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익한 종 (빌1:4-22)
본문
바울 사도가 옥중에서 제자 에바브라의 방문을 받고 그 당시 에바브라가 기도하고 있는 교회인 골로새,라오디게아,에베소교회에 대한 유대주의자들의 방해에 대비한 대책을 세워 골로새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와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쓰고 이 편지를 두 기고의 편에 전달하는 길에 개인적으로 빌레몬에게 그의 종이었 던 오네시모를 보내게 된 내용의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인 것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던 당시의 신자 로 장사꾼이었는데 그 수하에 있는 노예 오네시모가 돈을 훔쳐 가지고 도망을 쳐 로마에 와서 바울을 만나서 회개하고 기독교에 들어오게 되어 너무나 신실하고 착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이 받아들여서 종이 아니요 형제로,무익한 종이 아니라 유익한 종으로 맞아줄 것을 이 서신 내용 속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사람의 중간 에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는 바울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용서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모략 중상으로 죄가 없는 자도 죄인이 되 고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 보다는 안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이 메마르고 강팍한 현실에서 본문은 기독교의 참 실상을 보여주면 서 이러한 신앙적 정신을 가지고 이웃과 형제 지간에 서로가 아 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도 강팍해지기만 하는 우리 자 신 자신을 이 아름다운 사랑으로 충전시키는 시간이 되시길 바라 며 어느 사람의 말과 같이 "과학은 앞으로 나갈수록 발전이 되지 만 종교는 처음으로 돌아갈수록 진실해진다"고 했는데 우리는 초 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도둑이 친구로 변하고, 종이 형제로 변하고,무익한 사람이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든 오네시모의 아름다운 변화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1. 바울의 복음적인 사랑 빌레몬서에 나타난 바울이 오네시모를 대하는 정신은 우리 죄 인들에게 함께해 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일치되는 신앙 사상 입니다. 오네시모는 당시의 신분으로서는 노예였고,그위 행위는 범죄자 였고 또한 그것을 도피하여 도망쳤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울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예수의 복음으로 새로워지는 변화를 가져왔고,훗날에 오네시모는 에베소교회의 감독이 되 어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 있다가 2월15일에 순교를 당하므로 지금도 2월 15일을 "오네시모 순교기념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그에게 복음을 통하여 무엇을 심어 주었습니 까
1) 평등사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 계급에서는 노예제도가 강력하게 지켜지고 있 었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이 노예제도와 계급제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 였음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차별하는 제도적 모순,즉 남 자와 여자의 지위와 사회참여,인식부족,귀족과 노예와의 차별대 우에 대한 인격차별을 요구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차 별이 없습니다. 롬3장22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고 이 차별을 롬10장12절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절대적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흑인의 노예해방 운동에 있어서 빌레몬서는 지대한 공헌을 했을 뿐아니라 민주주의의 인격의 평등사상도 바로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니다.
2) 속죄 사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로마의 법은 엄격했습니다. 노예가 도망했다가 잡히는 날에는 죽어야 했던 것이고,죽여도 양심상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시 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 으신 속죄의 도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의 생명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벗어날 수 없는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만약에 우리 스스로가 형제를 용서못링한다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마 18장 21절과 22절에서 베드로는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라고 하시고 계속해서 예를 들기를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주었는데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에 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게 가두었습니다. 이 때에 임금이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를 잡아다가 "내가 네 빚을 전부 탕 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하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리라(마18:21-35)"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 서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 용 서가 없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오네시모의 모든 지은 죄를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여 주셨다는 복음을 주었던 것입니다.
3) 사랑의 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죄인이 도피해 나가는 이용물이 될 수 없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종교이므로 마음대로 죄를 지 어도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실 것이 아니냐고 악용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롬6장1-2절에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 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 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회개하고 새로워진 사람에게는 그 어떠 한 사람일지라도 사라으로 용납하시는 종교인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해도 전과자라는 오명 이 있어 용서는 했으나 다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를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 로 삼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형제에 대하여 과거를 씻지 못 하고 마음 한 구석에 기억하므로 용서 못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 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 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고 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의 이 사랑 정신을 본받읍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 상호간에 이 넘치는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2. 빌레몬의 진실한 신앙 빌레몬이라는 이름은 빌레몬서에서 한 번 밖에 나오지 않는 이름이며 그의 행적도 역시 빌레몬서에 의지할 수밖삥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본서에서 나타난대로 바울이 신임할 수 있는 훌륭한 신앙인인 것 같습니다.
1) 물질로 봉사한 신앙입니다. 2절에서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 하노니"라고 한 것은 바 로 빌레몬의 거처하는 가정이 교회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행19장10절을 보면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시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 시기에 장사꾼인 빌레몬은 에바브 라와 함께 고로새에서 이곳에 왔다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개종 을 한 것 같으며, 그는 고향 골로새 지방에 돌아와서 교회를 세 웠는데 그곳이 바로 자기 집에서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교회 가 바로 골로새 교회인 것입니다. 빌레몬은 이토록 자신의 집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교회를 세 우고 사실상 교회의 기둥으로써 봉직하는 일군이었으니 바울과는 그 관계감 깊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돈이 있어야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니냐하 고 말하지만 돈이 있다는 것과 드릴 수 있는 신앙과는 다른 것입니다. 빌레몬은 물질적으로 봉사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2) 순조의 신앙인이었습니다. 빌레몬의 신앙은 주변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7절에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교회로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교회에서 가장 중직 을 맡고 있는 일군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울 에게나 함께 있는 성도들에게나 늘 평안을 주며 기쁨을 주며 위 로를 줄 수 있는 존재였음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서 항상 시한폭탄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잠시 조용하다가 문제가 생겼다면 그런 사람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교회가 불편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 았으면 나을 뻔 했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그런 존재가 아 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은 시시각각으로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있습니다.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쁨을 주며 위로 가 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일꾼은 하나님의 교회에 얼마나 필 요한 존재입니까 그러면 왜 이토록 차이점이 생기는 것입니까 순종과 역종과의 차이입니다. 물이 내려가는 길을 골을 파주고 거침이 없이 내려가도록 할때 에는 평화스러운 물 줄기가 되지만 내려가는 물 줄에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을 때에는 물은 여러곳으로 나갈 길을 찾게 되고 물 줄기가 분산되어 평화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일할때 말없이 순종하는 사람이지만 역종하는 사람은 일할 때는 모습을 볼수 없이 일하지 않으나 자신의 입장을 위할때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주장하는 자세 를 취하게 됩니다. 막14장3-9절을 보면 마리아가 옥합을 깨어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위에 부었 으나 예수님을 팔아 먹을 가롯 유다는 가장 예수님을 아끼고 돈 을 아끼는 것처럼 나서서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 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괴변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그를 책망했는데 요12장을 보면 "이는 도 적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막14장9절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 자의 행한 힐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없는 여인의 순조의 태도와 다른 제자들은 가만이 있는데 나타나서 자신의 하고 있는 행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잘난척 비방했던 가 롯 유다를 비교하여 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빌레몬은 성경상에 한 마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 의 말에 따라 그의 재산상 손해도,인격적 손해도,생활상 고통도, 무 조건 없이 바울의 말에 순종했던 순조의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위대한 귀감이 되는 신앙의 선배인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봉사하면서 말없이 순종했던 빌레몬의 신앙입니다.
3. 오네시모의 변화된 인격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성격도,인격도,품격도 변화되고 사고도,판단도,행위도,변화되는 종교인것입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참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어떻게 변화가 됐습니까
1) 노예에서 형제로 변화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제도상의 노예였겠지만 그는 예수를 받아 들임으로 써 죄의 노예요, 사단의 노예에서 그리스도의 형제로 변화 되 었습니다. 롬8장1절과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님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 이라"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아직도 나를 얽매고 있는 쇠사슬에서 노예로 살고 있습니까 죄에서,정욕에서,마귀 에게서,습관에게서,옛생활에서,나를 얽매고 있는 감정에서,혈기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완전히 매인줄을 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고 그의 피로 인하여 형제가 됩시다.
2) 도둑이 변하여 친구로 변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돈을 훔쳐서 도망친 도둑입니다. 이 사람 이 이제는 빌레몬의 친구로 변하게 된것입니다.
3) 무익한 자가 유익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많아도 막상 일을 시키려면 쓸만한 사람이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변화되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자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백해 무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안에서 변화된 사람은 참으로 필요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25장30절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변화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네시모는 유익한 종 이 되어 그는 후일에 에베소교회의 감독으로 있다가 순교를 당 했던 순교자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변화입니까 바울이 빌레몬에게 말하기를 17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 무로 알진대 저(오네시모)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라고 합니다. "동무"란 말은 코이노논인데 이것은 코이노니아에서 나온 말로 사귐(Fellowship)을 뜻합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아주 가까운 친구로써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도둑을 바울임 맞이한 것처럼 맞이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변화되는 것은 바로 기독교 복음 외에는 있을 수 없는 변화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것을 도둑하던 우리가 예수의 친구로 변하는 사람이 됩시다. 주일을 도둑하고,십일조를 도둑하고,기도시간, 성경읽는 시간을 도둑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결론' 오늘 바울 사도의 사랑정신과 빌레몬의 신앙과 오네시모의 변 화된 인격 모두가 기독교의 중심사상 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의 구속의 모습이라면 빌레몬은 구원을 소유한 신앙인의 참 모습 이요,오네시모는 구언받은 자의 복음안에서 변화받은 인격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유 익한 종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이 받아들여서 종이 아니요 형제로,무익한 종이 아니라 유익한 종으로 맞아줄 것을 이 서신 내용 속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사람의 중간 에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는 바울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용서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모략 중상으로 죄가 없는 자도 죄인이 되 고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 보다는 안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이 메마르고 강팍한 현실에서 본문은 기독교의 참 실상을 보여주면 서 이러한 신앙적 정신을 가지고 이웃과 형제 지간에 서로가 아 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도 강팍해지기만 하는 우리 자 신 자신을 이 아름다운 사랑으로 충전시키는 시간이 되시길 바라 며 어느 사람의 말과 같이 "과학은 앞으로 나갈수록 발전이 되지 만 종교는 처음으로 돌아갈수록 진실해진다"고 했는데 우리는 초 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도둑이 친구로 변하고, 종이 형제로 변하고,무익한 사람이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든 오네시모의 아름다운 변화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1. 바울의 복음적인 사랑 빌레몬서에 나타난 바울이 오네시모를 대하는 정신은 우리 죄 인들에게 함께해 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일치되는 신앙 사상 입니다. 오네시모는 당시의 신분으로서는 노예였고,그위 행위는 범죄자 였고 또한 그것을 도피하여 도망쳤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울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예수의 복음으로 새로워지는 변화를 가져왔고,훗날에 오네시모는 에베소교회의 감독이 되 어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 있다가 2월15일에 순교를 당하므로 지금도 2월 15일을 "오네시모 순교기념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그에게 복음을 통하여 무엇을 심어 주었습니 까
1) 평등사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 계급에서는 노예제도가 강력하게 지켜지고 있 었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이 노예제도와 계급제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 였음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차별하는 제도적 모순,즉 남 자와 여자의 지위와 사회참여,인식부족,귀족과 노예와의 차별대 우에 대한 인격차별을 요구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차 별이 없습니다. 롬3장22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고 이 차별을 롬10장12절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절대적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흑인의 노예해방 운동에 있어서 빌레몬서는 지대한 공헌을 했을 뿐아니라 민주주의의 인격의 평등사상도 바로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니다.
2) 속죄 사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로마의 법은 엄격했습니다. 노예가 도망했다가 잡히는 날에는 죽어야 했던 것이고,죽여도 양심상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시 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 으신 속죄의 도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의 생명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벗어날 수 없는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만약에 우리 스스로가 형제를 용서못링한다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마 18장 21절과 22절에서 베드로는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라고 하시고 계속해서 예를 들기를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주었는데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에 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게 가두었습니다. 이 때에 임금이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를 잡아다가 "내가 네 빚을 전부 탕 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하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리라(마18:21-35)"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 서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 용 서가 없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오네시모의 모든 지은 죄를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여 주셨다는 복음을 주었던 것입니다.
3) 사랑의 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죄인이 도피해 나가는 이용물이 될 수 없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종교이므로 마음대로 죄를 지 어도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실 것이 아니냐고 악용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롬6장1-2절에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 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 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회개하고 새로워진 사람에게는 그 어떠 한 사람일지라도 사라으로 용납하시는 종교인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해도 전과자라는 오명 이 있어 용서는 했으나 다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를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 로 삼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형제에 대하여 과거를 씻지 못 하고 마음 한 구석에 기억하므로 용서 못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 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 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고 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의 이 사랑 정신을 본받읍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 상호간에 이 넘치는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2. 빌레몬의 진실한 신앙 빌레몬이라는 이름은 빌레몬서에서 한 번 밖에 나오지 않는 이름이며 그의 행적도 역시 빌레몬서에 의지할 수밖삥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본서에서 나타난대로 바울이 신임할 수 있는 훌륭한 신앙인인 것 같습니다.
1) 물질로 봉사한 신앙입니다. 2절에서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 하노니"라고 한 것은 바 로 빌레몬의 거처하는 가정이 교회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행19장10절을 보면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시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 시기에 장사꾼인 빌레몬은 에바브 라와 함께 고로새에서 이곳에 왔다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개종 을 한 것 같으며, 그는 고향 골로새 지방에 돌아와서 교회를 세 웠는데 그곳이 바로 자기 집에서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교회 가 바로 골로새 교회인 것입니다. 빌레몬은 이토록 자신의 집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교회를 세 우고 사실상 교회의 기둥으로써 봉직하는 일군이었으니 바울과는 그 관계감 깊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돈이 있어야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니냐하 고 말하지만 돈이 있다는 것과 드릴 수 있는 신앙과는 다른 것입니다. 빌레몬은 물질적으로 봉사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2) 순조의 신앙인이었습니다. 빌레몬의 신앙은 주변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7절에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교회로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교회에서 가장 중직 을 맡고 있는 일군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울 에게나 함께 있는 성도들에게나 늘 평안을 주며 기쁨을 주며 위 로를 줄 수 있는 존재였음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서 항상 시한폭탄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잠시 조용하다가 문제가 생겼다면 그런 사람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교회가 불편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 았으면 나을 뻔 했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그런 존재가 아 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은 시시각각으로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있습니다.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쁨을 주며 위로 가 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일꾼은 하나님의 교회에 얼마나 필 요한 존재입니까 그러면 왜 이토록 차이점이 생기는 것입니까 순종과 역종과의 차이입니다. 물이 내려가는 길을 골을 파주고 거침이 없이 내려가도록 할때 에는 평화스러운 물 줄기가 되지만 내려가는 물 줄에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을 때에는 물은 여러곳으로 나갈 길을 찾게 되고 물 줄기가 분산되어 평화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일할때 말없이 순종하는 사람이지만 역종하는 사람은 일할 때는 모습을 볼수 없이 일하지 않으나 자신의 입장을 위할때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주장하는 자세 를 취하게 됩니다. 막14장3-9절을 보면 마리아가 옥합을 깨어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위에 부었 으나 예수님을 팔아 먹을 가롯 유다는 가장 예수님을 아끼고 돈 을 아끼는 것처럼 나서서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 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괴변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그를 책망했는데 요12장을 보면 "이는 도 적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막14장9절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 자의 행한 힐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없는 여인의 순조의 태도와 다른 제자들은 가만이 있는데 나타나서 자신의 하고 있는 행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잘난척 비방했던 가 롯 유다를 비교하여 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빌레몬은 성경상에 한 마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 의 말에 따라 그의 재산상 손해도,인격적 손해도,생활상 고통도, 무 조건 없이 바울의 말에 순종했던 순조의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위대한 귀감이 되는 신앙의 선배인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봉사하면서 말없이 순종했던 빌레몬의 신앙입니다.
3. 오네시모의 변화된 인격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성격도,인격도,품격도 변화되고 사고도,판단도,행위도,변화되는 종교인것입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참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어떻게 변화가 됐습니까
1) 노예에서 형제로 변화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제도상의 노예였겠지만 그는 예수를 받아 들임으로 써 죄의 노예요, 사단의 노예에서 그리스도의 형제로 변화 되 었습니다. 롬8장1절과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님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 이라"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아직도 나를 얽매고 있는 쇠사슬에서 노예로 살고 있습니까 죄에서,정욕에서,마귀 에게서,습관에게서,옛생활에서,나를 얽매고 있는 감정에서,혈기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완전히 매인줄을 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고 그의 피로 인하여 형제가 됩시다.
2) 도둑이 변하여 친구로 변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돈을 훔쳐서 도망친 도둑입니다. 이 사람 이 이제는 빌레몬의 친구로 변하게 된것입니다.
3) 무익한 자가 유익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많아도 막상 일을 시키려면 쓸만한 사람이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변화되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자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백해 무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안에서 변화된 사람은 참으로 필요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25장30절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변화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네시모는 유익한 종 이 되어 그는 후일에 에베소교회의 감독으로 있다가 순교를 당 했던 순교자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변화입니까 바울이 빌레몬에게 말하기를 17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 무로 알진대 저(오네시모)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라고 합니다. "동무"란 말은 코이노논인데 이것은 코이노니아에서 나온 말로 사귐(Fellowship)을 뜻합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아주 가까운 친구로써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도둑을 바울임 맞이한 것처럼 맞이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변화되는 것은 바로 기독교 복음 외에는 있을 수 없는 변화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것을 도둑하던 우리가 예수의 친구로 변하는 사람이 됩시다. 주일을 도둑하고,십일조를 도둑하고,기도시간, 성경읽는 시간을 도둑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결론' 오늘 바울 사도의 사랑정신과 빌레몬의 신앙과 오네시모의 변 화된 인격 모두가 기독교의 중심사상 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의 구속의 모습이라면 빌레몬은 구원을 소유한 신앙인의 참 모습 이요,오네시모는 구언받은 자의 복음안에서 변화받은 인격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유 익한 종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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