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함으로 아뢰라 (빌4:4-9)
본문
어느날 세무서 직원이 목사 집에 찾아왔습니다. 재산조사하러 왔 습니다. 목사님이 대뜸 이렇게 실토를 하는 거예요. "저에게는 숨 겨둔 귀중한 재산이 좀 있습니다. 이렇게 찾아오셨으니 솔직히 말씀드려야지요". 세무서 직원은 장부를 꺼내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말합니다. "저에게는 정열을 주시고 영원한 처소까지 마련해 주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저에게는 가장 귀중합니다." 세무직원 이 그것 말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말씀 하시라고 재촉했습니다. "예! 저에게는 주님을 위해 나를 돕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지요. 솔로몬왕이 잠언에서 말했듯이, 제 아내야 말로 제게는 보물입니다." 크게 실망한 세무직원이 뭐 다른 것은 없느냐고 묻습니다. "또 있지요. 건강하고 믿음 좋은 자녀들이 있습니다.커서 여호와 하나님 을 위해 귀히 쓰일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또 없어요 "또 있지 요. 제 마음 속에는 어떤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또 없어요 "예 이게 제 전 재산입니다" 세무 서 직원이 장부를 덮으며 말하더랍니다. "댁은 정말로 부자이군 요.
그런데 그 많은 재산 가운데 세금을 내야 할 것은 하나도 없 군요." 경제위기시대입니다. 모두들 주눅들고 움추리고,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되니까 전부들 위축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뜯어 놓고 보면 내려가지 못해서 오는 불 안입니다. 말로야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 디나 하늘 나라 하지만, 20평 아파트 13평으로 줄어들면 당장 지 옥이 되는 게 인간입니다. 150만원 벌다가 100만원으로 수입이 낮 아지면 당장 불안해 지는 게 인간입니다. 올라갈 땐 잘 몰라요.
그런데 내려갈 ㄸ는 여간 민감하지 않습니다. 올라갈 때는 적응력 이 뛰어납니다.
그런데 내려갈 때는 영 적응력이 서툴러요. 도저 히 견디지를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자동차가 있었습니 까 우리가 언제부터 아파트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외식 하며 살았습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백화점 드나들었습니까 몇 년 전을 생각하면 어릴적을 생각하면 못 살것도 없어요.
그런데 이렇 게 영 잘 되지 않는 거예요. 올라갈 땐 자기 탓이고, 내려 갈 땐 하나님 원망해요. 올라갈 땐 올라가는 만큼 감사가 정비례 못하 고, 내려 갈땐 실제 내려가는 것 보다 원망이 더 커요. 이것이 인간입니다. 큰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빌립보서는 이렇게 말 합니다. 기쁨과 관용과 감사의 무드를 언제나 유지 하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이라고요. 어떻게 가능합니까 같이 한 번 살펴 보십시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절) 기뻐하라는 말은 명령입니다. 3장 1절에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시 반복해서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빌립보서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항상 이라는 말은 거꾸로 인간은 항상 기뻐 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 습니다. 또 항상이라는 말은 기쁨이 자연적으로 생겨 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쁨은 예수에게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지요. 이건 기도를 함으로서, 주님과 대화를 함 으로써 퍼 올려 지는 샘물입니다. 이 생수가 항상 기쁨을 샘 솟아 나게 합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기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그냥 기뻐하라. 지나치는 의례적인 말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노니' 내가 누굽니까 감옥에 갖혀 있는 바울이 아닙니까 자기는 100평 아파트에 살면서 월세방 사는 사람에게 즐겁게 생활해라! 이게 아 닙니다. 감옥에 있는 대기 사형수가 바같의 넉넉한 자유인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신앙이예요. 누구든지 승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직면할 수도 있는 로마 감옥에 갖힌 나 바울이 이런 처지에서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겁니다. '기뻐하라'는 이 말이 유언이 될지 모르는 비장한 냄새가 있습니다. 마지막 권 면이 될 지라도 모른다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 라"(5절) 기쁨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기쁨이 어떤 한 사람 의 심리적 상황에만 머무른다면, 슬픈 사람에게는 위화감만 심어 줄 뿐입니다. 기쁨은 바깥으로 퍼져나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로 흘러가서 적극적인 작용을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기쁨 이 너그러움이 되든, 자선이되든, 기쁨이 봉사가 되든, 사랑이되 든, 관용이 되든 기쁨은 이웃을 향한 생산적인 발전의 터빈을 돌 려야 합니다. 그래야 에너지가 되지요. 기쁨이 생산적인 에너지가 되지 못한다면 덧없이 콸콸 흘러 요란한 소리만 내는 시내에 지나 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 '관용'이라는 말은, 법적인 권리를 양보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나한테 권리가 있고 내가 잘했고 내 가 정당하더라도, 그걸 포기하는 것이 관용이라는 말입니다. 사람 들은 법대로 하자고 합니다. 신앙인은 법대로 해서 결코 잘 했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법의 권리를 넘는 것입니다. 기쁨은 법의 정당성을 넘는 것입니다.
법 만큼 해서 사랑이나 기쁨을 실천했 다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관용의 더 근본적인 의미는 내가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있 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주님께 용서받고, 주님의 관용을 매일 덛 입고 사는 데서 나오는 관용입니다. 억지웃음, 억지 관용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죽을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실패와 오 류와 좌절과 무기력을 다 끌어 안아 주셨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 한 일입니다. 이런 주님의 용납을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 자기 긍 정, 자기 용납이 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남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자기 용서와 자기 치유가 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남을 용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 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죄 사함의 기쁨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사할 수 있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일제 때 감방에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감방 마루 틈새에 낀 쪽지를 발견했는 데, 보니 마5:38-49의 말씀이더 랍니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 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다 읽은 후에 픽 웃었답니다. '말은 좋구먼. 그러나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는 종이를 마루 틈 에 다시 끼워 놓았더랍니다. 그후 무료하고 고독한 감방 생활에 그저 무심히 또 꺼내 읽고는 역시 피식 웃고 다시 끼워 놓곤 했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기는 거예요.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말씀이 새롭게 마음 속에 파고 드는 겁니다. 결국은 그 말씀에 무릎 을 꿇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적개심만 남은 원수에게 오히려 뺨을 대주라는 말씀이 인생을 변화시킨 겁니다. 용서가 인생을 바꿔 놓은 거지요. 맞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기독교는 존재합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기쁨에 넘 치는 삶이구요. 그리스도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용서를 실천하 고 삽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기뻐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나의 추악 하고 죽어 마땅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 입니다. 복음의 빚진자들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 보혈로 인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안에서 기뻐하라'입니다. 주 님의 용서를 받고서 기쁨과 감격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가, 이웃에게 용서를 베풀지 못한다면 악한 종이 되겠지요. 주님이 우리를 해방시키셨듯이 우리는 이웃을 해방 시켜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듯이 우리는 이웃에게 자유를 주어야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절) 기쁨과 염려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생활의 자잘한 염려는 기쁨을 갉아 먹습니다. 염려가 기계적으로 기쁨으로 바뀝니까 아닙니다. 염려가 기쁨으로 바뀔려면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지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염려 대신에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어떤 상태에든지 염려하지를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는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든지라는 말입니다. 염려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자세이긴 하지만, 아직은 소 극적인 것입니다. 어디까지 나아가야 합니까 오히려 감사하면서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염려와 근심, 걱 정, 불안이 우리 존재를 감싸고 있지만, 오히려 감사함으로 일단 주님께 아뢰라는 겁니다. 그 다음은 평화가 초이성적으로 넘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감사의 무드를 듬뿍 가지고 아뢰는 기도가 기적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뤄지고 안 이뤄지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엄청난 평화가 우리 생각과 마음을 지배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뤄지고 나서도 불안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주장하는 평화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감사는 무엇입니까 감사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쁨, 관용, 감사는 다 한 줄로 연결된 것입니다. 다 무엇입 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가 받아들여 지고 있다는 믿음에 서 나오는 겁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하니까 나오는 겁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요즈음 경제위기 시대에 아빠를 원망하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아빠가 됐으면 당연히 학원 보내 줘야지, 이게 뭐야! 아 빠가 됐으면 당연히 대학 보내 줘야지, 이게 뭐야!' 부모를 부모 로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는 감사가 안 나 와요. 이런 자 식 학원 보내주고, 대학 보내 주면 감사가 나올 것 같습니까 아 녜요. 어렵게 자란 구세대들은 결핍과 고난의 세월을 보냈으면서도, 아버지 어머니 생각만 하면 가슴이 짠하고 눈물이 나와요.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이래서 감사가 나오는 거지요. 어머 니 아버지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게 감사예요. 부모 를 부모로 인정하는 겁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라. 주님이 주실 것에 대한 감사, 주신 것에 대 한 감사, 주시고 나서 감사 이 세 과정을 모두 관통하는 감사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은 초막이든 궁궐이든 하나님의 최선으로 받아 들이고 감사를 하세요. 이 신뢰가 기적을 낳습니다. 만약 여러분 이 아뢰고 나서 조그마한 응답이라도 받았다면, 하나님의 최선으 로 받아들이고 참으로 깊은 감사를 드리세요. 그걸 최선으로 아시 고 힘을 쏟으세요. 하나님께서 주신 것 아닙니까 이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것은 감사함으로 받으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최선의 것이라고 믿으라는 겁니다. 물론 세속의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 믿음의 잣대로 재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있잖습니까 광야 에서 먹을 게 없어 불평이 늘어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셨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항의 할 수 있어요. '이게 무슨 하나님의 응답이야! 하루만 먹을 수 있는 게 무슨 응답이야. 쌓아놓고 먹을 수 있어야 지! 너무 번거롭고 부족해. 자본 증식의 재미가 없어!' 이렇게 생각을 했다면 아마 감사하긴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 요. 하나님의 만나는 참으로 사려 깊은 응답이었습니다. 매일 하루 음식 거리로만 존재했기 때문에 빈부 차이가 없었습니다. 만 나 매점매석 행위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매추라기의 독점 이란 상상할 수 없는 겁니다. 하루가 지나면 무조건 썩어 버리니 부의 독점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적어도 만나와 메추라기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평등할 수 있었어요. 매일 거둬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매일 깨닫고 매일 감사를 드릴 수 있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는 가능 한 것, 이것이 감사입니다. 그러기에 간구하고 응답받고 나서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미리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겁니다. 응답받고나서 감사하려고 하면 조건반응, 상대반응입니다. 그러나 응답받기 전 기도 단계에서 감사하는 것은 절대반응입니다. 절대 반응에 절대감사가 있고, 절대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믿음입니다. 아뢰라고 했습니다. 간구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간구는 자신을 위한 기도, 중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만, 어쨋든 자신의 간절한 필요를 아뢰는 것이 간구입니다. 성경 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 가르침 중에서, 비중 높은 것은 일단 자신 의 요구를 아뢰고 요청하라는 겁니다. 단순하고 끈기있게, 무조건 요청하라는 겁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비유(마7:7-8)도 그 렇고, 수로보니게 여인의 비유(막7:28)도 그렇습니다. 사소한 문제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필요한 것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에 말 안해도 돼! 하나님은 벙어리를 원치 않으십니다. 말하고 대화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알고 있는 것도 확인하는 쌍방 통행을 좋아하 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나눌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파머 교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줄 만한 구실을 찾으시다가 우리가 구할 때 얼마나 기뻐하실까를 상상하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소통과 나눔이 중요합니다. 늙은 부모님들은 온라인으로 용돈 받는 것 보다, 피붙이 얼굴을 직접 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자세가 중요합니다. 무슨 자세입니까 그야말로 신뢰의 자세입니다. 이것 만큼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도 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나눌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보낼 때 하나님은 최고로 기 뻐하십니다. 또 신뢰는 무엇입니까 신뢰는 무조건 상대를 믿는 것입니다. 장 난감을 사주면 좋다고 헤헤 거리고, 졸라도 안 들어주면 징징 짜 고 이건 어린아이 수준입니다. 신뢰가 아닙니다. 진정한 신뢰는 응답이든 무응답이든 절대의존의 감정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는 족족 다 응답된다면, 어떤 불행한 일이 생 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 잘 아시지요. 어떤 나뭇꾼이 부자가 되보는 게 평생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소원이 무었이냐 하고 묻는 산신령에 게 뭐든지 만지기만 하면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원이 이뤄져 뭐든지 만지는 것은 전부 금으로 변 했답니다. 사과도 금, 귤도 금, 자식도 금, 아내도 금, 밥도 금, 상치도 금 도무지 살 수가 없어서 제발 전 처럼 돌려 달라고 애 원을 했답니다. 응답에 감사가 있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의 선하심을 바위 처럼 믿는 것 여기서 참된 감사는 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평강을 좌우합니다. 응답-거 절 시스템이 아닙니다. 대화-신뢰 시스템입니다. 대화는 교제입니다. 이것이 평화요, 이것이 기쁨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렇습니다. 모든 이성 을 초월하는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 준다는 말입니다. 이성 적으로 생각하면 염려스럽고 근심이 될 상황인 데 평화가 넘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나 평화를 얼마나 자주 쏟아 버리는지요. 평화를 얼마나 자주 상실하는지요. 하나님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지 않으면 간사하고 변하기 쉬운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이제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 양을 할 때 오는 초이성적인 평화를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에게 촛점을 맞추고, 주님으로 확고한 중심을 잡고, 말씀의 질서 가 참으로 나를 지배할 때 오는 신비한 기쁨을 쟁취하시기 바랍니다. 불안의 시대를 뚫고 나가는 왕도는 없습니다.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이 경제 불황의 시대에 여러분이 단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유 한 가지 만으로 면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분담이 신앙 인들에게는 면책 된다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 내핍과 절핍의 세 월이 유독 믿음의 아들 딸들에게만은 무풍지대일 수 있다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무엇에든지 참되 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 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다면 우리 주님은 고난을 뚫는 강한 힘을 여러분에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면서 하나님 께 감사함으로 아뢴다면 주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평강의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편안한 삶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재산 가운데 세금을 내야 할 것은 하나도 없 군요." 경제위기시대입니다. 모두들 주눅들고 움추리고,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되니까 전부들 위축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뜯어 놓고 보면 내려가지 못해서 오는 불 안입니다. 말로야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 디나 하늘 나라 하지만, 20평 아파트 13평으로 줄어들면 당장 지 옥이 되는 게 인간입니다. 150만원 벌다가 100만원으로 수입이 낮 아지면 당장 불안해 지는 게 인간입니다. 올라갈 땐 잘 몰라요.
그런데 내려갈 ㄸ는 여간 민감하지 않습니다. 올라갈 때는 적응력 이 뛰어납니다.
그런데 내려갈 때는 영 적응력이 서툴러요. 도저 히 견디지를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자동차가 있었습니 까 우리가 언제부터 아파트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외식 하며 살았습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백화점 드나들었습니까 몇 년 전을 생각하면 어릴적을 생각하면 못 살것도 없어요.
그런데 이렇 게 영 잘 되지 않는 거예요. 올라갈 땐 자기 탓이고, 내려 갈 땐 하나님 원망해요. 올라갈 땐 올라가는 만큼 감사가 정비례 못하 고, 내려 갈땐 실제 내려가는 것 보다 원망이 더 커요. 이것이 인간입니다. 큰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빌립보서는 이렇게 말 합니다. 기쁨과 관용과 감사의 무드를 언제나 유지 하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이라고요. 어떻게 가능합니까 같이 한 번 살펴 보십시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절) 기뻐하라는 말은 명령입니다. 3장 1절에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시 반복해서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빌립보서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항상 이라는 말은 거꾸로 인간은 항상 기뻐 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 습니다. 또 항상이라는 말은 기쁨이 자연적으로 생겨 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쁨은 예수에게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지요. 이건 기도를 함으로서, 주님과 대화를 함 으로써 퍼 올려 지는 샘물입니다. 이 생수가 항상 기쁨을 샘 솟아 나게 합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기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그냥 기뻐하라. 지나치는 의례적인 말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노니' 내가 누굽니까 감옥에 갖혀 있는 바울이 아닙니까 자기는 100평 아파트에 살면서 월세방 사는 사람에게 즐겁게 생활해라! 이게 아 닙니다. 감옥에 있는 대기 사형수가 바같의 넉넉한 자유인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신앙이예요. 누구든지 승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직면할 수도 있는 로마 감옥에 갖힌 나 바울이 이런 처지에서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겁니다. '기뻐하라'는 이 말이 유언이 될지 모르는 비장한 냄새가 있습니다. 마지막 권 면이 될 지라도 모른다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 라"(5절) 기쁨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기쁨이 어떤 한 사람 의 심리적 상황에만 머무른다면, 슬픈 사람에게는 위화감만 심어 줄 뿐입니다. 기쁨은 바깥으로 퍼져나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로 흘러가서 적극적인 작용을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기쁨 이 너그러움이 되든, 자선이되든, 기쁨이 봉사가 되든, 사랑이되 든, 관용이 되든 기쁨은 이웃을 향한 생산적인 발전의 터빈을 돌 려야 합니다. 그래야 에너지가 되지요. 기쁨이 생산적인 에너지가 되지 못한다면 덧없이 콸콸 흘러 요란한 소리만 내는 시내에 지나 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 '관용'이라는 말은, 법적인 권리를 양보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나한테 권리가 있고 내가 잘했고 내 가 정당하더라도, 그걸 포기하는 것이 관용이라는 말입니다. 사람 들은 법대로 하자고 합니다. 신앙인은 법대로 해서 결코 잘 했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법의 권리를 넘는 것입니다. 기쁨은 법의 정당성을 넘는 것입니다.
법 만큼 해서 사랑이나 기쁨을 실천했 다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관용의 더 근본적인 의미는 내가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있 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주님께 용서받고, 주님의 관용을 매일 덛 입고 사는 데서 나오는 관용입니다. 억지웃음, 억지 관용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죽을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실패와 오 류와 좌절과 무기력을 다 끌어 안아 주셨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 한 일입니다. 이런 주님의 용납을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 자기 긍 정, 자기 용납이 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남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자기 용서와 자기 치유가 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남을 용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 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죄 사함의 기쁨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사할 수 있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일제 때 감방에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감방 마루 틈새에 낀 쪽지를 발견했는 데, 보니 마5:38-49의 말씀이더 랍니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 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다 읽은 후에 픽 웃었답니다. '말은 좋구먼. 그러나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는 종이를 마루 틈 에 다시 끼워 놓았더랍니다. 그후 무료하고 고독한 감방 생활에 그저 무심히 또 꺼내 읽고는 역시 피식 웃고 다시 끼워 놓곤 했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기는 거예요.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말씀이 새롭게 마음 속에 파고 드는 겁니다. 결국은 그 말씀에 무릎 을 꿇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적개심만 남은 원수에게 오히려 뺨을 대주라는 말씀이 인생을 변화시킨 겁니다. 용서가 인생을 바꿔 놓은 거지요. 맞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기독교는 존재합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기쁨에 넘 치는 삶이구요. 그리스도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용서를 실천하 고 삽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기뻐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나의 추악 하고 죽어 마땅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 입니다. 복음의 빚진자들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 보혈로 인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안에서 기뻐하라'입니다. 주 님의 용서를 받고서 기쁨과 감격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가, 이웃에게 용서를 베풀지 못한다면 악한 종이 되겠지요. 주님이 우리를 해방시키셨듯이 우리는 이웃을 해방 시켜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듯이 우리는 이웃에게 자유를 주어야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절) 기쁨과 염려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생활의 자잘한 염려는 기쁨을 갉아 먹습니다. 염려가 기계적으로 기쁨으로 바뀝니까 아닙니다. 염려가 기쁨으로 바뀔려면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지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염려 대신에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어떤 상태에든지 염려하지를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는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든지라는 말입니다. 염려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자세이긴 하지만, 아직은 소 극적인 것입니다. 어디까지 나아가야 합니까 오히려 감사하면서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염려와 근심, 걱 정, 불안이 우리 존재를 감싸고 있지만, 오히려 감사함으로 일단 주님께 아뢰라는 겁니다. 그 다음은 평화가 초이성적으로 넘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감사의 무드를 듬뿍 가지고 아뢰는 기도가 기적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뤄지고 안 이뤄지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엄청난 평화가 우리 생각과 마음을 지배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뤄지고 나서도 불안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주장하는 평화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감사는 무엇입니까 감사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쁨, 관용, 감사는 다 한 줄로 연결된 것입니다. 다 무엇입 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가 받아들여 지고 있다는 믿음에 서 나오는 겁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하니까 나오는 겁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요즈음 경제위기 시대에 아빠를 원망하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아빠가 됐으면 당연히 학원 보내 줘야지, 이게 뭐야! 아 빠가 됐으면 당연히 대학 보내 줘야지, 이게 뭐야!' 부모를 부모 로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는 감사가 안 나 와요. 이런 자 식 학원 보내주고, 대학 보내 주면 감사가 나올 것 같습니까 아 녜요. 어렵게 자란 구세대들은 결핍과 고난의 세월을 보냈으면서도, 아버지 어머니 생각만 하면 가슴이 짠하고 눈물이 나와요.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이래서 감사가 나오는 거지요. 어머 니 아버지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게 감사예요. 부모 를 부모로 인정하는 겁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라. 주님이 주실 것에 대한 감사, 주신 것에 대 한 감사, 주시고 나서 감사 이 세 과정을 모두 관통하는 감사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은 초막이든 궁궐이든 하나님의 최선으로 받아 들이고 감사를 하세요. 이 신뢰가 기적을 낳습니다. 만약 여러분 이 아뢰고 나서 조그마한 응답이라도 받았다면, 하나님의 최선으 로 받아들이고 참으로 깊은 감사를 드리세요. 그걸 최선으로 아시 고 힘을 쏟으세요. 하나님께서 주신 것 아닙니까 이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것은 감사함으로 받으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최선의 것이라고 믿으라는 겁니다. 물론 세속의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 믿음의 잣대로 재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있잖습니까 광야 에서 먹을 게 없어 불평이 늘어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셨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항의 할 수 있어요. '이게 무슨 하나님의 응답이야! 하루만 먹을 수 있는 게 무슨 응답이야. 쌓아놓고 먹을 수 있어야 지! 너무 번거롭고 부족해. 자본 증식의 재미가 없어!' 이렇게 생각을 했다면 아마 감사하긴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 요. 하나님의 만나는 참으로 사려 깊은 응답이었습니다. 매일 하루 음식 거리로만 존재했기 때문에 빈부 차이가 없었습니다. 만 나 매점매석 행위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매추라기의 독점 이란 상상할 수 없는 겁니다. 하루가 지나면 무조건 썩어 버리니 부의 독점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적어도 만나와 메추라기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평등할 수 있었어요. 매일 거둬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매일 깨닫고 매일 감사를 드릴 수 있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는 가능 한 것, 이것이 감사입니다. 그러기에 간구하고 응답받고 나서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미리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겁니다. 응답받고나서 감사하려고 하면 조건반응, 상대반응입니다. 그러나 응답받기 전 기도 단계에서 감사하는 것은 절대반응입니다. 절대 반응에 절대감사가 있고, 절대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믿음입니다. 아뢰라고 했습니다. 간구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간구는 자신을 위한 기도, 중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만, 어쨋든 자신의 간절한 필요를 아뢰는 것이 간구입니다. 성경 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 가르침 중에서, 비중 높은 것은 일단 자신 의 요구를 아뢰고 요청하라는 겁니다. 단순하고 끈기있게, 무조건 요청하라는 겁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비유(마7:7-8)도 그 렇고, 수로보니게 여인의 비유(막7:28)도 그렇습니다. 사소한 문제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필요한 것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에 말 안해도 돼! 하나님은 벙어리를 원치 않으십니다. 말하고 대화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알고 있는 것도 확인하는 쌍방 통행을 좋아하 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나눌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파머 교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줄 만한 구실을 찾으시다가 우리가 구할 때 얼마나 기뻐하실까를 상상하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소통과 나눔이 중요합니다. 늙은 부모님들은 온라인으로 용돈 받는 것 보다, 피붙이 얼굴을 직접 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자세가 중요합니다. 무슨 자세입니까 그야말로 신뢰의 자세입니다. 이것 만큼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도 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나눌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보낼 때 하나님은 최고로 기 뻐하십니다. 또 신뢰는 무엇입니까 신뢰는 무조건 상대를 믿는 것입니다. 장 난감을 사주면 좋다고 헤헤 거리고, 졸라도 안 들어주면 징징 짜 고 이건 어린아이 수준입니다. 신뢰가 아닙니다. 진정한 신뢰는 응답이든 무응답이든 절대의존의 감정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는 족족 다 응답된다면, 어떤 불행한 일이 생 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 잘 아시지요. 어떤 나뭇꾼이 부자가 되보는 게 평생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소원이 무었이냐 하고 묻는 산신령에 게 뭐든지 만지기만 하면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원이 이뤄져 뭐든지 만지는 것은 전부 금으로 변 했답니다. 사과도 금, 귤도 금, 자식도 금, 아내도 금, 밥도 금, 상치도 금 도무지 살 수가 없어서 제발 전 처럼 돌려 달라고 애 원을 했답니다. 응답에 감사가 있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의 선하심을 바위 처럼 믿는 것 여기서 참된 감사는 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평강을 좌우합니다. 응답-거 절 시스템이 아닙니다. 대화-신뢰 시스템입니다. 대화는 교제입니다. 이것이 평화요, 이것이 기쁨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렇습니다. 모든 이성 을 초월하는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 준다는 말입니다. 이성 적으로 생각하면 염려스럽고 근심이 될 상황인 데 평화가 넘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나 평화를 얼마나 자주 쏟아 버리는지요. 평화를 얼마나 자주 상실하는지요. 하나님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지 않으면 간사하고 변하기 쉬운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이제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 양을 할 때 오는 초이성적인 평화를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에게 촛점을 맞추고, 주님으로 확고한 중심을 잡고, 말씀의 질서 가 참으로 나를 지배할 때 오는 신비한 기쁨을 쟁취하시기 바랍니다. 불안의 시대를 뚫고 나가는 왕도는 없습니다.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이 경제 불황의 시대에 여러분이 단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유 한 가지 만으로 면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분담이 신앙 인들에게는 면책 된다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 내핍과 절핍의 세 월이 유독 믿음의 아들 딸들에게만은 무풍지대일 수 있다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무엇에든지 참되 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 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다면 우리 주님은 고난을 뚫는 강한 힘을 여러분에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면서 하나님 께 감사함으로 아뢴다면 주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평강의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편안한 삶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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