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지대에 사는 사람 (빌4:11-13)
본문
사상가 신영복님이 쓴 국토기행문인 '나무야 나무야' 라는 책에 보면 참으로 가슴에 깊이깊이 새겨둘만한 이런 소중한 글귀가 눈길을 멈추게 합니다. "북극 을 가리키는 나침판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 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나침판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 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 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나침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침판이라는 한 물체가 이리도 생의 모양새를 잘 드러내 줄까, 아니 어쩌면 한 물체로부터 우리 실존의 의미를 이리도 잘 추적해 낼 수 있을까 참 으로 감탄을 자아내게하는 그런 글귀였습니다. 인간이 어찌 인간입니까 살아 있고, 꿈틀대고, 움직임으로서 인간일 것입니다. 인간은 목석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시계가 양쪽으로 오감으로서 시계인 것처럼 이리 저리 흔들린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때로는 왼쪽 으로 쏠려보기도 하고, 때로는 오른쪽으로 쏠려 보기도 하면서 이런 저런 일들 을 겪는 중에 서서히 자기 생의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의 고민이란게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자리에 대한 고민'일 것입니다. 가장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행여 회사의 내 자리가 치워져 있지 않나를 걱 정하게 되고, 아내는 집안의 살림살이, 먹거리가 제대로 채워져 있나를 걱정하 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삶을 영위해 나가는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직장 이라는 자리를 붙들고 있으면 풍요의 가능성으로 기울지만, 직장을 잃으면 궁핍 의 가능성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배부름과 배고픔이 바로 거기에 직결되어 있기 에 우리는 이 경제위기 시대에 무엇보다도 생업의 자리에 절박한 심정을 갖게되는 것 입니다. 몸을 가진 사람으로서 우리의 일생에 기본을 차지하고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풍부와 궁핍, 배부름과 배고픔이라는 양극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 입니다. '궁핍과 배고픔의 자리로부터 풍부와 배부름으로 자리로의 나아감', 이 것이 몸을 가진 인간들의 한결같은 삶의 방향입니다. 그러기에 이 두 자리는 우리가 가장 희망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우리가 가장 절망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양극 사이에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인생을 배워가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의 몸부림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그 두 자리 모 두가 몸과 함께 영혼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고민이 있고 숙제가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함으 로 내 실존이 만족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배부름도 잠 시, 다시 꺼져가는 배를 채워야 하는 것이 인생이요, 풍요함도 잠시,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인생의 궁극적인 덕 의 절정은 '자족,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되었고, 그 절정이 바로 바울 당시에 만개했던 스토아 철학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에 정신적 지주를 이루었던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지 혜로운 사람이란 고통과 쾌락, 부와 가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등에 대 해 전혀 무관심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바깥의 모든 변화무쌍한 것 에 대해 조금도 동요를 받지 않고 사는 그런 사람을 저들은 현자로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그 당시 철학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지혜자는 무엇보다도 스스 로 만족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모습 역시 스토아주의 의 현자라해도 무방할만큼 '스스로 만족한 삶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또한 '어떠한 처지에 처하게 되더라도 자족하는 비결을 터득했 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자족 개념'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족 개념'과는 근본 적으로 궤를 달리 합니다.
그가 '자족하는 비결을 터득했다'고 말한다 해서 스 토아 철학자들처럼 저 스스로 차 있는 상태나 무언가를 다 이루었다는 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또 완전주의자로 자처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3:12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또 이미 완전해졌다함도 아니'라고 겸허히 자기 현실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의 자족이란 어떤 것이고, 그 자족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얼핏 보면 가난과 비천에서도, 풍요와 높음에서도 똑같이 만족할 줄 아는 바울은 마 치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보입니다. 그 두 자리의 다름만큼이나 너무도 상반된 반응을 쉬이 보이곤 하는 우리로서는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게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도 만족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배부를 때, 풍부 할 때, 기쁘고 즐거울 때, 고난이 없고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을 때입니다. 궁 핍했을 때, 비천에 처했을 때, 곤경에 빠졌을 때, 실패했을 때도 여전히 자족 하며 자기됨과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살아가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절반의 성공만을 거둔 인생'을 대부분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은 곧 '절반은 실패하는 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되는 것입니다. 또 보면 한 쪽 자리에는 익숙한데 다른 한 쪽 자리에는 낮선 경우도 없지 않 습니다. 어떤 사람은 낮고 비천하게 살 줄 알고 그러한 삶에 익숙하면서도 부 요한 삶에는 익숙치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권세를 갖고 풍요하게 사는데는 익숙한데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는 언제나 생소해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 연 서로를 이해하질 못합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힘있는 자는 힘없는 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힘없는 자는 힘있는 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배운 자는 배우지 못한 자를 이 해하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자는 배운 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갈등과 오해가 생겨나고 심지어 서로 반목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게 자연 인들이 무리지어 사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속성이 결국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질시킬까요 이런 안목으로 살아 가다 보면 비천한 처지로부터 부요하고 영화로운 자리를 누리게 되거나, 반대 로 부와 풍요의 자리로부터 비천한 자리로 전락하게 되거나 하면 쉽게 자기됨 에 혼선을 빚고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인간의 약함과 더불어 추한 모습이 드러나고 맙니다. 사람은 굶주림으로부터 삶을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부름으로부터 도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이 두 가지 수단을 모두 이용합니다. 배부름과 풍요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 없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궁핍과 비천의 자리에 떨어졌다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사탄은 굶주림과 풍요라는 이 두 자리에 올가미를 놓고 인생을 걸어 쓰러뜨 리고 좌절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아굴은 그렇 게 기도했던게 아닙니까 '하나님이여 제가 주께 구하오니 죽기 전에 주시옵소 서.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 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정말 이 기도를 드리는 아굴이라는 사람은 인생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인생의 양극자리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풍요'와 '궁핍'의 양극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생의 적나라한 실체 를 보게 되고 신앙의 본질을 만나게 됩니다. 존재로서 살아왔는지, 소유로서 살아왔는지가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이 '풍요라는 제 1지대'와 '궁핍이라는 제 2지대'인 것입니다. 알맹이로서 살아왔는가, 껍질로서 살아왔는가가 바로 그 '배부름의 자리'와 '배고픔의 자리'에서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이런 저런 이유로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떠나는 인생들이 많을 것입니다. 직장을 잃었기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교회 못나오겠다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반대로 돈많이 벌어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치 않 아 교회 안나오겠다는 사람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제1지 대와 제2지대가 모든 것인 줄 알고 사는 인생들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러한 세속성에 물들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양극을 하나같이 똑같이 아우르 고 수용하며 살았습니다.
풍요의 현실에서도 마치 가지지 않은 자처럼 살 수 있었고, 비천한 형편에서도 가진 자와 다름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 임수도 아니었고 위선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어떤 경우에도 자기됨 의 저력을 잃지 않는 의연한 모습, 어떤 처지에서도 자기의 정체성을 이그러뜨 리지 않는 삶의 깊이를 보게 됩니다. 마치 표면엔 산처럼 큰 파도가 일어도 밑 바닥은 고요하기 그지없는 바다처럼 그 어떤 희비가 교차되는 경우에도, 그 어떤 반전이 일어나는 처지에서도 그 흔들림에 적절히 대처하는 중심고인 삶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나침반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 거나, 존귀에 처해지거나 비천에 처해지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졌노라'는 사도의 이 당당한 고백은 무엇으로 가능했을까요 실로 물질의 결여는 우리의 삶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고프거나 궁핍에 이 르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물질이 풍성하기만 하면 영혼의 문제까지 해결지을 수 있다고 믿는 유물주의에 우리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이 고백을 통해서 천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크게 주목 하는 물량의 유무, 지위의 고하, 세력의 강약, 경쟁의 성패 등은 그 절대성을 잃고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인생에 있어 절대적인 것처 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절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머리로서는 알아도 삶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명제입니다. 배고픔과 궁핍의 자리를 현 실적으로 수용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수용하는 삶을 살았노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일체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저가 단순히 풍부의 자리와 궁핍의 자리, 배부름의 자리와 배고픔의 자리, 그 두 양극만이 아닌 그 밖의 제3의 거점에 머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한 그 제 3의 자리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었습니다. 그 분의 자리가 그러한 삶의 비결을 그에게 제공했 던 것입니다. 사도는 14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 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제 여기서 바울의 자족의 정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의 자족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자족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족'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써,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 께 소유 당함으로써 가지는 만족이었습니다. 이 14절을 보기 전 13절까지 만을 보면 바울의 말은 스토아 철학의 교훈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1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족'을 말함으로써 저는 스토아주의와 결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유를 누리는 삶의 새 로운 지평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희망해야 할 궁극적 자리는 풍부의 자리도, 궁핍의 자리도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그 양극 사이를 오가며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러나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는 그 두 자리만이 아니라 바로 이 바울이 머물렀던 제 3지대인 '그리스도 안'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우리 역시 바울처럼 자족의 비결을 터득한 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거할 때 우리는 부유하게 되어도, 권세를 가졌어도, 학문이 높고 유리한 인간적 조건을 구비했어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분의 뜻을 따라 사나 죽으나 그분의 것으로 겸손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또 반대로 가 장 비천한 자리, 가난과 병고의 역경 속에서도, 억울하게 억눌림을 당하는 아 픔과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종으로 의연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전인적인 인생의 모습입니다. 사실 그 어느 한편의 조건 하에서만 그리스도의 종된 삶을 이루어간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그리스도인 상은 아닙니다. '어떠한 형편이든지.' 이게 중 요합니다. 사람은 풍부에 처해 보기도 하고, 궁핍에 처해 보기도 해야 인생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인생의 양극을 다 경험했습니다. 그러 면서 절망하거나 우쭐댄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처지에도 겸손과 의연함으로 적 절히 대응하며 사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 럼 살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이런 자유함이 일어나는 자 리가 바로 '그리스도 안'인 것입니다. 이 '제 3지대'를 꼭 가지시고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자리에 머물므 로서 궁핍과 풍요라는 땅의 자리를 넘어서서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자리를 살 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로 그 어떤 세상의 자리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힘을 부여해 주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그리스도교도인 관광객이 유대사원의 예배의식을 참관하 고는 유대인에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엄숙하고 좋군요.
그런데 가만 보니 기도할 때 모세의 이름이 나올 적마다 신도들이 무어라고 투덜거리던데 전 그 곡 절을 모르겠군요. 모세는 유대교의 예언자로서 존경받는 인물일텐데요." 그 러자 유대인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천만에요, 그 사람 인기 요새 땅에 떨어졌어요. 그 자가 안내해 준 덕분에 우리 유대인은 오렌지 가 잘 되는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석유가 나오는 땅이 더 낫 지 않아요." 앉아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는 중동의 다른 국가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저 들로 이런 우스개 소리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스라엘은 중동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석유가 나오지 않는 나라입니다. 바로 곁의 이란이나 이라 크,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석유가 펑펑 쏟아져도 이스라엘에는 석유가 나질 않 습니다. 뿐만 아니라 토질은 척박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지금 그 땅에서 그만한 풍요를 누리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본 래부터 저들에게 주어진 가나안 땅이 비옥하고 기름지고 풍요로웠기 때문이었 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 땅은 '불모의 땅', 박토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신 앙이라는 제 3지대에 거했기에 저들은 그 땅을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꿔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지가 주는 의미가 참으로 깊습니다. 이스라엘 땅을 객 관적으로 평가한다면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도 아니요, 그렇다 고 '전혀 몹쓸 불모의 땅'도 아닌 그 중간에 해당하는 땅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묘한 뜻이 있습니다. 산악지방이나 광야를 보면 도저 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안 평야나 갈릴 리 저지대, 요단강을 따라 펼쳐진 강변의 비옥한 땅들을 보면 어느 정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수식어도 어울린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땅, 축복의 땅이라 할 수도 있고, 저주의 땅 이라 할 수도 있는 땅이 팔레스틴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 땅을 믿음으로 일 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들었고 또 지금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성지가 우리에게 묵묵히 말하고 있는 것을 명심하 시기 바랍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애초에 그 땅 그 어디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자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자리를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 없는 자리는 어디든 그리스도인이 머물러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롯이 눈을 들어 바라다 본 소돔 땅은 '에덴 동산 같았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러나 저가 신앙 안에 거하지 아니했을 때 그 아름다운 땅 은 쏟아지는 유황불에 파묻혀 흉한 몰골의 저주받은 도시로 변하고 말았던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풍부의 자리도, 그 어떤 궁핍의 자리도 그리스도인이 거하는 궁극적 자리는 아닙니다. 석유가 분출하여 오일 달러가 쏟아 진다해서 그 풍요의 땅 기름진 중동이 하늘백성들이 머물러야 할 자리는 아니 었습니다. 또한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거침없이 쏟아지는 그 궁핍의 땅 박토 가나안도 하늘백성이 머물러야 할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한게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 안에 거할 때 저들은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시켜 그것을 누리 며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 3의 자리, 바로 신앙의 자리입니다. 이 제 3지대가 바로 하 늘백성인 우리들이 머물러야 할 자리입니다. 주님은 요8:31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이 머무는 곳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은총의 자리입니다. 삶의 윤기는 바로 거기서부터 나옴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풍부함 은 바로 거기서 맛볼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착각하지 마시 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 윤기를 더해주는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권세가 아닙니다. 세상의 그 어떤 힘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로 하여금 삶을 윤기나게 하고 활력있게 한 것은 '가난하다-부요하다', '배부르다-배고프다'는 구체적인 경제 형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이라는 신앙의 자리'였습니다.
사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지한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닌 믿음으로부터 퍼올려진 그리스도의 힘이 자신의 자기됨을 지탱시켜 준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울처럼 어느 경우에도 자족하며 살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 라는 제 3지대에 머물러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 면 그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유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생의 비결을 우리가 체득해야 합니다. 영국 역사에 있어 존경받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크롬웰이 가장 사랑하던 맏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는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하는 일 모두가 손에 잡히 질 않았습니다. 큰 낙심 중에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오늘 본문 말씀을 대했습니다.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 라.' 크롬웰은 이 대목을 천천히 읽어가면서 나도 이런 비결을 배웠으면 얼 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13절에 와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에 접하는 순간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렇다, 사도바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아 닌가.'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느 자리에 머물며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이라는 제3지대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풍요와 궁핍, 배부 름과 배고픔이라는 양극자리에 쏠리고 있습니까 나침반은 그 끝이 흔들리지만 어느 한 쪽에도 쏠리지 않습니다. 그 바늘 끝은 언제나 북쪽이라는 제 3지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주님이 계신 자리를 향해야 합니다. 그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이건 저절로 되는게 아니라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경제위기 시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로 이 신앙의 절정을 배우라는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이제 이 경제위기라는 비바람과 창수 속에서 이 자족의 비결을 터득하는 자만이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개의치 않고 그 나라에 들 어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비바람에 무너져 내리는 신앙이라면 그 신앙은 마지막 날 아무 쓸모없는 신앙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시 한번 사도의 귀한 고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나는 내 처지에 관한 한 자족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가난할 줄 압니다. 나는 부요할 줄 압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그리고 모든 경우에 나는 통달하고 있습니다. 배부른 것 과 배고픈 것, 풍요한 것과 궁핍한 것, 나를 강하게 만드시는 분 안에서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고백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진솔한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희를 자녀삼으시사 주님의 아들 딸로 사랑해주시는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지난 한 주간도 그리스도 안이라는 자리를 잃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만 착념하며 살아온 인생들이 이 시간 주님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면 풍부하면 풍부한대로, 궁핍하면 궁핍한대로 원망과 불평이 반복되었던 불만의 연속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못할 때 결코 자족할 수 없는 저희 생의 실체를 이 시간 깨우쳐 주셨사오니 주 님 안에 거하는 저희 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강권하시고 사로잡으 시사 주님 안에 머물며 자족하는 인생을 가꿔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왜냐하면 그것들은 삶을 영위해 나가는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직장 이라는 자리를 붙들고 있으면 풍요의 가능성으로 기울지만, 직장을 잃으면 궁핍 의 가능성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배부름과 배고픔이 바로 거기에 직결되어 있기 에 우리는 이 경제위기 시대에 무엇보다도 생업의 자리에 절박한 심정을 갖게되는 것 입니다. 몸을 가진 사람으로서 우리의 일생에 기본을 차지하고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풍부와 궁핍, 배부름과 배고픔이라는 양극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 입니다. '궁핍과 배고픔의 자리로부터 풍부와 배부름으로 자리로의 나아감', 이 것이 몸을 가진 인간들의 한결같은 삶의 방향입니다. 그러기에 이 두 자리는 우리가 가장 희망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우리가 가장 절망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양극 사이에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인생을 배워가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의 몸부림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그 두 자리 모 두가 몸과 함께 영혼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고민이 있고 숙제가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함으 로 내 실존이 만족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배부름도 잠 시, 다시 꺼져가는 배를 채워야 하는 것이 인생이요, 풍요함도 잠시,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인생의 궁극적인 덕 의 절정은 '자족,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되었고, 그 절정이 바로 바울 당시에 만개했던 스토아 철학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에 정신적 지주를 이루었던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지 혜로운 사람이란 고통과 쾌락, 부와 가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등에 대 해 전혀 무관심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바깥의 모든 변화무쌍한 것 에 대해 조금도 동요를 받지 않고 사는 그런 사람을 저들은 현자로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그 당시 철학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지혜자는 무엇보다도 스스 로 만족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모습 역시 스토아주의 의 현자라해도 무방할만큼 '스스로 만족한 삶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또한 '어떠한 처지에 처하게 되더라도 자족하는 비결을 터득했 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자족 개념'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족 개념'과는 근본 적으로 궤를 달리 합니다.
그가 '자족하는 비결을 터득했다'고 말한다 해서 스 토아 철학자들처럼 저 스스로 차 있는 상태나 무언가를 다 이루었다는 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또 완전주의자로 자처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3:12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또 이미 완전해졌다함도 아니'라고 겸허히 자기 현실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의 자족이란 어떤 것이고, 그 자족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얼핏 보면 가난과 비천에서도, 풍요와 높음에서도 똑같이 만족할 줄 아는 바울은 마 치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보입니다. 그 두 자리의 다름만큼이나 너무도 상반된 반응을 쉬이 보이곤 하는 우리로서는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게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도 만족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배부를 때, 풍부 할 때, 기쁘고 즐거울 때, 고난이 없고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을 때입니다. 궁 핍했을 때, 비천에 처했을 때, 곤경에 빠졌을 때, 실패했을 때도 여전히 자족 하며 자기됨과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살아가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절반의 성공만을 거둔 인생'을 대부분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은 곧 '절반은 실패하는 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되는 것입니다. 또 보면 한 쪽 자리에는 익숙한데 다른 한 쪽 자리에는 낮선 경우도 없지 않 습니다. 어떤 사람은 낮고 비천하게 살 줄 알고 그러한 삶에 익숙하면서도 부 요한 삶에는 익숙치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권세를 갖고 풍요하게 사는데는 익숙한데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는 언제나 생소해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 연 서로를 이해하질 못합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힘있는 자는 힘없는 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힘없는 자는 힘있는 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배운 자는 배우지 못한 자를 이 해하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자는 배운 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갈등과 오해가 생겨나고 심지어 서로 반목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게 자연 인들이 무리지어 사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속성이 결국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질시킬까요 이런 안목으로 살아 가다 보면 비천한 처지로부터 부요하고 영화로운 자리를 누리게 되거나, 반대 로 부와 풍요의 자리로부터 비천한 자리로 전락하게 되거나 하면 쉽게 자기됨 에 혼선을 빚고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인간의 약함과 더불어 추한 모습이 드러나고 맙니다. 사람은 굶주림으로부터 삶을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부름으로부터 도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이 두 가지 수단을 모두 이용합니다. 배부름과 풍요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 없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궁핍과 비천의 자리에 떨어졌다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사탄은 굶주림과 풍요라는 이 두 자리에 올가미를 놓고 인생을 걸어 쓰러뜨 리고 좌절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아굴은 그렇 게 기도했던게 아닙니까 '하나님이여 제가 주께 구하오니 죽기 전에 주시옵소 서.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 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정말 이 기도를 드리는 아굴이라는 사람은 인생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인생의 양극자리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풍요'와 '궁핍'의 양극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생의 적나라한 실체 를 보게 되고 신앙의 본질을 만나게 됩니다. 존재로서 살아왔는지, 소유로서 살아왔는지가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이 '풍요라는 제 1지대'와 '궁핍이라는 제 2지대'인 것입니다. 알맹이로서 살아왔는가, 껍질로서 살아왔는가가 바로 그 '배부름의 자리'와 '배고픔의 자리'에서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이런 저런 이유로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떠나는 인생들이 많을 것입니다. 직장을 잃었기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교회 못나오겠다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반대로 돈많이 벌어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치 않 아 교회 안나오겠다는 사람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제1지 대와 제2지대가 모든 것인 줄 알고 사는 인생들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러한 세속성에 물들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양극을 하나같이 똑같이 아우르 고 수용하며 살았습니다.
풍요의 현실에서도 마치 가지지 않은 자처럼 살 수 있었고, 비천한 형편에서도 가진 자와 다름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 임수도 아니었고 위선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어떤 경우에도 자기됨 의 저력을 잃지 않는 의연한 모습, 어떤 처지에서도 자기의 정체성을 이그러뜨 리지 않는 삶의 깊이를 보게 됩니다. 마치 표면엔 산처럼 큰 파도가 일어도 밑 바닥은 고요하기 그지없는 바다처럼 그 어떤 희비가 교차되는 경우에도, 그 어떤 반전이 일어나는 처지에서도 그 흔들림에 적절히 대처하는 중심고인 삶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나침반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 거나, 존귀에 처해지거나 비천에 처해지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졌노라'는 사도의 이 당당한 고백은 무엇으로 가능했을까요 실로 물질의 결여는 우리의 삶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고프거나 궁핍에 이 르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물질이 풍성하기만 하면 영혼의 문제까지 해결지을 수 있다고 믿는 유물주의에 우리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이 고백을 통해서 천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크게 주목 하는 물량의 유무, 지위의 고하, 세력의 강약, 경쟁의 성패 등은 그 절대성을 잃고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인생에 있어 절대적인 것처 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절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머리로서는 알아도 삶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명제입니다. 배고픔과 궁핍의 자리를 현 실적으로 수용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수용하는 삶을 살았노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일체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저가 단순히 풍부의 자리와 궁핍의 자리, 배부름의 자리와 배고픔의 자리, 그 두 양극만이 아닌 그 밖의 제3의 거점에 머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한 그 제 3의 자리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었습니다. 그 분의 자리가 그러한 삶의 비결을 그에게 제공했 던 것입니다. 사도는 14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 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제 여기서 바울의 자족의 정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의 자족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자족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족'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써,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 께 소유 당함으로써 가지는 만족이었습니다. 이 14절을 보기 전 13절까지 만을 보면 바울의 말은 스토아 철학의 교훈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1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족'을 말함으로써 저는 스토아주의와 결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유를 누리는 삶의 새 로운 지평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희망해야 할 궁극적 자리는 풍부의 자리도, 궁핍의 자리도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그 양극 사이를 오가며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러나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는 그 두 자리만이 아니라 바로 이 바울이 머물렀던 제 3지대인 '그리스도 안'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우리 역시 바울처럼 자족의 비결을 터득한 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거할 때 우리는 부유하게 되어도, 권세를 가졌어도, 학문이 높고 유리한 인간적 조건을 구비했어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분의 뜻을 따라 사나 죽으나 그분의 것으로 겸손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또 반대로 가 장 비천한 자리, 가난과 병고의 역경 속에서도, 억울하게 억눌림을 당하는 아 픔과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종으로 의연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전인적인 인생의 모습입니다. 사실 그 어느 한편의 조건 하에서만 그리스도의 종된 삶을 이루어간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그리스도인 상은 아닙니다. '어떠한 형편이든지.' 이게 중 요합니다. 사람은 풍부에 처해 보기도 하고, 궁핍에 처해 보기도 해야 인생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인생의 양극을 다 경험했습니다. 그러 면서 절망하거나 우쭐댄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처지에도 겸손과 의연함으로 적 절히 대응하며 사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 럼 살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이런 자유함이 일어나는 자 리가 바로 '그리스도 안'인 것입니다. 이 '제 3지대'를 꼭 가지시고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자리에 머물므 로서 궁핍과 풍요라는 땅의 자리를 넘어서서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자리를 살 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로 그 어떤 세상의 자리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힘을 부여해 주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그리스도교도인 관광객이 유대사원의 예배의식을 참관하 고는 유대인에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엄숙하고 좋군요.
그런데 가만 보니 기도할 때 모세의 이름이 나올 적마다 신도들이 무어라고 투덜거리던데 전 그 곡 절을 모르겠군요. 모세는 유대교의 예언자로서 존경받는 인물일텐데요." 그 러자 유대인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천만에요, 그 사람 인기 요새 땅에 떨어졌어요. 그 자가 안내해 준 덕분에 우리 유대인은 오렌지 가 잘 되는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석유가 나오는 땅이 더 낫 지 않아요." 앉아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는 중동의 다른 국가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저 들로 이런 우스개 소리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스라엘은 중동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석유가 나오지 않는 나라입니다. 바로 곁의 이란이나 이라 크,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석유가 펑펑 쏟아져도 이스라엘에는 석유가 나질 않 습니다. 뿐만 아니라 토질은 척박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지금 그 땅에서 그만한 풍요를 누리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본 래부터 저들에게 주어진 가나안 땅이 비옥하고 기름지고 풍요로웠기 때문이었 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 땅은 '불모의 땅', 박토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신 앙이라는 제 3지대에 거했기에 저들은 그 땅을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꿔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지가 주는 의미가 참으로 깊습니다. 이스라엘 땅을 객 관적으로 평가한다면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도 아니요, 그렇다 고 '전혀 몹쓸 불모의 땅'도 아닌 그 중간에 해당하는 땅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묘한 뜻이 있습니다. 산악지방이나 광야를 보면 도저 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안 평야나 갈릴 리 저지대, 요단강을 따라 펼쳐진 강변의 비옥한 땅들을 보면 어느 정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수식어도 어울린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땅, 축복의 땅이라 할 수도 있고, 저주의 땅 이라 할 수도 있는 땅이 팔레스틴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 땅을 믿음으로 일 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들었고 또 지금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성지가 우리에게 묵묵히 말하고 있는 것을 명심하 시기 바랍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애초에 그 땅 그 어디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자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자리를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 없는 자리는 어디든 그리스도인이 머물러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롯이 눈을 들어 바라다 본 소돔 땅은 '에덴 동산 같았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러나 저가 신앙 안에 거하지 아니했을 때 그 아름다운 땅 은 쏟아지는 유황불에 파묻혀 흉한 몰골의 저주받은 도시로 변하고 말았던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풍부의 자리도, 그 어떤 궁핍의 자리도 그리스도인이 거하는 궁극적 자리는 아닙니다. 석유가 분출하여 오일 달러가 쏟아 진다해서 그 풍요의 땅 기름진 중동이 하늘백성들이 머물러야 할 자리는 아니 었습니다. 또한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거침없이 쏟아지는 그 궁핍의 땅 박토 가나안도 하늘백성이 머물러야 할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한게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 안에 거할 때 저들은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시켜 그것을 누리 며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 3의 자리, 바로 신앙의 자리입니다. 이 제 3지대가 바로 하 늘백성인 우리들이 머물러야 할 자리입니다. 주님은 요8:31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이 머무는 곳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은총의 자리입니다. 삶의 윤기는 바로 거기서부터 나옴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풍부함 은 바로 거기서 맛볼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착각하지 마시 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 윤기를 더해주는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권세가 아닙니다. 세상의 그 어떤 힘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로 하여금 삶을 윤기나게 하고 활력있게 한 것은 '가난하다-부요하다', '배부르다-배고프다'는 구체적인 경제 형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이라는 신앙의 자리'였습니다.
사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지한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닌 믿음으로부터 퍼올려진 그리스도의 힘이 자신의 자기됨을 지탱시켜 준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울처럼 어느 경우에도 자족하며 살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 라는 제 3지대에 머물러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 면 그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유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생의 비결을 우리가 체득해야 합니다. 영국 역사에 있어 존경받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크롬웰이 가장 사랑하던 맏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는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하는 일 모두가 손에 잡히 질 않았습니다. 큰 낙심 중에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오늘 본문 말씀을 대했습니다.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 라.' 크롬웰은 이 대목을 천천히 읽어가면서 나도 이런 비결을 배웠으면 얼 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13절에 와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에 접하는 순간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렇다, 사도바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아 닌가.'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느 자리에 머물며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이라는 제3지대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풍요와 궁핍, 배부 름과 배고픔이라는 양극자리에 쏠리고 있습니까 나침반은 그 끝이 흔들리지만 어느 한 쪽에도 쏠리지 않습니다. 그 바늘 끝은 언제나 북쪽이라는 제 3지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주님이 계신 자리를 향해야 합니다. 그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이건 저절로 되는게 아니라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경제위기 시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로 이 신앙의 절정을 배우라는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이제 이 경제위기라는 비바람과 창수 속에서 이 자족의 비결을 터득하는 자만이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개의치 않고 그 나라에 들 어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비바람에 무너져 내리는 신앙이라면 그 신앙은 마지막 날 아무 쓸모없는 신앙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시 한번 사도의 귀한 고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나는 내 처지에 관한 한 자족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가난할 줄 압니다. 나는 부요할 줄 압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그리고 모든 경우에 나는 통달하고 있습니다. 배부른 것 과 배고픈 것, 풍요한 것과 궁핍한 것, 나를 강하게 만드시는 분 안에서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고백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진솔한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희를 자녀삼으시사 주님의 아들 딸로 사랑해주시는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지난 한 주간도 그리스도 안이라는 자리를 잃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만 착념하며 살아온 인생들이 이 시간 주님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면 풍부하면 풍부한대로, 궁핍하면 궁핍한대로 원망과 불평이 반복되었던 불만의 연속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못할 때 결코 자족할 수 없는 저희 생의 실체를 이 시간 깨우쳐 주셨사오니 주 님 안에 거하는 저희 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강권하시고 사로잡으 시사 주님 안에 머물며 자족하는 인생을 가꿔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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