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2:1)
본문
바울은 이제껏의 모든 권고를 마치면서 결론적인 권고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종말로’ 이 말은 종합적으로 말한다는 의미와 이제부터 하는 말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바울의 버릇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처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같은 말을 쓰는 것이’ 그는 반복적인 말을 사용하므로서 중요한 권고를 하겠다고 햡니다. 가장 좋은 교육방법은 반복교육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좋은 신앙적인 교훈을 잔소리 같지만 반복적으로 자꾸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귀찮아 하지만 그것이 머리속에 밖혀서 이 다음에 그것이 생각나고 그렇게 살게 됩니다.
예)텔레비젼 광고는 바로 반복적으로 하면서 광고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신앙교육도 반복교육입니다. ‘기도해라, 전도해라, 결석말라’등의 중요한 신앙적인 삶의 태도를 반복적으로 주입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반복적으로 중요하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가르침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1장에서부터 ‘기쁨’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어떻게 창조해 갈 것이냐에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가 지금 감옥에 있다는 사실과 그의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기쁨’에 대한 그의 요구가 얼마나 충격적이지 모릅니다. 빌립보교인들은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고난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당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고난과 시련의 출발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삶의 조건 속에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의 삶이란 것은 기쁨이 증대되기 보다는 기쁨을 앗아가는 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기쁨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질 때에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은 먼추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기쁨을 앗아가는 요소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것을 바울은 앞장에서부터 계속 거론해 오고 있었습니다.
1.사람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너무나 자주 우리에게서 기쁨을 앗아 갑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의 삶은 오히려 기쁨을 앗아 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로의 관계를 조심성있게 유지해 가야합니다. 가장 조심하여야 할 것은 바로 ‘말’입니다.
예)“사람이 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말을 안하고 꼬리를 흔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말을 합시다. 남의 이야기를 좋게 합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좋다고 생각되는 것만 합시다. 그럴때에 우리의 관계는 기쁨을 증진시키는 좋은 만남이 될것이며 은혜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환경입니다. 좋지못한 환경은 우리의 기쁨을 앗아갑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입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환경이 좋은 사람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범죄하였습니다. 반대로 바울은 가장 나쁜 환경에서 기쁨을 외치며 그의 휼륭한 서신들을 완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라 그 환경을 극복하여 나가는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쁨을 앗아갈 환경이 주어지면 기쁨을 창조하는 방법을 배워 나가야 합니다.
3.죄입니다. 죄를지면 기쁨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올바른 삶을 위하여 싸워가야 합니다.
4.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근심과 염려를 불어넣고 마음을 상할 일을 만들고 시험을 가져와 우리의 마음에 넘치는 기쁨을 앗아갑니다.-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쁨’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기쁨은 상대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욕구충족이 이루어졌을 때에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이 좋게 이루어질 때에 맛보는 기쁨입니다. 배고플때에 먹을 것이 있으면 기쁘고, 춥다가 따스한 옷을 입으면 기쁘고, 나의 생각대로 무엇이 이루어지면 기쁩니다.
예)월드컵축구 마지막경기에서 굉장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저도 그 경기를 보다가 하도 답답하니까 기도가 나옵디다. 이라크가 한골만 넣게해달라고,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경기가 끝났는가 싶은데 한골을 넣었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울고불고 했다는 이야기 들으니까 미안한 생각이 듭디다. 이 기쁨은 일차원적인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작은 것으로부터 이어집니다. (신호등이 계속 잘 연결될 때에, 수건을 처음 사용할 때의 기쁨, 속옷을 처음 입을 때의 상쾌함, 기다리지않고 자기가 탈 버스가 도착했을 때에, 잘 막히던 도로가 안 막힐 때에) 좀더 보면 새집에 이사갔을 때에, 새옷 사입었을 때에, 새로운 물건을 구입했을 때에등등. 그러나 이러한 일차적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상대적인 기쁨은 상대적인 기쁨의 요소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집니다. 조금 나은 기쁨은 ‘지적인 기쁨’입니다. 이것은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창작의 기쁨, 학문에서 얻은 기쁨입니다.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은 선행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기쁨입니다. 사랑하고, 도와주고, 선을 행하며 좋은 일을 하면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가장 높은 차원의 기쁨이 무엇이냐면 바로 ‘절대적인 기쁨’인데 그것은 ‘영적이 기쁨’입니다. 신앙으로서 얻어지는 기쁨. 신비로운 기쁨입니다. 은헤로 인하여 기뻐하고, 소망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경험하지 못한 자는 누구도 이해하지 기쁨입니다. 오늘 바울사도는 바로 이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는 그런 기쁨과 엄격히 구별짓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주님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기쁨을 항상 누리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심각히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기쁨이라는 기뻐할 조건이 생기면 거기에 따라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창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쁨을 만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도 얼마든지 기쁘고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수도 있고, 반대로 답답하고 어두운 가정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부부도 기쁘게 살아가 수도 있고, 멋없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교회도 얼마든지 기쁘고 아름다운 교회로 창조할 수가 있으며, 반대로 시험과 문제만 만들어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내가 기쁨으로 채워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기쁨은 창조되는 것이다. 아니 더욱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누리고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특권입니다. 여러분 짐승이 웃는 것 보았습니까 집에서 키우던 개가 어느날 갑자기 나를 보고 씩 웃으면 어떨까요 동물이 웃는 다는 것은 오히려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웃을 수있습니다. 웃어야 이쁘고 웃어야 편합니다.
예)세계에서 제일 불친절한데는 프랑스 파리이고 두번째가 한국이라고 합니다. 파리는 그의 도시의 자부심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서울은 무엇이지요. 웃음을 못만들어요. 유머가 없어요. 그러니 집에가도 다 화가 난 것 같아요. 밖에나가도 다 싸운 얼굴 같아요. 무서운 표정입니다. 사람은 웃어야 합니다. 기쁨을 창조하고, 그 기쁨을 유지하고. 그 기쁨을 나눌 수있는 여유있는 삶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기쁨은 기뻐할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기뻐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은 명령입니다. 무조건 순종하여야 할 명령입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이 말은 조건이 있어 기뻐하지 말고 먼저 무조건 기뻐하면 기뻐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화가나는 일이 있다고 합시다. 그럴 때에 바로 화를 내고 걱정하면 거기에 붙잡힙니다. 그러나 조금 여유를 가지고 한번 씩 웃고 그럴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을 다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 생겨도 먼저 기뻐해 봅시다.
예)아주 못된 부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부부싸움하고나면 서로가 화가 나있습니다. 말도 안합니다. 그러면 대체로 남자나 여자가 한편이 그것을 풀어주려고 노력합니다. 웃기기도 하고 무엇을 사다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냥 여유있게 한번 웃어주고 받아주면 전쟁은 끝이나고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안 웃어요, 끝까지 고집부리고 냉전을 계속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못된 사람입니다. 자기만 손해입니다. 한번 쓱 웃어주는 것입니다. 그냥 여유있게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부싸움은 정드는 싸움이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아요. 괴로워하고 슬퍼하면 이상하게 계속 거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속상하다고 생각하면 자꾸만 속상하고 그것이 점점 더 확대되어서 속상해지고 나중에는 정말 큰 일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좀 속상해도 그냥 툭 털고 일어나서 이해해 버리고 빨리 기쁨의 요소를 찾아서 기뻐하면 그것은 잊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하나도 기쁜일이 없어도 무조건 기뻐하는 삶.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참 삶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음앞에서도 영원한 삶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사람. 문제 앞에서도 승리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기뻐하는 사람. 고난이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기뻐하는 사람. 시험이와도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사람. 바로 이러한 사람이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역사는 다 선하고 아름답다고 믿고 괴롭고 답답하여도 기쁨을 잃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중에도 기쁨을 만들어 내는 힘있는 믿음으로 성숙시켜야 합니다. 누누히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상표는 기쁨입니다. 얼굴에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링컨은 사람이 나이 40이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는데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얼굴에 대하여 책임을 지어야 합니다.
예)미국 세이트루이스를 여행중이던 한 변호사가 주일날 아침에 교통순경에게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개받은 교회를 찾아가는 동안에 몇개의 교회가 더 있더랍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순경에게 가까운 교회가 많은데 왜 굳이 그 교회를 소개했는가고 물었더니 그 순겨의 말인즉 “어느 교회가 참 교회인지 제가 가 보지 못하여서 모릅니다.
그런데 주일날 아침마다 교통정리를 하면서 보니까 그 교회에서 나오는 교인들의 표정이 가장 밝고 기뻐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를 소개한 것입니다.” 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험하고 답답한 세상에서. 괴롭고 힘들고 짜증과 피곤이 겹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늘의 명령을 하나 받았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입니다. 기쁘게 살아갑시다. 기쁨을 주님안에서 창조해 갑시다. 우리 안양서부교회 모든 교인은 삶의 현장에서 밝고 아름다운 기쁨의 얼굴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예)텔레비젼 광고는 바로 반복적으로 하면서 광고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신앙교육도 반복교육입니다. ‘기도해라, 전도해라, 결석말라’등의 중요한 신앙적인 삶의 태도를 반복적으로 주입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반복적으로 중요하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가르침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1장에서부터 ‘기쁨’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어떻게 창조해 갈 것이냐에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가 지금 감옥에 있다는 사실과 그의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기쁨’에 대한 그의 요구가 얼마나 충격적이지 모릅니다. 빌립보교인들은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고난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당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고난과 시련의 출발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삶의 조건 속에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의 삶이란 것은 기쁨이 증대되기 보다는 기쁨을 앗아가는 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기쁨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질 때에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은 먼추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기쁨을 앗아가는 요소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것을 바울은 앞장에서부터 계속 거론해 오고 있었습니다.
1.사람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너무나 자주 우리에게서 기쁨을 앗아 갑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의 삶은 오히려 기쁨을 앗아 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로의 관계를 조심성있게 유지해 가야합니다. 가장 조심하여야 할 것은 바로 ‘말’입니다.
예)“사람이 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말을 안하고 꼬리를 흔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말을 합시다. 남의 이야기를 좋게 합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좋다고 생각되는 것만 합시다. 그럴때에 우리의 관계는 기쁨을 증진시키는 좋은 만남이 될것이며 은혜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환경입니다. 좋지못한 환경은 우리의 기쁨을 앗아갑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입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환경이 좋은 사람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범죄하였습니다. 반대로 바울은 가장 나쁜 환경에서 기쁨을 외치며 그의 휼륭한 서신들을 완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라 그 환경을 극복하여 나가는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쁨을 앗아갈 환경이 주어지면 기쁨을 창조하는 방법을 배워 나가야 합니다.
3.죄입니다. 죄를지면 기쁨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올바른 삶을 위하여 싸워가야 합니다.
4.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근심과 염려를 불어넣고 마음을 상할 일을 만들고 시험을 가져와 우리의 마음에 넘치는 기쁨을 앗아갑니다.-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쁨’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기쁨은 상대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욕구충족이 이루어졌을 때에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이 좋게 이루어질 때에 맛보는 기쁨입니다. 배고플때에 먹을 것이 있으면 기쁘고, 춥다가 따스한 옷을 입으면 기쁘고, 나의 생각대로 무엇이 이루어지면 기쁩니다.
예)월드컵축구 마지막경기에서 굉장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저도 그 경기를 보다가 하도 답답하니까 기도가 나옵디다. 이라크가 한골만 넣게해달라고,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경기가 끝났는가 싶은데 한골을 넣었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울고불고 했다는 이야기 들으니까 미안한 생각이 듭디다. 이 기쁨은 일차원적인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작은 것으로부터 이어집니다. (신호등이 계속 잘 연결될 때에, 수건을 처음 사용할 때의 기쁨, 속옷을 처음 입을 때의 상쾌함, 기다리지않고 자기가 탈 버스가 도착했을 때에, 잘 막히던 도로가 안 막힐 때에) 좀더 보면 새집에 이사갔을 때에, 새옷 사입었을 때에, 새로운 물건을 구입했을 때에등등. 그러나 이러한 일차적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상대적인 기쁨은 상대적인 기쁨의 요소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집니다. 조금 나은 기쁨은 ‘지적인 기쁨’입니다. 이것은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창작의 기쁨, 학문에서 얻은 기쁨입니다.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은 선행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기쁨입니다. 사랑하고, 도와주고, 선을 행하며 좋은 일을 하면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가장 높은 차원의 기쁨이 무엇이냐면 바로 ‘절대적인 기쁨’인데 그것은 ‘영적이 기쁨’입니다. 신앙으로서 얻어지는 기쁨. 신비로운 기쁨입니다. 은헤로 인하여 기뻐하고, 소망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경험하지 못한 자는 누구도 이해하지 기쁨입니다. 오늘 바울사도는 바로 이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는 그런 기쁨과 엄격히 구별짓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주님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기쁨을 항상 누리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심각히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기쁨이라는 기뻐할 조건이 생기면 거기에 따라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창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쁨을 만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도 얼마든지 기쁘고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수도 있고, 반대로 답답하고 어두운 가정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부부도 기쁘게 살아가 수도 있고, 멋없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교회도 얼마든지 기쁘고 아름다운 교회로 창조할 수가 있으며, 반대로 시험과 문제만 만들어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내가 기쁨으로 채워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기쁨은 창조되는 것이다. 아니 더욱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누리고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특권입니다. 여러분 짐승이 웃는 것 보았습니까 집에서 키우던 개가 어느날 갑자기 나를 보고 씩 웃으면 어떨까요 동물이 웃는 다는 것은 오히려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웃을 수있습니다. 웃어야 이쁘고 웃어야 편합니다.
예)세계에서 제일 불친절한데는 프랑스 파리이고 두번째가 한국이라고 합니다. 파리는 그의 도시의 자부심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서울은 무엇이지요. 웃음을 못만들어요. 유머가 없어요. 그러니 집에가도 다 화가 난 것 같아요. 밖에나가도 다 싸운 얼굴 같아요. 무서운 표정입니다. 사람은 웃어야 합니다. 기쁨을 창조하고, 그 기쁨을 유지하고. 그 기쁨을 나눌 수있는 여유있는 삶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기쁨은 기뻐할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기뻐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은 명령입니다. 무조건 순종하여야 할 명령입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이 말은 조건이 있어 기뻐하지 말고 먼저 무조건 기뻐하면 기뻐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화가나는 일이 있다고 합시다. 그럴 때에 바로 화를 내고 걱정하면 거기에 붙잡힙니다. 그러나 조금 여유를 가지고 한번 씩 웃고 그럴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을 다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 생겨도 먼저 기뻐해 봅시다.
예)아주 못된 부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부부싸움하고나면 서로가 화가 나있습니다. 말도 안합니다. 그러면 대체로 남자나 여자가 한편이 그것을 풀어주려고 노력합니다. 웃기기도 하고 무엇을 사다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냥 여유있게 한번 웃어주고 받아주면 전쟁은 끝이나고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안 웃어요, 끝까지 고집부리고 냉전을 계속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못된 사람입니다. 자기만 손해입니다. 한번 쓱 웃어주는 것입니다. 그냥 여유있게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부싸움은 정드는 싸움이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아요. 괴로워하고 슬퍼하면 이상하게 계속 거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속상하다고 생각하면 자꾸만 속상하고 그것이 점점 더 확대되어서 속상해지고 나중에는 정말 큰 일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좀 속상해도 그냥 툭 털고 일어나서 이해해 버리고 빨리 기쁨의 요소를 찾아서 기뻐하면 그것은 잊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하나도 기쁜일이 없어도 무조건 기뻐하는 삶.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참 삶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음앞에서도 영원한 삶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사람. 문제 앞에서도 승리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기뻐하는 사람. 고난이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기뻐하는 사람. 시험이와도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사람. 바로 이러한 사람이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역사는 다 선하고 아름답다고 믿고 괴롭고 답답하여도 기쁨을 잃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중에도 기쁨을 만들어 내는 힘있는 믿음으로 성숙시켜야 합니다. 누누히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상표는 기쁨입니다. 얼굴에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링컨은 사람이 나이 40이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는데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얼굴에 대하여 책임을 지어야 합니다.
예)미국 세이트루이스를 여행중이던 한 변호사가 주일날 아침에 교통순경에게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개받은 교회를 찾아가는 동안에 몇개의 교회가 더 있더랍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순경에게 가까운 교회가 많은데 왜 굳이 그 교회를 소개했는가고 물었더니 그 순겨의 말인즉 “어느 교회가 참 교회인지 제가 가 보지 못하여서 모릅니다.
그런데 주일날 아침마다 교통정리를 하면서 보니까 그 교회에서 나오는 교인들의 표정이 가장 밝고 기뻐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를 소개한 것입니다.” 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험하고 답답한 세상에서. 괴롭고 힘들고 짜증과 피곤이 겹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늘의 명령을 하나 받았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입니다. 기쁘게 살아갑시다. 기쁨을 주님안에서 창조해 갑시다. 우리 안양서부교회 모든 교인은 삶의 현장에서 밝고 아름다운 기쁨의 얼굴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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