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권능에 참여함 (빌3:10-12)
본문
어느 외국인 선교사가 한국교회를 둘러보고는 소감을 묻는 어느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만 하고 아직 부활을 하시지 못하신 모양이죠” 제사가 아닌 예배 여기서 우리들은 신앙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너무 어둡다는 것입니다. 마치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와 제사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제사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고 예배는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쁨으로 경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와 제사는 동기부터 다릅니다. 제사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두렵고 무겁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다릅니다. 예배는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 기쁨과 감사를 하나님께 하나의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밝고 환한 것이야 하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마치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예배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드리신 그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온전한 사건이었습니까 아니면 부족한 사건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온전한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10:11-1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면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한 영원한 제사라는 것입니다. 즉,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는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라는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다시 (히 10:1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제사를 예수님께서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이런 예수님의 사역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제사가 아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즉, 이렇게 완전하게 제사를 드리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영적인 축제의 시간의 되어야 합니다.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축제, 세상의 그 어떤 축제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축제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축제 그 축제일 가운데 가장 흥겹고 기쁨이 넘치는 날을 꼽으라 한다면 당연히 부활주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정복하시고 무덤을 여신 이 날, 이 날은 그 어떤 날보다 더 영광스럽고 기쁨이 넘치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이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최고의 기쁨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들이 즐거워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최고의 즐거움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큰 웃음이라면 이 시간 내내 아니 오늘 하루 종일 기쁨의 미소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너무 진해서 눈물로밖에 표현을 할 수 없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아무튼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얻는 최고의 감정들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부활의 소망이란 먼저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가지 묻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을 하면 혹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좀 수준 있는 것 물어보십시오. 아 그거야 주님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들도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 아닙니까” 라고요.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우리들도 부활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요 “아니 목사님 점점 더하시네요. 아 그거야 주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 우리들도 다시 살아나서 주님처럼 된다는 말 아닙니까” 라고 말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아니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그런 의미밖에 없을까요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의 의미를 반쪽밖에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을 드린 것처럼 부활이란 주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 우리들도 다시 살아나서 영원토록 왕노릇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부활의 의미를 반쪽밖에 모른는 것입니다. 즉, 부활을 단지 미래에 내가 경험할 어떤 일로 밖에는 보지 않는 것이죠. 그러니 부활의 그 풍성함을 현재에는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는 미래 적인 의미도 있지만 현재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즉, 죽음을 정복한 그 부활의 능력이 지금을 살아가는 현재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샘입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나약해 지고 역동적이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점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이 시간이 여러분들에게 부활의 현재적인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이 시간을 통해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수지맞는 시간이 되실 것입니다. 자 이제 함께 오늘 본문을 살피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려 함 오늘 본문을 여러분들이 좀 관심 있게 관찰을 한다면 바울이 자신의 수준과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 10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 자 어떤 점이 바울의 수준과 맞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려 한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서신을 기록한 바울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그는 교계에서도 거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서는 그의 인생 노년에 기록된 서신 중에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은지 오래되어 이제 제법 예수의 흔적이 나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온 삶을 바쳤던 노사도가 다시 오늘 본문에서 마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그리스도를 알려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을 초신자가 했다면 이해가 됩니다. 이제 막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를 알려 한다“ 고 말한다면 그래 그래야지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초신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려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를 알려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요 제가 늘 강조하는 이야기가 있죠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다르다고요. 어떻게 다르죠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은 지식 적은 앎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이죠.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즉, 여기서 그리스도를 알고자 한다는 이야기는 그리스도를 경험하고자 한다는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경험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즉, 매일 매일의 삶에서 그분을 경험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은 단시일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어떻게 죽으셨으며 하는 문제는 잠깐 앉아서 외우면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경험으로 아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시일에 되어 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평생을 걸쳐서 씨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알려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단지 자신이 지식적으로 주님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매 순간 순간 섬세하게 주님을 경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정말 자신이 가르친 대로 그의 삶에 살아서 역사 하시는 그런 분임을 경험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
그렇다면 여러분 바울이 이 말을 할 때 그리스도는 살아 계셨습니까 예, 살아 계셨습니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살아 계셨습니다.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주님을 죽으신 분으로 알았다면 주님을 경험하겠노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분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살아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분입니다. 여러분 세종 대왕이나 이순신을 우리가 지금 경험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들은 단지 그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저 지식으로만 알뿐입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이분들은 다 죽은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들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렇기 때문이 이 주님께 우리들의 삶의 문제를 맡깁니다.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 말합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께서 그 문제를 책임지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까 예, 그분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세상을 다스리는 만 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죠. 그러니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죠. 만약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노라 하고 자신의 문제를 맡기지 않는다면 아직 주님을 살아 계셔서 나를 지키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죠. 만약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아직도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다면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세상을 다스리는 분으로 믿지 않는 것이죠. 어떻게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는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믿습니다를 소리친다 해도 그 믿음은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두 눈을 뜨고 살아 계심을 믿으면서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화장실에 문을 잠그고 들어가 있으면 밖에서 하는 별의 별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겠죠 목사님이 이러쿵 저렇쿵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거기에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화장실 안에서 기침이라도 하면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못합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서도 이런데 하물며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금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알려 한다는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주님 앞에서 살면서 주님을 경험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렇게 사십니까 부활의 권능을 알려함 다음으로 바울이 알려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부활이 권능을 알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부활의 권능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권능이라는 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권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듀나미스라는 말입니다. 이 듀나미스라는 말에서 다이나마이트라는 말이 파생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권능이라는 말에 힘, 능력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활의 힘을 경험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바울은 부활에는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힘을 경험하고 싶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부활에 담겨 있는 힘은 어떤 것일까요 사망을 이긴 부활 성경을 한 곳 보지요. (고전 15:55-57)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이 있다는 것이지요.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 사망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즉, 죄의 권능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 죄의 권능을 이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무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죄를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삶을 살았던 그 누구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황제도, 최고의 부를 가지고 있었던 부자도, 최고의 학식을 가지고 있었던 학자도, 나름대로 선하게 살아갔다고 하는 여러 선인들도 이 죄의 문제만큼은 해결하지 못하고 죽어 갔습니다. 그러니 이 죄의 권능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바로 이 죄의 권능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권능은 아무도 싸워서 이길 수 없었던 죄 사망의 권능을 이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권능은 그 어느 힘 보다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힘을 그는 경험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죄를 이긴 부활의 권능을 경험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죄로부터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권능이면 가능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의 죄악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그렇다면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부활의 권능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왜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고자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이 고민스러운 죄악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죄악을 무엇을 의지하면 이길 수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바로 부활의 권능을 의지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활의 권능을 경험한다는 말은 이것을 의지해서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부활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죄를 이기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힘을 의지해서 자신도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 사람은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 권능을 힘입어 죄를 이기시고 계십니까 고난에 참여하고자 다음으로 바울이 경험하고자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잘 알고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롬 8:17'에서 말하기를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 말이 시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부활의 그 영광스러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고난은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즉,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자신도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고난의 길을 걷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삶의 곳곳을 열어보면 그리스도와 함께한 고난의 흔적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쓴 서신 아무데나 펼치고 읽어내려 가 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서 바울이 어떤 고난을 당했는가를 금방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고난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이 무엇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영광스러움은 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우리들도 바울처럼 고난을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고 감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문제점 중에 하나는 부활의 영광은 얻기를 원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부흥을 하고 어떤 교회의 예배가 은혜가 되는지 아십니까 예, 축복을 기원하고 복을 비는 교회는 성장을 하고 아멘이 넘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강조하고 고난을 강조하는 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복받기를 기원합니다. 하면 아멘을 하지만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읍시다. 하면 아멘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지 않습니다. 부활을 소망하는 사람은 그 부활이 어떤 것을 통과해서 얻어진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진정으로 부활의 영광스러움을 바라보고 있다면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아니 오히려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십시다. 우리들도 바울처럼 이런 고난을 직접 경험하기를 소원해 보십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단지 지식적으로 알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직접 자신의 삶속에 경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목표를 말할 때 그것을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는 이것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이런 열망을 가지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바울은 이렇게 자신이 알고싶은 것 몇 가지를 이야기 한 후 자신이 바라는 소망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내가 빨리 죽어서 부활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일까요 예, 얼핏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일까요 자신이 부활을 할 것을 확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일까요 물론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카이퍼 박사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의 관념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은 서 있는 자이고 죽어 있는 사람은 누워있는 자이다 그래서 헬라식으로 익살을 떨며 바울은 나는 그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영적으로 누워있는 자들 즉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 사이에 나는 서 있음으로써 쉽게 눈에 띄어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나의 행동을 통하여 영생을 미리 선보이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풀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기 죽어 있는 사람들은 목숨이 끊어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육신 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이라는 말은 서 있다는 말로도 해석이 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은 넘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서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많은 군중이 모여 서 있는 자리에서 한 사람을 찾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앉아 있는데 한 사람만이 서 있다면 그 서 있는 사람 찾는 일은 누워서 떡먹기 만큼이나 쉬운 일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다 영적으로 누워 있는 이 즈음에서 자신은 우뚝 서 있는 그런 사람으로 인정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즉,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찬란하게 빛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꿈꾸어야 할 것입니다. 모두 다 누워 있는 자리에서 함께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우뚝 서서 찬란하게 빛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전에는 저들과 함께 누워 있었습니다. 죽어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부활을 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엡 2:1-6)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들이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이 거듭났다는 말은 이미 부활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부활은 미래 적인 어떤 일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들은 부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저 죽어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부활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뭔가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부활했다고 말하면서 저 넘어져 있는 사람들과 함께 넘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넘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우뚝 서서 영롱하게 빛나야 합니다. 저 넘어진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야 하고 삶의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사는 모습도 달라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달려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같을 수 있습니까 같다는 것이 모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부활을 하신 분들입니까 그리고 부활하신 분처럼 그렇게 사시고 계십니까 그렇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배와 제사는 동기부터 다릅니다. 제사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두렵고 무겁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다릅니다. 예배는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 기쁨과 감사를 하나님께 하나의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밝고 환한 것이야 하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마치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예배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드리신 그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온전한 사건이었습니까 아니면 부족한 사건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온전한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10:11-1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면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한 영원한 제사라는 것입니다. 즉,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는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라는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다시 (히 10:1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제사를 예수님께서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이런 예수님의 사역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제사가 아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즉, 이렇게 완전하게 제사를 드리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영적인 축제의 시간의 되어야 합니다.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축제, 세상의 그 어떤 축제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축제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축제 그 축제일 가운데 가장 흥겹고 기쁨이 넘치는 날을 꼽으라 한다면 당연히 부활주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정복하시고 무덤을 여신 이 날, 이 날은 그 어떤 날보다 더 영광스럽고 기쁨이 넘치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이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최고의 기쁨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들이 즐거워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최고의 즐거움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큰 웃음이라면 이 시간 내내 아니 오늘 하루 종일 기쁨의 미소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너무 진해서 눈물로밖에 표현을 할 수 없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아무튼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얻는 최고의 감정들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부활의 소망이란 먼저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가지 묻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을 하면 혹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좀 수준 있는 것 물어보십시오. 아 그거야 주님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들도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 아닙니까” 라고요.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우리들도 부활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요 “아니 목사님 점점 더하시네요. 아 그거야 주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 우리들도 다시 살아나서 주님처럼 된다는 말 아닙니까” 라고 말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아니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그런 의미밖에 없을까요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의 의미를 반쪽밖에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을 드린 것처럼 부활이란 주님께서 재림을 하실 때 우리들도 다시 살아나서 영원토록 왕노릇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부활의 의미를 반쪽밖에 모른는 것입니다. 즉, 부활을 단지 미래에 내가 경험할 어떤 일로 밖에는 보지 않는 것이죠. 그러니 부활의 그 풍성함을 현재에는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는 미래 적인 의미도 있지만 현재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즉, 죽음을 정복한 그 부활의 능력이 지금을 살아가는 현재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샘입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나약해 지고 역동적이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점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이 시간이 여러분들에게 부활의 현재적인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이 시간을 통해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수지맞는 시간이 되실 것입니다. 자 이제 함께 오늘 본문을 살피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려 함 오늘 본문을 여러분들이 좀 관심 있게 관찰을 한다면 바울이 자신의 수준과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 10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 자 어떤 점이 바울의 수준과 맞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려 한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서신을 기록한 바울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그는 교계에서도 거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서는 그의 인생 노년에 기록된 서신 중에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은지 오래되어 이제 제법 예수의 흔적이 나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온 삶을 바쳤던 노사도가 다시 오늘 본문에서 마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그리스도를 알려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을 초신자가 했다면 이해가 됩니다. 이제 막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를 알려 한다“ 고 말한다면 그래 그래야지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초신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려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를 알려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요 제가 늘 강조하는 이야기가 있죠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다르다고요. 어떻게 다르죠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은 지식 적은 앎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이죠.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즉, 여기서 그리스도를 알고자 한다는 이야기는 그리스도를 경험하고자 한다는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경험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즉, 매일 매일의 삶에서 그분을 경험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은 단시일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어떻게 죽으셨으며 하는 문제는 잠깐 앉아서 외우면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경험으로 아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시일에 되어 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평생을 걸쳐서 씨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알려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단지 자신이 지식적으로 주님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매 순간 순간 섬세하게 주님을 경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정말 자신이 가르친 대로 그의 삶에 살아서 역사 하시는 그런 분임을 경험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
그렇다면 여러분 바울이 이 말을 할 때 그리스도는 살아 계셨습니까 예, 살아 계셨습니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살아 계셨습니다.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주님을 죽으신 분으로 알았다면 주님을 경험하겠노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분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살아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분입니다. 여러분 세종 대왕이나 이순신을 우리가 지금 경험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들은 단지 그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저 지식으로만 알뿐입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이분들은 다 죽은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들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렇기 때문이 이 주님께 우리들의 삶의 문제를 맡깁니다.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 말합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께서 그 문제를 책임지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까 예, 그분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세상을 다스리는 만 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죠. 그러니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죠. 만약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노라 하고 자신의 문제를 맡기지 않는다면 아직 주님을 살아 계셔서 나를 지키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죠. 만약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아직도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다면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세상을 다스리는 분으로 믿지 않는 것이죠. 어떻게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는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믿습니다를 소리친다 해도 그 믿음은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두 눈을 뜨고 살아 계심을 믿으면서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화장실에 문을 잠그고 들어가 있으면 밖에서 하는 별의 별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겠죠 목사님이 이러쿵 저렇쿵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거기에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화장실 안에서 기침이라도 하면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못합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서도 이런데 하물며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금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알려 한다는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주님 앞에서 살면서 주님을 경험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렇게 사십니까 부활의 권능을 알려함 다음으로 바울이 알려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부활이 권능을 알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부활의 권능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권능이라는 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권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듀나미스라는 말입니다. 이 듀나미스라는 말에서 다이나마이트라는 말이 파생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권능이라는 말에 힘, 능력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활의 힘을 경험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바울은 부활에는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힘을 경험하고 싶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부활에 담겨 있는 힘은 어떤 것일까요 사망을 이긴 부활 성경을 한 곳 보지요. (고전 15:55-57)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이 있다는 것이지요.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 사망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즉, 죄의 권능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 죄의 권능을 이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무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죄를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삶을 살았던 그 누구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황제도, 최고의 부를 가지고 있었던 부자도, 최고의 학식을 가지고 있었던 학자도, 나름대로 선하게 살아갔다고 하는 여러 선인들도 이 죄의 문제만큼은 해결하지 못하고 죽어 갔습니다. 그러니 이 죄의 권능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바로 이 죄의 권능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권능은 아무도 싸워서 이길 수 없었던 죄 사망의 권능을 이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권능은 그 어느 힘 보다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힘을 그는 경험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죄를 이긴 부활의 권능을 경험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죄로부터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권능이면 가능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의 죄악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그렇다면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부활의 권능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왜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고자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이 고민스러운 죄악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죄악을 무엇을 의지하면 이길 수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바로 부활의 권능을 의지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활의 권능을 경험한다는 말은 이것을 의지해서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부활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죄를 이기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힘을 의지해서 자신도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 사람은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 권능을 힘입어 죄를 이기시고 계십니까 고난에 참여하고자 다음으로 바울이 경험하고자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잘 알고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롬 8:17'에서 말하기를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 말이 시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부활의 그 영광스러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고난은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즉,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자신도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고난의 길을 걷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삶의 곳곳을 열어보면 그리스도와 함께한 고난의 흔적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쓴 서신 아무데나 펼치고 읽어내려 가 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서 바울이 어떤 고난을 당했는가를 금방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고난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이 무엇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영광스러움은 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우리들도 바울처럼 고난을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고 감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문제점 중에 하나는 부활의 영광은 얻기를 원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부흥을 하고 어떤 교회의 예배가 은혜가 되는지 아십니까 예, 축복을 기원하고 복을 비는 교회는 성장을 하고 아멘이 넘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강조하고 고난을 강조하는 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복받기를 기원합니다. 하면 아멘을 하지만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읍시다. 하면 아멘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지 않습니다. 부활을 소망하는 사람은 그 부활이 어떤 것을 통과해서 얻어진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진정으로 부활의 영광스러움을 바라보고 있다면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아니 오히려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십시다. 우리들도 바울처럼 이런 고난을 직접 경험하기를 소원해 보십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단지 지식적으로 알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직접 자신의 삶속에 경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목표를 말할 때 그것을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는 이것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이런 열망을 가지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바울은 이렇게 자신이 알고싶은 것 몇 가지를 이야기 한 후 자신이 바라는 소망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내가 빨리 죽어서 부활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일까요 예, 얼핏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일까요 자신이 부활을 할 것을 확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일까요 물론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카이퍼 박사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의 관념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은 서 있는 자이고 죽어 있는 사람은 누워있는 자이다 그래서 헬라식으로 익살을 떨며 바울은 나는 그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영적으로 누워있는 자들 즉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 사이에 나는 서 있음으로써 쉽게 눈에 띄어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나의 행동을 통하여 영생을 미리 선보이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풀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기 죽어 있는 사람들은 목숨이 끊어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육신 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이라는 말은 서 있다는 말로도 해석이 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은 넘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서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많은 군중이 모여 서 있는 자리에서 한 사람을 찾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앉아 있는데 한 사람만이 서 있다면 그 서 있는 사람 찾는 일은 누워서 떡먹기 만큼이나 쉬운 일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다 영적으로 누워 있는 이 즈음에서 자신은 우뚝 서 있는 그런 사람으로 인정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즉,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찬란하게 빛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꿈꾸어야 할 것입니다. 모두 다 누워 있는 자리에서 함께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우뚝 서서 찬란하게 빛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전에는 저들과 함께 누워 있었습니다. 죽어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부활을 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엡 2:1-6)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들이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이 거듭났다는 말은 이미 부활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부활은 미래 적인 어떤 일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들은 부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저 죽어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부활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뭔가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부활했다고 말하면서 저 넘어져 있는 사람들과 함께 넘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넘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우뚝 서서 영롱하게 빛나야 합니다. 저 넘어진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야 하고 삶의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사는 모습도 달라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달려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같을 수 있습니까 같다는 것이 모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부활을 하신 분들입니까 그리고 부활하신 분처럼 그렇게 사시고 계십니까 그렇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