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앙, 화목한 가정, 멋진 생활 (빌2:12-18)
본문
벌써 입추와 말복이 지나고 내일은 처서입니다. 우리 속담에 '처서에 비가 내리면 독의 곡식 도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 여름은 태풍 올가의 영향으로 많은 재산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농작물의 피해로 항상 가난에 찌든 농민들의 마음은 더욱 우울할 것 같습니다. 농 촌은 우리의 고향입니다. 더욱 근면 검소한 생활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이 준다'는 속담에서 조상들의 생활의 지혜를 봅니다. 벼이삭 이 여물 때 비가 내리면 그만큼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뜻이겠습니다. 뜻하지 않는 비로 인 해 농작물이 또 피해를 입는다면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친지 어른들게 다시 안부 전화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고향의 교회 목사님들께도 안부 전하 시기 바랍니다. 시골 교회 목사님들은 주민들 보다 자연과 계절의 변화에 예민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심방 및 기도로 대신해 주고 계시질 않습니까 부모님 이상으로 고향 교회 목사님을 기억하고 생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참 신앙 / 화목한 가정 / 멋진 생활로 정했습니다. 오늘 제목을 정하고 기도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할수록 그냥 은혜가 됩니다. 왠지 저의 목회 철학으 로, 가정의 가훈으로 삼고 싶어졌습니다. 함께 따라서 해봅시다. 참 신앙 / 화목한 가정 / 멋진 생활 정말 멋지고 좋은 문장입니다. 이대로 살아간다는 신앙인이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노 아처럼, 요셉처럼 완전하고 의로운 자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우리의 생활 을 기록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교만과 욕심을 버리고 여기에 걸맞는 그리시도인이 되 기 위하여 삶의 완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참 신앙 / 화목한 가정 / 멋진 생활!-이 문장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또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이렇게 되는 것인지 더 욱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참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질문' 참 신앙이 어떤 신앙을 말하는 것인가 '반응' 교인들의 대답을 기다린다. 예! 참 신앙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단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생각하고 있는 신앙에 대한 규정이 신앙의 한 부분일 수는 있어도 신앙의 전부는 아니기 에 그러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본질을 묻는 일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신앙 이 무엇이냐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기 전에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참 신앙 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며, 바른 신앙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신앙의 본 질에 대한 질문에는 절대적 정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성서의 핵심대로 그리스도 사건을 믿는 점에 서, 다시 말하면 신앙의 거점인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면 그것은 참 신앙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삶을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규범 에 그치고 말것입니다. 삶을 일으키고 생명을 살리는 신앙에는 접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는 믿기 때문에 신앙은 어떤 환경 에 굴하지 않고 영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웃을 만나고 자연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참 신앙인지를 깨닫게 할 수 있는 두가지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군에 입대했을 때 일병을 달고 군종병으로 교회에 가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남보다 편해서 좋았고, 많을 책을 볼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당시의 사령관은 이우천 장군이었는 데 아주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에 오면 군인의 냄새가 전혀 나질 않았고, 교회를 섬기고 사병들을 아끼는 마음은 다정다감 하였습니다. 또한 부인도 집사로 여전도회 회장으로 교회 일에 표시나지 않게 헌신적이었습니다.
여름성경학교 기간에는 땡볕에 가마솥을 걸고 손수 밥을 하여 교사들에게 식사를 제 공해주었습니다. 아울러 당시 목사님은 몇해전 군종감을 역임하신 홍순영 목사님이었습니다. 홍순영 목사 님은 군목단에서 신망이 두터운 분이었고, 말씀이 깊이 있고 박식하여서 장교들이 아주 좋 아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모범적인 사령관 내외분이 교회에 출석하고, 군에서 촉망받는 목사님이 계셨기 때문에, 군대의 특수성이겠지만 장교, 하사관들이 거의 교회에 나왔고, 또 주 일만 되면 일직사령은 각 부대로 예배출석인원을 강제로 할당하여 사병들을 예배에 참석시 키는 것이었습니다. 군대용어로 종교사역이라고 하는데 억지로 교회에 나오는 사병들의 불만은 대단했습니다. 이것을 자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라는 사령관을 특별지시가 있었지만, 여전히 고쳐지지가 않았습니다. 대령에서부터 말단 신병까지 교회에 나오니 사람수가 많아서 좋긴 좋았고, 헌금 이 많이 나와 여러 가지 뜻깊은 행사를 교회에서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령관이 예편을 하였습니다. 하나, 둘 빠지기 시작하더니 거의 대부분 예배에 참 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성당이 없어 인근 사단으로 미사를 참석했었는데 새롭게 부 임한 사령관이 카톨릭 신자여서 교회를 빌려 토요일 오후에 미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급격히 참석하는 수가 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그 동안 교회에 출석했던 군인들의 신앙이 아무리 눈 도장을 찍기 위한 요식 행위라 하더라도 이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더 아프게 느끼게 된 일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새벽 시간에 어느 대령 부부가 참석했습니다. 그러더니 전에 교회에 나왔던 영관 장교들 이 나와서 기도를 합니다. 진급심사를 앞두고 진급을 위해 기도하러 나왔던 것입니다. 조금 지나자 제 생각도 변했습니다. 그래도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그들의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복을 받게 해달라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진급발표 후에는 이렇게 나왔던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는 모습보다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세계사 과목을 담당하셨던 박무성 선생님이 계십니다. 박 선생님은 전공이 역사여서 그런지 학생들에게 삶의 가치관을 심어주셨고, 아주 건강하고 훌륭한 시를 쓰시는 시인이기도 하셨습니다. 문예반으로 있던 저는 선생님의 시를 교정을 보며 감명 깊게 시를 보았습니다. 재학시에는 거의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군 제대후 신학교에 복학하니 인근 여자고등학교에 근무하고 계셨습니다. 학교를 오가며 가끔 만날 기회가 있어 인사를 드렸더니, 저를 기억하셨으며, 또한 훌륭한 목회자가 되도록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어느 날인가 밤늦게 귀가를 하는데 버스 안에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어디를 가시냐고 물었더니 금요철야기도를 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신앙인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선 생님이 출석하는 교회는 제가 통학하는 길에 있었기 때문에 그후에도 여러분 버스 안에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당시 고3 수험생을 담임하고 계셨고, 대학진학을 위하여 그의 제자들이 아무 탈없이 진학할 수 있도록 기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왔던지, 아! 이렇게 좋은 선생님인줄 내가 왜 진작 몰랐 었나 하는 존경심과 갑자기 선생님이 너무나 높게만 보였습니다. 아무 욕심없이, 또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제자들을 위해 피곤한 발걸음을 옮기는 선생님의 심정!-물론 선생님의 기도대로 전부 대학에 갈 수는 없었겠지만 진정 선생님 의 길, 신앙의 길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참 신앙은 이것이다, 저것이다를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각자가 체험하고 느끼며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 참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성경중심의 삶이어야 합니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니라. 우리가 하나님, 예수님을 알려면 성경을 보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에 대해서 우리한테 무엇을 가르쳐주는 유일한 책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되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기에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신앙은 전인적인 삶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 이렇게 참 신앙은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성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전인적인 삶 이란 영적 생활의 원리를 중심으로 균형 잡힌 삶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나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삶이 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영원한 삶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여러분의 신앙은 시간이나 시대 상황에 따라서 퇴 색하거나 변질될 수 없는 영원한 믿음을 소유하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를 믿고 따라가려면 우리의 신앙 역시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참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하는 여러분! 성경중심적인 삶으로, 전인적인 삶으로, 영원한 삶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시고 참 신앙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화목한 가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앙은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보다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신앙을 성숙하게 하고 가정을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화목한 가정을 전제로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 속에서 교회를 출석하게 될 때 가족의 모습까지도 때로는 위선적으로 보이며, 또한 반발 심리로 아예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부정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말씀드립니다. 정신과 의사인 고교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이고 목사로 써의 반응을 확인했던 내용입니다. 어느 중년 남자가 부인들 데리고 병원에 와서 정신과 진단을 받으러 왔습니다. 이유는 가 정과 자녀를 내팽개치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한다고 합니다. 집에 있는 것까지 다 가져가면 서 교회 생활을 하는데 도저히 자기부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적어도 가정을 화목하 게 하고 기쁨이 넘치게 하고, 또한 교회로 가족을 사랑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교회에 빠져 남편을 무시하고 자녀를 모른 채 하고 교회에 나갈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들으면서 이 주부가 어느 이단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한번 여러분이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부인을 정신병자로 보는 남편과 남편에게 정신병 자로 취급받는 아내의 관계-이러한 가운데 가정이 화목할 수 있으며, 남편이 신앙을 가질 수가 있으며, 혹 부인이 이단에 빠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신앙이 올바로 성장할 수 있겠 습니까 화목한 가정은 화목한 사회를 만들고, 화목한 사회는 삶의 질서와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것은 가정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가정을 허락하셨을 때 하나님의 창조는 완성되었습니다. 요즈음의 가정은 여러모로 문제가 심각합니다. 가정은 사랑의 만남이 아니라 잠깐 잠만 자러 왔다가 각자의 사회 생활로 출발하는 버스의 시발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애정과 대화의 단절로 현실사회에 그 문제점이 그대로 나타나 사회의 병리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누가 보더라도 진정한 화목한 가정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우리의 가정을 되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식구간에도 이기심과 질투심이 들었 던 우리, 나만 편하기 위하여 가정의 힘든 일을 팽개쳤던 우리, 그러한 우리들의 모습들. 그러나 가정은 그 무엇과 바꿀 수가 없는 내용이 들어있으며, 함께 숨쉬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운명체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행복은 공유되어져야 하고, 모든 문제는 치유되어야 합니다. 이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형식적인 말로써만 가능한 것이 아 닙니다. 애완견을 쓰다듬으면서 '난 너를 미워해' 라고 속삭일 때 그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 고 좋아할지 모릅니다. 반대로 그 개를 향하여 '난 너를 사랑해' 하고 소리를 지른다면 그 강아지는 금새 꼬리를 내리고 도망갈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 은 세상 어느 곳에서 찾아볼 수가 없고 가정에서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장으로써 가정과 비교할 것은 없습니다. 가정은 사랑의 교실입니다. 그러 기에 가정의 절대조건인 부부는 당초부터 명령의 사슬이 아닌 사랑의 사슬에 묶여 있어야 하며 사람의 됨됨이는 가정을 이루어봐야 올바로 평가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가정에 선물로 주신 미래의 자기자신인 자녀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정신병원에 입원중인 청소년들의 50% 이상이 기독교인의 가정이라는 어느 통계를 보고 기독교인으써, 목사로써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최초로 만나는 스승이 부모입니다. 부모는 신앙의 모델이기에 화목한 가정을 이루려면 사랑의 교실인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해서 부부나 자녀나 모두 가정의 화목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듯이 화목한 가정에서 교회와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그 화합의 계기를 마련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족의 주님으로 영접한 가정입니다. 요한
1,12;에베소서5,18;을 보면 예수께서 가족의 마음속에 계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다스리는 가정이 기독교 가정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을 교회와 가정 밖에 없습니다. 가정은 사랑을 배울 수 있게 하는 곳이고, 세상 속에서 멸시와 천대들 치유할 수 있는 곳이며, 또 사회 생활 속에서 그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에 소중합니다. 예수님을 모신 가정은 다른 가정보다 화목하고 행복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둘째로) 성경적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야 합니다.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나와 다른 가족들의 관계는 주님께서 예수의 형상을 닮게 하 도록 우리를 훈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순종과 보호의 마음을 깨닫게 하여 이 사회의 윤활유 역할을 하게 합니다. 이로써 가정은 구성원 상호간의 인격성숙의 장이요, 인격완성의 장임이 확인되는 것이며 서로의 자랑이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가정에 돌아가서 쑥스럽기는 하지만-어머니 사랑합니다, 나는 아버 지가 자랑스럽습니다, 여보 너무 사랑해, 아빠(엄마)는 너희들이 대견하고 사랑스럽단다-라고 한마디씩 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멋진 생활입니다. 경제난국이 터져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힘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위기는 이 사 회에 신종 부유층을 만들었습니다. 일명 '이대로족'이라고 하여 수입은 늘어, 생활은 더 여유 가 생겨 경제위기가 이대로 지속하길 바라는 일부의 부유층을 일컫는 신종 단어입니다. 국민들 의 생활고가 새어나올 때 이들은 호화주택을 구입하고 가족들의 승용차를 슬그머니 최신형 으로 바꾸고 여전히 호화 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옷로비' 사건에서 그 실태를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미국에 WASP족이라 하여 최 특권층이 있습니다.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 계급(white Anglo-Saxon Protestant)인데 미 국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도 정경유착으로 형성된 일부의 특권층과 졸부들로 이루어진 부유층들이 이제 집단이 이루어 진 것 같습니다. WASP의 보통명사는 말벌(wasp)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속된 말로 성미 급한 사람 을 일컫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일부 특권층이 말벌처럼 행동한다면 우리 국민들의 대다 수가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작은 소수의 부류지만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재물과 권세는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대로족'처럼 생활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나 멋지고 황홀한 생활입니까 싹쓸이 쇼핑, 고급 호화 생활, 판검사 사위 두고 법의 그물의 이저리 빠져나가고, 골프장, 룸살롱등 가볼데 다가보고 없는 것 없이 살아가는 얼마나 멋진 생활입니까
그런데 과연 이것이 진정한 멋진 생활인지요 이렇게 초호화판으로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 이지만 그들의 행태가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국민간의 위화감만 조성하고 선량한 국민들의 삶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과연 돈 많고 힘 있다고 참 신앙을 살 수 있는 것이며, 화목한 가정을 만들 수가 있겠습 니까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서 낮아지고, 겸손하고, 더욱 밑 으로 내려가게 하고 있습니다. 장미꽃의 탄식은 소나무에 비하여 늘 푸르지 못한 것이었고, 소나무는 포도나무처럼 포도 송이를 맺지 못하는 것이었고, 포도나무의 탄식은 다른 나무처럼 혼자 서지 못하고 언제나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신세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결국 이 탄식으로 아름다운 동산은 생기가 사라지고 새소리는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햇살이 비치는 언덕 모퉁이에 민들레가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민들레의 웃음은 꽃을 피운다는 보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민들레의 웃 음으로 인하여 동산에 다시 생기가 돋고, 끊겼던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장 멋진 삶이란 이렇게 가치있고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찌 나무들이 서 로가 비교될 수 있습니까 민들레는 자기자리에서 자기만족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의 생애는 자기가 만드는 작품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있습니까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어떤 색을 칠하겠습니까 남을 사정없이 짓 밟고라도 출세를 해야하는 경우도 있겠고, 남의 고혈까지도 빨아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멋진 생활은, 또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훈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도대체 멋진 생활은 무엇입니까 잘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른 마음가짐으로 제정신 박힌대로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멋진 생활은 남이 보 거나 말거나 제 할 일을 감사함으로 소박한 민들레의 미소를 새기며 살아가는 삶이 잘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멋진 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주의 일을 위해 여러분 가로막을 것은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난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며, 빛과 소금의 역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 멋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심방 및 기도로 대신해 주고 계시질 않습니까 부모님 이상으로 고향 교회 목사님을 기억하고 생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참 신앙 / 화목한 가정 / 멋진 생활로 정했습니다. 오늘 제목을 정하고 기도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할수록 그냥 은혜가 됩니다. 왠지 저의 목회 철학으 로, 가정의 가훈으로 삼고 싶어졌습니다. 함께 따라서 해봅시다. 참 신앙 / 화목한 가정 / 멋진 생활 정말 멋지고 좋은 문장입니다. 이대로 살아간다는 신앙인이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노 아처럼, 요셉처럼 완전하고 의로운 자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우리의 생활 을 기록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교만과 욕심을 버리고 여기에 걸맞는 그리시도인이 되 기 위하여 삶의 완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참 신앙 / 화목한 가정 / 멋진 생활!-이 문장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또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이렇게 되는 것인지 더 욱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참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질문' 참 신앙이 어떤 신앙을 말하는 것인가 '반응' 교인들의 대답을 기다린다. 예! 참 신앙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단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생각하고 있는 신앙에 대한 규정이 신앙의 한 부분일 수는 있어도 신앙의 전부는 아니기 에 그러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본질을 묻는 일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신앙 이 무엇이냐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기 전에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참 신앙 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며, 바른 신앙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신앙의 본 질에 대한 질문에는 절대적 정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성서의 핵심대로 그리스도 사건을 믿는 점에 서, 다시 말하면 신앙의 거점인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면 그것은 참 신앙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삶을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규범 에 그치고 말것입니다. 삶을 일으키고 생명을 살리는 신앙에는 접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는 믿기 때문에 신앙은 어떤 환경 에 굴하지 않고 영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웃을 만나고 자연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참 신앙인지를 깨닫게 할 수 있는 두가지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군에 입대했을 때 일병을 달고 군종병으로 교회에 가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남보다 편해서 좋았고, 많을 책을 볼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당시의 사령관은 이우천 장군이었는 데 아주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에 오면 군인의 냄새가 전혀 나질 않았고, 교회를 섬기고 사병들을 아끼는 마음은 다정다감 하였습니다. 또한 부인도 집사로 여전도회 회장으로 교회 일에 표시나지 않게 헌신적이었습니다.
여름성경학교 기간에는 땡볕에 가마솥을 걸고 손수 밥을 하여 교사들에게 식사를 제 공해주었습니다. 아울러 당시 목사님은 몇해전 군종감을 역임하신 홍순영 목사님이었습니다. 홍순영 목사 님은 군목단에서 신망이 두터운 분이었고, 말씀이 깊이 있고 박식하여서 장교들이 아주 좋 아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모범적인 사령관 내외분이 교회에 출석하고, 군에서 촉망받는 목사님이 계셨기 때문에, 군대의 특수성이겠지만 장교, 하사관들이 거의 교회에 나왔고, 또 주 일만 되면 일직사령은 각 부대로 예배출석인원을 강제로 할당하여 사병들을 예배에 참석시 키는 것이었습니다. 군대용어로 종교사역이라고 하는데 억지로 교회에 나오는 사병들의 불만은 대단했습니다. 이것을 자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라는 사령관을 특별지시가 있었지만, 여전히 고쳐지지가 않았습니다. 대령에서부터 말단 신병까지 교회에 나오니 사람수가 많아서 좋긴 좋았고, 헌금 이 많이 나와 여러 가지 뜻깊은 행사를 교회에서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령관이 예편을 하였습니다. 하나, 둘 빠지기 시작하더니 거의 대부분 예배에 참 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성당이 없어 인근 사단으로 미사를 참석했었는데 새롭게 부 임한 사령관이 카톨릭 신자여서 교회를 빌려 토요일 오후에 미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급격히 참석하는 수가 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그 동안 교회에 출석했던 군인들의 신앙이 아무리 눈 도장을 찍기 위한 요식 행위라 하더라도 이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더 아프게 느끼게 된 일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새벽 시간에 어느 대령 부부가 참석했습니다. 그러더니 전에 교회에 나왔던 영관 장교들 이 나와서 기도를 합니다. 진급심사를 앞두고 진급을 위해 기도하러 나왔던 것입니다. 조금 지나자 제 생각도 변했습니다. 그래도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그들의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복을 받게 해달라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진급발표 후에는 이렇게 나왔던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는 모습보다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세계사 과목을 담당하셨던 박무성 선생님이 계십니다. 박 선생님은 전공이 역사여서 그런지 학생들에게 삶의 가치관을 심어주셨고, 아주 건강하고 훌륭한 시를 쓰시는 시인이기도 하셨습니다. 문예반으로 있던 저는 선생님의 시를 교정을 보며 감명 깊게 시를 보았습니다. 재학시에는 거의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군 제대후 신학교에 복학하니 인근 여자고등학교에 근무하고 계셨습니다. 학교를 오가며 가끔 만날 기회가 있어 인사를 드렸더니, 저를 기억하셨으며, 또한 훌륭한 목회자가 되도록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어느 날인가 밤늦게 귀가를 하는데 버스 안에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어디를 가시냐고 물었더니 금요철야기도를 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신앙인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선 생님이 출석하는 교회는 제가 통학하는 길에 있었기 때문에 그후에도 여러분 버스 안에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당시 고3 수험생을 담임하고 계셨고, 대학진학을 위하여 그의 제자들이 아무 탈없이 진학할 수 있도록 기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왔던지, 아! 이렇게 좋은 선생님인줄 내가 왜 진작 몰랐 었나 하는 존경심과 갑자기 선생님이 너무나 높게만 보였습니다. 아무 욕심없이, 또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제자들을 위해 피곤한 발걸음을 옮기는 선생님의 심정!-물론 선생님의 기도대로 전부 대학에 갈 수는 없었겠지만 진정 선생님 의 길, 신앙의 길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참 신앙은 이것이다, 저것이다를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각자가 체험하고 느끼며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 참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성경중심의 삶이어야 합니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니라. 우리가 하나님, 예수님을 알려면 성경을 보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에 대해서 우리한테 무엇을 가르쳐주는 유일한 책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되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기에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신앙은 전인적인 삶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 이렇게 참 신앙은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성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전인적인 삶 이란 영적 생활의 원리를 중심으로 균형 잡힌 삶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나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삶이 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영원한 삶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여러분의 신앙은 시간이나 시대 상황에 따라서 퇴 색하거나 변질될 수 없는 영원한 믿음을 소유하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를 믿고 따라가려면 우리의 신앙 역시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참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하는 여러분! 성경중심적인 삶으로, 전인적인 삶으로, 영원한 삶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시고 참 신앙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화목한 가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앙은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보다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신앙을 성숙하게 하고 가정을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화목한 가정을 전제로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 속에서 교회를 출석하게 될 때 가족의 모습까지도 때로는 위선적으로 보이며, 또한 반발 심리로 아예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부정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말씀드립니다. 정신과 의사인 고교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이고 목사로 써의 반응을 확인했던 내용입니다. 어느 중년 남자가 부인들 데리고 병원에 와서 정신과 진단을 받으러 왔습니다. 이유는 가 정과 자녀를 내팽개치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한다고 합니다. 집에 있는 것까지 다 가져가면 서 교회 생활을 하는데 도저히 자기부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적어도 가정을 화목하 게 하고 기쁨이 넘치게 하고, 또한 교회로 가족을 사랑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교회에 빠져 남편을 무시하고 자녀를 모른 채 하고 교회에 나갈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들으면서 이 주부가 어느 이단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한번 여러분이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부인을 정신병자로 보는 남편과 남편에게 정신병 자로 취급받는 아내의 관계-이러한 가운데 가정이 화목할 수 있으며, 남편이 신앙을 가질 수가 있으며, 혹 부인이 이단에 빠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신앙이 올바로 성장할 수 있겠 습니까 화목한 가정은 화목한 사회를 만들고, 화목한 사회는 삶의 질서와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것은 가정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가정을 허락하셨을 때 하나님의 창조는 완성되었습니다. 요즈음의 가정은 여러모로 문제가 심각합니다. 가정은 사랑의 만남이 아니라 잠깐 잠만 자러 왔다가 각자의 사회 생활로 출발하는 버스의 시발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애정과 대화의 단절로 현실사회에 그 문제점이 그대로 나타나 사회의 병리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누가 보더라도 진정한 화목한 가정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우리의 가정을 되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식구간에도 이기심과 질투심이 들었 던 우리, 나만 편하기 위하여 가정의 힘든 일을 팽개쳤던 우리, 그러한 우리들의 모습들. 그러나 가정은 그 무엇과 바꿀 수가 없는 내용이 들어있으며, 함께 숨쉬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운명체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행복은 공유되어져야 하고, 모든 문제는 치유되어야 합니다. 이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형식적인 말로써만 가능한 것이 아 닙니다. 애완견을 쓰다듬으면서 '난 너를 미워해' 라고 속삭일 때 그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 고 좋아할지 모릅니다. 반대로 그 개를 향하여 '난 너를 사랑해' 하고 소리를 지른다면 그 강아지는 금새 꼬리를 내리고 도망갈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 은 세상 어느 곳에서 찾아볼 수가 없고 가정에서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장으로써 가정과 비교할 것은 없습니다. 가정은 사랑의 교실입니다. 그러 기에 가정의 절대조건인 부부는 당초부터 명령의 사슬이 아닌 사랑의 사슬에 묶여 있어야 하며 사람의 됨됨이는 가정을 이루어봐야 올바로 평가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가정에 선물로 주신 미래의 자기자신인 자녀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정신병원에 입원중인 청소년들의 50% 이상이 기독교인의 가정이라는 어느 통계를 보고 기독교인으써, 목사로써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최초로 만나는 스승이 부모입니다. 부모는 신앙의 모델이기에 화목한 가정을 이루려면 사랑의 교실인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해서 부부나 자녀나 모두 가정의 화목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듯이 화목한 가정에서 교회와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그 화합의 계기를 마련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족의 주님으로 영접한 가정입니다. 요한
1,12;에베소서5,18;을 보면 예수께서 가족의 마음속에 계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다스리는 가정이 기독교 가정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을 교회와 가정 밖에 없습니다. 가정은 사랑을 배울 수 있게 하는 곳이고, 세상 속에서 멸시와 천대들 치유할 수 있는 곳이며, 또 사회 생활 속에서 그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에 소중합니다. 예수님을 모신 가정은 다른 가정보다 화목하고 행복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둘째로) 성경적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야 합니다.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나와 다른 가족들의 관계는 주님께서 예수의 형상을 닮게 하 도록 우리를 훈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순종과 보호의 마음을 깨닫게 하여 이 사회의 윤활유 역할을 하게 합니다. 이로써 가정은 구성원 상호간의 인격성숙의 장이요, 인격완성의 장임이 확인되는 것이며 서로의 자랑이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가정에 돌아가서 쑥스럽기는 하지만-어머니 사랑합니다, 나는 아버 지가 자랑스럽습니다, 여보 너무 사랑해, 아빠(엄마)는 너희들이 대견하고 사랑스럽단다-라고 한마디씩 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멋진 생활입니다. 경제난국이 터져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힘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위기는 이 사 회에 신종 부유층을 만들었습니다. 일명 '이대로족'이라고 하여 수입은 늘어, 생활은 더 여유 가 생겨 경제위기가 이대로 지속하길 바라는 일부의 부유층을 일컫는 신종 단어입니다. 국민들 의 생활고가 새어나올 때 이들은 호화주택을 구입하고 가족들의 승용차를 슬그머니 최신형 으로 바꾸고 여전히 호화 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옷로비' 사건에서 그 실태를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미국에 WASP족이라 하여 최 특권층이 있습니다.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 계급(white Anglo-Saxon Protestant)인데 미 국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도 정경유착으로 형성된 일부의 특권층과 졸부들로 이루어진 부유층들이 이제 집단이 이루어 진 것 같습니다. WASP의 보통명사는 말벌(wasp)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속된 말로 성미 급한 사람 을 일컫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일부 특권층이 말벌처럼 행동한다면 우리 국민들의 대다 수가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작은 소수의 부류지만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재물과 권세는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대로족'처럼 생활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나 멋지고 황홀한 생활입니까 싹쓸이 쇼핑, 고급 호화 생활, 판검사 사위 두고 법의 그물의 이저리 빠져나가고, 골프장, 룸살롱등 가볼데 다가보고 없는 것 없이 살아가는 얼마나 멋진 생활입니까
그런데 과연 이것이 진정한 멋진 생활인지요 이렇게 초호화판으로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 이지만 그들의 행태가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국민간의 위화감만 조성하고 선량한 국민들의 삶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과연 돈 많고 힘 있다고 참 신앙을 살 수 있는 것이며, 화목한 가정을 만들 수가 있겠습 니까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서 낮아지고, 겸손하고, 더욱 밑 으로 내려가게 하고 있습니다. 장미꽃의 탄식은 소나무에 비하여 늘 푸르지 못한 것이었고, 소나무는 포도나무처럼 포도 송이를 맺지 못하는 것이었고, 포도나무의 탄식은 다른 나무처럼 혼자 서지 못하고 언제나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신세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결국 이 탄식으로 아름다운 동산은 생기가 사라지고 새소리는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햇살이 비치는 언덕 모퉁이에 민들레가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민들레의 웃음은 꽃을 피운다는 보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민들레의 웃 음으로 인하여 동산에 다시 생기가 돋고, 끊겼던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장 멋진 삶이란 이렇게 가치있고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찌 나무들이 서 로가 비교될 수 있습니까 민들레는 자기자리에서 자기만족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의 생애는 자기가 만드는 작품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있습니까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어떤 색을 칠하겠습니까 남을 사정없이 짓 밟고라도 출세를 해야하는 경우도 있겠고, 남의 고혈까지도 빨아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멋진 생활은, 또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훈은 이러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도대체 멋진 생활은 무엇입니까 잘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른 마음가짐으로 제정신 박힌대로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멋진 생활은 남이 보 거나 말거나 제 할 일을 감사함으로 소박한 민들레의 미소를 새기며 살아가는 삶이 잘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멋진 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주의 일을 위해 여러분 가로막을 것은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난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며, 빛과 소금의 역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정 멋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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