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옷이신 그리스도 (마9:14)
본문
우리 사람은 원래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호흡이 들어와야 살수있는 존재 이다. 다시 말하면 내게 없는 다른 것이 들어와야 내가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내게 없는 다른 것이 새것이다. 새것은 신랑으로, 새천, 새옷,새포도주, 새가죽 부대로 여러가지 모양으로 비유됐다. 사람은 새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새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이고 새것을 누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누리는 사람은 신랑을 맞는 사람인데 친구들과 처녀들 친구가 바로 새것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우리의 옷이 되기 위하서 새천으로 오신 그리스도이다. 옷을 입지 않고는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 마태복음 22장에 있는 것처럼 사람을 청했더니 각자 자기 볼일 보러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악한자나 선 한자나 할것 없이 다 데리고 왔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손님들을 주 인이 보러왔더니 한 사람이 의복을 입지 않고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여 왜 의복을 입지않고 왔느냐고 했더니 아무 소리도 안하더라는 것이다. 여기 서우리는 청함을 받은자와 택함을 받은자는 다르다는 것을 본다. 주인의 택 함을 입는 것은 다르다. 누구나 잔치에 올 수 있다.
그런데 필요한 사람은 새옷을 입고 온 사람, 예복을 입고 온 사람이었다. 우리가 남의 잔치에 가면 서 옷을 단정하게 입고 가면 집주인을 존중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더러운 옷 을 입고 가면 주인의 잔치를 더럽히는 것이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 르실때는 누구든지 부르시는 것이지만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려 할때는 반드 시 예복을 입는 사람이 필요하다. 새천은 왜 주셨는가. 새옷을 만들어 입고 오라는 것이다. 신랑편에서 신부에게 옷감을 보냈다. 이것은 그천으로 우리 집에 옷을 만들어 입고 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집안 풍습이 그런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말하면 왕비로 간택했다. 그러면 왕궁에서 평민 집 에 옷감천을 보낸다. 왕궁에 들어 갈려면 아무옷이나 입고 들어 갈수가 없고 임금의 아내로서 맞는 그런 옷을 입어야 임금앞에 설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옷을 입고 주님앞에 서야한다. 새옷이 우리의 허물을 가려주고 우리의 옛사람의 신분을 없애주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설수있는 보장이 될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앞에 그리스도로 옷 입고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 갈때 우리가 우리의 품위가 있어야 한다. 품위를 가지고 가야한다. 그집을 빛낼려면 내가 품위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데 아무 이름없는 사람이 가면 빛낼 수가 없다. 그래서 이름있는 사람을 부른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따로 있다. 그 영광을 빛내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우리를 궁휼이 여기 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다이유가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는 신분이 필요하다. 우리는 전에는 불결하고 더러운 사람이었지만 부름받은 후에는 신분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을 표현하기위해 있는 사람이 되게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다. 왜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부르셨는가. 부자들은 부르더라도 안 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배고픈 사람, 가난한 사람, 길거리에서 헤매는 사람 을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데 있다. 최종 적으로는 왕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왕을 빛낼수가 있게 되고 왕의 후사가 될수 있고 왕의 유업을 계승할 수 있다. 거지는 왕의 유업을 계 승할 수 없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분이지만 당신의 유업을 맡길자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합당한 신분과 자격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것 이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입었다 하는 이것은 합당한 신분이다. 새천이신 그리스도는 무엇때문에 보냈는다. 우리의체 질에 맞는 천을 보낸것이다. 왜 천만 가지면 되지 새옷이 필요한가. 우리의 모양 즉 품위를 위해서 그렇다. 둘둘말고 다니면 모양이 안안난다. 요즘에는 그렇게 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모양이 안난다. 미국에서 보니까 길에서 구걸하고 있는데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있다. 홈레스라고 써있다. 집이 없다는 것이다. 거지가 되는 것은 배가 고파서 거지가 되지만 중요한것은 품 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품위를 생각하면 다 거지가 되지 않을수 있다. 거지가 되는 것은 품위를 버린것이다. 사람에게는 모양과 품위가 필요하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이것은 하나님의 품위대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니까 우리 도 거룩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것은 품위를 말한다. 우리 주님은 새천이었다. 인류 가운데 온 새로운 재료였다. 새로운 생명이었다. 이건 한번도 없었던 생명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바로 입기에는 알 맞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탄생했다. 우리가 입을려고 해도 안 입어 진다. 우리는 처녀의 몸이 아닌 남편이 있는 아내의 몸에서 났다. 예수님께서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우리는 안입어진다. 입는다는 것은 이 런 것이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된 분이었다. 좋기는 좋지만 바로 입을려면 안입어 진다. 내 옷으로 삼을려면 안삼아진다. 신발은 오래된 신발이 좋다는 말이 있다. 요즈은 구두가 좋아져서 잘 맞지만옛날에는 구두를 맞추면 발가 락이 아프고 그렇다. 아픈것을 참고 신다보면 구두가 발에 맞게된다. 그래서 신발은 오래 신을수록 좋다고 한다. 잘맞게 되면 닳아서 없어지게 된다. 뒤 축이 신을만 하면새것으로 갈아야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구두고 새 옷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쩐지 맞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면에서, 어떤 사람은 회의적인 면에서,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면에서 놀라운 사람이 었다. 이 사람은 부정적으로 놀랍고 어떤 사람은 회의적으로 놀랍고의심을 해도 그렇게 부정을 받은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 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긍정을 받았었다. 반대로 거짓말장이, 참람하다고부 정을 받았다. 회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를 믿을려고 해도 도 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를 부정하지 않을려고 했다.맹세 했었다. 가야바의 법정에서 나는 도무지 저 사람을 모르겠다. 맹세 하며 가로되 모르겠다, 저주하며 가로되 모르겠다. 믿을려고 해도 안믿어진 회의적인 사람이다. 예수만큼 절대적인 회의와 부정과 긍정을 받은 경이로운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긍정적으로 그 분을 입을 수 없고 부정적이면서도 그 분을 입을 수 없고회의적이면서도 우리 체질에 맞도록 입을 수가 없었다. 제자들까지도 아무리 자기의 옷을 입을려고 해도 입을 수가없었다. 그래서 가 야바의 법정에서 그를 버리고 갔던 것이다. 결국 그는 참으로 새로운 천이었다. 너무나 새로운 천이었기 때문에 생소한 분이었다. 우리는 아담안에 태어 나서 아담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그는 아담아닌 사람이었다. 똑같이 생겼는데 전혀 다른 분이었다. 숨을 쉴때도 밥 먹을때도 똑같다.
그런데 나하고 본질 이 다른 사람이었다. 틀림없는 사람은 사람인데 입을려고 해도 못입는 사람 이었다. 우리의 체질을 위해서 보낸 사람이 었지만 우리의 몸에는 맞지않는 분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때 두려움이 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엎드리게 되었다. 모세는 그 자리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고 이사야는 입술을 지져야 했다. 그렇게 두려운 분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났을때는 두렵지는 않았지만 어색한 분이 었다.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니까 예수께 그어머니가 이야기 해서 포도주를 만들게 되었다. 그때 그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되었겠어요 내 가 난 아들인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인가 우리가 예수를 만났을때는 두 렵지는 않았지만 경이로운 분이었다. 이것은 아직 우리의 옷이 되지는 않았 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의 옷이 되기위해서 시험과 연단을 거치게 되었다. 그분 자신은 옷이 될려니까 할 수 없이 재단사에게 잘라지고 꼬매지고 다림 질하는데 서 뜨겁게 다려져서 옷이 된 것이다. 예수는 3가지 방면에서 시험 과 연단을 거치게 되었다.
부정적인 사람과 긍정적인 사람과 회의적인 사람 에게 네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각자 자기의 입장 대로 시험을 했다. 베드로는 자기 뜻으로 한말이 아니고 뭔가 하나님의 영에 휩싸여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긍정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어도 어느 때는 그가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긍정적인데 있을려고 노 력은 하지만 할 수 없이 회의적인 입장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들 에게 예수님은 시험과 연단을 거치게 되었다. 유태인들, 제사장들은 심하게 예수를 시험하게 되었다. 마지막에 가야바의 법정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다. 이것은 그동안 거친 시험의 마지막이었다. 여러면으로 예수를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그렇다 라고 말했을때 더 이상 물어 볼 필요가 없으니 십자가에 못을 박아라 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만난 사람마다 그를 시험해 보았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을때자기 조상들이 40년동안 광야에서 메추라기를 먹었으니까 당신이 모세보다 더 위대 합니까 하고 이것을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이 기 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배고픈 까닭이었구나. 이 모든 것들은 시험과 연단이 었다. 우리도 시험과 연단을 받고있다. 너희만 진짜냐 너만 생명이냐 하는 질문을 받게된다. 이것은 모두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집회에 갔다가 오더니 새로운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속으로 시험을 하는 것이다. 네 모양이 어떤 가 보자 그래서 사사건건 그리스도가 그 모양이냐고 새 생명이 그 모 양이냐고 진리가 그 모양이냐고 계속 시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우리를 연단하느냐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 나쁜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 져지고 있는 것이다.이런 연단의 과정을 겪는 것은 새로운 천이 옷이 되게 하기 위해서 시험과 연단을 거친 것이다. 천이 옷이 될 수 없으므로 천이 자 기의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몸에 맞도록 되는 것이다.
천은 키가 큰 자가 오면 크게 작은자가 오면 작게 잘라져야 한다. 우리는 이 사람은 통과 했는 지 알았더니 안되었고 집에 가면 아내가 안되고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사방에 깔려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다 필요한 것이다. 더 많이 다져질수록 완전해 지니까 구원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항상 준비할 것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질문하고 시험을 하더라도 나에게서 확실한 대답이 나올때까 지 우리를 연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와도 재단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 들려니까. 예수는모든 사람에게 시험을 받았다. 심지어는 자기 동생들도 그 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신발이 내발에 맞을때까지는 얼마나 많은 고통 을 당했겠는가. 예수님은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인적으로나 회 의적으로나 시험을 받아서 이제는 아무도 그에게 시험을 할 수 없는 자리까 지 갔다. 아무리 시험을 할려고 해도 시험할 꺼리가 없어서 못하게 될때까지 갔다. 두번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 공생애를 마치면서 마귀에게 시험 받았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돌들로 떡이 되게해서 먹어라 그것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어야 적어도 하나님의 아 들이라 할 수 있지 않는가 라는 것이었다.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것을 보 니까 포기를 한 것이다. 창세기 이후로 아담에게 그러한 이유로 시험한 것이다. 하나님이 정녕 그것을 먹지말라더냐 하는 것도 함께 함축된 것이다. 예수도 만일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있 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사람인데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야 된다 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실패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다 넘어졌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입에서 나온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 지 하는 것으로 이겼다. 옛날에 이 런 것으로 시험을 많이 받았다. 애기를 데리고 와서 아프니까 기도를 해 달 라고 하는데 못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주여 능력을 베풀어 주옵소서 하는데 안되더라는 것이다. 제일 곤란한 것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기도원에 가고 순복음 교회 가서 기도했다. 사람이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냐. 내가 돌로 떡을 왜 만들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도 확실한걸 왜 속았던지 모르겠다. 미쳐서든지 속았든지 둘중의 하나이다. 왜 나는 그것 때문에 열등감을 갖고 있었을까. 이것을 보니까 아담이 생각난다. 바로 여기 에 열등감이 있어서 사탄에게 넘어갔던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봐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와서 받아줄 것이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무엇을 줬더라면 나도 무엇이 되는지 알고 그짓을 했 을 것이다. 나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릴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표현할 사람이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도 확실한 것을 모르고 속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할 사람이다.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했다. 예수님께서 이기신 것을 보니 너무 너무 쉽다. 사탄이 너무 너무 어려웠다. 큰 시험이다. 내게 절만하 면 너에게 50만의 신자를 주겠으니 네가 이러 이러한 방법을 쓰면, 기술을 가지면, 능력을 가지면, 너는 큰 교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흥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 목사의 입장 보면이것은 큰 시험이다. 그러나 내가 큰교회를 위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나는 오직 하나님을 표현할 사람으로 부르신것이다. 마귀에게 우리는 모두 속고 있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그러면 이렇게 할 수 있지 않느 냐.
그런데 우리는 죄인이고 아무것도 아니니까 우리는 그것를 알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 능력을 받아서 뭔가 할 수 있으 니까 된다고 생각한다. 인류 역사상 돌로 떡을 만들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서울에서 어느 부흥사가 와서 귀머거리가 낳았다는 것을 들었다. 이웃 집에 있는 귀머거리였었다. 그러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은 사람은 없다. 그 러니까 무슨 능력을 해도 마지막까지 시험할 것은 있다. 서울대학 시험문제는 매해마다 새것을 내놓는 것처럼 사탄의 시험도 끝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못할 때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에게 단지 한가지 말만 했다. 정녕 이것 을 먹지말라 하더냐.
그런데 모든 것이 함축되어져 있다. 아담은 거기서 넘 어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넘어지지 않았다. 주 하나님을 경배하 라 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마라 하니까 간단하게 끝났다. 여러분도 여러분 머리속에, 생각속에만 어떤 종류의 생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네가 그리스도를 안다면서, 대구 교회 다닌다면서 그것밖에 안되냐 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서 잘못을 제대로 찾아야 한다. 나는 숨이 코에 붙 은 사람이다. 오늘밤 내 영혼을 찾으면 가야할 사람이다 하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시험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마귀를 물리치는 일은 제일 간단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할 때에 우리로 하여금 만유를 다스리도록 해 놓았다.
그런데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서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시험했다. 하나님은 네가 정말로 사람의 아들이냐 라고 시험했다. 나는 정말 사람입니다, 나는 흙이입니다 라고 예수는 대답했다. 인자라는 말 이 그말이다. 예수가 나는 인자다 라고 하니까 하나님은 네가 정말 사람의 아들이냐 하고 물었던 것이다. 너는 숨이 코에 붙었다는 말이 맞냐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시험에 대해서 완전하게 통과했다. 아버지여 하실만 하시 면 내게서 이잔을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나는 사람입니다 라는 것이다. 사람들과 마귀는 나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고 있지만 나는 사람입니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는 아무 할 말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흙이냐 즉 사람이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우리가 항상 넘어질때는 말로는 흙이다 라고 해 놓고 실제로 사람앞에 설때는, 하나님 앞에 설때는 숨이 코에 붙지않은 자로 서게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럴 수 있습니까 라는 말이나오 게 된다. 이것은 나는 흙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흙은 주무르면 주무르는 대 로 돌하루방 만들면 돌하루방이 된다. 진흙은 서양 사람도 몽골리안도 필리 핀 사람도 만들 수 있다. 바울은 이것을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었다. 토기가 나는 왜 뚝배기로 만들어 놓았냐, 접시로 만들어 놓았냐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앞에서 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앞 에서 너는 사람이냐라는 그러나 시험을 받아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마귀 에게 완전한 시험을 받은 것이었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나타난 실제적으로 나타난 자리가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똑같은 시험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봐라. 심지어는 같이 십자가에 매달렸던 강도까지도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십자가 에 못박혀 죽는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는 사람의 아들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하게 통과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의 옷이 되기에 합당하도록 시험을 거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시험거리 가 없게 될때까지 시험을 거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왜 우리는 십자가가 필요한가. 많은 시험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우리 인간의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문제는 십자가에서 다 끝난다. 죽은 사람에게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은 사람 놓고 판사가 십년언도를 내려도 필요없는 것이다. 죽은 사람 앞에는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부정적인 사람도 긍정적인 사람도 회의적인 사람도 하나님도 아무 할말이 없어진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제잘난 맛에 요동하고 있는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이다. 시어머니 문제 해결 할려고 가면 며느리 문제가 생기고 끝이 없이 생기는 것이다. 말이 불어나고 불어나서 좋게 할려고 하다가 더 시끄러워져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있으면 시끄러웠던 것이 조 용해 진다. 십자가는 어지러운 우주를 조용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가면 서로 자기가 잘하고 남이 잘못했다는 것이다. 누가 잘하고 잘못해서 시끄러운 것 이 아니고 사실은 십자가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시끄러운 것은 십자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만유의 입을 다 잠잠하게 하셨다. 부활 은 십자가를 통해서 오게 되었다.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모든 자리가 완전하게 끝나게 되었다. 원천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우리 가 바로 그분을 옷입어야 사람도 할말이 없고 마귀도 하나님도 할말이 없는 사람이 된다. 그분으로 옷입었다,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는 것은 바로 이말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한분을 우리가 옷입은 것이다. 옷 입는다는 것은 내 신 분을 대신 한다는 것이다. 예수라는 한 사람을 옷입음으로써 내 신분을 예수 로 내세우는 것이다. 내가 죽은 사람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앞에 사람앞에 마귀앞에 입고 설 옷이다. 우리가 어디가도 이 옷만 필 요하다.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것밖에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잔치상에 초대 받았는데 예복을 입고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다 가 버 라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앞에나 마귀 앞에나 사람 앞에나 옷을 입지 않은 문제 가 생긴다는 것이다. 제사장은 꼭 지정된 옷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의 법에 따르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지 정된 옷을 입어야 지정된신분을 가져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은 목사 자격증이라는 말이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거지옷을 입으면 바베큐나 송아지를 갔다 놓았어도 거지들의 잔치이다. 그러나 왕들이 커피 한잔 마시고 있어도 이것은 왕들의 잔치인 것이다. 신분이 높아 가지고 그 자리가 높은 것이지 음식이 좋아서 높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사장의 옷을 입고 앉아 있으면 제사장 잔치이다. 잔치는 옷이 중요하다. 우리가 모두 거지의 품위를 가지 고 죄인의 품위를 가지고 하나님앞에 왔다면 하나님 나라가 죄인의, 거지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면 나도 영광이 없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있다. 작은 아들이 나도 다컸다. 나도 내 멋대로 하고 싶다고 해서 자기 재산을몫을 달라고 했다. 내 속을 몰라주고 아버지는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래서 기어코 졸랐다. 할 수 없이 논밭을 팔아서 주었다. 성공하고 돌 아오겠다고 생각하고 아들은 나갔는데 다 망했다. 그래서 자기 주머니는 바 나나껍질만 남게되었다. 그래서 돼지키우는데로 미끄러져 가게 되는 가운 데 너무 너무 배고프고 쥐엄 열매만 먹게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버지 집에 먹을 것도 많은데 굶어죽는 것보다는 아버지 집으로 달려가기로 결심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날마다 문을 열어놓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을 맞이하여 얼싸안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배고픈데 먹을 것을 주 지않고 옷을 갈아입히 라는 것이다. 새옷을 갈아 입히고난 다음에 살찐 송 아지를 잡으라는 것이다. 잔치에는 의복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필요는 아버지의 영광이었다. 아버지의신분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배고파도 배고 픈 것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라는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고 사람은 먹는 것이 첫째이다. 옷 팔아서 밥먹는 것이 사람이다. 에서 가 장자의 명분을 팔아서 팥죽을 사먹은 사람이다. 장자는 에서의 옷이다. 사람은 이렇게 배고프면 옷을 팔아먹는 사람이지만하나님은 옷이 중요한 분 이시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시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것만 주면 바꿔 지지 않는다. 거지를 바꿀려면 신분을 줘야 바뀌는 것이지 먹을 것을 주어서 바뀌는 것이 아니다. 거지가 운명이 바뀌어 질려면 품위가 있는 옷으로 바뀌 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는데는 우리의 신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새옷을 입고 잔치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께는 신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신분이 있고 품위가 있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호텔에 가면 큰 샹데리아가 있다. 보통 집에가면 싸구려가 있다. 하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났다. 그러나 좋은 것은 크리스탈로 만들어 놓았다. 좋은 것은 빛이 사방으로 반사가 된다. 그러니까하나님의 영광을 빛낼려면 크리스탈 같은 우리의 신분이 필요하다. 거지는 밥때문에 거지가 된 것이 아니다. 신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대단했다. 양반은 굶고 나오면서도 이쑤시개로 쑤시면서 나온다. 나는 내 신분을 팔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절대로 거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옷이 무 슨 소용이 있냐고 생각하면 거지가 된다. 새 신분의 사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영광의 찬송이 되게하려 하신 다는 것은 신분있는 사람이 되게하려 하 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의 신분이 필요하다. 자 기의 영광을 빛내야 하기 때문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임금앞에 나가는 왕비는 금사슬로 수를 놓은 옷을 입고 가도록 되어있다. 금 은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왕의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왕의 성질로 수놓은 옷을 입는다는 것이니까 하나님 성질로 수놓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의 신분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을 돌 려드릴 신분이다. 옛 사람을 끝내시고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아있는 그런 분 이시다. 아담은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었다. 창피한 것이다. 하나님은 가죽 옷을 입혔줬다. 이스라엘은 율법의 옷을 입을려고 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로 입혀 주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새생명으로, 그리스도로 옷입기를 원 한다.세상은 선악과로 옷입고 있다. 자기 신분을 나타낼때 선악과로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우리를 옷입혀 주시기를 원한다.
우리는 배고 파서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옷 입혀지기를 원한다. 아담 이 선악과를 먹을때아직 옷이 없었다. 벌거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다. 아직 죄를 알지못할 때이기 때문에, 옷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넘어갔다. 발가벗고 있으면 신분을 벗어 던진것이다. 목욕땅에 가면 함부로 한다. 사람이 신분 벗어 던지고 나면 볼 모양이 없다. 사람이 얼마나 옷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아담은 옷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신분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는 왜 사탄에게 넘어가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해야 될 확실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제사장의 옷을 입고 세상 을 섬길 수 없었다. 그 옷을 입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거 룩한 옷을 입어야 거룩한 일을 할 수 있다. 새로운 옷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우리가 옷입고 그 천국잔치를 하는 것이다. 바울은최종적으로 주님께 참여하 고 동참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잔치상에 참여하는데로 이끌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스도로 우리를 격상시켜서 하나님의 잔치상에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신분이 없는 사람이고 죄인의 신분이고 거지의 신분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분을 속에서 부터 바꾸어 나올려고 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 물샐틈 없이 우리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의 신분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완전하게 아들의 신분으로 그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동역자가 아들의 신분으로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우리의 신분이 되기 위해서 짤려지고 시험을 거쳐서 완 전하게 그분 자신을 뒤집어 쓰고 살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쉬운말로하면 그리스도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신분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자로서의 신분이 중요하다. 세상 풍조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형상에서 금수와 버러지 형 상으로 몰고가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금수와 버러지를 뒤집어쓰고 살도록 이 끌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키우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우리는 세상의 어떤 풍조가 밀려오더라도 나는 하나님 아들이고 나는 하나님 을 나타낼 자고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과 동역할자고 하나님 영광의 보 자좌에서 함께 식사할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분을 팔아 먹을자가 아니다.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에서보고 망령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신분 을 팔아 먹었다는 것이다. 신분을 팔아 먹으면 인생을 팔아 먹는 것이다.
하나님의 표현으로서의 형상의 신분을 우리가 소중히 여길때 택함을 받는 것이다. 야곱은 인간적으로 볼때 에서보다 못하다.
그런데 야곱은 신분을, 장자 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장자의 명분은 그리스도의 명분이다. 하나님께서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시고 고치고 또 고쳐서 하나님 의 영광을 나타낼자로 만드신 것이다. 에서 보고는 잘먹고 잘살라는 것이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이 걱정하니까 큰 민족을 이루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말은 별로 볼일 없다 그러니까 잘먹고 잘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된다면 비참한 것이다. 너는 나를 표현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 기는구나 하고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교회의 학생들이 내 일생을 하나님을 표현하는 영광스러운 인간이 되겠다는 것이 마음에 새 기게 되기를 원한다. 버려진 인간이 아니고 잘먹고 잘사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겠다면 영광스럽고 소중한 인생이 될 것이다. 우리 학생들이 우리만큼 나이가 먹었을때 저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나타낼려고 했는데 못한 것을 우리의 자녀들이 나타내고 있구나 하 고 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망된다. 지금은 놀고 바빠서 앉아 있기는 앉 아 있지만 엉덩이가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표현이다 나는 에서와 같지 않고 야곱의 길을 가겠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바 톤을 이어서 달음질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새옷을 입고하나님을 표현하는 옷을 입고 사는 사람이 되기원한다. 기도: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배가 고파서 쥐엄열매를 먹고 돼지와 함께 살던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귀한 신분의 옷을 준비해 놓으시 고 우리가 배고프지만 먹을것 부터 주시지 않고 옷부터 갈아 입히고 가락지 를 끼워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귀한 신분을 약속하시고 너는 나의 아들이다. 유업을 이을자 라고 약속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에서와같이 망령된 사람이 돼서 고귀한 명분을 소홀이 여기는 사람이 되지않고 야곱같이 소중히여기는 사람이 되게 되기를 원하고 이스마 엘처럼 되지않고 이삭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그런데 필요한 사람은 새옷을 입고 온 사람, 예복을 입고 온 사람이었다. 우리가 남의 잔치에 가면 서 옷을 단정하게 입고 가면 집주인을 존중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더러운 옷 을 입고 가면 주인의 잔치를 더럽히는 것이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 르실때는 누구든지 부르시는 것이지만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려 할때는 반드 시 예복을 입는 사람이 필요하다. 새천은 왜 주셨는가. 새옷을 만들어 입고 오라는 것이다. 신랑편에서 신부에게 옷감을 보냈다. 이것은 그천으로 우리 집에 옷을 만들어 입고 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집안 풍습이 그런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쉽게말하면 왕비로 간택했다. 그러면 왕궁에서 평민 집 에 옷감천을 보낸다. 왕궁에 들어 갈려면 아무옷이나 입고 들어 갈수가 없고 임금의 아내로서 맞는 그런 옷을 입어야 임금앞에 설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옷을 입고 주님앞에 서야한다. 새옷이 우리의 허물을 가려주고 우리의 옛사람의 신분을 없애주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설수있는 보장이 될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앞에 그리스도로 옷 입고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 갈때 우리가 우리의 품위가 있어야 한다. 품위를 가지고 가야한다. 그집을 빛낼려면 내가 품위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데 아무 이름없는 사람이 가면 빛낼 수가 없다. 그래서 이름있는 사람을 부른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따로 있다. 그 영광을 빛내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우리를 궁휼이 여기 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다이유가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는 신분이 필요하다. 우리는 전에는 불결하고 더러운 사람이었지만 부름받은 후에는 신분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을 표현하기위해 있는 사람이 되게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다. 왜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부르셨는가. 부자들은 부르더라도 안 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배고픈 사람, 가난한 사람, 길거리에서 헤매는 사람 을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데 있다. 최종 적으로는 왕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왕을 빛낼수가 있게 되고 왕의 후사가 될수 있고 왕의 유업을 계승할 수 있다. 거지는 왕의 유업을 계 승할 수 없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분이지만 당신의 유업을 맡길자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합당한 신분과 자격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것 이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입었다 하는 이것은 합당한 신분이다. 새천이신 그리스도는 무엇때문에 보냈는다. 우리의체 질에 맞는 천을 보낸것이다. 왜 천만 가지면 되지 새옷이 필요한가. 우리의 모양 즉 품위를 위해서 그렇다. 둘둘말고 다니면 모양이 안안난다. 요즘에는 그렇게 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모양이 안난다. 미국에서 보니까 길에서 구걸하고 있는데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있다. 홈레스라고 써있다. 집이 없다는 것이다. 거지가 되는 것은 배가 고파서 거지가 되지만 중요한것은 품 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품위를 생각하면 다 거지가 되지 않을수 있다. 거지가 되는 것은 품위를 버린것이다. 사람에게는 모양과 품위가 필요하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이것은 하나님의 품위대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니까 우리 도 거룩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것은 품위를 말한다. 우리 주님은 새천이었다. 인류 가운데 온 새로운 재료였다. 새로운 생명이었다. 이건 한번도 없었던 생명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바로 입기에는 알 맞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탄생했다. 우리가 입을려고 해도 안 입어 진다. 우리는 처녀의 몸이 아닌 남편이 있는 아내의 몸에서 났다. 예수님께서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우리는 안입어진다. 입는다는 것은 이 런 것이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된 분이었다. 좋기는 좋지만 바로 입을려면 안입어 진다. 내 옷으로 삼을려면 안삼아진다. 신발은 오래된 신발이 좋다는 말이 있다. 요즈은 구두가 좋아져서 잘 맞지만옛날에는 구두를 맞추면 발가 락이 아프고 그렇다. 아픈것을 참고 신다보면 구두가 발에 맞게된다. 그래서 신발은 오래 신을수록 좋다고 한다. 잘맞게 되면 닳아서 없어지게 된다. 뒤 축이 신을만 하면새것으로 갈아야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구두고 새 옷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쩐지 맞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면에서, 어떤 사람은 회의적인 면에서,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면에서 놀라운 사람이 었다. 이 사람은 부정적으로 놀랍고 어떤 사람은 회의적으로 놀랍고의심을 해도 그렇게 부정을 받은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 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긍정을 받았었다. 반대로 거짓말장이, 참람하다고부 정을 받았다. 회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를 믿을려고 해도 도 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를 부정하지 않을려고 했다.맹세 했었다. 가야바의 법정에서 나는 도무지 저 사람을 모르겠다. 맹세 하며 가로되 모르겠다, 저주하며 가로되 모르겠다. 믿을려고 해도 안믿어진 회의적인 사람이다. 예수만큼 절대적인 회의와 부정과 긍정을 받은 경이로운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긍정적으로 그 분을 입을 수 없고 부정적이면서도 그 분을 입을 수 없고회의적이면서도 우리 체질에 맞도록 입을 수가 없었다. 제자들까지도 아무리 자기의 옷을 입을려고 해도 입을 수가없었다. 그래서 가 야바의 법정에서 그를 버리고 갔던 것이다. 결국 그는 참으로 새로운 천이었다. 너무나 새로운 천이었기 때문에 생소한 분이었다. 우리는 아담안에 태어 나서 아담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그는 아담아닌 사람이었다. 똑같이 생겼는데 전혀 다른 분이었다. 숨을 쉴때도 밥 먹을때도 똑같다.
그런데 나하고 본질 이 다른 사람이었다. 틀림없는 사람은 사람인데 입을려고 해도 못입는 사람 이었다. 우리의 체질을 위해서 보낸 사람이 었지만 우리의 몸에는 맞지않는 분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때 두려움이 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엎드리게 되었다. 모세는 그 자리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고 이사야는 입술을 지져야 했다. 그렇게 두려운 분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났을때는 두렵지는 않았지만 어색한 분이 었다.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니까 예수께 그어머니가 이야기 해서 포도주를 만들게 되었다. 그때 그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되었겠어요 내 가 난 아들인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인가 우리가 예수를 만났을때는 두 렵지는 않았지만 경이로운 분이었다. 이것은 아직 우리의 옷이 되지는 않았 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의 옷이 되기위해서 시험과 연단을 거치게 되었다. 그분 자신은 옷이 될려니까 할 수 없이 재단사에게 잘라지고 꼬매지고 다림 질하는데 서 뜨겁게 다려져서 옷이 된 것이다. 예수는 3가지 방면에서 시험 과 연단을 거치게 되었다.
부정적인 사람과 긍정적인 사람과 회의적인 사람 에게 네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각자 자기의 입장 대로 시험을 했다. 베드로는 자기 뜻으로 한말이 아니고 뭔가 하나님의 영에 휩싸여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긍정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어도 어느 때는 그가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긍정적인데 있을려고 노 력은 하지만 할 수 없이 회의적인 입장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들 에게 예수님은 시험과 연단을 거치게 되었다. 유태인들, 제사장들은 심하게 예수를 시험하게 되었다. 마지막에 가야바의 법정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다. 이것은 그동안 거친 시험의 마지막이었다. 여러면으로 예수를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그렇다 라고 말했을때 더 이상 물어 볼 필요가 없으니 십자가에 못을 박아라 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만난 사람마다 그를 시험해 보았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을때자기 조상들이 40년동안 광야에서 메추라기를 먹었으니까 당신이 모세보다 더 위대 합니까 하고 이것을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이 기 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배고픈 까닭이었구나. 이 모든 것들은 시험과 연단이 었다. 우리도 시험과 연단을 받고있다. 너희만 진짜냐 너만 생명이냐 하는 질문을 받게된다. 이것은 모두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집회에 갔다가 오더니 새로운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속으로 시험을 하는 것이다. 네 모양이 어떤 가 보자 그래서 사사건건 그리스도가 그 모양이냐고 새 생명이 그 모 양이냐고 진리가 그 모양이냐고 계속 시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우리를 연단하느냐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 나쁜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 져지고 있는 것이다.이런 연단의 과정을 겪는 것은 새로운 천이 옷이 되게 하기 위해서 시험과 연단을 거친 것이다. 천이 옷이 될 수 없으므로 천이 자 기의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몸에 맞도록 되는 것이다.
천은 키가 큰 자가 오면 크게 작은자가 오면 작게 잘라져야 한다. 우리는 이 사람은 통과 했는 지 알았더니 안되었고 집에 가면 아내가 안되고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사방에 깔려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다 필요한 것이다. 더 많이 다져질수록 완전해 지니까 구원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항상 준비할 것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질문하고 시험을 하더라도 나에게서 확실한 대답이 나올때까 지 우리를 연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와도 재단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 들려니까. 예수는모든 사람에게 시험을 받았다. 심지어는 자기 동생들도 그 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신발이 내발에 맞을때까지는 얼마나 많은 고통 을 당했겠는가. 예수님은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인적으로나 회 의적으로나 시험을 받아서 이제는 아무도 그에게 시험을 할 수 없는 자리까 지 갔다. 아무리 시험을 할려고 해도 시험할 꺼리가 없어서 못하게 될때까지 갔다. 두번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 공생애를 마치면서 마귀에게 시험 받았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돌들로 떡이 되게해서 먹어라 그것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어야 적어도 하나님의 아 들이라 할 수 있지 않는가 라는 것이었다.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것을 보 니까 포기를 한 것이다. 창세기 이후로 아담에게 그러한 이유로 시험한 것이다. 하나님이 정녕 그것을 먹지말라더냐 하는 것도 함께 함축된 것이다. 예수도 만일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있 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사람인데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야 된다 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실패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다 넘어졌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입에서 나온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 지 하는 것으로 이겼다. 옛날에 이 런 것으로 시험을 많이 받았다. 애기를 데리고 와서 아프니까 기도를 해 달 라고 하는데 못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주여 능력을 베풀어 주옵소서 하는데 안되더라는 것이다. 제일 곤란한 것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기도원에 가고 순복음 교회 가서 기도했다. 사람이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냐. 내가 돌로 떡을 왜 만들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도 확실한걸 왜 속았던지 모르겠다. 미쳐서든지 속았든지 둘중의 하나이다. 왜 나는 그것 때문에 열등감을 갖고 있었을까. 이것을 보니까 아담이 생각난다. 바로 여기 에 열등감이 있어서 사탄에게 넘어갔던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봐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와서 받아줄 것이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무엇을 줬더라면 나도 무엇이 되는지 알고 그짓을 했 을 것이다. 나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릴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표현할 사람이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도 확실한 것을 모르고 속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할 사람이다.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했다. 예수님께서 이기신 것을 보니 너무 너무 쉽다. 사탄이 너무 너무 어려웠다. 큰 시험이다. 내게 절만하 면 너에게 50만의 신자를 주겠으니 네가 이러 이러한 방법을 쓰면, 기술을 가지면, 능력을 가지면, 너는 큰 교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흥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 목사의 입장 보면이것은 큰 시험이다. 그러나 내가 큰교회를 위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나는 오직 하나님을 표현할 사람으로 부르신것이다. 마귀에게 우리는 모두 속고 있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그러면 이렇게 할 수 있지 않느 냐.
그런데 우리는 죄인이고 아무것도 아니니까 우리는 그것를 알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 능력을 받아서 뭔가 할 수 있으 니까 된다고 생각한다. 인류 역사상 돌로 떡을 만들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서울에서 어느 부흥사가 와서 귀머거리가 낳았다는 것을 들었다. 이웃 집에 있는 귀머거리였었다. 그러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은 사람은 없다. 그 러니까 무슨 능력을 해도 마지막까지 시험할 것은 있다. 서울대학 시험문제는 매해마다 새것을 내놓는 것처럼 사탄의 시험도 끝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못할 때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에게 단지 한가지 말만 했다. 정녕 이것 을 먹지말라 하더냐.
그런데 모든 것이 함축되어져 있다. 아담은 거기서 넘 어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넘어지지 않았다. 주 하나님을 경배하 라 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마라 하니까 간단하게 끝났다. 여러분도 여러분 머리속에, 생각속에만 어떤 종류의 생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네가 그리스도를 안다면서, 대구 교회 다닌다면서 그것밖에 안되냐 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서 잘못을 제대로 찾아야 한다. 나는 숨이 코에 붙 은 사람이다. 오늘밤 내 영혼을 찾으면 가야할 사람이다 하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시험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마귀를 물리치는 일은 제일 간단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할 때에 우리로 하여금 만유를 다스리도록 해 놓았다.
그런데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서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시험했다. 하나님은 네가 정말로 사람의 아들이냐 라고 시험했다. 나는 정말 사람입니다, 나는 흙이입니다 라고 예수는 대답했다. 인자라는 말 이 그말이다. 예수가 나는 인자다 라고 하니까 하나님은 네가 정말 사람의 아들이냐 하고 물었던 것이다. 너는 숨이 코에 붙었다는 말이 맞냐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시험에 대해서 완전하게 통과했다. 아버지여 하실만 하시 면 내게서 이잔을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나는 사람입니다 라는 것이다. 사람들과 마귀는 나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고 있지만 나는 사람입니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는 아무 할 말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흙이냐 즉 사람이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우리가 항상 넘어질때는 말로는 흙이다 라고 해 놓고 실제로 사람앞에 설때는, 하나님 앞에 설때는 숨이 코에 붙지않은 자로 서게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럴 수 있습니까 라는 말이나오 게 된다. 이것은 나는 흙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흙은 주무르면 주무르는 대 로 돌하루방 만들면 돌하루방이 된다. 진흙은 서양 사람도 몽골리안도 필리 핀 사람도 만들 수 있다. 바울은 이것을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었다. 토기가 나는 왜 뚝배기로 만들어 놓았냐, 접시로 만들어 놓았냐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앞에서 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앞 에서 너는 사람이냐라는 그러나 시험을 받아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마귀 에게 완전한 시험을 받은 것이었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나타난 실제적으로 나타난 자리가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똑같은 시험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봐라. 심지어는 같이 십자가에 매달렸던 강도까지도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십자가 에 못박혀 죽는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는 사람의 아들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하게 통과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의 옷이 되기에 합당하도록 시험을 거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시험거리 가 없게 될때까지 시험을 거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왜 우리는 십자가가 필요한가. 많은 시험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우리 인간의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문제는 십자가에서 다 끝난다. 죽은 사람에게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은 사람 놓고 판사가 십년언도를 내려도 필요없는 것이다. 죽은 사람 앞에는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부정적인 사람도 긍정적인 사람도 회의적인 사람도 하나님도 아무 할말이 없어진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제잘난 맛에 요동하고 있는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이다. 시어머니 문제 해결 할려고 가면 며느리 문제가 생기고 끝이 없이 생기는 것이다. 말이 불어나고 불어나서 좋게 할려고 하다가 더 시끄러워져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있으면 시끄러웠던 것이 조 용해 진다. 십자가는 어지러운 우주를 조용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가면 서로 자기가 잘하고 남이 잘못했다는 것이다. 누가 잘하고 잘못해서 시끄러운 것 이 아니고 사실은 십자가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시끄러운 것은 십자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만유의 입을 다 잠잠하게 하셨다. 부활 은 십자가를 통해서 오게 되었다.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모든 자리가 완전하게 끝나게 되었다. 원천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우리 가 바로 그분을 옷입어야 사람도 할말이 없고 마귀도 하나님도 할말이 없는 사람이 된다. 그분으로 옷입었다,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는 것은 바로 이말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한분을 우리가 옷입은 것이다. 옷 입는다는 것은 내 신 분을 대신 한다는 것이다. 예수라는 한 사람을 옷입음으로써 내 신분을 예수 로 내세우는 것이다. 내가 죽은 사람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앞에 사람앞에 마귀앞에 입고 설 옷이다. 우리가 어디가도 이 옷만 필 요하다.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것밖에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잔치상에 초대 받았는데 예복을 입고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다 가 버 라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앞에나 마귀 앞에나 사람 앞에나 옷을 입지 않은 문제 가 생긴다는 것이다. 제사장은 꼭 지정된 옷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의 법에 따르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지 정된 옷을 입어야 지정된신분을 가져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은 목사 자격증이라는 말이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거지옷을 입으면 바베큐나 송아지를 갔다 놓았어도 거지들의 잔치이다. 그러나 왕들이 커피 한잔 마시고 있어도 이것은 왕들의 잔치인 것이다. 신분이 높아 가지고 그 자리가 높은 것이지 음식이 좋아서 높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사장의 옷을 입고 앉아 있으면 제사장 잔치이다. 잔치는 옷이 중요하다. 우리가 모두 거지의 품위를 가지 고 죄인의 품위를 가지고 하나님앞에 왔다면 하나님 나라가 죄인의, 거지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면 나도 영광이 없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있다. 작은 아들이 나도 다컸다. 나도 내 멋대로 하고 싶다고 해서 자기 재산을몫을 달라고 했다. 내 속을 몰라주고 아버지는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래서 기어코 졸랐다. 할 수 없이 논밭을 팔아서 주었다. 성공하고 돌 아오겠다고 생각하고 아들은 나갔는데 다 망했다. 그래서 자기 주머니는 바 나나껍질만 남게되었다. 그래서 돼지키우는데로 미끄러져 가게 되는 가운 데 너무 너무 배고프고 쥐엄 열매만 먹게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버지 집에 먹을 것도 많은데 굶어죽는 것보다는 아버지 집으로 달려가기로 결심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날마다 문을 열어놓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을 맞이하여 얼싸안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배고픈데 먹을 것을 주 지않고 옷을 갈아입히 라는 것이다. 새옷을 갈아 입히고난 다음에 살찐 송 아지를 잡으라는 것이다. 잔치에는 의복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필요는 아버지의 영광이었다. 아버지의신분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배고파도 배고 픈 것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라는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고 사람은 먹는 것이 첫째이다. 옷 팔아서 밥먹는 것이 사람이다. 에서 가 장자의 명분을 팔아서 팥죽을 사먹은 사람이다. 장자는 에서의 옷이다. 사람은 이렇게 배고프면 옷을 팔아먹는 사람이지만하나님은 옷이 중요한 분 이시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시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것만 주면 바꿔 지지 않는다. 거지를 바꿀려면 신분을 줘야 바뀌는 것이지 먹을 것을 주어서 바뀌는 것이 아니다. 거지가 운명이 바뀌어 질려면 품위가 있는 옷으로 바뀌 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는데는 우리의 신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새옷을 입고 잔치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께는 신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신분이 있고 품위가 있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호텔에 가면 큰 샹데리아가 있다. 보통 집에가면 싸구려가 있다. 하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났다. 그러나 좋은 것은 크리스탈로 만들어 놓았다. 좋은 것은 빛이 사방으로 반사가 된다. 그러니까하나님의 영광을 빛낼려면 크리스탈 같은 우리의 신분이 필요하다. 거지는 밥때문에 거지가 된 것이 아니다. 신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대단했다. 양반은 굶고 나오면서도 이쑤시개로 쑤시면서 나온다. 나는 내 신분을 팔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절대로 거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옷이 무 슨 소용이 있냐고 생각하면 거지가 된다. 새 신분의 사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영광의 찬송이 되게하려 하신 다는 것은 신분있는 사람이 되게하려 하 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의 신분이 필요하다. 자 기의 영광을 빛내야 하기 때문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임금앞에 나가는 왕비는 금사슬로 수를 놓은 옷을 입고 가도록 되어있다. 금 은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왕의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왕의 성질로 수놓은 옷을 입는다는 것이니까 하나님 성질로 수놓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의 신분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을 돌 려드릴 신분이다. 옛 사람을 끝내시고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아있는 그런 분 이시다. 아담은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었다. 창피한 것이다. 하나님은 가죽 옷을 입혔줬다. 이스라엘은 율법의 옷을 입을려고 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로 입혀 주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새생명으로, 그리스도로 옷입기를 원 한다.세상은 선악과로 옷입고 있다. 자기 신분을 나타낼때 선악과로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우리를 옷입혀 주시기를 원한다.
우리는 배고 파서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옷 입혀지기를 원한다. 아담 이 선악과를 먹을때아직 옷이 없었다. 벌거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다. 아직 죄를 알지못할 때이기 때문에, 옷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넘어갔다. 발가벗고 있으면 신분을 벗어 던진것이다. 목욕땅에 가면 함부로 한다. 사람이 신분 벗어 던지고 나면 볼 모양이 없다. 사람이 얼마나 옷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아담은 옷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신분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는 왜 사탄에게 넘어가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해야 될 확실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제사장의 옷을 입고 세상 을 섬길 수 없었다. 그 옷을 입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거 룩한 옷을 입어야 거룩한 일을 할 수 있다. 새로운 옷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우리가 옷입고 그 천국잔치를 하는 것이다. 바울은최종적으로 주님께 참여하 고 동참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잔치상에 참여하는데로 이끌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스도로 우리를 격상시켜서 하나님의 잔치상에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신분이 없는 사람이고 죄인의 신분이고 거지의 신분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분을 속에서 부터 바꾸어 나올려고 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 물샐틈 없이 우리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의 신분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완전하게 아들의 신분으로 그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동역자가 아들의 신분으로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우리의 신분이 되기 위해서 짤려지고 시험을 거쳐서 완 전하게 그분 자신을 뒤집어 쓰고 살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쉬운말로하면 그리스도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신분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자로서의 신분이 중요하다. 세상 풍조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형상에서 금수와 버러지 형 상으로 몰고가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금수와 버러지를 뒤집어쓰고 살도록 이 끌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키우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우리는 세상의 어떤 풍조가 밀려오더라도 나는 하나님 아들이고 나는 하나님 을 나타낼 자고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과 동역할자고 하나님 영광의 보 자좌에서 함께 식사할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분을 팔아 먹을자가 아니다.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에서보고 망령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신분 을 팔아 먹었다는 것이다. 신분을 팔아 먹으면 인생을 팔아 먹는 것이다.
하나님의 표현으로서의 형상의 신분을 우리가 소중히 여길때 택함을 받는 것이다. 야곱은 인간적으로 볼때 에서보다 못하다.
그런데 야곱은 신분을, 장자 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장자의 명분은 그리스도의 명분이다. 하나님께서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시고 고치고 또 고쳐서 하나님 의 영광을 나타낼자로 만드신 것이다. 에서 보고는 잘먹고 잘살라는 것이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이 걱정하니까 큰 민족을 이루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말은 별로 볼일 없다 그러니까 잘먹고 잘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된다면 비참한 것이다. 너는 나를 표현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 기는구나 하고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교회의 학생들이 내 일생을 하나님을 표현하는 영광스러운 인간이 되겠다는 것이 마음에 새 기게 되기를 원한다. 버려진 인간이 아니고 잘먹고 잘사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겠다면 영광스럽고 소중한 인생이 될 것이다. 우리 학생들이 우리만큼 나이가 먹었을때 저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나타낼려고 했는데 못한 것을 우리의 자녀들이 나타내고 있구나 하 고 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망된다. 지금은 놀고 바빠서 앉아 있기는 앉 아 있지만 엉덩이가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표현이다 나는 에서와 같지 않고 야곱의 길을 가겠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바 톤을 이어서 달음질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새옷을 입고하나님을 표현하는 옷을 입고 사는 사람이 되기원한다. 기도: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배가 고파서 쥐엄열매를 먹고 돼지와 함께 살던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귀한 신분의 옷을 준비해 놓으시 고 우리가 배고프지만 먹을것 부터 주시지 않고 옷부터 갈아 입히고 가락지 를 끼워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귀한 신분을 약속하시고 너는 나의 아들이다. 유업을 이을자 라고 약속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에서와같이 망령된 사람이 돼서 고귀한 명분을 소홀이 여기는 사람이 되지않고 야곱같이 소중히여기는 사람이 되게 되기를 원하고 이스마 엘처럼 되지않고 이삭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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