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빌3:12-16)
본문
먼저 우리는 주님께 잡힌 바 된 사람들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내가 주님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님의 손을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안한 일입니다. 안정성이 없습니다. 내가 주님의 손을 잡고 있다면, 오늘은 천당 내일은 지 옥 이렇게 우리는 불안정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고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에 우리의 구원은 안정성이 있고, 우리의 영적 생명은 확고한 것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리무중의 안개 속에서 주님을 잡으려고 헤메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께 잡힌 바된 것을 잡으려 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12절) 세상적인 판단으로 볼때는 '잡혔으면 그냥 수동적으로 따라가면 될 것이고, 잡으려고 좇아가는 사람은 못잡았으니 좇아가겠지' 이 렇게 양극단으로 딱 부러지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이중입니다.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잡혔다고만 생각하면 방종과 오만 나태가 나옵니다. 예전에 고 린도 교회에 그런 풍조가 있었어요. 이제 구원은 따논 당상이고, 우리는 무한 자유를 얻었으니 어떻게 해도 상관 없다 이런 풍조 가 유행을 했드랬습니다. 그래서 우상제물을 마구 먹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누구나 '나는 무슨 일이든 지 할 자유가 있다.'고 말 할 수 잇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해서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고전10:23) 고고한 자유를 얻음 복음의 자유인 바울이지만 자신은 아직 잡 은줄로 여기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13절)" 다 이루었다 다 얻었다고 안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주님을 잡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잡고 계십니다. 잡힌 바 된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협력해 주는 것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잡힌 손을 뿌리 친다거나 항 거하고 몸부림 친다거나 발로 버팅기고 뒷걸음질 친다거나 하는 것은 잡힌 바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와 '아직' 사이를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얻었지만, 주님께 잡힌바는 되었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표는 아직 저 앞에 있습니다. 인격의 변화와 복음의 사역의 목 표는 평생을 달려 가야할 경주입니다.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목표에 다가가는 성화의 길에 서는 출발에 불과합니다. 출발이 전부일 수 없습니다. 복음사역과 이웃사랑의 실천 제자의 길은 먼 길입니다. 주님이 부르신 부름 의 길이 한 없이 펼쳐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어떤 미신의 종교 처럼 복빌고 복주고, 액을 면하게 해주고 신 에게 보답하는 그런 구조가 아닙니다. 미신은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까닭은 위대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까지 자라야 할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즉 일입니다. 목표를 세웁시다.-푯대와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 그리스도인은 목표가 생긴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갖지 못한 분 들에게 왜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사는 거지요. 그럽니다. 좀 시적 인 분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라고 대답합니다. 대 중가요를 좀 좋아하는 분들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어떤 가수 의 '존재이유' 가사를 읊어댈지도 모릅니다. 그냥 열심히 살다가 깨끗하게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가며,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깔끔한 해답없이 그냥 열심 히 삽니다. 그 뒷 일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분 들에게 가치가 없다거나 삶의 고상한 목표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분명한 존재론적인 목표가 흐리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팝송 가운데 젊은이들이 세태를 풍자한 노-바디 (Nobody)라는 노래가 유행한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노래의 가 사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대충 이렇습니다. 대통령감이 있는 가 Nobody. 전쟁을 쉬게 할 사람이 있는가 Nobody. 존경할 사람이 있는가 Nobody. 이 'Nobody'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도대체 믿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신조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No족속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모든 것이 가치가 없고 의미가 없으며 목표도, 초 점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에게로 와서 주님에게로 돌아 간다는 단순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 은 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구두닦이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푯대가 있고 촛점이 있 고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는 목표가 있는,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우리 삶의 존재 이유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주 님 때문에 존재합니다. 이 말을 좀 풀이하면, 주님의 인격과 주님 의 사역을 이어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표요, 가시적인 달성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부름의 상, 눈에 보이는 푯대는 무엇입니까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 푯대가 우리 삶의 가장 엄중한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막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표가 있으면 자신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목표가 있으면 허무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목표와 푯대를 가진 사람은 가 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생은 50이 넘으면 목표가 엷어 집니다. 그저 곱게 늙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생을 마감할 마지막 순간 까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목표가 없어지면 불행해 집니다. 지난번 어떤 분 하고 이야기를 하는 데, 어떤 부인이 한 분 있 었습니다. 30평 아파트 마련할려고 지독하게 내핍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초대를 받아도 초대하는 걸 자제하고, 남들에게 대접을 받아도 입을 닦고 모르는 척 하고 이렇게 억척 스럽게 노 랭이 생활을 해서 드디어 30평 아파트를 한 채 마련했다는 거지 요.
그런데 그 뒤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 때 까지는 30평 아 파트 내 집 마련을 위해 지독하게 달려 왔는 데 막상 그 목표에 도달하고 보니 갑자기 허무해 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통 살맛이 없어지고, 무얼해야 하나 하고 허망하다는 생각 뿐이 라고 합니다. 이렇게 한 순간의 찰나적인 유한한 목표도 그걸 바라보고 달리는 순간은 행복해 지는 게 인간입니다. 확고하게 바라볼 목표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속의 목표는 끊임 없 이 변하고 오래가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자꾸 목표를 바 꿔야 합니다. 사춘기 때는 사랑에, 청년의 시절에는 결혼에,
3,40 대에는 성공,가정,자식,집 장만에 그러다가 덜컥 갱년기가 오고 인생의 황혼이 오면 허망해 집니다. 그렇게 목숨걸고 추구하던 직장도 허망해지고, 자식은 품을 떠나고, 사랑은 식고, 집은 시들 해 지고 갑자기 목표를 잃어 버린 공허감이 몰려 오는 것입니다. 세속의 목표는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의 목표는 한결 같습니다. 움직이거나 변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 복음증거 와 사랑의 사역, 이것이 우리의 움직이지 않는 영원한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영원한 목표, 분명한 푯대를 바라보고 달려 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최고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푯대를 향하여는 ' 푯대를 똑바로 쳐다보고'의 뜻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힘들 때도 있습니다. 거룩한 투쟁이 힘겨울 때도 있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싸움 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훈련이 지겨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푯대를 향해 달리는 사람 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경주를 멈추어도 좋을 정도의 달성은 없는 것입니다. 잠시 쉬어도 좋을 정도의 놀이가 아닙니다. 달리는 자전거가 넘어지기 않듯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 이것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름의 상에 대 해 흐릿하십니까 매력이 없습니까 동기 유발이 안됩니까 나 하고 상관 없는 일입니까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부른 부름의 상을 향해 분명한 목표를 삼읍시다. 아메리칸 인디안의 한 추장이 늙어서 자기의 추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세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고 합니다. 눈 앞에 큰 나무가 있고 그 나무가지에 독수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추장은 맏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맏아 들이 대답합니다. 하늘이 보이고 나무가 보입니다. 추장은 실망하 여 둘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둘째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나무가 보이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독수 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역시 실망한 빛으로 막내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막내아들이 대답했다. 독수리가 보이는데 두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이 마주치는 곳에 독수리의 가슴이 보입니다. 추장은 기쁨으로 외쳤다. 그곳을 쏴라. 막내아 들의 화살은 독수리의 가슴을 명중시켰습니다. 물론 추장은 막 내아들에게 추장의 위를 물려주었습니다. 목적은 사냥인데, 하늘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막연하게 독수 리를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지요. 목적이 사냥이면 화살이 꽂힐 곳 독수리의 가슴 그 과녁을 목표로 확고히 바라봐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 주님이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확고 한 과녁의 목표는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입니다. 수 많은 그리스챤들이 한 몸의 구원, 복과 저주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구원을 이미 주셨고 출발선에 우리를 서게 하셨으니, 이제는 골인의 목표 지점을 향해 눈을 고정 시켜 야 합니다. 목표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 시기 바랍니다. 푯대를 언제나 잃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 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목표와 푯대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일 이 필요합니다. 이 경주를 포기하거나 주저하거나 게을리 하거나 철회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은 영광스런 월계관을 받으러 계단을 오르는 모습입니다.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이런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달립시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13절)" 바울이 이런 말을 할 때에 과거의 믿음의 고백과 구원의 감격 까지 다 잊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경주하는 자는 앞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경주하는 자가 뒤를 바라 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여기서 12절 14절에 '좇아 가노라'(디오코)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이 말의 뜻은 '추적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냥이냐 달리기 경주 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사냥할 때 어슬렁거리면서 가는 사람이 없지요 달리기 경주를 하는 데 쉬엄 쉬엄 뛸 수는 없 지요. 있는 힘을 다해 집중적으로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집중적으로 추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격을 추 적합니다. 주님의 사역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의 엄청난 사건, 주님을 직접 만나는 사건에 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1차전도 여행의 어려움에도 묻혀 있지 않습니다.
2,3차 전도 여행의 업적에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지금 빌립보서를 쓰는 감옥의 상황에도 메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갑니다. 어제와 과거는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잊어 버려야 합니다.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또 최선을 다 해 달려야 할 과제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화려함도 과거의 실 패도 잊어 버려야 합니다. 주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앞 을 바라보고 끊임 없이 전진할 뿐입니다. 여름이든 가을이든 성경공부든 제자훈련이든 오늘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꾸준히 달 릴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런 고백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 켰으니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 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 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이런 축복이 여러분에게 모두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12절) 세상적인 판단으로 볼때는 '잡혔으면 그냥 수동적으로 따라가면 될 것이고, 잡으려고 좇아가는 사람은 못잡았으니 좇아가겠지' 이 렇게 양극단으로 딱 부러지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이중입니다.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잡혔다고만 생각하면 방종과 오만 나태가 나옵니다. 예전에 고 린도 교회에 그런 풍조가 있었어요. 이제 구원은 따논 당상이고, 우리는 무한 자유를 얻었으니 어떻게 해도 상관 없다 이런 풍조 가 유행을 했드랬습니다. 그래서 우상제물을 마구 먹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누구나 '나는 무슨 일이든 지 할 자유가 있다.'고 말 할 수 잇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해서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고전10:23) 고고한 자유를 얻음 복음의 자유인 바울이지만 자신은 아직 잡 은줄로 여기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13절)" 다 이루었다 다 얻었다고 안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주님을 잡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잡고 계십니다. 잡힌 바 된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협력해 주는 것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잡힌 손을 뿌리 친다거나 항 거하고 몸부림 친다거나 발로 버팅기고 뒷걸음질 친다거나 하는 것은 잡힌 바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와 '아직' 사이를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얻었지만, 주님께 잡힌바는 되었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표는 아직 저 앞에 있습니다. 인격의 변화와 복음의 사역의 목 표는 평생을 달려 가야할 경주입니다.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목표에 다가가는 성화의 길에 서는 출발에 불과합니다. 출발이 전부일 수 없습니다. 복음사역과 이웃사랑의 실천 제자의 길은 먼 길입니다. 주님이 부르신 부름 의 길이 한 없이 펼쳐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어떤 미신의 종교 처럼 복빌고 복주고, 액을 면하게 해주고 신 에게 보답하는 그런 구조가 아닙니다. 미신은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까닭은 위대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까지 자라야 할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즉 일입니다. 목표를 세웁시다.-푯대와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 그리스도인은 목표가 생긴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갖지 못한 분 들에게 왜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사는 거지요. 그럽니다. 좀 시적 인 분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라고 대답합니다. 대 중가요를 좀 좋아하는 분들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어떤 가수 의 '존재이유' 가사를 읊어댈지도 모릅니다. 그냥 열심히 살다가 깨끗하게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가며,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깔끔한 해답없이 그냥 열심 히 삽니다. 그 뒷 일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분 들에게 가치가 없다거나 삶의 고상한 목표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분명한 존재론적인 목표가 흐리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팝송 가운데 젊은이들이 세태를 풍자한 노-바디 (Nobody)라는 노래가 유행한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노래의 가 사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대충 이렇습니다. 대통령감이 있는 가 Nobody. 전쟁을 쉬게 할 사람이 있는가 Nobody. 존경할 사람이 있는가 Nobody. 이 'Nobody'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도대체 믿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신조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No족속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모든 것이 가치가 없고 의미가 없으며 목표도, 초 점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에게로 와서 주님에게로 돌아 간다는 단순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 은 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구두닦이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푯대가 있고 촛점이 있 고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는 목표가 있는,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우리 삶의 존재 이유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주 님 때문에 존재합니다. 이 말을 좀 풀이하면, 주님의 인격과 주님 의 사역을 이어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표요, 가시적인 달성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부름의 상, 눈에 보이는 푯대는 무엇입니까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 푯대가 우리 삶의 가장 엄중한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막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표가 있으면 자신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목표가 있으면 허무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목표와 푯대를 가진 사람은 가 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생은 50이 넘으면 목표가 엷어 집니다. 그저 곱게 늙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생을 마감할 마지막 순간 까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목표가 없어지면 불행해 집니다. 지난번 어떤 분 하고 이야기를 하는 데, 어떤 부인이 한 분 있 었습니다. 30평 아파트 마련할려고 지독하게 내핍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초대를 받아도 초대하는 걸 자제하고, 남들에게 대접을 받아도 입을 닦고 모르는 척 하고 이렇게 억척 스럽게 노 랭이 생활을 해서 드디어 30평 아파트를 한 채 마련했다는 거지 요.
그런데 그 뒤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 때 까지는 30평 아 파트 내 집 마련을 위해 지독하게 달려 왔는 데 막상 그 목표에 도달하고 보니 갑자기 허무해 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통 살맛이 없어지고, 무얼해야 하나 하고 허망하다는 생각 뿐이 라고 합니다. 이렇게 한 순간의 찰나적인 유한한 목표도 그걸 바라보고 달리는 순간은 행복해 지는 게 인간입니다. 확고하게 바라볼 목표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속의 목표는 끊임 없 이 변하고 오래가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자꾸 목표를 바 꿔야 합니다. 사춘기 때는 사랑에, 청년의 시절에는 결혼에,
3,40 대에는 성공,가정,자식,집 장만에 그러다가 덜컥 갱년기가 오고 인생의 황혼이 오면 허망해 집니다. 그렇게 목숨걸고 추구하던 직장도 허망해지고, 자식은 품을 떠나고, 사랑은 식고, 집은 시들 해 지고 갑자기 목표를 잃어 버린 공허감이 몰려 오는 것입니다. 세속의 목표는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의 목표는 한결 같습니다. 움직이거나 변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 복음증거 와 사랑의 사역, 이것이 우리의 움직이지 않는 영원한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영원한 목표, 분명한 푯대를 바라보고 달려 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최고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푯대를 향하여는 ' 푯대를 똑바로 쳐다보고'의 뜻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힘들 때도 있습니다. 거룩한 투쟁이 힘겨울 때도 있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싸움 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훈련이 지겨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푯대를 향해 달리는 사람 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경주를 멈추어도 좋을 정도의 달성은 없는 것입니다. 잠시 쉬어도 좋을 정도의 놀이가 아닙니다. 달리는 자전거가 넘어지기 않듯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 이것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름의 상에 대 해 흐릿하십니까 매력이 없습니까 동기 유발이 안됩니까 나 하고 상관 없는 일입니까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부른 부름의 상을 향해 분명한 목표를 삼읍시다. 아메리칸 인디안의 한 추장이 늙어서 자기의 추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세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고 합니다. 눈 앞에 큰 나무가 있고 그 나무가지에 독수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추장은 맏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맏아 들이 대답합니다. 하늘이 보이고 나무가 보입니다. 추장은 실망하 여 둘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둘째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나무가 보이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독수 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역시 실망한 빛으로 막내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막내아들이 대답했다. 독수리가 보이는데 두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이 마주치는 곳에 독수리의 가슴이 보입니다. 추장은 기쁨으로 외쳤다. 그곳을 쏴라. 막내아 들의 화살은 독수리의 가슴을 명중시켰습니다. 물론 추장은 막 내아들에게 추장의 위를 물려주었습니다. 목적은 사냥인데, 하늘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막연하게 독수 리를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지요. 목적이 사냥이면 화살이 꽂힐 곳 독수리의 가슴 그 과녁을 목표로 확고히 바라봐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 주님이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확고 한 과녁의 목표는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입니다. 수 많은 그리스챤들이 한 몸의 구원, 복과 저주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구원을 이미 주셨고 출발선에 우리를 서게 하셨으니, 이제는 골인의 목표 지점을 향해 눈을 고정 시켜 야 합니다. 목표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 시기 바랍니다. 푯대를 언제나 잃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 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목표와 푯대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일 이 필요합니다. 이 경주를 포기하거나 주저하거나 게을리 하거나 철회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은 영광스런 월계관을 받으러 계단을 오르는 모습입니다.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이런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달립시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13절)" 바울이 이런 말을 할 때에 과거의 믿음의 고백과 구원의 감격 까지 다 잊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경주하는 자는 앞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경주하는 자가 뒤를 바라 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여기서 12절 14절에 '좇아 가노라'(디오코)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이 말의 뜻은 '추적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냥이냐 달리기 경주 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사냥할 때 어슬렁거리면서 가는 사람이 없지요 달리기 경주를 하는 데 쉬엄 쉬엄 뛸 수는 없 지요. 있는 힘을 다해 집중적으로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집중적으로 추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격을 추 적합니다. 주님의 사역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의 엄청난 사건, 주님을 직접 만나는 사건에 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1차전도 여행의 어려움에도 묻혀 있지 않습니다.
2,3차 전도 여행의 업적에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지금 빌립보서를 쓰는 감옥의 상황에도 메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갑니다. 어제와 과거는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잊어 버려야 합니다.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또 최선을 다 해 달려야 할 과제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화려함도 과거의 실 패도 잊어 버려야 합니다. 주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앞 을 바라보고 끊임 없이 전진할 뿐입니다. 여름이든 가을이든 성경공부든 제자훈련이든 오늘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꾸준히 달 릴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런 고백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 켰으니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 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 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이런 축복이 여러분에게 모두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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