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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형제된 형제 자매들 (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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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을타고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신나는 일이다. 예수쟁이가 그 이상 신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웃음이 나온것은 순전히 손오공이 라는 그 원숭이 녀석 때문인데 예수님 재림에 손오공이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구름을 타고' 라는 말씀 때문이리라. 일부 자유 신학자들 사이에 주장 하기를 구름 이라는 것을 인간이 만든 비행물이나 혹은 UFO 같은 이상적 비행 물체를 사도 요한이 보고 표현할 수 없으니까 구름 이라고 적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신학자들 머리통에서 나왔을 것 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비이 성적인 발상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학자들이 예수님이 타고 오실 구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따지고 더 나가 그 형체가 인간이 만든 물체 혹은 상상력 속에 국한 시키고 애기 하는 수준에 놀랍기가 가히 깜짝 쇼에 가깝다. 내가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인간이 성경을 보고 받아 들이면서 가장많이 범하는 오류가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을 바라 본다는 점이다. 성경은 텔레비젼 드라마가 아니고 소설이 아니고 나라는 개인의 구원 계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않되겠다. 이들이 자기 구원 이라는 관점을 잊어 버리고 과학적 성경 해석 이라는 논리를 앞세 우다 보니 얼토당도 않는 말이 만들어 지고 논리가 세워 지고 그것이 학문이라는 미명을 뒤집어 쓴것이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이 라고 한다면 손오공 이나 배추도사 무우도사 따위를 생각하는 우리의 머리를 비우고 현실감 있게 받아 들여야 한다. 각인의 눈 각인의 눈이라는 말은 살아 있는 사람을 말한다. 죽은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을 볼수가 없다. 순서적으로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부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후에 부활이 있고 심판이 있고 천년왕국이 세워지기 때문에 순서적으 로 죽은 사람은 재림 하는 주님의 모습을 볼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 재림 당시에-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조만간 오리라 믿는다.-살아 있는 자에게 만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이가 보일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 한다. 예수님을 찌른 자가 재림 하는 예수를 본다는 것이다. 이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위의 내 말이 틀렸단 말인가 우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여기 저기 물어보고 들쑤셔 봐도 도무지 시원한 대답이 없다. 심지어 어떤 분은 그냥 요한 복음이나 읽고 시편이나 읽으면 됐지 뭐하러 구지 계시록 까지 읽으려 하느냐 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말씀은 영의 양식이니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는것은 본능이다.
a) 본다는 것의 차이 나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정규 교육을 받은 여러분을 위해 이런 예를 들어 보겠다. 이곳은 현재 교실이고 미술 수업을 받고 있다. 선생님은 석고상을 하나 가져다 놓고 학생들에게 데생을 하라고 한다. 각자 연필을 들고 열심히 데생을 하고있다. 어떤 학생은 미적 감각이 뛰어나 그림을 잘 그리지만 어떤 학생은 형편없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러나 50명이 넘는 학생이 석고상을 똑같은 구도와 똑같은 조감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본다는 것의 차이 때문이다. 솔직히 다같은 예수쟁이들 이지만 재림하는 주를 똑같은 마음으로 맞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이는 땅을 치며 한탄할 것이고 어떤이는 세상에 미 련이 남아 아쉬워 할 것이고 또 어떤이는 자신이 이룬 구원 완성에 내심 감사해 할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차이가 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원인은 지금 내가 무엇을 보느냐에 달렸다.
시각적:눈으로 무엇을 보느냐 TV가요 20의 가수를 보고 있느냐 주님의 말씀을 보고 있느냐 의식적:내 의식은 세상에 소원성을 두고 목적을 두고 예수님의 구원계시와 사역을 받아 들이고 저혼자 열심히 노력하느냐 아니면 오는 사건 가는 사건 말씀의 검과 진리의 자를 가지고 재어 보 고 잘라보고 뒤집어 보고 업어서 보느냐 심리적:진리를 갖였고 진를 먹는다고 하면서 심리적으로는 내가 아닌 내가 진리가 아닌 것을 들고 오는 것을 보고 진리만을 취하느냐 아니면 구원운동 한다고 눈꼽딱지 떨어뜨리며 정신없이 뛰고 있 느냐 지금 내가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취하여 성장 하느냐 하는 결과성은 예수님의 재림때에 발켜진다. 예수님의 재림을 어떻게 보느냐 내가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보느냐 신앙 궤도가 잘못 되었으면 수정 해야 한다. 수정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판자가 되고 예수님을 판자는 예수님을 찌른자가 될수밖에 없고 예수님을 찌른자는 심판받고 불에 탈수밖에 없다. 우주선이 지구 대기권에 진입 하면서 궤도가 잘못 되면 재도 남지 않고 타버린다고 한다. 하나님이 과학이라는 도구를 들고서 이것을 보여주는 까 닭은 신앙 궤도 잃지 말고 바로 보고 바로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렇지 못하 면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온 흔적은 하나도 없이 타 없어지고 나는 이름만 남는 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최석영 하고 부르면 나는 명찰만 달랑 들고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다시한번 물어보고 싶다. 지금 당신은 시각적으로, 의식적으로, 심리적으 로 무엇을 보고 어떤 방법으로 선별하고 취하여 먹고 있느냐 그를 찌른자 시대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찌른 자는 로마 병정 들이고 계시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따르지 않고 방해하고 회방하는 자들이다. 시대론자 들은 예수님을 찌른 자들 이라고 했으니 예수님의 재림 전에 부활이 있을 것 이라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찌른 사람이 예수님을 본다는 말씀이 있었으니 순서적으로 부활이 있고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찌른 자들이라는 말씀은 우리 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이 또 무슨 해괴 망측하고 혈압 오르는 소린가 단순히 성경이 역사적인 의미 만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눈알이 빠지게 읽을 필요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 이랍시고 교회에 가서 허 리 아프게 쭈그리고 앉아 설교를 들을 필요도 없다. 불교 신자들 처럼 가끔 가다 생각 나면 그저 교회에 가서 기도나 하고 헌금이나 내고 오면 족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지 않는 까닭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고 계시를 풀어 해 석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 목사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졸리운 눈을 비벼 가며 예배 시간에 앉아 있는 것이고 그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때로는 회개도 하 고 때로는 감사도 하며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다. 살다 보니 인생은 참 힘들다. 하루 하루가 솜뭉치 물적신듯 나른하기가 말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펼쳐 들고 읽고 또 읽는 까닭은 무엇인 가 하나님의 생각-하나님이 나를 왜 만드셨고 내가 지금 당한 사건에 어 떻게 대처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되는가-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다. 단순히 성경이 역사적 기술 이라면 나는 VTR을 보겠다. 좋은 성서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 자 그러면 우리 눈이 빠지게 성경도 읽고 선교지도 읽고 방울 소리 나도 록 예배(바른 계시가 있는 예배)도 빠트리지 말고 드리며 예수님을 찌른자 가 누군지 알아 보기로 하자.
A)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구원계시 먼저 우린 이런 정의를 하여 보자. BC니 AD니 하는 년대(年代)라는 개념을 버리자. 성경 이라는 특별 계시 속에서 구원계시를 보는데는 어느시대 어느 인물 이라도 상황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적용이 된다는 개념을 갖자. 아담은 태 초의 인간일 뿐만 아니라 내인생 속에서 나라른 또 다른 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죄악의 시작이며 또한 구원의 시작 이었던 아담도 그 자신은 몰랐겠지만 예수를 찌른자가 되었다. A-1) 아담은 예수님을 찌른자 인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자 벌거벗은 수치를 알게 되고 수치를 깨달은 아담 은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렸다. 나뭇잎은 피를 흘릴 수 없으니 일회성이고 임시 방편적이다.
그것으로 죄를 가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일.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를 알고 아담에게 물으셨다. "네가 어떻게 수치를 알았느냐" 그러자 아담은 "하나님이 저에게준 여자가 준 과일을 먹고 알게 되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여자를 주지 않았더라면 이 런 죄를 짓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이 여자를 주어 아담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상황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이 죄가 내 책임이 아니고 하와 저 여자 책임이고 저 여자를(상황) 만들어 준 하나님 당신 책임 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책임인가 하나님의 책임인가 아담의 책임 이라면 아담은 어디서 어디까지 책임이고 그 잘못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아담은 에덴 이라는 세상(구원이 없으니 세상이다.)에서 하나님이 아닌 선악과를 보았다. 선악 과를 보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한 과일을 먹을 수 밖에 없고 과일을 먹으니 죄를 짓고 죄는 수치를 낳고 수치는 죽음을 부른다. 나뭇잎으로 가려도 짐승의 가죽으로 가려도 죽음이 온다. 죽음이라는 것은 단절을 말한다. 무엇에서 단절인가 구원에서 단절이다. 하나님을 만나 그의 신성한 신격과 사랑과 의를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아담은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잊어 버렸다. 하나님은 분명 아담을 낙원에 안주 시키실 계획은 아니셨다. 우리 에 게 천국을 주셨듯 아담에게도 천국을 주실 계획 이셨다.

그렇다면 아담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따라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범죄 라는 수단을 통해 천국 구원을 방해 하였고 그 원인과 이유를 하나님 께 전가 했다. (참으로 엄청난 죄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예수(하나님)님을 찌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신앙적으로 심행적으로 심리적으로 의식적으로 이것을 보아야 한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내게 주어진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환경을 극복 할 실력을 갖지 못하고, 세상에 안주하며 타협 하다가 심행적 물행적으로 죄를 짓고 하나님에게 매달리고 통사정을 하고 애걸복걸 안달을 하게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육이 아니면 영 이라는 신앙의 양분론에서 시시때때로 오고 가는 사건 속 에서, 상황 속에서 거듭난 영의 새 인격체가 주체가 되어 싸워 이기고 예수 를 살리 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좀더 과격한 표현을 쓰자면 예수를 살리고 죽이고 하는 것은 나에게 매번 주어지는 사건에 어떻게 대처 하느냐에 달려있다 하겠다.
A-2)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찔렀을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하나 그 역시 인간이고 보면 아브라함의 일 생 중 예수님을 창칼로 찌른 것을 하나 둘로 예기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한 예로 들자면 한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 가나안에 심한 감음이 들어 가나안을 떠나(계시적으로 진리를 떠났다고 보아야 함)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 애굽으로 들어가기 전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게 말하기를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때 에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데 그대는 나 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 하겠노라"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들어가며 주위 환경을 측량한 자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가 아브라함 이라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가 판단해 보라.) 내가 느끼기에 아브라함은 세상적으로 무척 영리한 사람이다. 먼저 자 신이 살아갈 방도와 처세술을 잘 알고 있었다. 아브라함의 예상 대로 애굽 으로 들어가자 애굽 사람들이 사라의 미모를 왕에게 고했고 왕은 사라가 아 브라함의 누이 라는 사실(누이가 아니라 아내라 했어도 절대 왕권 하에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만)에 사라를 궁으로 데려 왔다. 성경에 정확히 언급 된 바는 없지만 전후 문맥으로 볼때 사라는 애굽왕에게 정조를 잃었을 것이다. 결과는 바로왕의 집과 애굽에 큰 재앙이 내렸고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들통났다. 아브라함은 감음이라는 환경적 사건에 봉착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주시기 로 한 약속의 땅을 떠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거부한 것이다. 하나님도 약속의 땅도 소용 없다. 우선 내가 살고 보자는 인본주의가 앞섰다. 심행(心行)이 하나님을 떠나자 인간은 거짓말을 하게 되고 거짓말은 죄악을 싹 틔우고 죄악은 아내의 정조와 생명을 교환하고 대대로 오점을 남 기고 그들이 목숨을 보전 하고자 했던 애굽에서 쫓겨나게 된다. 애굽을 떠날때 아브라함은 빈 털털이 가난뱅이에서 부유한 부자가 되어 있었다. 바로왕이 사라를 궁으로 데려가면서 아브라함에게 준 예물을 그대 로 가지고 온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정조를 팔아 가계를 연명한 인간 이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위해 살아 남고자 했을까(아브라함이 목숨을 연 명하기로 한 판단과 아내의 정조를 팔아 취한 재물을 챙겨 들고 애굽을 떠 난 의식구조의 눈은 어떤 눈인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볼때 아브라함의 행위는 어떻게 보여지는가) 이 글을 읽으면서 남의 일인양 웃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웃지마라 남 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 정조를 팔아 직장을 구하고 신앙 정조를 팔아 가계를 꾸리고 그러면서 그 댓가로는 내사랑 연인의 정조를 파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위해 삶 이라는 유한적 시간과 공 간 그리고 물질과 환경(고난과 역경, 행복과 불행)을 주셨는데 그것을 가지 고 무엇을 했느냐 그 정신 세계는 무엇과 엿 바꾸어 먹고 그 사상 세계는 누구와 간음을 하 고 그 추구하는 추구성은 어떻게 더렵혀 졌는가. 시간을 허비하는 것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거스리는 것, 건강을 해치는 것 이 모두가 따지고 들자면 예수님의 구원 계획을 방해 하는 행위가 아닌가 말이다.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시는데 방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요셉과 마리아를 마굿간으로 내쫓은 여관 주인과 당신과 내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설명할 수 있으면 설명해 보라. 이 행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밖고 칼로 찌른 것과 같다. 누가 내가. 왜 하나님을 모르고 천국을 모르고 사건이 오는 목적과 추구성을 보지 못했 기 때문에. 진리가 와도 불필요하게 여기고 은 30세겔에 팔아 버린 것이다. A-3) 직접 적용 예수님을 실질적으로 찌른 로마 병정들은 사실 큰 죄인이 못된다. 그들은 단순히 조직 사회에서 명령수행을 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아담,아브라함,당신,그리고 나, 이들은 모두 큰 죄인이다. 왜 나라는 인간은 오늘도 정신 세계에서 혹은 심리상에서 혹은 물행(물질적 행동)적으로 예수를 팔고 십자가에 못밖으라고 선동하고 예수를 못밖고 창 칼로 찌르는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물어보자!! 주일(안식일)은 왜 있고 하나님이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에 나가 기도 하고 헌금 하라고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지은 죄 사함받고 용기 백배하여 세상으로 나가 또 죄 지으라고 그도 아니면 진리를 깨달아 그 진리 먹고 새 생명의 인격이 성장해 예수 화가 되어서 천국을 현세적으로 정복하고 내세적으로 누리고 다스릴 실력자 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살지 못하면 예수님을 팔고 찌른 죄인중 죄인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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