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을 위한 목회자의 기도 (빌1:3-11)
본문
I. 기독교의 의식 중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는 중보의 기도는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봉사 중에 최 고의 봉사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 부터 받을 수있는 은혜 중 가장 큰 은혜는 남이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삼상12:23)을 보면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 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사사와 예언자(judge and prophet)였습니다. 즉 실질적인 왕이였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사울 왕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던 모든 권세를 다 내어놓게 되었습니다. (삼상12:23) 말씀은 이렇게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약속입니다. 즉 그는 물러나도, 나라와 민족에 관심을 갖고, 뒤에서 기도로 도와 주겠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싫다고 반란을 일으켜 사울을 왕으로 세웠는데도, 사무엘은 그런 자들을 위하여, 그런 나라를 위하여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요, 하나님 의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와 같은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세우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 입니다. 이 기도는 모든 것을 다 바쳐 교회를 세우고 그곳을 떠난 목회자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속에서는 목회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이 사도 바울의 목회 기도속에 들어 있는 기도의 내용을 살펴 보면 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를 위하여 기도했다. 9 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충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말세가 되면 세상은 사랑이 점점 더 식어 갑니다. (마24:12)에서 예수님은 말세에는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식어가는 세상에 사랑을 공급해야 할 종교가 바로 기독교 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종교 입니다. 세상에 사랑을 공급하려면, 먼저 내 속에 사랑이 충만해야 합니다. 내 가 가진 것이 없으면 어떻게 남에게 나눠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지기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랑이 식어가는 세상에 사랑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해달라"는 기도에서 "점점 더 풍성하게"란 것은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 잔이 가득찼으나, 잔에 붓는 것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서 붓는 것-즉 다윗 왕이 내 잔이 넘치나 이다하고 노래한 것과 같이 차고 넘치는 것을 마음속에 그리며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빌립고 교회에 사랑이 풍성하게 하시데, 파도가 계속해서 밀려 오듯이, 빌립보 교회에 사랑을 계속해서 공급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빌립 보 교회에 사랑이 가득차도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서 사랑을 부어 달라는 뜻 입니다. 여기에서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다보다도 더 넓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읍니다. 프랑스 파리의 빈민굴에서 태어나서, 일생을 그 빈민굴에서만 보내 여인 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인 난생 처음으로 바다엘 갔습니다. 그녀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계속해서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보았읍니다. 그러자 그녀는 해변으로 가서, 물이 무릎까지 올때까지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손을 모아 바닷물을 퍼올리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물이 있으니 감사합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다 보다도 더 넓고 큽니다. 혹시 바닷물은 다함이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 하는 샘물과 같습니다. 이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밀려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사랑은 자꾸만 식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의 사랑이 곧 식어져 버리고 맙니다. 교회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공급이 중단되면, 곧 사랑이 말라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계속해서 우리에게 밀려오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발전 시켜야 합니다. 사랑을 계속해서 개발해야 합니다. 사랑을 개발하지 않으면, 사랑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줄어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을 계속해서 개발해야 합니다. 사랑을 계속해서 개발하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사도 바울은 사랑 을 지식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을 계속해서 개발하는 것은 지식과 함께 개발됩니다. 우리의 깨달음과 함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위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오히려 무서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나의 생각과는 관계 없이 남에게 큰 해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 강아지 한 마리가 생겼던 기억이 납니다. 그 강 아지를 사왔는지, 누가 주어서 가져왔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으나, 어쨋든 우리 집에 강아지가 한마리 생겼습니다. 저와 제 동생은 무척이나 그 강아지를 좋아했습니다. 그 강아지를 너무 너무 사랑했습니다. 지금 생각에 아무리 봐도 애완용 개는 아니고,분명히 똥개였는데도, 강아지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강아지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이블을 덥어주고, 입을 마추고 꼭 안아주고, 서로 가질려고 잡아 당기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 강아지를 우리 형제는 사랑했는데, 얼마 있다가 보니, 그 강 아지가 죽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그 강아지 왜 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엄마도 별 대답할 것이 없었던지, 우리 집에는 호랑이가 살아서 강아지가 안되고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제 동생이 범띠라 강아지가 안되고 죽는다는,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순진한 우리 형제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장가를 간 후에 하루는 집에 가보니, 강아지가 몇마리 집에 있었습니다. 왠 강아지냐고 물으니까, 제 동생이 사다가 놓았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 집에는 강아지를 사다가 놓으면,호랑이 띠가 있어서 죽는 데 무엇 때문에 강아지를 사다가 놓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전 실업전문학교 축산과를 졸업을 하고 경찰생활을 하는 제 동생은 "집에 호랑 이 띠가 있어서 강아지가 죽었는지 아느냐 우리가 너무 그 강아지를 못 살게 굴어서 죽었다"고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어렸을 때 죽은 강아지가 집에 호랑이 띠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강아 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너무 못살게 굴어서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 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이 지식과 함께 풍성해 지지 않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엄청나게 자랐는데, 지식과 함께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살리는 사랑 이 아니라, 죽이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식과 함께 자라지 않는 사랑은 무서운 독이 됩니다. 살려야 할 사랑이 죽이는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식과 함께 사랑이 더욱더 풍성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또한 이 사랑은 "모든 총명으로" 더불어 더욱더 풍성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모든 총명"은 통찰력을 뜻합니다. 즉 사랑은 바른 판단력과 함께 점점 더 풍성해져야 합니다. 바른 판단력이 없는 사랑도 지식이 없는 사랑과 같이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세가 되면 사랑이 놀랍게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딤후 3:1-5) 말씀을 보면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 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게 된다"고 말씀하 셨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사랑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 줍니다. 말세는 돈을 사랑하게 되는데, 사도 바울은 (딤전3:10) 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 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점점 더 많아지되, 잘못 판단하여, 돈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면, 점점 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바른 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점점더 풍성해져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점점 발전시키는 것은 지식과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발전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흑석동 교회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바른 판단력과 더블어 점점 더 풍성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인격의 성장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v.10)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되고, 또 진실하여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 습니다. 이것은 인격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인격체입니다. 인격이 없으면, 사람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읍니다. 인격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격을 가진 인격체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인격적으 로 대하야 합니다. 사람을 인격이 없는 짐승과 같이 대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 인격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낮고 천한 인격을 가진, 그래서 짐승 보다도 더 못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하면, 숭고한 인격을 가 진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최고의 인격을 가졌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최고의 인격을 가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3:35)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마5:48)에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서, 예수님과 같이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 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최고의 인격을 가추어야 합니다. 그럼 예수님을 닮은 온전한 인격은 어떤 인격일까요 오늘 본문 10 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1) 온전한 인격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분별한다"는 말의 희랍어의 뜻은 금속이 순수한 금속인지 아 닌지를 알기 위하여 시험한다는 뜻입니다. 가짜 금속이 많기 때문에, 그 금속이 진짜인지 겉과 속이 같은지, 아니면 다른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금속이 겉과 속이 같은지를 시험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때 이 "분별한다"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온전한 인격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극히 선한 것"(the best)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 습니다. 진정한 인격은 고상한 말을 하고, 고상한 행동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인격은 바로 "최고의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입니다. 예의 바른 말은 할 줄 모르고, 격조있는 행동은 하지 못해도, 최고의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바로 참 된 인격자입니다. 그럼 "지극한 선"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주 만물 을 창조하시고,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창조하시고,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짐 승과 바다의 고기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극한 선"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인격체입니다. 세상에는 우상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격체 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우상이고, 어떤 것이 참 신인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우상과 참 하나님을 분별할 줄 아는 자가 바로 참다 운 인격체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을하고, 세상적으로 존경을 받고, 인격자라고 해 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참다운 인격자가 아닙니다. 어찌 자기를 낳으신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를 인격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 찌 인간을 만드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를 인격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돼지 머리 앞에 절을 하는 자들을 보고 인격체라고 할 수 있 겠습니까 그런 자들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돼지 못한 자들입니다. 돼지 만도 못하니까 돼지 머리에 절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들이 어떻게 인격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49:20) 말씀을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 망하는 짐승과 같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큰 영광을 얻 고 존귀한데 처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인격자가 될 수 없습니다. 멸망하는 짐승과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른 자에 게는 영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분별하기 위하여, 더욱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2) 온전한 인격은 진실하여 허물이 없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 보 교인들이 "진실하여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기도했읍니다. "진실하여 허물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순결한 것을 뜻합니다. 진정 한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순결해야 합니다. 마음에 허물이 없 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죄악으로 더러워 질때로 더러워졌습니다. 예레미야 선 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말씀하 셨습니다. 만물 중에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이 더러워진 마음을 아름답게 포장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인격자인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인격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가르쳐 "회칠한 무덤"같다고 하셨습니다. (마 23:27) 말씀을 보면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 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는 이러한 거짓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닙니다. 겉을 아름답게 치장한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여기에서 "진실하다"는 말을, 영어 성경은 sincere라는 단어를 사용했읍니다. 이 단어의 뜻은 "태양에 의하여 검사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sincere 라는 말은 프랑스어에서 온 말인데, 이 프랑스어는 sans cere 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이 말은 "밀랍이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 조각가들이 작품을 만들때, 실수하여 잘못 흠을 낸 부분이 있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 곳에 밀랍을 녹여서 발랐습니다. 그리고 겉에 다 색을 칠하였습니다. 그러면 감쪽 같아집니다. 흠이 있는 것 같이 감쪽 같아집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귀족들의 집 마당에 갖다가 세워두면 얼마 가지 않아 서, 뜨거운 태양에 그 밀랍이 녹아 내려서, 그곳의 흠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조각품을 살때, "이 작품에는 밀랍이 없느냐 "고 묻습니다. 이 "밀랍이 없다"는 말이 바로 진실하다는 말의 어원입니다. 이렇게 밀랍으로 가장하지 않은 마음이 바로 진실한 마음입니다. 뜨 거운 불이 가까지 와도 녹아 내릴 것이 없이, 가장 되지 않은 마음을 가지 고 있는 자가 바로 인격자입니다. 마음에 흠과 티가 없는 깨끗한 마음을 가진 자가 인격자가 아닙니다. 실수와 허물이 없는 자가 인격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인격자는 꾸밈이 없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비록 흠과 티가 있어도, 그것을 속이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 놓는 마음을 가진자가 진 정한 인격자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 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오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 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한다"(렘17:9-10)고 말씀하셨읍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뜨거운 불로 시험하여서, 거짓 된 것 이 없는 자에게는 상을 주십니다. 그러나 거짓된 것으로 속인 자들에게는 벌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흠과 티가 없는 마음이 아니라, 거짓 없는 마음입니다. 그런 인격자가 진정한 인격자입니다. 참 하나님을 누구인지를 분별할 줄 알고, 거짓 없는 신실한 마음을 소유 하셔서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기를 기도했습니다.(v.11) 예수님은 (마7:16-20)에서 사람을 나무에다 비유했습니다. "그의 열매 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 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 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 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 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또한 (요15:5)서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무에다 비유된 우리 기독교인들 에게는 두가지 중요 목적이 있습니다.
1) 하나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쁜 열매를 맺으면 우리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나쁜 열매를 맺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나무가 되시는 예수님을 나쁜 나무로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좋은 열매를 사도 바울은 "의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는 것은 포도나무의 가지인 우리 기독교인들이 점점 더 좋 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더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점점 더 좋은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무가 좋은 영양분을 주어도, 가지가 병들면 좋은 열매 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포도 나무인 예수님이 나빠서 기독교인들이 잘 못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무가지가 병들고 썩어서 잘못된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요15:2) 말씀을 보면 이렇게 병들과 썩은 잘못된 나무 가지는 하나님이 제하여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지 때문에 나무인 예수님이 욕을 먹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의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이 바로 의 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Westminster Chatechism)은 인간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to glorify God)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믿는 자들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로 만드는 곳입니다.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점점 더 의의 열매를 맺는 자 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로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 로 인간의 목표이며, 기독교인의 목표입니다.
2)
둘째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발전하는 것 입니다. 나무가 그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농 부가 열심히 농사했는데, 열매를 적게 맺으면, 농부의 마음이 기쁘지 않읍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기쁘시게 하 기 위해서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시기 위하여, 우리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요15:2)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쓸모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제하여 버리시지만,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많은 과실을 맺게하기 위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데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의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했읍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도록 기도 했습니다. 교회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열매 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많은 열매를 맺는 방법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하셨습니다. 즉 많은 열매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을 통해서만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요15:4-6)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 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미암지 않고는 즉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많은 과실을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이라"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풍성하나 열매 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우리에 게 전달해 주시는 예수님을 통해야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읍니다. 인도 중남부 지방에 고다바리 삼각주(Godavari Delta)가 있다. 그곳은 쌀이 과잉생산될 정도로 많이 생산 되고 있는 곡창지대이다.
인도 사람 들 중에 그 곳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유명한 쌀 생산 지역이다. 그 곳도 19세기 상반기 까지는 인도의 다른 내륙 지역과 같이 농 사를 지을 수 없는 버림 받은 땅이였다.
그런데 위대한 기독교인인 기술 자 아더 코튼 경(Sir Athur Cotton)이 고다바리 강 뚝에 있는 다우라이쉬와 람(Dowlaishwaram)에 댐을 건설했다. 그리고 수로를 파서 그 신선한 물 을 그 델타지역에 공급했다. 강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물을 모아서 신선한 물을 공급해 주었고, 수로가 그 물들을 그 델타지역에 공급해 주었다. 그 러자 그 지역이 몹씨 비옥한 땅이 되었다. 그 고다바리 델타 지역은 물질적인 쌀 생산에서만 버림 받은 땅이 풍성 한 옥토로 변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옥토로 변했다. 1836년에 하나님이 보내주신 복음이 그곳에 전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지금까지 하나님이 보낸 복음의 수로를 통하여 그 복음이 그 지방 사람들에게 흘러들 어갔다. 그래서 그곳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과 복을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들이 수천명이나 있는 복음의 옥토가 되었다. 강물을 날라주는 수로가 있어야 그 땅이 옥토가 되듯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우리에게 날라다 주는 예수님을 통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많 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없이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읍니다.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 맺는 열매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열 매가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읍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는 열매는 의의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을 통하면 세상의 열매를 맺을 뿐입니다. 사단을 통하면 사단의 열매 를 맺을 뿐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읍니다. 왜나하면 세상과 인간의 육신과 사단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롬8:7) 말씀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이렇게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육신으로 말미암은 열매들은 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열매들만 맺 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을 통한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합니다. 교회나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 세상이나, 사단이 나,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려고 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욕되게하고, 하나님 의 마음을 아프게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의의 열매와 풍성한 열매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의 열매들 을 점점 더 많이 맺는 흑석동 교회 성도들로 발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사울 왕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던 모든 권세를 다 내어놓게 되었습니다. (삼상12:23) 말씀은 이렇게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약속입니다. 즉 그는 물러나도, 나라와 민족에 관심을 갖고, 뒤에서 기도로 도와 주겠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싫다고 반란을 일으켜 사울을 왕으로 세웠는데도, 사무엘은 그런 자들을 위하여, 그런 나라를 위하여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요, 하나님 의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와 같은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세우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 입니다. 이 기도는 모든 것을 다 바쳐 교회를 세우고 그곳을 떠난 목회자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속에서는 목회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이 사도 바울의 목회 기도속에 들어 있는 기도의 내용을 살펴 보면 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를 위하여 기도했다. 9 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충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말세가 되면 세상은 사랑이 점점 더 식어 갑니다. (마24:12)에서 예수님은 말세에는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식어가는 세상에 사랑을 공급해야 할 종교가 바로 기독교 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종교 입니다. 세상에 사랑을 공급하려면, 먼저 내 속에 사랑이 충만해야 합니다. 내 가 가진 것이 없으면 어떻게 남에게 나눠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지기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랑이 식어가는 세상에 사랑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해달라"는 기도에서 "점점 더 풍성하게"란 것은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 잔이 가득찼으나, 잔에 붓는 것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서 붓는 것-즉 다윗 왕이 내 잔이 넘치나 이다하고 노래한 것과 같이 차고 넘치는 것을 마음속에 그리며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빌립고 교회에 사랑이 풍성하게 하시데, 파도가 계속해서 밀려 오듯이, 빌립보 교회에 사랑을 계속해서 공급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빌립 보 교회에 사랑이 가득차도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서 사랑을 부어 달라는 뜻 입니다. 여기에서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다보다도 더 넓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읍니다. 프랑스 파리의 빈민굴에서 태어나서, 일생을 그 빈민굴에서만 보내 여인 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인 난생 처음으로 바다엘 갔습니다. 그녀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계속해서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보았읍니다. 그러자 그녀는 해변으로 가서, 물이 무릎까지 올때까지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손을 모아 바닷물을 퍼올리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물이 있으니 감사합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다 보다도 더 넓고 큽니다. 혹시 바닷물은 다함이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 하는 샘물과 같습니다. 이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밀려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사랑은 자꾸만 식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의 사랑이 곧 식어져 버리고 맙니다. 교회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공급이 중단되면, 곧 사랑이 말라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계속해서 우리에게 밀려오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발전 시켜야 합니다. 사랑을 계속해서 개발해야 합니다. 사랑을 개발하지 않으면, 사랑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줄어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을 계속해서 개발해야 합니다. 사랑을 계속해서 개발하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사도 바울은 사랑 을 지식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을 계속해서 개발하는 것은 지식과 함께 개발됩니다. 우리의 깨달음과 함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위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오히려 무서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나의 생각과는 관계 없이 남에게 큰 해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 강아지 한 마리가 생겼던 기억이 납니다. 그 강 아지를 사왔는지, 누가 주어서 가져왔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으나, 어쨋든 우리 집에 강아지가 한마리 생겼습니다. 저와 제 동생은 무척이나 그 강아지를 좋아했습니다. 그 강아지를 너무 너무 사랑했습니다. 지금 생각에 아무리 봐도 애완용 개는 아니고,분명히 똥개였는데도, 강아지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강아지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이블을 덥어주고, 입을 마추고 꼭 안아주고, 서로 가질려고 잡아 당기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 강아지를 우리 형제는 사랑했는데, 얼마 있다가 보니, 그 강 아지가 죽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그 강아지 왜 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엄마도 별 대답할 것이 없었던지, 우리 집에는 호랑이가 살아서 강아지가 안되고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제 동생이 범띠라 강아지가 안되고 죽는다는,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순진한 우리 형제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장가를 간 후에 하루는 집에 가보니, 강아지가 몇마리 집에 있었습니다. 왠 강아지냐고 물으니까, 제 동생이 사다가 놓았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 집에는 강아지를 사다가 놓으면,호랑이 띠가 있어서 죽는 데 무엇 때문에 강아지를 사다가 놓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전 실업전문학교 축산과를 졸업을 하고 경찰생활을 하는 제 동생은 "집에 호랑 이 띠가 있어서 강아지가 죽었는지 아느냐 우리가 너무 그 강아지를 못 살게 굴어서 죽었다"고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어렸을 때 죽은 강아지가 집에 호랑이 띠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강아 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너무 못살게 굴어서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 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이 지식과 함께 풍성해 지지 않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엄청나게 자랐는데, 지식과 함께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살리는 사랑 이 아니라, 죽이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식과 함께 자라지 않는 사랑은 무서운 독이 됩니다. 살려야 할 사랑이 죽이는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식과 함께 사랑이 더욱더 풍성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또한 이 사랑은 "모든 총명으로" 더불어 더욱더 풍성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모든 총명"은 통찰력을 뜻합니다. 즉 사랑은 바른 판단력과 함께 점점 더 풍성해져야 합니다. 바른 판단력이 없는 사랑도 지식이 없는 사랑과 같이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세가 되면 사랑이 놀랍게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딤후 3:1-5) 말씀을 보면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 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게 된다"고 말씀하 셨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사랑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 줍니다. 말세는 돈을 사랑하게 되는데, 사도 바울은 (딤전3:10) 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 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점점 더 많아지되, 잘못 판단하여, 돈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면, 점점 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바른 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점점더 풍성해져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점점 발전시키는 것은 지식과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발전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흑석동 교회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바른 판단력과 더블어 점점 더 풍성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인격의 성장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v.10)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되고, 또 진실하여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 습니다. 이것은 인격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인격체입니다. 인격이 없으면, 사람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읍니다. 인격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격을 가진 인격체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인격적으 로 대하야 합니다. 사람을 인격이 없는 짐승과 같이 대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 인격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낮고 천한 인격을 가진, 그래서 짐승 보다도 더 못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하면, 숭고한 인격을 가 진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최고의 인격을 가졌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최고의 인격을 가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3:35)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마5:48)에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서, 예수님과 같이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 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최고의 인격을 가추어야 합니다. 그럼 예수님을 닮은 온전한 인격은 어떤 인격일까요 오늘 본문 10 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1) 온전한 인격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분별한다"는 말의 희랍어의 뜻은 금속이 순수한 금속인지 아 닌지를 알기 위하여 시험한다는 뜻입니다. 가짜 금속이 많기 때문에, 그 금속이 진짜인지 겉과 속이 같은지, 아니면 다른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금속이 겉과 속이 같은지를 시험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때 이 "분별한다"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온전한 인격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극히 선한 것"(the best)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 습니다. 진정한 인격은 고상한 말을 하고, 고상한 행동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인격은 바로 "최고의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입니다. 예의 바른 말은 할 줄 모르고, 격조있는 행동은 하지 못해도, 최고의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바로 참 된 인격자입니다. 그럼 "지극한 선"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주 만물 을 창조하시고,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창조하시고,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짐 승과 바다의 고기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극한 선"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인격체입니다. 세상에는 우상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격체 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우상이고, 어떤 것이 참 신인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우상과 참 하나님을 분별할 줄 아는 자가 바로 참다 운 인격체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을하고, 세상적으로 존경을 받고, 인격자라고 해 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참다운 인격자가 아닙니다. 어찌 자기를 낳으신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를 인격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 찌 인간을 만드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를 인격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돼지 머리 앞에 절을 하는 자들을 보고 인격체라고 할 수 있 겠습니까 그런 자들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돼지 못한 자들입니다. 돼지 만도 못하니까 돼지 머리에 절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들이 어떻게 인격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49:20) 말씀을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 망하는 짐승과 같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큰 영광을 얻 고 존귀한데 처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인격자가 될 수 없습니다. 멸망하는 짐승과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른 자에 게는 영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분별하기 위하여, 더욱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2) 온전한 인격은 진실하여 허물이 없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 보 교인들이 "진실하여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기도했읍니다. "진실하여 허물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순결한 것을 뜻합니다. 진정 한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순결해야 합니다. 마음에 허물이 없 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죄악으로 더러워 질때로 더러워졌습니다. 예레미야 선 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말씀하 셨습니다. 만물 중에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이 더러워진 마음을 아름답게 포장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인격자인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인격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가르쳐 "회칠한 무덤"같다고 하셨습니다. (마 23:27) 말씀을 보면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 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는 이러한 거짓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닙니다. 겉을 아름답게 치장한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여기에서 "진실하다"는 말을, 영어 성경은 sincere라는 단어를 사용했읍니다. 이 단어의 뜻은 "태양에 의하여 검사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sincere 라는 말은 프랑스어에서 온 말인데, 이 프랑스어는 sans cere 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이 말은 "밀랍이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 조각가들이 작품을 만들때, 실수하여 잘못 흠을 낸 부분이 있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 곳에 밀랍을 녹여서 발랐습니다. 그리고 겉에 다 색을 칠하였습니다. 그러면 감쪽 같아집니다. 흠이 있는 것 같이 감쪽 같아집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귀족들의 집 마당에 갖다가 세워두면 얼마 가지 않아 서, 뜨거운 태양에 그 밀랍이 녹아 내려서, 그곳의 흠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조각품을 살때, "이 작품에는 밀랍이 없느냐 "고 묻습니다. 이 "밀랍이 없다"는 말이 바로 진실하다는 말의 어원입니다. 이렇게 밀랍으로 가장하지 않은 마음이 바로 진실한 마음입니다. 뜨 거운 불이 가까지 와도 녹아 내릴 것이 없이, 가장 되지 않은 마음을 가지 고 있는 자가 바로 인격자입니다. 마음에 흠과 티가 없는 깨끗한 마음을 가진 자가 인격자가 아닙니다. 실수와 허물이 없는 자가 인격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인격자는 꾸밈이 없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비록 흠과 티가 있어도, 그것을 속이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 놓는 마음을 가진자가 진 정한 인격자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 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오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 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한다"(렘17:9-10)고 말씀하셨읍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뜨거운 불로 시험하여서, 거짓 된 것 이 없는 자에게는 상을 주십니다. 그러나 거짓된 것으로 속인 자들에게는 벌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흠과 티가 없는 마음이 아니라, 거짓 없는 마음입니다. 그런 인격자가 진정한 인격자입니다. 참 하나님을 누구인지를 분별할 줄 알고, 거짓 없는 신실한 마음을 소유 하셔서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기를 기도했습니다.(v.11) 예수님은 (마7:16-20)에서 사람을 나무에다 비유했습니다. "그의 열매 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 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 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 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 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또한 (요15:5)서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무에다 비유된 우리 기독교인들 에게는 두가지 중요 목적이 있습니다.
1) 하나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쁜 열매를 맺으면 우리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나쁜 열매를 맺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나무가 되시는 예수님을 나쁜 나무로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좋은 열매를 사도 바울은 "의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는 것은 포도나무의 가지인 우리 기독교인들이 점점 더 좋 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더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점점 더 좋은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무가 좋은 영양분을 주어도, 가지가 병들면 좋은 열매 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포도 나무인 예수님이 나빠서 기독교인들이 잘 못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무가지가 병들고 썩어서 잘못된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요15:2) 말씀을 보면 이렇게 병들과 썩은 잘못된 나무 가지는 하나님이 제하여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지 때문에 나무인 예수님이 욕을 먹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의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이 바로 의 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Westminster Chatechism)은 인간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to glorify God)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믿는 자들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로 만드는 곳입니다.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점점 더 의의 열매를 맺는 자 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로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 로 인간의 목표이며, 기독교인의 목표입니다.
2)
둘째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발전하는 것 입니다. 나무가 그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농 부가 열심히 농사했는데, 열매를 적게 맺으면, 농부의 마음이 기쁘지 않읍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기쁘시게 하 기 위해서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시기 위하여, 우리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요15:2)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쓸모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제하여 버리시지만,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많은 과실을 맺게하기 위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데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의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했읍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도록 기도 했습니다. 교회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열매 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많은 열매를 맺는 방법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하셨습니다. 즉 많은 열매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을 통해서만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요15:4-6)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 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미암지 않고는 즉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많은 과실을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이라"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풍성하나 열매 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우리에 게 전달해 주시는 예수님을 통해야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읍니다. 인도 중남부 지방에 고다바리 삼각주(Godavari Delta)가 있다. 그곳은 쌀이 과잉생산될 정도로 많이 생산 되고 있는 곡창지대이다.
인도 사람 들 중에 그 곳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유명한 쌀 생산 지역이다. 그 곳도 19세기 상반기 까지는 인도의 다른 내륙 지역과 같이 농 사를 지을 수 없는 버림 받은 땅이였다.
그런데 위대한 기독교인인 기술 자 아더 코튼 경(Sir Athur Cotton)이 고다바리 강 뚝에 있는 다우라이쉬와 람(Dowlaishwaram)에 댐을 건설했다. 그리고 수로를 파서 그 신선한 물 을 그 델타지역에 공급했다. 강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물을 모아서 신선한 물을 공급해 주었고, 수로가 그 물들을 그 델타지역에 공급해 주었다. 그 러자 그 지역이 몹씨 비옥한 땅이 되었다. 그 고다바리 델타 지역은 물질적인 쌀 생산에서만 버림 받은 땅이 풍성 한 옥토로 변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옥토로 변했다. 1836년에 하나님이 보내주신 복음이 그곳에 전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지금까지 하나님이 보낸 복음의 수로를 통하여 그 복음이 그 지방 사람들에게 흘러들 어갔다. 그래서 그곳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과 복을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들이 수천명이나 있는 복음의 옥토가 되었다. 강물을 날라주는 수로가 있어야 그 땅이 옥토가 되듯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우리에게 날라다 주는 예수님을 통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많 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없이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읍니다.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 맺는 열매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열 매가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읍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는 열매는 의의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을 통하면 세상의 열매를 맺을 뿐입니다. 사단을 통하면 사단의 열매 를 맺을 뿐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읍니다. 왜나하면 세상과 인간의 육신과 사단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롬8:7) 말씀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이렇게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육신으로 말미암은 열매들은 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열매들만 맺 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을 통한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합니다. 교회나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 세상이나, 사단이 나,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려고 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욕되게하고, 하나님 의 마음을 아프게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의의 열매와 풍성한 열매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의 열매들 을 점점 더 많이 맺는 흑석동 교회 성도들로 발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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