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계1:1-3)
본문
경제위기시대를 맞아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을 하고, 가게마다 장사가 안돼서 울쌍인데, 때아닌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곳이 있답니다. 다름 아닌 점보는 집들이랍니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점을 보러 온답니다. 새로운 직장을 찾아봐야 할 지, 구멍가게나 포장마차라도 시작해야 할지 답답한 마음으로 점 집을 찾는 답니다. 아직 직장에 붙어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몰라 점을 보러 온답니다. 정리해고 태풍이 몰아닥칠 텐데 자기가 해당이 될 지 불안한 마음으로 점 집을 찾는 답니다.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점 집을 찾는 사람들 중에 75% 이상은 점쟁이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는답니다. 믿지도 않을 것을 비싼 복채를 주고 점 집을 찾는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합니다. 시대가 불안하고, 앞길이 막막할수록 더 합니다. 그
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단지 현재를 살뿐입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리 당겨서 미래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뒤바꿀 수도 없고, 미래를 미리 알아 대비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우리의 미래를 아실 수 있고, 또 아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시고, 따라서 시간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존재론적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한계를 뛰어넘어 미래를 알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계 1장 1절에 말씀된 "계시"가 바로 그 길입니다. 그러면 계시란 무엇입니까 헬라어 원문에는 계시란 말이 아포칼룹시스라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것, 덮여진 것을 벗겨내는 것"이란 뜻입니다. 신부의 얼굴에 가리운 면사포를 걷을 때, 감춰진 신부의 얼굴이 드러나게 된다는 뜻으로 아포칼룹시스란 말을 씁니다. 남의 잘못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알려 망신을 줄 때, 몰랐던 허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다는 뜻으로 아포칼룹시스란 말을 씁니다. 이 말이 기독교에서 사용되면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을 계시라 했습니다. 엡 3장 3절에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구원의 비밀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계시라 했습니다.
둘째로, 세상 끝 날에 일어날 일들이 미리 알려지는 것을 계시라 했습니다. 롬 2장 5절에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이라는 말이 아포칼룹시스 즉 계시입니다. 이럴 경우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난다는 뜻으로 "묵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며 순종하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을 계시라 했습니다. 갈 2장 2절에서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도 계시라 부릅니다. 이렇게 기독교에서 계시란 말이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가지 뜻 안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벗겨 주셔야 그 비밀을 알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알려주실 때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삼상 3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자 사무엘은 겸손히 무릎 꿇고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어떤 말씀이라도 다 듣겠다는 겸손한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면 이렇듯이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구하는 자세입니다. 시 62편 1절에 보면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기를 조용히 그리고 간절히 바라고 구하는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면 이렇듯이 간절히 바라고 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셋째는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시 123편 2절을 보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고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계시란 어떤 계시입니까 본문 1절을 보면 계시는 계시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계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하시되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요 5:20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해 여기게 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요 14:6-7을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기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애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요 14:9에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고, 요14:24에는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그 모든 비밀과 뜻을 다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과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야한다는 말입니다. 본래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길에 관해 알고 싶거나, 역사의 미래를 알고 싶거나,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관해 알고 싶을 때 예수께 와야 합니다. 예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다른 그 어떤 책에도 써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다 추측한 것을 써 놓았을 뿐입니다. 점쟁이나 어떤 도사에게 가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다 가짜입니다. 그럴듯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다 속이는 자들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중심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앞 서 말씀드린 대로 기독교의 계시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 역사의 종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가리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 씻음을 받고, 부활을 통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이 바로 역사가 문을 닫는 날이요, 역사가 끝이 나고 영원으로 편입되는 날입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닮아 사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계시의 핵심 내용은 바로 예수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최근에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 영화라면 단연 미국 할리우드 영화 "타이타닉"일 것입니다. 금년도 아카데미 상 11개 부문을 석권해서 깨질 것 같지 않았던 벤허의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습니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10억불의 관람료를 거둬들였고, 우리나라에서도 300만이 이 영화를 볼 것이랍니다. 가히 최고의 영화요, 영화사를 다시 쓰게 만든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연예 주간지 "엔터테인먼트"에 실린 기사를 보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남자 주인공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고, 여자 주인공은 케이트 웬슬렛입니다.
그런데 관객들이 이 영화를 흥미 있게 본 것은 이 두 배우 때문이 아니랍니다. 침몰 당해야 하는 배의 처참한 운명과 이것을 모르고 애처롭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 젊은 연인을 절묘하게 엮어낸 극의 전개요, 놀라운 영화 기술로 표현된 타이타닉호의 위용과 침몰 장면 등이랍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아카데미 상 11개를 휩쓸었지만, 이 상의 꽃이라 불리는 남녀 주연상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 기사는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타이타닉호 배 그 자체였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 역사를 들여다보면 겉으로 우리 인간이 주인공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토인비의 말대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우리 인생도 겉으로 볼 때는 우리가 남자 주인공이요, 여자 주인공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인생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그러면 계시와 연관된 축복은 무엇입니까 본문 3절에 보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연관된 하나님의 축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읽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전 예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 드리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 예배는 제물을 드려 제사 드리는 것이 중심입니다. 다른 하나는 회당 예배입니다. 각 지역마다 세워진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 것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중 가운데서 7명이 뽑혔고, 이들이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이들은 정말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이 하던 역할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진정 축복이요 은혜임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복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를 축복으로 알아 "성경 천독 대행진"이라는 성경 읽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운동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크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이 길이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듣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교육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훈으로 여겨지는 고사 가운데 맹모삼천지교라는 것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어린 맹자를 가르치며 겪었던 경험을 교훈으로 엮은 것입니다. 맹자 어머니가 시장 근처에서 살고 있을 때 보니까 맹자가 하루 종일 시장엘 나다니면서 보고 듣는 것이 장사하는 것이니까 하루 종일 장사하는 흉내만 내더랍니다.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이사를 했는데 하필 이사한 곳이 공동묘지에 가까운 곳이어서 맹자가 보고 듣는 것이 늘 장례 치르는 것이니까 하루 종일 장사 지내는 흉내만 내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이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서당 근처로 이사를 했더랍니다. 그랬더니 맹자가 보고 듣는 것이 늘 서당에서 글 읽는 것이었답니다. 하루종일 글 읽는 흉내만 내더랍니다. 그러더니 자라서 대학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고 듣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을 좌우하고, 그 사람의 삶의 형태를 결정짓습니다. 그래서 롬 10:17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을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이 자체가 축복입니다. 주일 대예배 한 번 나오는 것으로 끝난다면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믿음의 현상유지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자주 듣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지키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사람들 중에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 모두가 다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해 주신 사람에게서나 가능합니다. 요즈음 TV를 보면 경제위기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재미있는 제안들을 많이 내 놓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각 가정마다 전등 하나만 끄면 얼마가 절약된다는 둥, 기름 얼마를 덜 수입해서 외환 위기 극복에 얼마가 보탬이 된다는 둥. 국민 한 사람씩 집에 잠자고 있는 십원 짜리 동전 하나씩만 들고 나오면 얼마가 모여지고 동전 만드는 비용 얼마가 절감된다는 둥. 그럴듯하고 재미있는 제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천입니다. 우리 국민이 정말 그대로 실천할 능력이 있는가 모두가 한 마음이 돼서 참여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온 국민이 정말 참여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경제위기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조만 간에 선진대국이 될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 한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는 나라 그 나라가 복 받은 나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열매가 나타나고,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고,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점 집을 찾는 사람들 중에 75% 이상은 점쟁이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는답니다. 믿지도 않을 것을 비싼 복채를 주고 점 집을 찾는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합니다. 시대가 불안하고, 앞길이 막막할수록 더 합니다. 그
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단지 현재를 살뿐입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리 당겨서 미래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뒤바꿀 수도 없고, 미래를 미리 알아 대비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우리의 미래를 아실 수 있고, 또 아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시고, 따라서 시간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존재론적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한계를 뛰어넘어 미래를 알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계 1장 1절에 말씀된 "계시"가 바로 그 길입니다. 그러면 계시란 무엇입니까 헬라어 원문에는 계시란 말이 아포칼룹시스라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것, 덮여진 것을 벗겨내는 것"이란 뜻입니다. 신부의 얼굴에 가리운 면사포를 걷을 때, 감춰진 신부의 얼굴이 드러나게 된다는 뜻으로 아포칼룹시스란 말을 씁니다. 남의 잘못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알려 망신을 줄 때, 몰랐던 허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다는 뜻으로 아포칼룹시스란 말을 씁니다. 이 말이 기독교에서 사용되면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을 계시라 했습니다. 엡 3장 3절에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구원의 비밀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계시라 했습니다.
둘째로, 세상 끝 날에 일어날 일들이 미리 알려지는 것을 계시라 했습니다. 롬 2장 5절에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이라는 말이 아포칼룹시스 즉 계시입니다. 이럴 경우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난다는 뜻으로 "묵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며 순종하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을 계시라 했습니다. 갈 2장 2절에서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도 계시라 부릅니다. 이렇게 기독교에서 계시란 말이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가지 뜻 안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벗겨 주셔야 그 비밀을 알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알려주실 때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삼상 3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자 사무엘은 겸손히 무릎 꿇고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어떤 말씀이라도 다 듣겠다는 겸손한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면 이렇듯이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구하는 자세입니다. 시 62편 1절에 보면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기를 조용히 그리고 간절히 바라고 구하는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면 이렇듯이 간절히 바라고 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셋째는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시 123편 2절을 보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고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계시란 어떤 계시입니까 본문 1절을 보면 계시는 계시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계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하시되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요 5:20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해 여기게 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요 14:6-7을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기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애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요 14:9에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고, 요14:24에는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그 모든 비밀과 뜻을 다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과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야한다는 말입니다. 본래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길에 관해 알고 싶거나, 역사의 미래를 알고 싶거나,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관해 알고 싶을 때 예수께 와야 합니다. 예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다른 그 어떤 책에도 써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다 추측한 것을 써 놓았을 뿐입니다. 점쟁이나 어떤 도사에게 가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다 가짜입니다. 그럴듯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다 속이는 자들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중심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앞 서 말씀드린 대로 기독교의 계시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 역사의 종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가리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 씻음을 받고, 부활을 통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이 바로 역사가 문을 닫는 날이요, 역사가 끝이 나고 영원으로 편입되는 날입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닮아 사는 것입니다. 예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계시의 핵심 내용은 바로 예수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최근에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 영화라면 단연 미국 할리우드 영화 "타이타닉"일 것입니다. 금년도 아카데미 상 11개 부문을 석권해서 깨질 것 같지 않았던 벤허의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습니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10억불의 관람료를 거둬들였고, 우리나라에서도 300만이 이 영화를 볼 것이랍니다. 가히 최고의 영화요, 영화사를 다시 쓰게 만든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연예 주간지 "엔터테인먼트"에 실린 기사를 보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남자 주인공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고, 여자 주인공은 케이트 웬슬렛입니다.
그런데 관객들이 이 영화를 흥미 있게 본 것은 이 두 배우 때문이 아니랍니다. 침몰 당해야 하는 배의 처참한 운명과 이것을 모르고 애처롭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 젊은 연인을 절묘하게 엮어낸 극의 전개요, 놀라운 영화 기술로 표현된 타이타닉호의 위용과 침몰 장면 등이랍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아카데미 상 11개를 휩쓸었지만, 이 상의 꽃이라 불리는 남녀 주연상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 기사는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타이타닉호 배 그 자체였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 역사를 들여다보면 겉으로 우리 인간이 주인공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토인비의 말대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우리 인생도 겉으로 볼 때는 우리가 남자 주인공이요, 여자 주인공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인생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그러면 계시와 연관된 축복은 무엇입니까 본문 3절에 보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연관된 하나님의 축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읽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전 예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 드리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 예배는 제물을 드려 제사 드리는 것이 중심입니다. 다른 하나는 회당 예배입니다. 각 지역마다 세워진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 것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중 가운데서 7명이 뽑혔고, 이들이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이들은 정말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이 하던 역할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진정 축복이요 은혜임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복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를 축복으로 알아 "성경 천독 대행진"이라는 성경 읽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운동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크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이 길이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듣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교육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훈으로 여겨지는 고사 가운데 맹모삼천지교라는 것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어린 맹자를 가르치며 겪었던 경험을 교훈으로 엮은 것입니다. 맹자 어머니가 시장 근처에서 살고 있을 때 보니까 맹자가 하루 종일 시장엘 나다니면서 보고 듣는 것이 장사하는 것이니까 하루 종일 장사하는 흉내만 내더랍니다.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이사를 했는데 하필 이사한 곳이 공동묘지에 가까운 곳이어서 맹자가 보고 듣는 것이 늘 장례 치르는 것이니까 하루 종일 장사 지내는 흉내만 내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이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서당 근처로 이사를 했더랍니다. 그랬더니 맹자가 보고 듣는 것이 늘 서당에서 글 읽는 것이었답니다. 하루종일 글 읽는 흉내만 내더랍니다. 그러더니 자라서 대학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고 듣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을 좌우하고, 그 사람의 삶의 형태를 결정짓습니다. 그래서 롬 10:17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을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이 자체가 축복입니다. 주일 대예배 한 번 나오는 것으로 끝난다면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믿음의 현상유지도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자주 듣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지키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사람들 중에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 모두가 다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해 주신 사람에게서나 가능합니다. 요즈음 TV를 보면 경제위기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재미있는 제안들을 많이 내 놓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각 가정마다 전등 하나만 끄면 얼마가 절약된다는 둥, 기름 얼마를 덜 수입해서 외환 위기 극복에 얼마가 보탬이 된다는 둥. 국민 한 사람씩 집에 잠자고 있는 십원 짜리 동전 하나씩만 들고 나오면 얼마가 모여지고 동전 만드는 비용 얼마가 절감된다는 둥. 그럴듯하고 재미있는 제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천입니다. 우리 국민이 정말 그대로 실천할 능력이 있는가 모두가 한 마음이 돼서 참여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온 국민이 정말 참여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경제위기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조만 간에 선진대국이 될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 한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는 나라 그 나라가 복 받은 나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열매가 나타나고,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고,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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