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혁명 정신, 한 사람 (마9:1-8)
본문
요즈음 교회의 불건강성 문제가 많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물량화 한다느니, 복만 외치고 있다느니, 가난한자를 돌보고 있 지 않다느니, 교회가 비정해 지고 있다느니, 교회가 주식회사 같 다느니, 여러 비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친 결과입니다. 이 사실만 놓치지 않았다면 모 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극복되었을 그런 문제입니다. 바로 한 영혼에 대한 예수님적 관점을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 영혼 에 대한 철저한 섬김과 균형있는 섬김은 예수 혁명의 기본입니다. 예수님의 관점과 실천으로 제대로 돌아가야 교회가 개혁되고, 사회가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예수 혁명 운동의 본질을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1. 예수의 혁명운동은 한 영혼 섬김의 운동입니다. 한 영혼을 하늘 처럼 받들지 않는 혁명 운동은 종래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왜 예수 혁명 운동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살 아 생전 실천하신 한 영혼을 하늘처럼 받드는 것이 바로 혁명적 위험성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 섬김에 대한 철저성 이 없었다면 아마 예수는 살해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의 운동이 한 영혼 섬김이라고 해서 사실 혁명적 위험성이 전혀 없는게 아닙니다. 막3:6에 보면 " 바리세인들이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했습니다.-안식일 병자 고침 사건으로 인해 살해의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혁명의 냄새가 있습니다. 병만 고쳐 주고 하나님의 나라(죄 사함의 선포 등)를 전하지 않 았다면, 예수를 굳이 죽이기까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한 사람에 대한 영혼과 육신의 완전한 섬김이 십자가를 불러일으킨 것이지요. 이것이 혁명입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이고 요. 때문에 한 영혼 섬김, 이것을 우리는 근본적인 혁명 운동이라 말 합니다. 왜 그냥 혁명 운동이라 부르지 않고 근본적인 혁명 운동 이라 부르느냐 하면, 정치적인 혁명 운동, 민족적인 혁명 운동, 문화적인 혁명 운동, 종교적인 혁명 운동 모두를 뛰어 넘는 혁명 운동이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혁명 운동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수 없이 있어 왔습니다. 가깝게 우리 나라 근현대 만 하더라도 갑오경장, 동학혁 명, 4.19혁명, 5.16혁명 등이 있습니다.
이런 혁명 운동은 역사 의 진보를 앞당기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운동이 인류 역사를 관통하여 모든 민족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계승되고 확대 발전되는 혁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역사의 현장에 묻혀 정신 적 토양을 제공하고, 인류의 진보적 가치에 일조를 할뿐입니다. 예수 복음 운동처럼, 시대와 민족과 역사를 초월해서 온 인류의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운동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합니다. 보세요, 만약에 예수의 혁명이 한 영혼에 대한 철저한 섬김에 바 탕하지 않고, 무조건 성전 제도와 바리세 종교 주의에 대한 저항 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요 한 시대 종교운동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또 로마 권력에 대한 투쟁으로만 일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 요 마카비 혁명과 젯롯당 운동과 함께 유대 역사 운동으로 끝마 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 예수님의 혁명 운동이 근본적인 것이라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인간, 한 영혼에 대한 섬김과 해방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혁명 운동은 한 영혼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과정과 결말이 한 인간을 대상화하고 동원하고 한 사람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그러면 변질되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 의 혁명 운동은 철저한 한 영혼 한 인간에 대한 철저한 섬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이 한 사람 한 사람 을 대상으로 베풀어 졌다는 것을 보면 압니다. 왜그렇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완성되는 것 이기에 그렇습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집단이 아닙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완전하게 에덴 동산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 고서야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100% 완벽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어서 이뤄지는 집단입니다. 그런 까닭 에 천국은 모두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고서야 그 일 원이 될 수 있습니다. 적당히 다수의 사람이 혁명의 혜택을 누리 고 나머지는 구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엉거주춤 지나 가는 세속적 혁명의 나라가 아닙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혁명운동으로 함께 들어가 보 십시다.
2. 예수님은 한 영혼씩 고쳐 주셨습니다. 한 영혼의 소중성, 물량 취급이나 대상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인 격으로 영혼으로 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 오 놀라운 사랑, 주님 은 이 세상에서 사랑할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사랑해 주시다니." 그렇습니다. 수많은 70억 인구 중에서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 주 님은 우주에 상대할 사람이 나 하나 뿐인 것처럼 그렇게 나를 만 나주십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고, 그렇게 나를 돌보십니다. 한 영혼의 실패는 우주의 실패요, 천하의 실패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는 인류의 구속사이긴 하지만, 바로 한 영혼의 구속 사입니다. 한 영혼의 구속이 완벽하게 이뤄지고서야 진행되는 인 류 구속사이기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대량 생산 하듯이 몇십 명 몇백 명을 쭈-욱 세워 놓고 한꺼번에 고쳐대지 않았습니다. 생명은 제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동원의 대상, 처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 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눅 4:40절) 자 보세요 우리 주님이 능력이 모자라거나 시간이 남아돌아서 일 일이 손을 얹으시면서 한 사람씩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의 능력으로는 유대 온 나라의 병자 수만명을 함 꺼번에 모아 놓 고 한순간에 대량으로 완전하게 고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최대로 많은 숫자를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고치신 것은 겨우 문둥병자 열명이었습니다.(눅17:2) 그것도 성경의 보도 대 로라면 열 명은 이 한 사건뿐입니다. 99%는 전부 한 명씩 고쳤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중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 을 먹인 사건이 있지만 이것은 물건의 기적입니다.
가나 혼인 잔 치에서는 돌항아리 여섯을 포도주로 채우셨습니다. 이것도 물질 입니다. 돼지 이천마리를 몰살시킨 기적 사건도 있지만 그것은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한 사람을 고치시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 일 뿐입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씩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신간과 관심과 정열을 허비해 가면서 까지 한 영 혼씩 인격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열정과 인격을 쏟 아 부어 한 영혼씩 섬겨야 합니다. 저는 서울 미아리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중학생 시절에 미아리 고개에 있는 어떤 교회 집회에 어머님을 따라 갔더랬습니다. 은 사집회를 하는 데 그 목사님의 능력이 어떻게 세게 나가는 지 희 얀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다가 손가락을 들어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능력을 발하면, 레이져 광선이 지나가 듯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선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넘어가 거나 방언을 하고 진동을 하는 걸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뒤로 돌 아서서 기도하면 목사님의 뒷통수가 향하는 방향의 사람들은 모 두 넘어가거나 병고침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 니 결국 그 목사님은 이단으로 분류가 되더라고요. 그때에는 그저 신기 하긴만 했었는데, 지금 가만히 말씀에 비추 어보니 그 박목사님 예수님 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한 것이더라구 요.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으로서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분 이지만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면서 아주 수공 업적으로 기적을 베푸셨는 데, 그 목사님은 예수님 보다 능력이 얼마나 더 컸으면 대량생산을 해댔을까요 허망하고 비뚫어진 말씀이 횡행하고 그것이 먹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의 교회 현실도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교회 성장의 도구로, 조직의 대상으로, 동원의 대 상으로 삼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 영혼을 목숨 다해 섬기는 것이 어찌해서 그냥 전도 주일도 아니고 총동원전도주일이어 야 합니까 그러면 한 영혼이 동원의 대상이라는 말입니까 전부 머리수로, 헌금숫자로, 동원의 숫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11월 1일을 '생명 만남의 주일'이라고 했습니다. 한 영혼이 주님과 만나고 그리스도의 형제를 만나 생명 얻는 우주적인 사건을, 저희가 열정을 다해 지극 정성으로 섬기고 자 하는 열망 때문입니다. 뭐 별 차이 없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정신이냐 세속의 정신이냐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은 물건이 아닙니다. 대상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열정과 인격을 쏟아 부어 한 영혼씩 섬기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3. 영혼만 아니라 육신까지 통전적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 섬김의 원칙, 이것이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개혁해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 다른 기적 사건과 좀 다른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고치기 전에 죄사함을 먼저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 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절) 물론 예수님의 의도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걸 알리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단순히 병만 고쳤으면 별 탈 없을 상황에서, 굳이 오해받아 살해의 위험 까지 감수하면서 죄사함을 먼저 선포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5절)
그런데 예수님은 죄사함만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일어나 걸어가 게 하는 육신의 치료도 하셨습니다. 죄사함의 선포인 복음증거와 육신의 치료인 사랑의 실천을 함께 병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과 영혼의 온전한 치료입니다. 사람이 완전케 되는 것은 육신과 영혼이 다 치료받을 때 온전해 집니다. 육신의 빵과 영혼의 빵을 함께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 천은 정확한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이래야 온전한 하나님의 형 상으로 회복시키는 한 사람 섬김이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마9:35에 보니 예수님은 천국복음의 전파와 약한 것의 고침을 동시에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균형을 이뤘지요.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 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9:35)
여기서 천국복음전파는 복음증거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또 누가복음에 보니 예수님이 칠십인 제자 전도단을 모아 놓고 연설하실 때, 병자를 고치고 나서는 꼭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 고 당부하셨습니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에게 가까이 왔다하라"(눅10:9) 여기서 병자들을 고치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러나 자선단체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 즉 복음증거를 꼭 하라고 합니다. 요즈음 우리 한국교회의 불건강성은 한쪽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쪽에서는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만 열심히 합니다. 그러고 그만입니다. 육신의 필요를 섬기는 사랑의 실천은 아예 할 생각 을 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쪽에서는 '일어나 가라'에만 열중합니다. 죄사함의 선포, 하나님 나라의 선포, 복음증거는 소홀히 합니다. 한쪽은 영혼이 불구요, 한쪽은 육신이 불구입니다. 이렇 게 되고서는 생명 출산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21세기 교회의 핵심 이슈는 교회 성장이 아니라 교회 건강성이 다"라는 말이 정말 딱 맞는 말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건강성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이 균형을 칼같이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균형 은 유지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호흡기질병이든, 순환기 질병이든, 내분비 질병이든, 생체 호르몬 질병이든 모두 균형의 파괴가 질병이 됩니다. 암은 아주 극심한 균형의 파괴입니다. 때문에 균형이 유지되지 않으면 곧 죽음입니다.
우리 몸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고 한 개인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과 육신을 건강하게 해 주 시기를 원하십니다. 영혼의 건강뿐 아니라 육신을 둘러싸고 있는 생활조건을 건강하게 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인 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이 죄사함만 선포했다면, 아마 우리는 육신의 필요를 주님께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육신의 필요 까지 해결 해 주셔서 온전하게 해 주셨기에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유리의 육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는 육신의 필 요만 충족시키고 영혼은 내몰라라 했다면 육신은 편안하게 살찌 다가 지옥에 떨어질 슬픈 운명에 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사 함의 기쁨도 주셨기에 영혼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덴 동산의 완전한 한 인간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복음이니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이런 축복을 받았으니 그렇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균형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실천하여 한 영혼을 살리고, 한 국 교회를 살리고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 힘있게 나서시기 바랍니다.
1. 예수의 혁명운동은 한 영혼 섬김의 운동입니다. 한 영혼을 하늘 처럼 받들지 않는 혁명 운동은 종래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왜 예수 혁명 운동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살 아 생전 실천하신 한 영혼을 하늘처럼 받드는 것이 바로 혁명적 위험성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 섬김에 대한 철저성 이 없었다면 아마 예수는 살해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의 운동이 한 영혼 섬김이라고 해서 사실 혁명적 위험성이 전혀 없는게 아닙니다. 막3:6에 보면 " 바리세인들이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했습니다.-안식일 병자 고침 사건으로 인해 살해의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혁명의 냄새가 있습니다. 병만 고쳐 주고 하나님의 나라(죄 사함의 선포 등)를 전하지 않 았다면, 예수를 굳이 죽이기까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한 사람에 대한 영혼과 육신의 완전한 섬김이 십자가를 불러일으킨 것이지요. 이것이 혁명입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이고 요. 때문에 한 영혼 섬김, 이것을 우리는 근본적인 혁명 운동이라 말 합니다. 왜 그냥 혁명 운동이라 부르지 않고 근본적인 혁명 운동 이라 부르느냐 하면, 정치적인 혁명 운동, 민족적인 혁명 운동, 문화적인 혁명 운동, 종교적인 혁명 운동 모두를 뛰어 넘는 혁명 운동이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혁명 운동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수 없이 있어 왔습니다. 가깝게 우리 나라 근현대 만 하더라도 갑오경장, 동학혁 명, 4.19혁명, 5.16혁명 등이 있습니다.
이런 혁명 운동은 역사 의 진보를 앞당기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운동이 인류 역사를 관통하여 모든 민족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계승되고 확대 발전되는 혁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역사의 현장에 묻혀 정신 적 토양을 제공하고, 인류의 진보적 가치에 일조를 할뿐입니다. 예수 복음 운동처럼, 시대와 민족과 역사를 초월해서 온 인류의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운동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합니다. 보세요, 만약에 예수의 혁명이 한 영혼에 대한 철저한 섬김에 바 탕하지 않고, 무조건 성전 제도와 바리세 종교 주의에 대한 저항 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요 한 시대 종교운동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또 로마 권력에 대한 투쟁으로만 일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 요 마카비 혁명과 젯롯당 운동과 함께 유대 역사 운동으로 끝마 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 예수님의 혁명 운동이 근본적인 것이라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인간, 한 영혼에 대한 섬김과 해방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혁명 운동은 한 영혼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과정과 결말이 한 인간을 대상화하고 동원하고 한 사람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그러면 변질되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 의 혁명 운동은 철저한 한 영혼 한 인간에 대한 철저한 섬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이 한 사람 한 사람 을 대상으로 베풀어 졌다는 것을 보면 압니다. 왜그렇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완성되는 것 이기에 그렇습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집단이 아닙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완전하게 에덴 동산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 고서야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100% 완벽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어서 이뤄지는 집단입니다. 그런 까닭 에 천국은 모두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고서야 그 일 원이 될 수 있습니다. 적당히 다수의 사람이 혁명의 혜택을 누리 고 나머지는 구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엉거주춤 지나 가는 세속적 혁명의 나라가 아닙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혁명운동으로 함께 들어가 보 십시다.
2. 예수님은 한 영혼씩 고쳐 주셨습니다. 한 영혼의 소중성, 물량 취급이나 대상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인 격으로 영혼으로 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 오 놀라운 사랑, 주님 은 이 세상에서 사랑할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사랑해 주시다니." 그렇습니다. 수많은 70억 인구 중에서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 주 님은 우주에 상대할 사람이 나 하나 뿐인 것처럼 그렇게 나를 만 나주십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고, 그렇게 나를 돌보십니다. 한 영혼의 실패는 우주의 실패요, 천하의 실패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는 인류의 구속사이긴 하지만, 바로 한 영혼의 구속 사입니다. 한 영혼의 구속이 완벽하게 이뤄지고서야 진행되는 인 류 구속사이기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대량 생산 하듯이 몇십 명 몇백 명을 쭈-욱 세워 놓고 한꺼번에 고쳐대지 않았습니다. 생명은 제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동원의 대상, 처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 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눅 4:40절) 자 보세요 우리 주님이 능력이 모자라거나 시간이 남아돌아서 일 일이 손을 얹으시면서 한 사람씩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의 능력으로는 유대 온 나라의 병자 수만명을 함 꺼번에 모아 놓 고 한순간에 대량으로 완전하게 고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최대로 많은 숫자를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고치신 것은 겨우 문둥병자 열명이었습니다.(눅17:2) 그것도 성경의 보도 대 로라면 열 명은 이 한 사건뿐입니다. 99%는 전부 한 명씩 고쳤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중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 을 먹인 사건이 있지만 이것은 물건의 기적입니다.
가나 혼인 잔 치에서는 돌항아리 여섯을 포도주로 채우셨습니다. 이것도 물질 입니다. 돼지 이천마리를 몰살시킨 기적 사건도 있지만 그것은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한 사람을 고치시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 일 뿐입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씩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신간과 관심과 정열을 허비해 가면서 까지 한 영 혼씩 인격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열정과 인격을 쏟 아 부어 한 영혼씩 섬겨야 합니다. 저는 서울 미아리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중학생 시절에 미아리 고개에 있는 어떤 교회 집회에 어머님을 따라 갔더랬습니다. 은 사집회를 하는 데 그 목사님의 능력이 어떻게 세게 나가는 지 희 얀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다가 손가락을 들어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능력을 발하면, 레이져 광선이 지나가 듯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선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넘어가 거나 방언을 하고 진동을 하는 걸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뒤로 돌 아서서 기도하면 목사님의 뒷통수가 향하는 방향의 사람들은 모 두 넘어가거나 병고침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 니 결국 그 목사님은 이단으로 분류가 되더라고요. 그때에는 그저 신기 하긴만 했었는데, 지금 가만히 말씀에 비추 어보니 그 박목사님 예수님 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한 것이더라구 요.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으로서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분 이지만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면서 아주 수공 업적으로 기적을 베푸셨는 데, 그 목사님은 예수님 보다 능력이 얼마나 더 컸으면 대량생산을 해댔을까요 허망하고 비뚫어진 말씀이 횡행하고 그것이 먹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의 교회 현실도 이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교회 성장의 도구로, 조직의 대상으로, 동원의 대 상으로 삼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 영혼을 목숨 다해 섬기는 것이 어찌해서 그냥 전도 주일도 아니고 총동원전도주일이어 야 합니까 그러면 한 영혼이 동원의 대상이라는 말입니까 전부 머리수로, 헌금숫자로, 동원의 숫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11월 1일을 '생명 만남의 주일'이라고 했습니다. 한 영혼이 주님과 만나고 그리스도의 형제를 만나 생명 얻는 우주적인 사건을, 저희가 열정을 다해 지극 정성으로 섬기고 자 하는 열망 때문입니다. 뭐 별 차이 없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정신이냐 세속의 정신이냐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은 물건이 아닙니다. 대상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열정과 인격을 쏟아 부어 한 영혼씩 섬기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3. 영혼만 아니라 육신까지 통전적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 섬김의 원칙, 이것이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개혁해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 다른 기적 사건과 좀 다른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고치기 전에 죄사함을 먼저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 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절) 물론 예수님의 의도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걸 알리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단순히 병만 고쳤으면 별 탈 없을 상황에서, 굳이 오해받아 살해의 위험 까지 감수하면서 죄사함을 먼저 선포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5절)
그런데 예수님은 죄사함만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일어나 걸어가 게 하는 육신의 치료도 하셨습니다. 죄사함의 선포인 복음증거와 육신의 치료인 사랑의 실천을 함께 병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과 영혼의 온전한 치료입니다. 사람이 완전케 되는 것은 육신과 영혼이 다 치료받을 때 온전해 집니다. 육신의 빵과 영혼의 빵을 함께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 천은 정확한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이래야 온전한 하나님의 형 상으로 회복시키는 한 사람 섬김이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마9:35에 보니 예수님은 천국복음의 전파와 약한 것의 고침을 동시에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균형을 이뤘지요.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 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9:35)
여기서 천국복음전파는 복음증거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또 누가복음에 보니 예수님이 칠십인 제자 전도단을 모아 놓고 연설하실 때, 병자를 고치고 나서는 꼭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 고 당부하셨습니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에게 가까이 왔다하라"(눅10:9) 여기서 병자들을 고치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러나 자선단체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 즉 복음증거를 꼭 하라고 합니다. 요즈음 우리 한국교회의 불건강성은 한쪽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쪽에서는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만 열심히 합니다. 그러고 그만입니다. 육신의 필요를 섬기는 사랑의 실천은 아예 할 생각 을 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쪽에서는 '일어나 가라'에만 열중합니다. 죄사함의 선포, 하나님 나라의 선포, 복음증거는 소홀히 합니다. 한쪽은 영혼이 불구요, 한쪽은 육신이 불구입니다. 이렇 게 되고서는 생명 출산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21세기 교회의 핵심 이슈는 교회 성장이 아니라 교회 건강성이 다"라는 말이 정말 딱 맞는 말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건강성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이 균형을 칼같이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균형 은 유지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호흡기질병이든, 순환기 질병이든, 내분비 질병이든, 생체 호르몬 질병이든 모두 균형의 파괴가 질병이 됩니다. 암은 아주 극심한 균형의 파괴입니다. 때문에 균형이 유지되지 않으면 곧 죽음입니다.
우리 몸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고 한 개인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과 육신을 건강하게 해 주 시기를 원하십니다. 영혼의 건강뿐 아니라 육신을 둘러싸고 있는 생활조건을 건강하게 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인 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이 죄사함만 선포했다면, 아마 우리는 육신의 필요를 주님께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육신의 필요 까지 해결 해 주셔서 온전하게 해 주셨기에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유리의 육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는 육신의 필 요만 충족시키고 영혼은 내몰라라 했다면 육신은 편안하게 살찌 다가 지옥에 떨어질 슬픈 운명에 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사 함의 기쁨도 주셨기에 영혼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덴 동산의 완전한 한 인간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복음이니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이런 축복을 받았으니 그렇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균형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실천하여 한 영혼을 살리고, 한 국 교회를 살리고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 힘있게 나서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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