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고난에의 동참 (사53:10-12,빌3:1-11)

본문

어느 동물원에서 사슴이 새끼를 낳을 때 무통분만(無痛分娩)을 시켰더니 새끼를 본척 만척하며 돌아보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없이는 모성에도 발휘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통을 통과하지 않은 창조란 있 을 수 없고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영광은 참된 영광일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고난을 맛보 지 않고 영광을 얻으려는 것이요, 창조하는 아픔을 겪지 않고, 창조의 기쁨을 맛보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짜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뼈를 깎는 것 같은 고통과 피나는 노력 없이 쉽게 가짜 박사 학위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남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하지 않으면서 돈은 쓰고 싶으니까 위조 지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풍토는 신앙 생활에까지 침투되어 아주 쉽게 편안하게 예수 를 믿으려는 사람들로 교회는 만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속했으니까 이제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된다고 가볍게 생각하고 교회 에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예수로 말미암아 오는 사죄의 은혜를 귀하게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본 회퍼는 이러한 교회의 풍토를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교회는 은혜를 싸구려로 팔리는 상품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또는 무진장한 식료품 창고에서 물품을 내오 듯이 생각 없이 교회에서 털어 내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공짜라고 말하면서 대가를 이미 지 불한 자를 생각해서라도 무엇이나 거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짜가 아니라면 무엇이 은혜란 말입니까
본 회퍼는 이런 은혜를 '값없는 은혜' 라고 불렀습니다. "값없는 은혜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교회의 규 율을 무시한 세례요, 죄의 고백 없이 베푸는 성만찬, 은밀한 참회 없는 면 죄의 확인이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산사람 예수 그리스도 를 무시한 은혜는 값없는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들은 교인들을 대량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마치 조폐 공사에서 화폐를 마구 찍어내듯이 남발하므로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회의 실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는 교인의 수를 늘리기에만 급급해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나 회개 그리고 져야 할 십자가는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오직 축복과 위로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교회밖에 나가서는 자기가 교인임을 밝히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밝히므로 따르는 여러 가지 제약과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 문입니다. 이들은 언제든지 자기에게 불리할 때는 그리스도를 헌신짝처럼 던져 버릴 용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아 무 것도 자기 것을 희생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어떤 감격도 체험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를 위하여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 교인들이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다던가 이 땅에 사회 정의 를 실현시키기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전연 기대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현재 자기가 이 땅에서 구축하고 있는 안정된 기 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 때문에 옥에 갇힌다던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 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교인들은 성령님 체험을 통하여 방언도 하고 병도 고치 고 귀신도 쫓아내지만 그래서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잘 믿는다고 자부하 지만, 막상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리에선 뒤로 물러나 앉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져야 할 자리에선 뒤로 물러나 앉는 것입니다.
십자가 를 져야 할 자리에선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왜 내가 십자가를 또 다시질 것인가 하면서 회피하는 교인들인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 신앙, 십자가를 지지 않는 신앙이란 결국 알맹이 없는 쭉정이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산상수훈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를 향하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 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이렇 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 아, 내게서 물러가라"(마 7:21-23) 예수 앞에 많은 사람이 와서 주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기적도 행하였 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였다는 말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아버지의 뜻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무엇이라고 기도하셨습니까 내 뜻 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는 그의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빼 놓은 모든 신앙의 행위는 위선이요, 거짓 신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국의 교회는 위기 앞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하였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은 교회요, 오늘의 고난을 외면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신약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고도 그 모든 것을 오물같이 여겼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발견되려는 것입니다." 그 러면서도 그는 말하기를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 어떻게 해서 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대 로 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먼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음에는 고난에 함께 동참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은혜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본 회퍼는 말하기를 "은혜는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 기 때문에 비싸고, 동시에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에 은혜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이 땅에 속한 우리의 모든 것을 요 구하시기 때문에 비싼 것이요, 그러나 또 하늘의 새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 기에 그것은 은혜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고 고백했을 때, 그는 영광의 그리스도, 왕되신 그리스도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고백을 들으시고 자기가 예루살렘 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 을 당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광의 그리스도이기 전에 고난의 종이요,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나 그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할 일과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인가 되어 보겠다는 꿈을 가 지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되었고, 부 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올 때 어리둥절한 채 있는 그들을 예수는 부르 시어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오순 절 다락방에서 그들은 화끈한 성령님 체험을 한 후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사도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자기들 몸으로 채워 간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함 없이, 또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신앙을 가 졌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은혜도 축복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 없이 그의 부활을 이해 할 수 없고, 그가 약속한 영생을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지겠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관문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번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제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포 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에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입니다."고 하였 고, "이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은 내게 대하여 못 박혀 죽었고, 나는 세상 에 대하여 못 박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이 세상에서 얻 기를 원하던 모든 것, 이 세상에 기대하던 모든 것을 그리고는 심지어 자 기 자신까지도 완전히 포기하여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진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 되는 자리를 버리고 종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 하여 스스로 한 걸음씩 다가 가셨듯이 우리고 스스로가 이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자기가 결단을 내려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둘째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유와 정의,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까닭이 무 엇입니까 이 땅에 편만하여 있는 죄와 부 자유와 불의를 몰아내고 거기에 얽매인 인간들을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시고 거기에 사랑과 평화를 가져오 게 하기 위하여 그가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으로 채워 간다는 것을 바 로 그리스도께서 하시고자 했던 그 일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이 땅 위에 모든 불의한 일들과 대항하여 투쟁하는 일이며, 억압당하는 인권의 회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자유를 억압하고 평화를 짓밟는 모든 세력과 투쟁하여 자유와 평화를 실현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오늘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는 주일입니다. 교회의 외적인 성장 속에서 오늘 우리가 져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외면해 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는 주일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에게 걸림돌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서도 바로 그 십자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 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설교에서 십자가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몸으로 감당해 가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일부 러 설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제 교회당을 짓고 있습니다만 아름다운 교회당 속에 안주하면서 오늘의 고난을 외면하게 될까 봐 두려워 지는 것입니다. 오늘 목회자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이 교회로 하여금 함께 고난에 참여하게 할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 목회자의 고민은 예수 를 따라가야 영생을 얻을 줄 알면서도 자기가 가진 많은 재산 때문에 돌아 설 수밖에 없었던 부자 청년의 고민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돌아설 것인지를 결단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의 고난과 함께 참여하여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 어떻게 하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결심이 없이는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로 믿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께 능력을 간구하여야 하겠습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86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