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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양을 찾으라 (마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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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께서 많은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여 함께 식사 를 나누셨을 때 이를 제일 못마땅해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깨 끗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죄인 중의 대표적인 세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세리는 로마 정부가 고용한 유대인으로 조국의 불행을 이용해 축재하는데 급급했던 매국노였습니다. 자기 동족들을 착취할 뿐만 아니라 로마 정부도 빈틈없이 속여가며 축재했고, 탈세하려는 부자들로부터 뇌물을 챙 겨 막대한 재산을 긁어 모은 불결한 짐승처럼 취급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강도, 살인자와 한 종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들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요즈음 말로 '왕따'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세리나 죄인들을 '땅의 백성'이라 부르면서 이 들과의 어떠한 교제도 금지했습니다. 이들과 돈거래를 하거나 상거래를 하거나, 손님으로 맞아들이거나, 여행에 동행하거나, 혼인시키는 행위 등 일체의 교제가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더러 운 행위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엄격한 유대인이나 바리새 인, 서기관들은 "죄인의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 고 말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말살되면 하 늘에는 기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바리 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 하나를 구원하기보다는 죄인 하나 하나가 저주 를 받아 멸망당할 것을 학수고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 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죄인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들에 대한 저주 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양의 목자로 세상에 오신 예수의 관심은 의인보다 죄인에게 있 었던 것입니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병, 환자이며, 병, 환자를 치 료하는 것이 바로 의사의 사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죄인들이었고 예수는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 자신은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예수가 필요치 않습니다. 스스로 선하다고 확신하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며 그 죄에서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을 찾으 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도우려하기 보다는 그들과 장벽을 쌓고 접촉을 피하여 자신 의 거룩함을 보존하는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전염병 환 자로부터 병이 전염될까봐 진료를 거부하거나 왕진을 거부하는 의사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동정 하거나, 위로하며 격려하기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선한 행동, 의 로운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마치 질병을 진단하고 알아내는 데는 관심이 있으나 그것을 치료하여 도와주려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 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원하시는 바는 제사(예배)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 곧 긍휼(자비)입니다. 용서와 사랑이 없는 예배는 의 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죄인들을 대하실 때마다 그 죄인을 정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용서하고 그 병든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료하여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인을 붙잡아 끌고 와 예수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질문을 던 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런 여인은 돌로 쳐죽여야 하는데 용서와 사랑을 가 르치시는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돌을 들었던 어른에서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고 오직 예수와 간음했던 여인만이 남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 냐" 고 묻습니다. 여인은 "주여, 없나이다" 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 죄를 정하여 죽이는 것 일뿐 그 죄를 치료하고 새로운 삶을 베풀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죄를 정죄치 않고 용서와 사랑으로 그 여인에게 생명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새 삶으 로 인도하셨습니다. 마태는 '왕따'같은 세리였지만 예수를 영접하여 12 제자 중 하나가 되었고 마태 복음서를 기록하는 영광스런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불같은 성미에 과격한 성격이라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요한을 선택하셔서 사랑의 사도로 변화시켜 제자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 중의 괴수였던 바울을 불러 이방인의 복음 전도자로 삼 으셔서 세계 복음화에 초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결국에는 인류가 당해야 할 저주와 심판을 친히 자신이 담당하시고 인류에게는 생명과 구원을 베 푸신 분이십니다. 죄인을 정죄하며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받아 마 땅한 저주는 십자가에서 자신이 받으시고 그 죄인에게는 생명과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당해야 할 아픔과 고통, 내가 당해야 할 불행과 저주, 사망을 전혀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당하시므로 나는 기쁨과 행복, 생명과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길 잃은 양을 찾아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도록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3에서,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 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는 내 골육 친척들을 구원받는 것이 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생활이 바로 예수의 마음이요 우리가 가져야 할 생활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길 잃어버린 양과 같은 죄인 하나를 구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이란 한 마디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을 말합니다. 양이 목자 곁에 있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 상태, 즉 목자가 되신 하나님 을 떠난 상태를 바로 죄라 하는 것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있는 상태가 바로 길 잃은 양의 모습이며 죄인의 모습 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도둑질, 살인 강도, 간음 등의 죄를 지었다는 것 을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관심은 인간이 "길을 잃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도둑질, 간음, 살인 강도 등의 죄나 마음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나 다 같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은 '네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느냐, 무슨 죄를 지었느냐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네가 전과 몇 범이냐 소위 별이 몇 개냐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모두 전과자입니다. 모두가 다 흉악범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길을 잃어서 벌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오직 길을 잃은 양을 찾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을 정죄하고 세상을 정죄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의 손발 이 되어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며 그럴 수밖에 없었 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얼싸 안고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곳입니다. 교회는 길을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서 생명을 구원하는 곳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다 양 같은 존재로 말합니다. 이사야 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은 원래 본능적으로 먹이를 따라 이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 면 눈앞에 풀만 뜯어 먹으며 이동하다가, 자칫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그 본능대로 먹을 것을 따라가다, 다시 말해 욕심에 이끌려 생활하다 결국 길을 잃고 사망의 골짜기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을 잃고 사망의 골짜기에 빠진 양과 같은 우리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목자되신 심정으로 사방을 찾아 헤매이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소 위 "먹이를 찾기 위해" 헤매이다 길을 잃고 '앵벌이 하는 아이들'이나 ' 몸을 파는 십대 소녀들이나 주부들' 등이 있거든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 하기보다는 먼저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 안으며 상한 마음과 몸을 치료하 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되신 예수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으십니다. 진정으로 참 목자라면 그 목 자는 자신의 양무리 중의 어떠한 양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소흘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 양이 병들었건 절름발이건 간에 모두를 정성스럽게 돌봅니다. 특히 병든 양이 있다면 그 양이 나을 수 있도록 더욱 애정과 관심을 갖고 치료할 것입니다. 이러할진대 만일 양 가운데 잃어버린 양이 있다면 그는 그 양을 찾기까지 밤새도록 온 들녘을 찾아 헤매일 것입니다. 요한 복음 10:11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이시 며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목자되신 심정으로 양같은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시며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시 23 편).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며 보호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 어 갈 길 몰라 헤매일 때 황량한 들녘, 깊은 계곡 그곳이 어디든지 단숨 에 찾아 나서십니다. 또한 그분은 길 잃은 우리를 찾되 중도에 포기하시 지 않고 끝까지 찾으십니다. 심산유곡(深山幽谷), 장강대하(長江大河) 어 느 위험 속에서든지 기어코 우리를 찾아내어 다시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 니할 터이요. 또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길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는 일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목자 되신 예수처 럼 어떠한 경우에도 용서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끝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길 잃은 양을 찾아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 주시기 바랍니다. 목자는 몸소 양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한 마리의 양을 잃게 되면 목자는 적어도 끝까지 찾아가 죽은 양의 털이라도 집으 로 가져와야 했습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이유는 많은 양떼들이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소유로서 공동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책임은 둘 혹은 새 사람의 목자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들 목자들은 양떼들을 무사히 이끌고 시간 맞추어 집에 돌아와야 했고, 때로는 아직 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 려고 산에 있다는 소식을 들리면 온 마을은 끝까지 기다리게 됩니다. 그 러다가 멀리서 어깨에 잃어버린 양을 매고 집으로 걸어오는 목자를 보게 되면 온 마을은 기쁨과 감사의 환성을 지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목자 가 되신 예수님의 마음이십니다. 그러나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길 잃은 양과 같은 세리 와 죄인들을 더러운 짐승처럼 여기며 오직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로 단 정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율법을 앞세워 죄인을 정죄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용서와 사랑을 모르는 짐승처럼 여기실 겁니다. 사람들은 죄인에 대한 소망을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없는 용서와 사랑 으로 병들고 상한 몸과 마음을 치료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축복하십니다. 고교시절 감명깊게 읽었던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소설, '빙점'이 있습니다. 아내의 부정한 행위를 용서하지 못하는 고상한 신앙을 가진 남 편, 그 부정한 아내를 무섭도록 철저히 복수하고자 사랑을 가장하는 남편 의 심리, 이러한 남편의 가장된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그 남편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아내, 그리고 사실은 전혀 용서받을 죄가 없으면서 모든 사람의 용서를 빌면서 죽어가는 천사같은 그들의 양녀 요오꼬의 이야기 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모든 것이 있어도 용서가 없는 세상이 얼마 나 무서운가를 보여 주는 소설입니다. 끝없는 용서는 끝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같이 강한 사랑이십니다. 십자가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을 보여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십자가를 지니고 어떠한 죄인이라도 영접하여 그들과 함께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길을 잃지 않은 양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길 잃은 양과 같은 죄인 하나라도 반드시 그를 찾아내어 구원하 시고 이를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찾은 양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십니다. 팔레스타인의 양치는 목자들 사이에서는 양을 한번 잃었다가 다시 찾 았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다고 합니다. 잃은 양 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그 양을 찾기까지의 고생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양 대한 원망과 책망보다는 더욱 더 깊은 사랑과 애정과 따스함으로 맞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 나라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즉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예수님만의 기쁨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 전체에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죄인된 인간들이 돌아오기를 기대하시며 천국 잔치를 배푸실 준비를 하 고 계십니다. 참으로 믿음을 지키기 어렵고 신앙생활을 하기 힘든 세상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처처에 수많은 유혹과 어려움과 시험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양을 잡아 먹고자 하는 늑대나 이리의 위험과도 같은 위협들이 우리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 자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 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 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 지의 뜻이 아니니라" 우리의 목자되신 주님 마음을 가지고 길 잃고 헤매이는 이 땅의 수많 은 양무리를 찾아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크신 기뻐하심 을 입으시고 하늘 나라 생명 잔치가 날마다 베풀어지는 우리 교회가 되 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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