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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나 교회 (계2:8-11)

본문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 반도의 에베소 북쪽에 위치한 무역항이요 유대인의 집단적 근거지로 황제 숭배의 중심지인 서머나 도시의 지역 이름을 따서 설립된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유대인들의 훼방이 심하여 환란과 박해를 많이 받았고,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은 순교를 당한 순교의 교회입니다. 유대인들의 축제일에 성난 군중들이 흥분으로 들떠 있을 때 군중을 선동하는 유대인이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을 ‘황제숭배를 행치말라고 가르친 선생이요, 기독교의 아버지요, 신들의 파괴자’라고 말하면서 황제에게 분향을 하든지, 화형을 당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폴리갑에게 요청했습니다.
폴리갑은 “나는 86년간 그리스도를 섬겨왔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잘못 하시거나 나를 모르신다고 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어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느냐”고 흥분한 군중들 앞에서 대답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안식일인데도 화형할 나무를 열심히 쌓고 열심히 기름을 붓고 화형장으로 폴리갑을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이 말하기를 “괜찮다 나는 한동안 타다가 잠시 후에 꺼지고 말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왜 지체하느냐 뜻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불이 몸에 휘감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기를 “주께서 은혜롭게도 나를 이 날과 이 시간에 합당한 자라고 여기셨습니다. 나를 수 많은 순교자들의 반열에 들게 하시고, 주 예수의 집에서 분깃을 얻게 된 것을 감사하나이다.” 하면서 그의 최후를 바쳤다고 합니다. 일곱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그 교회의 형편, 사정, 교회의 질에 따라 각각 달리 나타나셨습니다. 죄악이 있는 교회에는 의로운 주님의 정반대로 나타나셔서 주님과 정반대된 사상과 행동을 책망하여 회개할 것을 권면하시고, 바로된 교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교회에는 그 교회가 고통을 받는 그 원인과 같은 주님으로 나타나셔서 위로의 주님을 나타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시간관, 생사관, 평안관, 빈부관, 이 사대관이 같은 주님으로, 위로의 주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 (4대관)
1 시간관 8절 중반절 ‘처음과 나중’의 주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죽음 이편의 시간 만을 상대하지 않고, 죽음 너머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 너머 시간에 맞추어 사는고로 유대인들의 집단적 근거지에서 많은 환란과 박해와 궁핍과 고통을 당하고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 이편의 금생의 세월만을 자기의 것으로 자기에게 유익하도록 사나, 주님께서는 죽음 너머 내세를 준비하는 교훈도, 주장도 하시므로 이를 알지 못하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 되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어 재세의 기간동안 박해와 십자가로 일관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도 시간관이 주님과 같으므로 많은 박해, 환란, 궁핍,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을 주님이 아노라고 위로의 주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금생의 세상은 내세,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기간이요, 훈련하는 훈련 기간입니다. 하늘나라는 영주처요,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이요, 나그네 생활이요, 인생의 세상살이는 목적지인 하늘나라를 향하여가는 행인의 생활이요, 객의 생활입니다. 세상은 잠간이요, 하늘나라는 영원이요, 인생의 세상 재세의 기간은 영원의 한 경점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잠간의 준비기간인 세상 생활이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준비하고, 건설한 만큼 하늘나라의 수치와 영광, 실력과 존귀가 결정되기 때문에, 잠시가 영원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했습니다.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 부인한 그 부끄러운 수치가 주님 대할 면목이 없어서 전설에 의하면, 생전에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만 나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주님 뵈올 면목이 없어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답니다. 이는 죽음 너머 영원한 나라 그 시간을 상대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2 생사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8절 하반절)의 주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한 번 태어나면 한 번은 떠나야 되는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은 한정된 생명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한 번 죽어 다시 살아, 영원히 사는 생명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이 화형을 당하며서도, 순교의 반열에 세워주심과, 영원한 분깃을 얻게 된 것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죽은 생사관을 가진 순교의 교회입니다. 성도의 재세목적이, 죽음 이편에 있는 생명을 상대하지 아니하시고, 한번 죽고 다시 사는 그 생명을 상대하여 사신 주님의생활을 소개하여, 육의 생명은 유한하고, 짧으며, 부활의 생명은 완전하고, 영원하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택자들에게 영생의 죽지않는 새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죽음을 자처하여 대속의 공로를 베푸시고, 부활하셔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었습니다. 주님처럼 서머나 교회가 주님의 대속의 도리를 확실히 믿고, 유한하고, 짧은 죽을 생명을 상대하지 아니하고, 죽어 다시 사는 생명관을 가져 생사관이 주님과 같으므로 주님께서 아노라고 인정하시고, 위로하신 것입니다. 순교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피에 팔리운 주님의 것인 것을 깨달아, 사활의 대속의 피공로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소유를 다하고 몸 다하고 생명까지 다하지 않고는 못 배겨서 원하고 원하여 사는 그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생명 1분 1초도 단축하지 아니합니다. 자기 모든 것 다하며, 생명까지 다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 사람에게 죽을 때가 되어서 인을 쳐서 하나님이 받으시고, 상으로 주시는 것이 순교입니다.
3 고락관과
4 빈부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9절) ‘환난’은 평안관, 고락관을 말하고, ‘궁핍’은 빈부관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환난’이란 의미는 압력이란 뜻으로 큰 돌에 치어 고통을 당하다가 천천히 눌려 죽는 사람에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받는 핍박인데, 그 핍박 당하는 고통이 마치 무거운 돌에 눌려 압력을 받는 지경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서머나 도시는 유대인의 집단적 근거지로서 기독교 박멸운동에 모든 열심을 기울이는 지역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훼방과 심한 박해로 정신적으로 많은 환난이 있었고, 경제적인 박해로 궁핍을 당하므로 환난을 많이 당하였으나,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의 도우심으로 십자가로 일관한 신앙생활을 한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음 저편의 평안과 부요를 택자들에게 입히시려고 재세의 기간 동안, 수 많은 멸시, 천대, 조롱, 욕, 핍박, 고초, 환난, 형벌의 고통을 당하셔도 한 마디 원망, 불평이나 세포 하나도 거역치 아니하셨습니다. 영원한 평안을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로 자취하시고, 십자가 상에서 피 한방울 물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고통을 다 당하신 뒤, “다 이루었다”고 하신 주님과 서머나 교회의 고락관, 평안관이 같기 때문에, 위로의 주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 믿어 복 받고, 병 낫고, 등 따뜻하고, 배 부르고 평안하기만을 원하는 것도 좋지만, 믿음생활 해보면 마찰이 있기 마련이요, 환난이 반드시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려면 반드시 마찰, 핍박, 환난이 있고, 우리는 영원한 평안을 위해 먼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고, 나중 위로와 영광과 존귀와 평안을 얻는 십자가를 지는 일을 달게 져야 합니다. ‘궁핍’은 가난을 의미하는데, 생계를 위하여 날품팔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빈궁과 아예 가진 것이라곤 전무한 빈궁보다 핍절한 것을 말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집단적인 습격과 폭행과 약탈로 신자들의 재산을 강탈 당하여 심한 경제적 궁핍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가난과 훼방, 투옥과 순교, 인권유린(악평)과 가산의 약탈 등을 당한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영계와 우주의 모든 소유를 내어 놓고, 가난해지시고, 제세기간 동안 헐벗고, 굶주리시고, 머리둘 곳이 없도록 영원한 하늘나라 부요를 증거하신 생애가 궁핍을 당한 서머나 교회와 빈부관이 같았기 때문에, 위로의 주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둘째로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고, 중하게 여기시는 교회는 4대관이 주님과 같은 교회입니다. 악령은 시간, 생사, 빈부, 평안을 미끼로 교회와 성도를 낚아 제 수입을 보기 때문에 4대관을 바꾸기 전에는 모든 수고의 공적이 원수의 곡간을 채워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훼방하는 세력의 정체 서머나 교회를 훼방하고 박해하는 세력의 정체는 무엇이며 이 박해는 무엇을 위한 것이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라(9절 하반절) ‘훼방’이라 말은 빚고 깍는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가 훼방하는 이 훼방에 못 견뎌서 하나 떨어지고, 둘 떨어지고, 자꾸 그렇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훼방을 하는가 “자칭 유대인이 훼방을 한다”고 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란 하나님은 인정하지 아니하는데, 자기 스스로 잘 믿는다는 사람, 정통신앙, 법통신앙, 진리대로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상징해서 말한 것입니다. 자칭 유대인들이 왜 훼방할까요 그 훼방은 4대관이 다르기 때문에 훼방을 했습니다. 주님과 4대관이 다른 자는 유대인이 아니요, 자칭 유대인이요, 곧 사탄입니다. 껍데기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정통신앙, 법통신앙, 보수신앙이라 하나, 그 속은 이 세상 권세를 붙들고 일하는 사탄이 훼방을 합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훼방하는 것이 나라에서 훼방하고, 사회에서 훼방하고, 어떤 종교 단체에서 훼방하고, 가정에서 훼방하고, 교회 내에서 훼방하고, 훼방하는 것이 이런 형체를 가지고 나타나고, 저런 형체를 가지고 나타나는 그 외형은 많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외형을 보고, 확정을 지우면 안되고, 그 속에 알맹이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든 존재들이 움질일 때에 움직여 지는 것의 외형 겉만 보고, 간판만 보고, 확정 짓지 말고, 그 속에 행동의 질적으로 본성적으로 그 내용이 어떠하냐, 방편을 이 방편, 저 방편을 쓰나 그 역사하는 내용이 어떠하냐, 그 내용에 이치가 어떠하냐 그것을 따져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에 대한 훼방은 4대관이 다르기 때문에 훼방과 대립이 생겨진 것입니다. 이 훼방의 겉에 나타난 것이 ‘자칭 유대인’이고, 실은 속 알맹이는 ‘사탄의 회’, ‘사탄’입니다. 그 다음에 ‘마귀’라 했습니다. 계17장에 보면 일곱 머리, 열 뿔 달린 짐승이 세상인데, 세상이 잘 믿는 정통, 보수, 개혁, 진리, 신자의 껍데기를 입고 신자로 나타나 가지고, 4대관을 훼방합니다. 세상에 있는 권세를 붙들고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세력이 사탄이요, 마귀입니다.
무엇을 위한 훼방이며 박해인가 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서머나 교회가 현재 환난 중에 있는데, ‘장차 받을 환난’이란 현재 받고 있는 환난을 부인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도를 인도하실 때에 고도의 환난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장차에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고, 고난을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장차 받을 고난은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되는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시험을 받는 것’은 4대관에 대한 시험을 어느 정도 굳게 잡고 있느냐, 말만 4대관을 말하고 있느냐, 참으로 진실되게 4대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옥에 가둬가지고 시험을 받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시험을 받게 되면 두려워말라고 하심은 야고보서 1장에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시험을 치루시는 분이 주님이시오, 시험을 치루는 목적은 시험을 통하여 믿음의 실력이 있나 없나 하는 것을 바로 알아 과대평가나 과소평가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요, 온전한 사람 만들기 위한 시험이니, 잘못해도 유익있고, 잘해도 유익이 있기 때문에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두려워 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훼방을 하고 시험을 하는 것은 언제든지 시험을 치루시는 분은 주님이시오, 시험하실 때 일꾼으로 자칭 유대인, 즉 자칭 정통, 법통, 보수, 예수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과 사탄과 마귀를 일꾼으로 써서 시험하니, 목적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 만들기 위함이니 두려워 하지 말고 온전히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걸음에는 장차 받을 고난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장차 받을 고난은 4대관에 대한 고난인데 세상 방법과 표준대로 하면 안 당해도 되나, 주님과 같은 4대관을 가지기 때문에 당해야 합니다. 그 고난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 만들기 위한 시험이기 때문에 시험을 당할 때 두려워 말고 온전히 기뻐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특수 예정으로 정해 놓은 자를 하나님께서 옥에 가두어 시험을 하시는데 특수 예정을 입은 그 사람은 더 큰 은혜, 더 좋은 영광의 면류관을 씌우기 위함이요, 주님과 더 깊은 영교의 기회로 주님과 결합할 기회로 주신 줄 알고 감사해야 됩니다. “나만 왜 이 형편을 이 입장을 주셨느냐”고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 같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특수 예정을 입어 내가 시험을 당할 때, 순교자 한 사람이 나면 거기에 많은 순교자가 나고 많은 승리자가 나게 됩니다. 감옥에 안 들어가도 감옥에서 승리하는 사람과 같이 승리할 사람이 있고, 감옥에 안 들어 가고도 패전한 사람은 패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몇만 시험하면 그 교회 시험 다 합니다. 그 교회 한 두 사람만 시험하면 옆에 공연히 놀라서 다 거꾸러지고 다 절단나 버리고 옆에 참석을 안해도 승리하는 사람이 다 됩니다.
이 박해가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10절 하반절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마귀가 무한정으로 성도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일정한 기간 동안만 환난을 당하게 하시나 결코 그 기간이 긴 기간이 아닙니다. ‘십일 동안’이란 사람과 사건에 따라서 다릅니다. 때로는 몇 달 몇 년이 될 수도 있으나, 반드시 끝나는 시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여 놓은 기간을 다 채워야 환난이 끝이 납니다. 어떤 사람은 9일까지 채우고 하루를 채우지 못하고 진리를 떠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십일 동안’은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의 만족이 되기까지 그 시험으로 인하여 완전승리, 완전성화의 판결이 나기까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1:12) 하나님께서 ‘옳다 인정할 때까지’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환난은 필요하고 귀한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 믿음 지키다가 살아도 좋고, 죽어도 더 좋다, 살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이룰 자기 구원을 이루어가니 좋고, 죽으면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가니 더 좋은 것입니다. 환난을 당할 때 처음 사랑과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 생활과 빛의 세계에만 있으면 마귀가 아무리 강하게 역사해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서 완전 승리를 하게 하시고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환난을 찾아가면 안됩니다. 고행주의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6년 동안을 신사참배 반대한 죄로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해방을 몇 개월 앞두고 참지를 못하여 변절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수 개월전에만 해방이 되었어도 승리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잡된 것은 인정하지 아니하시고, 금을 연단하듯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된 전부는 실패로 구별하기까지 시험 같은 환난이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시험의 그 양은 다르나 그 질은 같습니다. 거짓 것을 옳은 것으로 통과시키고, 속고 속이는 시험이 아니고, 모든 진가를 바로 드러내시는 시험을 의미합니다. 아가서에 “왼손으로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아듬고 계시는 주님께서 원하시기 전에는 나를 깨우지 말아라”고 했습니다. 감옥에 들어 있는 게 사랑하는 주님의 왼팔을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주님의 품안에 안기워 가지고 지금 환난과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이니까, 주님의 원하시기 전에 깨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원하시기 전에는 이 환난이 없어지도록 기도하지 말아라. 주님이 만족하도록까지 시험하시고, 주님이 이제 됐다 할 때 나를 깨우고, 그 전에 석방운동 등을 하여 주님을 근심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흉흉한 파도 입고 고문고형잔치 섭리고개 턱 넘어 숨어 엿보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전쟁의 고개 턱에서 가만히 숨어가지고. 나의 사랑하는 자가 정절을 팔아서 간부들에게 굴복을 당하나 안당하나 죽을 지경이면 정절을 양보하나 안하나 숨어서 창살 틈으로 숨어서 엿보십니다. ‘열흘 동안’은 한정이 차기 전에는 안된다는 것을 미리 예비 지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평안하고 유익이 있고 든든해 집니다.
주님의 요구 10절 하반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충성’은 임금과 신하 주인과 종 사이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말은 결사적 충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든지 소유와 몸과 생명은 주님이 모든 것 다 내어 놓아서 나를 사셔서 구속하여 주님의 구속에 팔렸기 때문에 언제든지 작으나 크나 소유, 몸, 생명, 다 내어 놓아 다하여 주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죽도록 있는 것 다하여 구속하신 주님께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생활은 “전부가 죽도록 충성 생활이요, 죽을 때까지 충성함으로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주님께 충성하였다 할지라도 살아 있는 정도면 주님의 요구에 만족된 충성이 아니고, 더할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충성을 할 때, 자기 것으로 하는 줄 알면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요,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두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것을 자기가 보관하고, 사용하고, 이용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충성하되 자기는 주님의 피에 팔리운 주님의 것인 것을 똑바로 알고, 자기를 값 주고 사신 주께서 치루신 대가는 자기에게 있는 것 다해도 부족하고, 몇 억분의 일도 안되는 줄 알아 감사함으로 겸손히 있는 것 다하여 끝나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 조금 해 놓고 큰 일이나 한 것처럼 자랑하면서, 알아주고, 대우해 주기를 바랬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극히 작은 일 하나에도 죽도록 충성할 것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허비하는 것은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니 나는 맘 다하고, 뜻 다하고, 몸 다하고, 소유 다하고, 성품 다하고, 생명 다해서 주의 일할 것 뿐입니다. 이것을 주님이 요구하십니다. 주님의 요구는 “다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 주님께서 성경에 하라고 요구하고 명령하심은 복과 구원이 되기 때문이요, 하지 말라고 하심은 화가 되고 죽고 망하는 멸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또 오늘 교회와 성도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요구하심은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함이요,
둘째 사망의 해를 당치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10절 하반절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이요, ‘면류관’은 승리의 표시로 씌워주는 관입니다. 하나님과 둘이 연결되어 합작한 승리생활을 하게 해 주십니다. 껍데기는 자칭 유대인, 법통, 보수,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을 사탄이 업고, 주님의 4대관을 갖고 살라고 하는 성도들을 똘똘 뭉쳐 훼방과 박해로 환난을 줄 때, 10일 동안, 너는 소유, 몸, 생명, 다 기울여, 4대관을 견고히 잡고, 주님의 요구에 100점 만족이 되도록 충성해라. ‘생명의 면류관’은 하나님과 연결된 연결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된 것으로의 연결, 승리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하고 나하고 하나되는 성공보다 더 성공된 좋은 성공이 있습니까 하나님하고 하나되는 성공을 하도록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11절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니” ‘이기는 자’, 주님의 4대관을 갖고 살 때, 사탄이 자칭 유대인의 껍질을 입고 똘똘 뭉쳐 훼방과 박해를 해도,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자를 말씀합니다. 택자의 첫 죽음은 영육이 분리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레를 받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는 것이 첫 죽음입니다.
첫째 아담으로 죽었고, 죽은 것이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산 것이 산 그대로 하나님과 딱 들어 붙어 연결이 끊어지지 아니하니다시 죽는 해가 오지 아니하는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아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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