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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붙잡힌 사람! (빌3:6-16)

본문

많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속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억매이고 간섭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자유라는 단어를 고귀하게 생각하며 가치있게 생각 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유라고 하면 경제적인 자유, 정치적인 자유, 교육적인 자유, 문화적인 자유등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자유는 지식의 자유, 이성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 한번 깊이 생각 해 봅시다. 우리의 삶에 진정한 자유란 있습니까 인간은 무중력인간이란 없습니다. 진공인간도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인간은 무엇인가에 붙잡혀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달나라에서의 우주인간. 무중력상태에 놓여 둥둥 떠 다닙니다. 쉽게 말하면 그런 인간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붙잡혀 있고 무엇인가에 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돈에 끌려 삽니다. 어떤이는 강한 육신의 욕망에 끌려 삽니다. 또한 어떤이는 술에 끌려 살고, 약물에 끌려살고, 세상의 명예나 권세에 끌려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유를 박탈당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은 양심도 빼앗기고, 인격도 도난당하고, 거기에 매여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붙잡혀 삽니다. 이것뿐아닙니다. 조금은 낫지만 어떤이는 가정에 매이고, 직장에 매입니다. 아침이 되면 가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매여서 그것을 하여야만합니다. 여자들은 남편에 매이고, 자녀에게 매여서 삽니다. 가정일에 매여서 삽니다. 자신의 자유는 완전히 박탈당하고 삽니다. 사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인생에게는 완전한 자유란 없습니다.
예)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독서의 바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노예이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선택된 바에 의해서 노예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누구의 노예인가 하는 사실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노예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노예인가하는 사실입니다.
나는 무엇에 붙잡혀 사는 인간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무엇인가에 붙잡혀 사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존재를 무엇이라고 말하는고하면, 12절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다시말하면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붙잡혔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맨처음 자신의 사상과 세상적인 명예에 붙잡혀 살던 사람입니다. 그는 헛된 철학과 그의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멕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는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80도로 바뀝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으며 전혀 다른 인생을 삽니다. 그러기에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나는 붙잡혔다. 나는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그는 그의 서신을 기록할 때마다 자신을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예수님이 값주고 산 존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어머니의 모태로 부터 택정하였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은 철저히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자신의 몸만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부를 바쳤으며, 자신의 마음의 중심과 사상과 생각까지도 완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합니다. 그는 외치기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바울 사도의 삶은 노예로서 아무런 의미와 삶의 즐거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 그러한 삶에서 진정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고 참다운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찾고 나아가서 살아가는 인생ㅇ의 보람을 깨닫는 다는 것입니다.
예)독일의 신학자 본회퍼의 옥중서신에 보면 그는 이런 시 한편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자일까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어떤 자이건, 아! 하나님이여, 당신은 아십니다. 애가 누구이든, 선하든 악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나는 분명히 당신의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나 자신도 나를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바울 사도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살아올 때는 자신의 인생을 다른 것에 붙잡혀 살때는 세상사람이 원하는 대로 그런 삶을 살았지만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삶을 살면서 예수님의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빌7절-9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것이 그의 진정한 인생의 자유인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붙잡혀 고통하며 살던 그의 삶이 이제는 그것을 부터 해방을 맛봅니다. 진정한 자유의 삶을 외치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입니다. 사단의 세력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의 삶에 붙잡혀 세상의 물질에 노예의 삶이 되어서 살도록 유혹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돈의 노예가 되도록하며, 세상의 권세나 명예의 노예가 되도록 합니다. 때로는 육신의 욕정과 욕망의 노예가 되도록하여 자신의 노예가 되게 하며 결국 소중한 우리의 삶을 파괴시키려고 합니다.
예)요즈음 재산공개로 인하여 시끄럽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옛날 마치 아간의 사건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간 한사람이 여리고성에서 탐욕의 노예가되어 물질을 감춰두고 치부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아이성에서 패배를 하게 하였고, 결국 아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승리의 역사를 맛보았습니다. 그들은 아간같이 탐욕과 세상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자신마을 위한 치부를 하였고 이 나라는 고통의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위에서 사단의 꾀에 빠져 그러한 것에 노예가 되어서 살다가 비참하게 인생을 마치신 분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붙잡혀 삽니까 혹시 세상 것의 노예로 살거나 썩어지고 사라질 헛된 세상것에 얽매어서 하나님의 말씀도 떠나고 죄를 지으며 살지는 않는지요 이 모든 것에 붙잡혀서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도 준비하지 못하고 지치고 피곤한 모습을 살지는 않는지요 참으로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더욱 나은 삶과 축복된 삶을 위하여서 자신의 살아가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합니다.-더구나 우리는 어떠한 삶에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발버둥 칩니다. 다시말하면 그 목적의 노예가 되어서 진정한 삶을 놓칩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보십시다.
빌3:12-14“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 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다만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려고 발버둥치면서 거기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삶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루어야 할 목적이 아니라 달려가야할 온전한 방향을 설정하고 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 합니다. 사람들은 목적을 세우고 무조건 달리기에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것인지도 돌아보지 않고 달립니다. 그러다가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생을 비관하기도 하고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또 설상 그 목적이 이루어졌다고 하여도 그것은 마치 무지개를 잡는 것과 같이 헛것일 뿐이며 만족할 수없고 허만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목적이 아니라 삶의 온전한 방향의 설정입니다. 이 방향만 분명히 세워 놓고는 달리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푯대’란 내가 세운 목적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노예된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향한 방향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14절에 “그리스도안에서”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더구나 그는 놀라운 신앙의 비밀을 말합니다. 12절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잡혔다’라는 말은 포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없는 자신의 삶입니다. 그러나 잡혔다하여 그냥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적그적으로 자신이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그는 노예의 붙잡힌 삶을 살면서도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것입니다. 이것이 특권이냐 아니면 고통이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있는 것입니다.
예)정채봉선생의 ‘생각하는 동화시리즈’가운데 한편인 코뚜레가 일을 한다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미소가 두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송아지가 자라 어느덧 코뚜레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맏송아지가 농부에게 사정합니다. “저에게는 제발 코뚜레를 하지마세요” 농부가 말하기를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망아지처럼 되고 말텐데” “아닙니다. 주인님 코뚜레를 해야만 일을 시킬 수있다는 생각은 옛날생각입니다. 두고보십시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곱절이나 일을 잘할테니까요.” 농부는 맏송아지의 말을 받아들여 동생송아지의 코뚜레만 했습니다. 맏송아지는 자신의 약속대로 코뚜레 없어도 스스로 멍에를 매고 쟁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달구지도 힘껏 끌었습니다. 그러면서 송아지가 자라서 어느덧 어른 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코뚜레를 하지 않은 맏송아지는 차츰 꾀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농부에게 됫발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코뚜레를 한 동생송아지가 들에서 돌아와 보니 맏송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행바을 알아보니 주인은 말하기를 “일도 안하고 꾀만 부려서 도살장으로 보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직도 코뚜레가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코뚜레 한소가 일을 한다. 우리의 신앙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잡힌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자발적으로 주님의 푯대를 향하여 최선을 다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붙잡힌 사람이 된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요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철저히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서 그 푯대를 향하여 자발적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잡힌바된 존재로서 엉뚱한 길로 가지 마시고, 주님의 길로 좁은 길로 달려갑시다. 거기에 진정한 자유와 삶의 목표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과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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