) 를 무시하고 제 좋을 대로하다가 도덕적 윤리적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소위 이것을 죄라고 하는데 일이 이렇게 되도록 만 든 자기 자신은 회개를 하지 않고 단순하게 자기가 지은 죄의 결과만을 회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진실로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통곡의 회개를 한다 하더라도 이 회개는 본질적 접근을 하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니 머루나무 가지를 자른다고 머루가 안 열리는 것 봤습니까 열립니다. 다른 가지에서 또 머루가 또 열려요 . 그 러니까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계속해서 같은짓(모양과 형 태는 다르나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한 종류다. )을 반복하게 된단 말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잘 보세요. 사람은 바뀌고 이름은 바뀌지만 마귀의 역 사는 똑 같단 말입니다.
2)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 다 불에 던지우리라 위에 제목의 본문은 이렇습니다.(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 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마:10)
이 말씀 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농부(하나님)가 목적하고자 하였던 결실(구원의 영광)을 얻고자 땅(세상)에다 나무(성도)를 심었더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고 나쁜 열매를 맺어서 그 나무를 자르려고 뿌리에 도끼를 두었다는 뚯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냐 나쁜 열매냐 하는 가치기준은 누가 정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나무를 심기전부터 이 땅에 사람이라는 나무를 심 어 구원이라는 열매를 따야겠다 라는 계획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 인 내가 주제넘게도 "내가 가진 구원은 싫어! 쪼금해 저 옆에 호박처럼 나 도 큰 열매를 맺고 싶어!" 그래서 호박이 가진 것을 훔쳐다가 구원의 열매 와 호박을 썩었습니다. 그러면 그 열매가 가치가 있겠습니까 가치가 없 습니다. 거 뭐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도끼를 뿌리에 가져다 놓으시고 가만히 생각해 보십니다. " 그래 좀더 기다려 보자. " 하나님의 이 사랑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앞서 말한 그 참된 회개를 하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응을 해서 내가 그 결과를 일구 어 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도끼를 가져다 놓고 참고 계십니다. A)회개를 하지 않으면 여러분 하나님은 인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뻐 하실 줄도 아시고 안타까워 하실 줄도 아십니다. 또 사랑하실 줄도 아십니다. 또 미 워하실 줄도 아십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우리 구원자가 엉뚱한 길 망할길 로 가면 괴로워 하시고 슬퍼하심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시집 장가를 가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애물 단지 애물단지 그런 애물단지가 없습니다. 하루는 이 아들이 서랍에서 돈 을 꺼내갑니다. "얘야 그러지 마라 . 그러면 나중에 도둑놈 된다."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타이르고 타일러도 이 노무 자식이 계속해서 그럽니다. 그 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자식 하나 없는 샘 치는게 났 겠다고 한탄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죽도록 혼을 내 줍니다. 왜 다시는 도둑질 못하게 하려고 장차 영광자 만들어 줄려고 매 질이라도 해서 버릇을 잡습니다.
1)손해다. 저는 장애로 인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혼자서 공부를 했습니다. 친구들 숙제를 대신하며 공부하고 전과 책을 사다가 외우기도 하고 그렇게 공부를 하고 20여세가 되어 중등과정 검정고시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 처음으로 교과서를 앞에 놓으니 큰 절벽앞에 서는 것 같았 습니다.
왜냐하면 기초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수학 공식을 풀 수가 없 었습니다.
여러분. 지난날 우리는 누구나 배움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때 제대로 배우지 못함을 땅을 치고 통곡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서 예수 믿을 때 구원의 기회가 있지 죽고나면 말짱 꽝입니다. 구원은 경제 원리와 같습니다. 세계가 엔고 현상으로 경기 호왕을 누릴 때 아시아 4마리의 작은 용은 급격한 경제 성장을 했는데 한국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정치가들이 경제 우선 주의가 아닌 정치 우선 주의로 경제를 희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도 성장을 하지 못하고 완만한 경기 성 장을 했기 때문에 대만 싱카폴 홍콩들과 비교할 때 저조한 성장율 이였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다른 나라들은 돈을 많이 벌 때 우리 나라는 돈을 조금밖에 벌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돈을 벌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손해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란트를 받았던 세명의 종들에게서 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2)손해를 본 만큼 심판이 있다. 이런 표현을 하면 좀 모순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이야 초등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교육받는 사람보다 받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이 가난을 대물림했습니다. 무교육자(無敎育者)는 대대로 가난했고, 교육을 받은 사람은 받은 만큼 풍요로웠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 하실 줄 믿습니다. 이 논리를 구원에 놓고 적용해 봅시다. 앞서 말한바 약간의 예외라는 것이 있지만 일반적 이치로 볼때 무리한 적용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고 , 우리는 구원의 기회를 얻었 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만큼 구원을 받지(이루 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원을 받고 이루는 일에 힘쓰지 않는다는 말 입니다. 그것은 마치 학교에서 수업을 열심히 받는 학생과 수업을 열심히 받지 않는 학생과 비교되는 것과 같습니다. 지식이 곧 실력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식이 실력을 키울수 있습니다. 지식이 없는 자가 실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분중 학교에 가보지도 못한 장애자도 있고 사업가 혹은 학 생 혹은 직장인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예로 놓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학생시절 공부 안하고 땡땡 이치고 떡볶이집 만화방 극장 공원 등지로 놀 러 다니고 그랬더니 어떻게 심판을 받습니까 일주일에 한번꼴로 학교에서 시험을 보죠 두어 달 간격으로 중요한 시 험을 봐서 점수가 떨어졌다 그러면 선생님의 몽둥이가 날라 오죠 이것도 심판입니다. 그래도 공부를 안하면 대학에 떨어지죠 이것도 심판입니다. 다행히 대학에 붙어도 3류에 속하는 대학에 전공과목이라고는 알아주지 도 않는 과에 들어가서 취직도 안되지요. 이것도 심판입니다. 취직을 해도 대기업에 가지는 못하고 중소기업 혹은 자영업으로 직장을 잡는데 직장은 언제 부도가 날지 모르고 장사를 해서 돈을 번다고 해도 일 당버는게 고작입니다.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지식이 없으니 실력이 자라 지 못하고, 실력이 자라지 못한 자와 실력이 자라난 자와는 실력의 차등이 있게 되고 이는 현실적으로 볼 때 공부를 게을리한 심판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습니까 실력이 좋은 학생은 양질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고 실력이 나쁜 학생은 그 반대의 삶을 누릴 것입니다. 이 것이 심판입니다. 공부 잘해서 잘나 가는 놈은 가족끼리 외식을 해도 호텔에서 고급요리 먹지만 공부 못하는 놈은 기껏해야 피자 한쪽 사 먹고 맙니다. 지금 호텔 에서 밥먹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누리는 질에서 이 렇게 차등이 있고 이것이 곧 심판이다 이 말을 하는 겁니다.
3) 세상은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 학교란 왜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학교란 지식을 얻기 위해 있습니다. 그러면 지식을 왜 얻습 니까 실력을 키우기 위해 지식을 얻습니다. 그러면 실력자는 왜 되려 합니까 장래의 영광 자가 되고자 해서 지식을 얻고 실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육자십니다. 학생을 앉혀 놓고 바른진리식을 가르치고 학생 스스로 하여금 전달받은 진리 지식으로 자기 자신의 실력을 키우고 장래 실력적 인격적으로 훌륭한 영광 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오늘에 우리 기독 자들은 하나님의 이 심정을 모르고 패 역한 기 존성으로 공부하기를 거부하고 실력자 되기를 무시하고 장래의 영광에 무 치(無恥-부끄러움을 모름)하여 학교에 등교하여서는 교과서 펼쳐놓고 연애 편지 쓰고 집에와 서는 뽄드 마시며 학생들을 간섭하지 않고 제 좋을 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오히려 부추기는 다른 학교로 전학 가려고 하는 이 자가 바로 아합입니다. 바로 당신이고 저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불러서 타이르시고 얼마나 채찍을 드셨습니까 그럼에도 계속해서 세상으로 나갔다면 하나님은 지금쯤 하나님 은 무관심하게 지켜보실 겁니다. 하나님 스스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치 농부가 도끼를 나무 뿌리에 두고서 나무에게서 좋은 열매가 열리기를 기다 리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죽지 않았다면 구원이 종결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천국에 영광 자가 될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결론 여러분 현재의 신앙에서 당신이 추구하는 사물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최종적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면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시간적으로 질적으로 영원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따져 보십시오. 따져보니 그 기한이 언제까지입니까 이것은 예수를 위해 한 일이다 , 연약한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 다 하는 말 따위는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만 악하고 게으른 종아 어두운 밖에 나가 슬피 욺이 있으리라. 하는 질 책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가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하는 자는 예수와 함께 크게 기뻐할 수 있지만 예수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예수가 사랑하는 것 을 함께 기뻐할 수 없고 더욱 크게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구원을 받는다 못 받는다 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 같이 구원을 받는데 누가 더 예수 가까이에 있을 수 있느냐 하는 신앙의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은 다같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누가 의롭다고 했습니까 누가 의로운 판단을 하고 누가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까 성경이 이것을 보여주는 까닭은 너는 사울 처럼 살지 말고 다윗처럼 살아라 더 나가 다윗처럼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사울 보다는 요나단이 하나님과 가깝고 요나단 보다는 다윗이 하나님과 가 깝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울처럼 살면서 살아서 도 죽어서도 영광스럽지 못한 심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한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데 지식적으로 이성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하며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랑은 위선입니다 가식입니다. 또 일방적으로 제 좋을 대로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사랑 일 수는 없습니다. 정신병이거나 가식이고 형식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 적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을 하지도 않으면서 지식적으로 이성적으로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실제 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 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와 조건을 얻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 진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연애의 감정과 같습니다. 상대를 정말 사랑한다면 지난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버리고 상대가 원하는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적응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던 로미오와 쥴리엣, 견우와 직녀,호동 왕자와 낭낭 공주 모두 이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것들을 통해서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사울의 신앙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윗의 신앙이 되 시겠습니까 앞서 경제 원리를 들어 말씀 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 동시대에 태어나 다같이 하나님을 믿었던 두 인물의 대치적 구도 속에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사울도 구원을 받았고, 다윗도 구원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큰 영광을 받 은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작은 영광을 받은 자는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마지막 심판 때에 땅을 친들 소용이 있겠습니 까 거듭 말씀 드리거니와 여러분의 목숨이 깔딱거리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80%로를 손해본 사람은 나머지 20%라도 건 지기를 바라시고 10%를 손해본 사람은 90%로 얻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 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니 구원을 이루라고 활용하라고 주신 이 세상을 목적하지 말고 어찌 되었거나 저 천국에 소망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와 단일된 신앙을 이루십시 오. 그것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며 의의 심판대 앞에서는 길 입니다. 거듭 말씀 드리거니와 지옥맛 보지 않으려거든 진리의 본질에 바 로 서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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