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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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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전에 미국의 유서 깊은 지방도시 리치몬드에서 한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40대 한 중년 여성이 자기 아파트 입구에서 복면을 한 괴한에게 폭행을 당해 그 자리에서 숨져간 것입니다. 이 사건이 다른 사건과 달리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여인이 이웃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죽어갔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소리 지르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사람들은총을 든 강도의 폭행이 두려웠고, 신고한 것이 알려질 경우 그 일당들의 보복이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는 이 여인, 함께 한 아파트에 사는 자기들이 잘 아는 이 여인의 죽음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매정하게도 하나씩 둘씩 거실의 불을 끄고 그 사건으로부터 도망쳐 버린 것입니다. '리치몬드 타임스'지는 그 다음날 사회면에 절규하듯이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헤드라인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어디로 갔는가"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이런 현상을 "공동체의 해체 현상"이라 불렀습니다. 이웃들이 어울려 기대고 살던 공동체가 무너진 것입니다. 서로를 돌아보고, 서로를 아끼고, 서로를 사랑하며 살던 정겨운 공동체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산업화,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과학문명의 발달로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는 편리함을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과거에는 꿈도 꿔보지 못할 많은 것들을 얻게 됐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주의, 물질만능주의에 깊이 빠지게 되면서 너무도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서로를 돌아볼 여유로운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삭막하고 거친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진정한 이웃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행 2장에 보면 교회는 본래 믿는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특히 행 2:44를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함께 떡을 떼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하고, 그리고 함께 일하는 곳입니다. 행 4:32에 보면 성도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이유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한마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같아지니까 함께 있고 싶고, 뜻이 하나가 되니까 함께 떡을 떼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된 교회입니다. 한마음을 바탕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 못합니다. 단지 주일에 예배보러 한자리에 모였다가 흩어지기 바쁩니다. 마치 좋은 연극이나 콘서트를 관람하듯이 몰려왔다가 흩어집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교인들이 서로 마음을 나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물리적으로 한자리에 모이기는 했지만 서로 한마음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서로 하나라는 생각, 서로 하나가 되려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두가 낯설고, 모두가 남입니다. 여기 현대 교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관해 교훈해 줍니다. 특별히 성도들끼리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에 관해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려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아보고, 서로 하나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교인들과 사랑을 나누면서 살았던 사람 바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살았는가를 살피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함은"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나은 영적 자식들입니다. 그가 2차 전도여행 때 성령님의 인도로 빌립보로 건너가 처음 빌립보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바울은 대부분 이미 복음에 대해 들었거나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빌립보 교회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처음 믿는 사람들이고, 모두가 바울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바울은 우선 빌립보 교인을 도울 수 있었음을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피땀 흘린 수고로 얻은 영적 아들딸들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산모가 10달 동안 힘겨운 임신 기간을 보냅니다. 몇 시간 씩 인간의 육체적 고통 가운데 가장 극심하다는 산고를 겪으면서 아이를 분만합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산모의 마음은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그 누구도 "저놈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고 미워하거나 화를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건강하게 태어나 준 것이 감사하고, 힘차게 울어 주는 것이 감사합니다. 아이가 건강하게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앞으로 이 아이 때문에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하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이런 심정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함께 예배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서로를 도울 수 있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서로를 섬길 수 있기에 감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를 돕기 위해 힘써왔고, 또 지금도 힘쓰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감사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이 헌금을 모아서 멀리 로마에까지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위해 걱정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 헌금을 받아들고, 그 기도 소식을 전해듣고 감격어린 눈물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 예기를 좀 하겠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지쳐있을 때였습니다. 여러 사람들 때문에 마음 상해있고, 열심히 어떤 일에 몰두했지만 열매가 시원치 않아서 낙심해 있었습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하고 목회자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가 지도하던 청년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 자체가 제게 큰 힘이 됐기도 했지만, 편지 내용 한 구절에 제게 더할 수 없는 위로와 큰 힘이 됐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참 행복한 분이십니다. 제가 요즘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매일 새벽기도와 저녁 시간에 기도하러 교회에 갑니다.
그런데 갈 때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는 분을 만납니다. 기도하다 보면 옆에 있는 분이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그 편지를 읽다가 저는 가슴이 터지는 듯한 감격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잊고 있던 한가지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오늘도 그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힘겹고 어려울 때 우리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당신이 외로이 홀로 남았을 때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 이들이 있음을 알고 이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로 기억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 빌립보 교인 있다는 말입니다. 늘 기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선교사를 꼽으라면 단연 리빙스턴을 손꼽습니다. 그는 27살 되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당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아프리카 대륙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홀혈 단신으로 건너갔습니다. 안식년이 돼서 영국으로 잠시 돌아온 리빙스턴에게 가족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이제 영국에서 목회를 하도록 권했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형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영국에 머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프리카 형제들 생각 때문에 안식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바쁜 걸음으로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남은 한 평생을 아프리카 땅에 머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34년 동안 아프리카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동안 그가 여행한 거리가 2만 9천마일 이었고, 그 때문에 복음을 영접한 사람 수가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가 1873년 5월 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영국 교회는 위대한 선교사인 리빙스턴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하고 영원히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토인들은 그를 보낼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영원한 친구를 평생을 자기들 곁에 두고 늘 그 사랑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교회의 간절한 청이 있어서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의 따뜻한 마음까지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리빙스턴의 가까운 친구 수지와 추마가 리빙스턴의 심장을 꺼내 리빙스턴이 아끼던 무불라 나무 밑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유해를 건골로 만들어 영국으로 보냈습니다. 바로 리빙스턴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다간 사람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는 누가 있습니까 혹 여러분 자신 밖에 없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족들이 여러분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이 여러분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이 여러분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그 마음속에 담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를 기억하시고 계십니다. 주님처럼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마음에 담고 기억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노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간구할 때마다 너희를 위해 기쁨으로 기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을 위해 기도하되 기쁨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에게 기뻐할 것이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고, 또 언제 순교의 쓴잔을 마셔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쁨이 생겨나고 특별히 빌립보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기쁘다는 것입니다. 성서신학자 제럴드 호돈은 바울이 기뻐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 안에 자기가 바라는 일들을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그를 기쁘게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교인들로부터 기도부탁을 수도 없이 많이 받습니다. 어떤 분들은 인사 치레로 기도부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부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진지하게 기도부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그 많은 기도부탁을 최선을 다해 들어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위해서 기도를 하다보면 마음에 느낌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도와서 역사하실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기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 기도하다가 힘이 생기고 마음이 평안해 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쁨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기쁨이 생겼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이웃들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다 기쁨을 얻고, 힘을 얻습니다. 기도 부탁이 짐이 아니라 오히려 피차의 믿음을 키우는 매우 소중한 과정이 됩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는 내게 큰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내게 큰 힘이 됩니다. 남들을 위한 기도는 내게 큰 축복입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세월이 힘겹고 고단하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코가 석잔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서로 돌아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감사하고,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 위해서 기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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