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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의 길 (빌3:12-14,4:11-12)

본문

우리가 산을 오를 때 산봉우리를 하나 힘겹게 헉헉거리며 넘고 나면 또 다른 산봉우리가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듯, 우리의 삶이란 "부단한 시작의 연속"일뿐 사실 인생의 길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생들은 일의 분기점마다 일이 끝난 것처럼 즐거워합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한 과정을 끝내면 우리는 그것을 '졸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졸업이 아닙니다. 졸업은 또 다른 시작을 의 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졸업은 공부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일의 시작 일 뿐입니다. 주어졌던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나면 우리에겐 새로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급학교의 진학이던 사회진출이던 우리는 새로운 과정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머뭇거리거나, 전력질주하지 않고 주춤 거린다며는 인생여로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단히 노력하고 쉬지 않고 산을 향해 오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의 길에서 마칠 졸(卒)자를 써야할 부분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린 이제 중학교 과정을 끝내놓고서 공부를 다 마친 것처럼 졸 업이라고 하고, 해마다 년말이 되면 마치 인생을 다 산 것처럼 망년회다 송년회다 떠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인생의 길에서 마칠 졸(卒)자를 써야할 부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삶이란 "부단한 시작의 연속"일뿐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이 먹고 늙으면 삶을 다 산 것같이 자포자기를 하지만 그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은 없습니다. 나이 먹고 늙으면 죽음이라는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가야합니다. '죽음'이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불합리한 단어중의 하나입니다. 마 치 졸업이라는 말을 만들었듯, 죽음도 인생이 끝난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성경학적 의미는 별세(別世), 즉 내세(來 世)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향하여 가는 단계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에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보면 우리네 인생은 내세라는 한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동반잡니다. 문제는 천국을 향하느냐 지옥을 향하느냐가 문젭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길을 마치고 내세라는 목표지점에 다 달으면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누가 천국으로 들고 누가 지옥으로 떨어 질 것인가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어떤 인생길을 걸어 왔느냐가 판가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인생길이 중요한 것입니다. 북한산 정상은 하나지만 등산로는 많습니다. 우린 이왕이면 영생의 목표 를 향하여 달려야 하겠습니다. 어떤 길이 바른 인생 길일까요
1. 삶의 푯대(목표)를 정한 인생길 인생길에서 푯대를 확고히 정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푯대가 확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본문 3:14에서 사도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아가노라"고 했습니다. 푯대는 목표지점을 말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목표는 이상이요 비죤이요 꿈입니다. 이상과 꿈은 말 그대로 꿈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 만큼 열심히 그 이상을 향하여 달려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뜻이 없고 이상이 없는 인생은 삭막하고 힘듭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목표를 향해 일생동안 달려갔던 자입니다. 그의 삶의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3:13-14에 고백하기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 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아가노라고 고백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푯대를 정해놓고 인생길을 달려 갔습니다. 달려가면서 자기에게 혹 좋은 여건이 주어졌을 때도 그것을 "잡은줄 로 여기지 아니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옳지됐다 이제 한몫 잡았다"고 하는 건방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흔히 무엇인가 조금만 된 듯하면 교만해지고 바른 길에서 탈선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만약에 한 학생이 대학교에 합격했다고 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은 다 시시한 것으로 여기고 "난 이제 대학간판을 잡은거야"라며 교만을 떤 다 면, 그 학생은 잘못된 인생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의 행동은 높은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이런 자들이 많습니다. 예전에 청와대 경호실장이였던 차지철씨는 청와대 경호실장이라는 자리에 올라서는 모든 것을 다 잡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만 빼 놓고 국무총리도 장관도 모든 사람을 자기 부하처럼 생각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릴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의 그 허황된 세도 때문에 10,26사건 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박대통령과 함께 김재규의 총 탄에 갔습니다. 잡은줄 생각하고 교만을 떠는 사람들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10:12에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라"고 하셨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되라"고 하셨고,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잡은 줄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네 인생길을 가면서 우리 손에 잡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 빌려쓰고 있으며 돌려 드려야 할 것 뿐입니다. 하다못해 우리의 육신마저도 본래의 위치에 돌려 드려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처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그때부터 순교의 피를 흘리던 그때까지 한 번도 주님을 배반한 적 없이 한 이상을 향해 달 려갔습니다. 그는 처음 회심할 당시 "나는 모든 사람중 지극히 적은 자"라고 했고, 그 다음 더욱 신앙이 깊어 졌을 때에 "나는 죄인" 이라고 했으며, 말년의 깊은 신앙의 경지에 다 달아서는 "나는 죄인 중 괴수"라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자기가 잡은 높은 신앙의 경지를 아직도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마지 막까지 분투하는 그의 '인생 달리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어떤 업적을 이루었을 때 바로 그 순간 허리띠를 동여 메고 신발 끈을 조일 줄 알아야 합니다. 잡은 줄로 여기지 마십시오. 넘어질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푯대는 어떻게 꽂아야 할까요
2. 앞을 내다보고 바라보는 푯대를 세워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본문 3:13절 하반절에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체험하기 이전의 것들은 분토 처럼 버린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겸비했던 문벌, 지식, 부귀, 체면 등을 자랑삼아 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율법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 생활태도와 습성을 모조리 버리고 오직 예수라는 목표에 인생을 걸고 아가겠노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잘못 길을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생의 목표를 잘못세우고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럴 때마다 잘못된 푯대를 바 르게 수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낙심하고 포기하면 파멸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바울도 처음엔 푯대를 잘못 세운 자였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의 자손이요. 바리새파 유대교 신봉자였습니다.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에 간여했고, 외국성까지 다니면서 기독 인들을 박해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의 행동이 잘한 것으로 알 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심하고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름까지 바꾸면 서 푯대를 바로 세울 때에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주의종이 될 수가 있었 습니다. 사도바울은 지난 과거에 얽메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회로 삼아 새 인 생의 길을 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이 하는 일에는 실패가 있기 마련입니다. 원래 인생은 연약합니다. 목표를 잘못세운 그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잘못 세워진 것임을 알고도 바 로 세우지 아니하고, 과거 습성을 되풀이 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는 현실의 중요성을 흐리게 할 뿐 우리 인생의 여로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저 앞을 내다보면서 밝은 미래를 향하여 달려가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 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이왕이면 높은 푯대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들 하는 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별을 보고 활을 쏘다 독수리를 잡는 것이, 독수리를 겨냥하다 돌을 잡는 것보다 났다" 나에게 지금 무엇이 돌아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처음부터 겨 냥했던 목표물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날마다 다짐을 하는 사람은 대통령은 못되도 국무총리 나 장관 한 자리는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동네 이장 반장을 처음부터 꿈꾸고 있는 사람은동네 이장 반장밖에는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좀 더 높은 대망을 품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3:14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저 하늘, 저 높은 곳, 창대한 꿈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 니까 땅의 것, 세속의 것에 미련을 두지 아니하고 저 높은 곳에 우리의 이상을 펼쳐본다는 것은 완벽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위를 바라보고 걷는다는 것은 , 하나님의 이상과 그 진리에 우리의 현실 을 맞추고 개조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 겪는 여러 고난과 천대와 시련은, 훗날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온몸에 짜릿한 감동을 느끼며 헐벗고 매를 맞아도 기쁘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 바울은 세인들의 눈에 가장 멍청하고 답답하고 불쌍한 존재로 보였 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예수님의 후계자요. 모든 기독인의 신앙의 본보기요. 많은 신학자와 설교가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 었습니다. 보다 높은 곳에 꿈과 희망을 두고 그곳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유럽에 대 공항이 휩쓸던 시절, 장차 지상 낙원을 꿈꾸며 가난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한 덴마아크의 그룬트 비히 목사님은 낙심과 실의 에 빠져있는 덴마아크 국민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 먼저 덴마아크 청년들의 가슴을 갈아 업풉시다. 그러면 그들이 덴 마아크의 황무지를 갈아 옥토로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서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호세아서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덴마아크 백성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지금 당장 땅을 갈아 살길을 찾자는데 갑자기 무슨 청년의 가슴을 갈자 니… 미친놈 아니야…" 땅의것, 당장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고 높은 내일을 바라보지 못하는 현실 주의자들은 이렇게 그를 헐 뜯었습니다. 그러나 앞을 내다볼 줄 알았던 그룬트 비히 목사님은 청년의 가슴을 갈아 개조시키는 것이야 말로 나라가 축복받는 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위엣것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을 우리는 선견자라고하고 선구자 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 우리의 꼬라지가 직금은 아무 것도 아니듯 싶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소망을 두고 위를 바라본다면 기필고 승리으; 깃발을 거머 질 것입니다. 욥기서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화평교회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천막교회입니다. 화평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의 소망을 갖고, 높은 이상의 푯대를 향하여 바른 인 생길을 간다면 분명히 창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조그마한 이스라엘에서 기독교의 사상이, 조그마한 아테네에서 헬라 문명이 이룩되었으며. 베니치아 아주 작은 소 도시에서 르네쌍스 문명이 꽃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조그마한 난지도에서 근동에 중심이 되는 교회가 태동할 것임을 믿으 시기 바랍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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