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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제물 (빌4:14-20)

본문

Charles Harvey라고 하는 청년은 텍사스에 사는 아주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매우 조바심 나게 빠르게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하여 면접을 하게 되었는데, 시간을 재보니까 아무래도 약속시간보다 10분 정도 늦어질 것 같아서 조바심을 내며 빠르게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가에 서 있는 차가 하나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한 중년 부인이 자동차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는데 이거 어찌할 바를 몰라서 길 가에 서 있는 겁니다. Harvey는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바쁜 걸음이지마는 이 시간에 이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차를 멈추고 친절하게 타이어를 교환해 주었습니다. 이미 늦었지마는 그래도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서 약속했던 시간이니까 면접하는 장소에 나가서 뒤늦게라도 사과를 해야겠다 생각을 하고 그 직장에 들어서 보았습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쉽게 취직이 될 뿐더러 아주 좋은 장소에 배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펑크를 내고 서 있던 그 중년부인이 이 회사의 인사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선행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보상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선한 일 하면은 그저 바로 상을 받고, 좋은 일 하면은 바로 칭찬을 받고 그야말로 성경말씀대로 30배, 60배, 100배 이렇게 즉각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선한 일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쉬울까 생각됩니다마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고요 또, 보상이 아주 멀리 있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모르게 신비롭게 그 어딘가에 반드시 보상과 갚아주시는 축복은 있습니다마는 내 눈앞에 잘 나타나지 않고 의식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인간 됨은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Anthropolist가, 인류학자가 동물과 인간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동물의 세계와 인간을 비교해 본 결과,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동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베풀 줄 모르는 것이다. 자기만 알고, 자기만 먹고, 자기 앞길만 찾는다. 그러나 사람은 서로 베푸는 데 (차이가) 있다." 이건 인류학자가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기를 서로 물어뜯고 빼앗고 하면은 '저게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되지 못하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유명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전설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좀 일찍 떠나게 돼서 아들이 너무 어려요. 유산을 줘야겠지마는 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믿음직한 랍비에게 재산을 맡기고, 유서 한 장을 남겼습니다. 유서 내용이 뭐냐하면 '이 아들이 거지가 되거든 그 때 주십시오.' 했거든요. 이 아들이 점점 커서 어른이 되었습니다마는 '거지가 돼야만 받는다' 도대체 이걸 이해할 수 없어요. 정말로 거지가 돼야 되나 그럼 내가 정말 아무 것도 없어서 거지가 된 다음에 받으란 얘긴가! 그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가 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위해서 봉사하다 보니까 뭐 주고 또 주고, 또 주고.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 아이가 과자를 먹는 걸 보고 그 앞에 따라다니면서 '아'하고 입을 벌리고 "나 한 입만 줘라" 하는데 이놈이 안 주는 거예요. '아'하고 따라다니다 보니까 '아차 이게 거지다. 바로 이거다' 생각을 하고 랍비에게 가서 "내가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유산을 그 아들에게 주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이 받는 마음, 받고자 하는 마음, 베풀고 받는 바로 그 마음속에 인간 됨이 있는 것이올시다. 옛날에는 우리가 자랄 때 귀에 닳도록 들은 얘기는 '착한 사람이 되라' 그랬어요. 그 외에 들은 얘기가 없는 것 같아요. 착한 사람이 되라, 착한 사람이 되라 그랬는데 요새는 '공부해라 얘' 그것밖에 몰라요. 아니면 그저 좀 정중하게 말한다고 해야 "필요한 사람이 되라, 유능한 사람이 되라." 너무 너무, 너무 멀어졌습니다. "가난해도 좋고, 그저 그렇게 출세 못 해도 좋은데 좀 착한 사람이 되라", 거기에 인간미가 있고,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고, 인간 됨의 현 주소가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 세대가 이렇게 어려운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 아니에요. 사람의 마음이 강팍해졌기 때문이에요. 아주 메말랐기 때문이에요. 이것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부부간에도 니꺼내꺼, 형제간에도 니꺼내꺼. 뭐 전혀 모릅니다. 더구나 외국 사람들의 예를 들면은 부부간이 따로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남편의 월급이 얼마냐고 물어보아도 안된 답니다. 그 신뢰랍니다. 이렇게 사니 그것이 어떻게 사람 사는 것입니까. 어쩌다가 이래서 인간은 점점 고독해지고 인간성을 잃어버리게 되어간다는 말씀이올시다. 인간의 인간 됨이란 베푸는데 있고, 그 인격은 덕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격의 수준도 바로 이 덕성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한 내용은 딱 한 절밖에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친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딱 한 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서 인용합니다. 여러분, 복이 무엇입니까 받는 게 복입니까, 주는 게 복입니까 행복으로 말하면 받는 것이 행복합니까, 주는 것이 행복합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고. 주는 행복, 베푸는 행복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합니다. 이제 그는 행복할 길이 없습니다. 한 평생 아무리 부하게 살아도 그는 한번도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갈 것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끝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차피 인간이라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Give and Take요. 주고받게 돼 있습니다. 주고받는 일이 교차됩니다. 예컨대 구체적으로 말하면 받기만 하면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여러분, 좀 부자 집 아들들 자꾸 주었거든요. 얘는, 받기만 했어요. 결혼한 다음에 보세요. 그 부인한테도 못 살게 굴어요. 받을 줄만 알지 줄지는 몰라요. 끝도 없이 받을 줄밖에 몰라요. 한 평생 이기주의자로 살다가 그냥 끝나는 거예요. 참으로 불쌍한 겁니다. 받기만 하면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반대로 또, 주기만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람은 교만해 집니다. 자기는 항상 주는 위치에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독재자의 성격이 많아집니다. 나는 주는 사람이다―이거예요. 그거 아니에요. 주고받는 것이에요. 그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바로 전야예요.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잡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 베드로가 너무 미안하게 됐거든요. "어떻게 예수님이, 주님이 내 발을 씻기십니까"하고 사양하게 되지 않습니까 "영원히 내 발을 씻기지 못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 말씀이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되돌려 생각하면 '네가 나로부터 발 씻김 받았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너는 남을 발 씻길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봉사 받았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남을 봉사할 수 없는 것이에요. 받은 마음이 먼저예요. 모든 면에서 부모로부터, 형제로부터, 교회로부터, 모든 친구로부터 나는 받은 것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이 받았어요.―이 받았다는 마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주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에요. 주고받는 일. 이 다른 관계 속에서 인간은 인간 됨의 위치를 지켜가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섬긴다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 봉사한다는 것을 한 번 분석해 봅시다. 가장 잘못 되기 쉬운 것이 봉사가 수단화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감 된 겁니다. 봉사하는 것을 장사 속으로 하는 것이에요. 난 너무나도 많을 것을 보았습니다. 좀 선한 일 하자고 이렇게 저렇게 해 보면은 할 듯 하다가 안 해요. 가만히 보니까 이 사람이 돌아오는 이득을 따지고 있는 거예요. 정말 어떨 때는 마음이 아파요. 이 사람 이렇게 살면은 안 되는데. 이렇게 살면은 안 되는데 막 어쩔 때는 가슴이 섬 해요. 저런 마음으로 살다가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잘못 되는데. 아 이거는 아주 선행을 장사로 생각하는 거예요. 얼마를 투자하고 얼마를 법니다. 노골적으로 그래요. 나는 장사하는 사람인데요―이러고 시작하는 거예요. 기가 막혀요. 정말 돈이 말썽이에요. 그 돈 때문에 그 사람은 이 모양이 인간이 됐더라고요. 비참해 졌더라고요. 그 마음이 황폐해 졌어요. 인간도 아니에요. 그것은요. 무슨 선한 일을 하면서 그래 그걸 따지는 거예요. 내게 돌아오는 이득이 얼마냐고요. 계산하고 앉아 있어요.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까지 인용합니다. "잠언 19장 17절에 보면 '구제하는 것을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라고 했는데 장사 아닙니까 받아내야지." 그래요. 참 엄청난 수전노올시다. 여러분, 여러분의 선행이 수단이 된다면 이건 참으로 피곤하고 이것은 인간 타락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어차피 우리는 주고받아야 돼요. 주고받으며 사는데 줄 때마다 꼭 빼앗기는 마음으로 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참 유감 된 거예요. 한 평생 강도 만나는 거예요. 미안한 얘기 한마디 드릴게요. 부부간에도 한 평생 강간당하는 마음으로 산대요. 그냥 깨끗이 주지, 뭘 그렇게 합니까.
뭐든지 간에 여러분 마음을 담아서 주세요. 그저 몸만 주고, 돈만 주고 그런 사람이래요. 그거 빼앗기지 마세요. 가령 보세요. 여러분이 한 평생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그러지만 용돈 줄 때는 제발 잔소리하지 마세요. 주려거든 이렇게 주세요. 잘 기억했다가 "더 주고 싶다마는 미안하다. 어떡하냐 이것밖에 없는걸. 요즘 경제위기시대에 어떻하냐. 죄송하다." 이러고 주세요. 그러면 아이들이 이걸 반갑게 여깁니다마는 "야! 경제위기시대에 정신차려 . 너 지금 용돈이……" 이딴 소리하게 되면은 "알았다고요." 고맙지 않아요. 고맙지 않아요. 왜 이렇게 빼앗기는 마음으로 삽니까 기왕이면 주지. 베푸는 마음으로 살지 못하고 뭐 행동은 마찬가지 같은데 마음씨는 계속 강도 만나는 마음이에요. 언제 한번, 내가 사투리 하나 쓸까요 '쎄원'하게 주는 법이 없어. 그냥 그저 계속 뺏기고 징징하면서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됐나. 이게 무슨, 왜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 좀 이제라도 제대로 살아 보세요. 그런가 하면 또 하나가 형식주의입니다. 이 형식, 바리새주의입니다. 예수님이 크게 책망한 것이 이것입니다. 옛날 바리새인들은 구제를 할 때에 아주 길거리에서 소문내고 자-소문내면서 했거든요. 이렇게 했어요. 길거리에서 했다고요. 그래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리고로 가는 골짜기에 불한당 맞은 사람이 누워있었지요. 아무도 보지 않는데 이 사람을 제사장이 보고 지나가도, 레위사람이 보고 지나갔는데 만일에 예루살렘 한 가운데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은 제사장이 그냥 지날 갈 리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건 내 차례다. 물러서라. 내가 하는거다." 이러고 봉사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럴 것 같아요.
꼭 사람 보는 데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거는 얼마의 선행을 하면서 명예를 사는 거예요. 물질을 사는 겁니다. 내가 북한 사람들하고 얘기 할 때에 고관들하고 얘기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 했더니요 그분들이 제일 괴로워하는 것이 몇 푼 주지 않고 그저 신문에 떠드는 거, 그러면서 하는 말이 "참 기독교인들이 이상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했다고……" 아 성경에 있는데. 자기들이 성경 읽고 앉았어요.
그런데 이게 도대체가 한국 기독교인들이 말이 많으냐 이거예요. 꼭 사람에게 보이려고 인터뷰하고, 신문기사화 하고, 이렇게 하고야 하겠다는 거예요. 왜 이러는 겁니까 그건 아닌데요. 그건 하나님 앞에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인데요. 더구나 하나님 앞에 죄되는 것이데, 왜 이 수준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까! 제발 구제할 때 사진 찍지 마세요. 기사화하지 마세요. 제가 그래서 교회 회보를 만들지 않아요. 일부러. 회보라는 거 만들어 보면 교회마다 고아원 방문, 양로원 방문, 뭐 어디 봉사, 어디 선교, 이런 거 써 놓거든요. 자기자랑이지 열심히 내 이거 보기 싫어서 안 한다니까요. 했다하면 그거 나오니까요. 사진은 남겨서 뭘 해요. 기록은 했다가 뭘 하겠다는 거예요. 잊어버려! 줬으면 끝났지 뭘 기록하겠다는 거예요. 역사가 어떻다나, 역사 좋아나네 어차피 한 세기 가면 없어질 거. 무슨 쓸데없는 짓이요. 이게 바로 교회가 잘못 가고 있는 거예요. 형식주의! 뭐 좀 하는 것 같으나 완전히 형식주의요, 위선적이예요. 이거 안돼는 거예요. 보다 더 진실하게 되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는 마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생각하며 이루어져야 돼요. 비록 우리가 사람에게 주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 같으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런데 사람을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어요. 인사도 없다, 뭐 조금 줬는데 "아 이거 뭐 소 주었는데 잠수함 보내는 저 사람들하고……", 그러니 어쩌란 말이에요.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우리는 언제까지나 주는 마음뿐 이예요. 그가 어떻게 하느냐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에요. 그 마음이 아니고는 선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일은 생각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이니까요.
하나님 위해서 한 일이니까요. 뿐만 아니라, 언제나 받았다고 하는 자세가 먼저입니다. 나는 너무 많이 받았어요. 형제로부터, 친구로부터, 부모로부터 많이 받았어요. 어떻게 보답할꼬. 받은 것은 많고 주는 것은 적다. 바로 이 마음이요. '어찌 보답할꼬' 하는 그 마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칭찬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얼마간의 성금을 모아서 에바브로디도 목사님 편에 보내왔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또 그 선물을 받고 너무 감사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사도 바울은 그가 받은 성금에 대하여 이렇게 신학적으로 풀이합니다. 1장 7절에 보면 "너희는 나의 은혜에 참예했다." 이랬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이 은혜에 너희가 성금을 보냄으로 동참했다. 또 본문 4장 14절에 보면 "괴로움에 참예했다", 내가 당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너희가 동참한 것이다―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나는 비록 여기 있지마는 순교자의 고난에 동참했단 말입니다. 또한 "주고받는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밖에 없었느니라." 이 말은 교역자로서 이 말씀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사방에 다니며 교회를 세우고 그 많은 고생을 했지마는 하나님을 위해서 바울은 복음을 전했고 교인들은 그에게 성금을 줬는데 'Give and take' 물질을 주었고, 그리고 영적인 것으로 주고 물질적으로 받았는데 'Give and take' 이 일에 가담한 교회는 너희밖에 없다. 참 귀한 얘기예요. 서글픈 얘깁니다. 바울이 그 많은 수고를 했지만 언제 한번 정말 받은 것은 없이 주기만 하는 생을 살았던가 봐요.
그런데 빌립보 교회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너무 고마운 것이에요.
여러분, 이 돈이라는 것이 참 귀하게 쓰여질 때는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탈무드에 있는 돈에 대한 경우를 몇 가지 읽어봅니다. '돈은 하나님에게 선물할 수 있는 기회다.' 돈은 기회입니다. 돈 없으면 살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돈은 선한 일의 기회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돈을 빌려준 이에게 화를 내는 일은 없다.' '돈은 악도 저주도 아니다. 돈은 축복이다.' '육체를 관장하는 것은 마음이요, 마음이 의지하는 것은 돈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고민이요 하나는 불화요 또 하나는 돈지갑이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는 '돈은 공짜로 얻기보다는 빌리는 것이 낫다. 그것은 공짜로 얻게 되면 굽신거려야 되니까 빌리게 되면 대등한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공짜 좋아하지 마세요. 문제는 이 돈이라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요. 오늘 성경말씀에 보니 '나는 풍족하다.' 그럽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풍족하면 얼마나 풍족하겠습니까마는 빌립보 교회의 그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풍성하다. 이제 더 바랄 것이 없다.' 만족한 그 선에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향기로운 제사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 너희가 나에게 보낸 선행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아무 보상도 바람이 없이 베풀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행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 참 기쁨과 영광이 있는 것이올시다. 이 교회가 지금 설립된 지 21년이지마는 한 20년 전에 저희 교회가 저쪽 상가에 있을 때, 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가 소록도에 있는 문둥병 환자들을 위해서 이것저것 보내드리고 봉사한 일이 있습니다.
언제가 한번 거기에서 저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옷을 잘 입을 필요도 없으니까 있는 옷가지고 충분합니다. 식량도 넉넉합니다. 그러나 사탕이 좀 먹고 싶습니다. 눈도 없고 손도 없고 이런데 그래도 먹는 재미가 있거든요." '먹는 재미…… 아 이거 당뇨 걸릴 것도 아니고, 그래서 사탕……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구나.' 그래서 제가 그날 저녁에 교인들을 모아놓고서 "이 사탕 대접합시다." 했더니 그 당시에 300만원이 나왔습니다. 그걸 몽땅 사탕을 샀어요. 그래서 트럭으로 보냈어요. 그 때의 대학생들 몇 사람이 따라 가겠다고 한 20명 따라 갔어요. 갈 때 제가 그랬어요. "그 가운데는 눈 없는 사람도 있고 손 없는 사람도 있다. 코가 없는 사람도 있고 문둥병 걸리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대로 까서 입에다 넣어 드리기도 하고 또 얼굴을 씻어 드리기도 하고 그리고 그 앞에서 기타를 치면서, 너희들 노래 잘하지 않냐, 율동을 하면서 힘껏 노래를 좀 부르고 와라." 그랬어요. 갔다 왔어요. 도착하면서 교회에 들어서더니 예배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하나님 앞에 기도하더니 '엉엉'우는 거예요. 전체가 다 울어요. 소리를 내서 울어요. 그래 "너희들 왜 우냐" 하고 물었더니 "너무 행복해서 웁니다. 이 행복을 일생동안 가지고 있고 싶습니다." 여러분, 주는 자에게 행복이 있는 거예요. 베푸는 자에게만이 진정한 인간다운 행복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행복이 없는 것이 인색하기 때문이고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이에요. 어느 사이에 욕심의 노예가 되어서 그래요. 어차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떠나야 합니다. 하루하루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바로 베푸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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