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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든지 죽든지 (빌1:19-26,마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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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재고(在庫) 파악을 좀 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금잔고가 얼마인지, 우리 재산의 재고가 얼마인지, 여름 옷 겨울 옷은 몇 벌있는지, 아이들 장난감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재고 파악을 좀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규모있게 살수 있고 앞일을 예측 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중요한 재고 파악은 아마 인생 재고 파악일 것입니다. 내 삶은 얼마나 남아 있는지, 내 생애 재고는 얼마큼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제일 급선 무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그 동안 공동체가 함께 두 달여 동안 위해 중보 기도해 오던 김태인 형제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병실 중환자실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장례예식을 통해 서 감사한 일도 많았습니다. 올해 저희 교회 표어가 "순도 높은 신앙"입니다. 우리네 삶이 얼 마큼 남았든, 삶이든 죽음이든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바로 순도 높은 신앙이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한 마디로 "살든지 죽 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한 번 보십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리라"(21절) 여 기서 유익(kerdos,gain)은 이익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장사를 해 서 이문을 보는 것처럼 좋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죽는 것은 손 해가 아닌 이득이라는 게 신앙인들의 고백입니다. 왜 그렇습니 까 이 땅의 몸을 벗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기 때문입니다. 그리 던 주님과 함께 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수고와 고난이 더 이상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유한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영 원한 시간 속에서 우주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 문입니다. "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 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3-24절) 그러니 사는 것과 죽는 것 둘 다 유익하고 좋아서 어떤 쪽을 선 택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좋은 신랑감이 둘 이라 서 어떤 사람을 선택할지 몰라 고민에 빠진 행복한 처녀 처럼 말 이지요. 서울대와 연세대 장학생을 놓고 선택의 고민을 하는 행복한 수험생 처럼 말이지요. 바울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싶다는 소원과 살아서 목회 적 사명을 다하고 싶다는 소망, 이 둘 사이에 끼어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똑 같은 비중입니다. 삶에만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죽기만을 바라고 하늘만 쳐다보며 살지도 않 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이 무엇입니까 죽는 것도 이득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습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몸을 벗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취하는 삶에 대한 입장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자세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순교적 자세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축복이요, 죽는 것은 저주라면 삶과 죽음은 하나가 될 수 없겟지요. 사는 것은 행복한 일이요, 죽는 것은 불행이라면 절대 삶과 죽음을 동일시 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죽는 것은 더욱 나에게 유익하리라고 하는 신앙은 엄두도 못낼 일입니다. 믿음의 사람과 세속적인 사람은 삶의 자세에서 차이가 납니다. 분명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죽음에서 세속의 사람과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삶을 결단할 뿐 더러 죽 음을 결단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삶을 마치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삶의 종결 즉 죽음은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하는 한 방식일 뿐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21절)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내일 밤 12시에 죽는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웨슬레는 서슴 치 않고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그 남은 시간을 작정한 대로 보내겠습니다. 오늘 밤과 내일 아침은 글로체스테에서 설교하 고, 오후에는 툭스버리로 차를 타고 가서 설교할것이고, 밤에는 회의를 진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친구 마틴 집을 방문하여 즐길 것입니다. 그런후 10시엔 잠자리에 들 것이고 12시엔 영광 중에 깰 것입니다" 삶은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늘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죽음을 결단한 믿음의 사람은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죽음을 결단한 사람 답게 이 땅의 삶을 살아 간 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결단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언제나 주를 맞을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청결한 흰세마포를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오래 살지 못 합니다. 또 오래 사는 것이 꼭 축복이 될 수도 없습니다. 어떤 마을에 한 사람이 불로초를 구해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화목하게 잘 나눠 먹었습니다. 그래서 잘 죽지를 안더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150살에 전부 자살을 하 더랍니다. 왜 자살을 하는가 봤더니, 너무 지긋지긋해서 자살을 하더랍니다. 자살을 하면서 '저 쪼그랑 할망구 저 주꿀테기 영감 하고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어! 너무 지긋지긋해, 사는 게 형벌 이야!'하며 자살을 하더랍니다. 90살만 되도 등은 꼬부라져 땅에 닿고, 얼굴은 검버섯이 피고, 눈꼽은 끼고, 이는 빠지고 그야말 로 산 송장이지요.
그런데 150살 까지 살면서 늙어가는 추한 모 습을 결혼한 이래 계속 보며 사는 것은 차라리 형벌 같아서 자살 을 해 버리더라는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의 종말은 고사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것, 나 개 인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가장 확실한 사실에 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가장 불확실한 것에는 대비를 잘 하면 서 가장 확실한 것에는 잘 대비를 못하고 사는 것이 인간인지도 모릅니다.
열처녀의 비유에 보면 기름 준비 하는 것으로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분류하고 있습니다. 먼저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슬기로운 처녀 들은 등과 기름 모두를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등은 기름을 담는 그릇입니다. 등만 있으면 완벽하지 못합니다. 등만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이 생 만을 위 한 믿음이라면, 기름이 없는 등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밝은 날에는 기름이 있으나 없으나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밤에는 등뿐만 아니라 기름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개인의 종말이 홀연히 올 때 등만 들고 당황하지 않을 지 살펴 볼일입니다. 기름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기름 은 무엇입니까. 신랑이 오실 것에 대한 완벽한 준비입니다. 기름 은 영적 상태입니다. 기도와 성령님으로 영적 상태가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 기름을 준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러 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완벽한 상태는 어떤 인간이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 하나님이 부르시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그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상태로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족 하면 부족한 대로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사람은 종말에도 꺼리낄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기름도 준 비한 사람입니다.슬기로운 처녀들입니다. 그러니 등만 있고 기름은 없는 신앙인이 아닌지 살펴볼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부르시면 즉시 아멘 하고 갈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준비하라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라고 했습니다. 더디 올 것 같은 마음이 준비를 게을리 하게 합니다. 더디 올것입니 까 모릅니다. 언제 올 것입니까 모릅니다. 그날과 그 시를 모 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류의 종말 뿐 아니라, 개인의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종말이든 개인의 종말이든 우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합니다. 미련한 자는 더디온다고 생각 하고 준비를 소홀히 합니다. 준비를 미룹니다. 깨어있지 못합니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기를 게을리 합니다.
이런 마음이 불행을 불러옵니다. 의사 한 분이 기고한 글을 보았습니다.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게셨습니다. 그분은 주님의 사업에 헌신코자 교회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설교하고 심방하고 전 도하던중 몸이 왠지 좋지 못함을 느꼈습니다. 제 환자로 와서 검사를 했을 때 결과는 간암이었습니다. 저는 그당시 많이 망설 여야 했습니다. 비록 목사님이시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는 왠지 어려운 대목들이 있었습니다. 고민하다 어느날 아침 결국 거짓말로 목사님께 간염이었다고 이야기했을때 그 목사님은 탄 성을 질렀습니다. "아이구!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암으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이 목사님을 비판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고 그대로 하늘나라에 가시기에는 가족들의 문제가 너무나 컸습니다. 차마 본향으로 가는 발걸 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 길지 않는 의사생활중 보고 놀란 것은 생각보다 죽 음이 준비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이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자에게서라도 의연한 임종을 보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실망할때가 많았습니다. 도리어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 아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때 추하게 느껴질때까지 있었습니다. 본향에 별로 마음이 없어 서였을까요 세상에서 너무 좋은 일 이 많이 있어서였을까요 예수님앞에 가면 별로 내놓을게 없 어서 더 준비하고 가고 싶어서였을까요" 죽음에 대한 준비는 제수 없는 일이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 를 잘 해야 삶이 풍성해집니다. 죽음에 대한 결단을 잘 해야 삶 의 초점이 분명해 집니다. 중심이 섭니다. 삶의 질서가 바로 잡 힙니다. 이것은 내 몸에 죽음을 초 한 그리스도 존귀를 결단하는 삶입니다. 그런 까닭에 죽음을 결단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삶과 죽음을 결 단하는 것입니다.
순교도 죽음과 삶에 대한 결단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이며 무엇을 위해 죽는 것이냐를 확연히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잘 살기 위해 믿는 것은 축복입니다.더할 나 위없이 좋지요. 그러나 더 아름다운 것은, 생을 잘 마감하기 위 해 애쓰는 것입니다. 영생을 추구하는 신앙이지요. 아울러 이렇게 삶과 죽음을 결단한 사람은 참다운 청지기의 삶 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소유권 은 없습니다. 무소유입니다. 다만, 내 삶의 임대권과 사용권을 잘 알아 씁니다. 그러기에 자랑하거나 뽐내거나 지배하거나 낭비 하지 않습니다. 또 진정한 관용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빌립보서 본 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힌 자신을 까 내리고 비방하면서 열심히 전도를 해서 빌립보 교회의 주도권 을 장악하려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이 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18절) 하늘의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섭섭하고 괴씸한 일도, 관용과 기쁨으로 감싸 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감방에 갖히게 되었고 또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비참 한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이렇게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증오심 에 휩쌓이지도 않았습니다. 차원이 한 차원 높아졌지요. 땅만 바 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는 자의 믿음의 태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기도를 매일 저녁 드려야 할 것입니다. " 주님, 내일 아침 눈뜰 때 제가 이 세상에서 아직도 할 일이 남 았거든 이 땅에서 눈을 뜨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늘 고백하면서 생활하십시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 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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