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풍랑 (마8:23-27)
본문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은총이 이 시간 예배 드리는 성도님들에 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인생의 풍 랑"이라는 말씀의 제목을 걸어놓고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분주하고 피곤한 하루를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들을 떠나 다른 지방으로 가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예상치 못한 풍량이 갑자기 일어나 큰 위기를 직면하 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서워하며 비명을 지르며 살아남기 위하여 정신 없이 물을 퍼냈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풍랑은 그칠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랑곳 하시지 아니하시고 평온하게 주무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풍랑과 싸우다 지쳐버린 제자들 은 할 수 없이 풍랑 속에서도 배안에서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그 때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무 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면서 풍랑을 멈추게 하셨 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서 일어난 갈릴리 바다의 풍랑의 사건은 막연히 그들이 풍랑 속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잘 건너 갔다는 이야기를 우리 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 풍랑의 사건은 우리 에게 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인생은 고해 와 같다고 말들을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인생이란 풍랑이 언제 어느때 갑자기 불어 닥칠지 알 수 없는 바다와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평안하던 가정이 내일 갑자기 불행이 닥치고 오늘 건강하던 사람이 내일은 이 세상 사람이 않인 일들이 우리의 삶에서 흔히들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도 마치 바다라는 망망 대해를 향 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 났을 때의 한 장면은 우리 신앙생활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일종의 신비스러운 바다입니다. 더욱이 수면은 지중해 바다보다 200미터 가량 낮은 바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곳 기후는 온하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계곡을 타고 찬바람이 불면 지금까지 고요하던 수면이 갑자기 노한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푹풍이 불어 닥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바다이기 때문에 신비의 바다 이상한 바다입니다. 이 바다는 이러한 현상 때문에 마치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 인생들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이 갈릴리 바다처럼 언제 어느때 고난의 풍퐁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의 생활이 편하고 걱정이 별로 없어도 마음 한 구석에는 형통한 것이 오히려 불안의 요소 가 되기도 합니다. 즉 때로는 우리의 인생이 마치 유리 같이 맑은 바닷 길을 순풍에 돛을 달고 힘차게 달려가면서도 마음 한 쪽에는 불안과 공 포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 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는데도 불구하고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을 모시고 건너가면 오히려 일어났던 풍랑도 잔잔해져야 하는데 왜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길에 폭풍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겨 야 했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즉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불행했던 삶이 행복해지고 또 인생의 고통 이 평안으로 바뀌어 지는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종종 어려운 일이 생기는 경우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신앙 생활을 하면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러나 우리가 살다보 면 예수 믿는 사람도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가정은 집안이 파산되고, 어떤 성도는 사업에 실패하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이가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큰 슬품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삶의 비극을 당하게되면 아무리 믿음을 가진 신앙인도 어쩔 수 없이 절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극의 풍 랑 앞에서 아무리 몸부림을 치며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을 바 꾸어 주시기 커녕 오히려 어두운 절망의 골짝기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 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로 구약에 보면 우수 땅에 사는 욥이라는 분이 그렇습니다.
욥은 성경에서 말하기를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 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축복 을 밭아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인 욥 에게 큰 불행의 풍랑이 불어 닥쳤습니다. 욥의 열 자녀들이 어느날 그 맏형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에 들에서 거친 태풍이 불 어와 집 네 모통이를 치는 바람에 집이 무너지므로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도독때들이 와서 욥의 종들을 죽이고 재산을 모두 끌어 갔습니다. 그리고 욥은 발 정수리에서부터 머리 까지 악성 종기가 나서 심한 아품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의인이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엄청난 비극의 풍랑을 만났습니다. 욥은 악 을 밭갈고 독을 뿌렸기 때문에 재앙을 거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의인이 당하는 불행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떤 불행을 당할 때마다 인간적인 설명으로 불행에 따르는 해답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경솔한 짓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사람이 설명 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신비는 하나님 만이 아십니다. 시편73편에 보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만 선을 행하시는 분인데 그러나 내가 보니 의인보다 악인이 더 형통하여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으며 죽을 때 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남을 능육하고 악하게 압제를 해도 오히려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의인은 종일 재앙을 당하며 책벌을 받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하고 재물이 더하고 건강하게 지내면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잘 되지 않고 어려움을 당하고 건강을 잃어 버리게 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또는 징계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해야만 합니까 하는 이 문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내가 왜 이런 고난의 풍 랑을 만나야만 하는가 그리고 나에게 불어오는 고난의 풍랑을 처음부터 막을 수는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 보다는 지금 나에게 밀어닥친 이 고난의 풍랑을 어떻게하면 잔잔하게 할 수 있는가 라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은 나와 우리 집은 잔잔한 바다위에 순풍에 돛을 달고 목적 지를 향해 가지만 언젠가는 나에게도 틀림 없이 인생의 풍랑이 닥치게되 면 어떤 준비를 할 것이가를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핵심적인 교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 니라 폭풍을 만난 그들에게 예수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갈릴리 바다에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에 도 불구하고 풍랑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인생의 고해와 같은 항로에서도 어 려움과 고통과 슬품을 당해도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지 않고 그 풍 랑 속에서 침목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라는 분이 그 풍랑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동행하신 분이 주님이시라면 역시 우리 인 생의 항로에도 주님이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이 인생의 풍랑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세상에 유일 한 소망의 빛이십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 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도에게 환난의 풍랑이 임하면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그 풍랑 속에서도 평온하게 조용히 주무시고 계셨 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인생의 환난의 풍랑 속에서 거이 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은 야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130년을 살 고난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창47:9에서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어마어마한 축복을 주셨는데 어찌하여 그는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을 했을까요 그러나 그의 고백은 과장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고해와 같은 세상에서 130년을 살아 오면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의 일생을 간단히 살표보면 그는 젊어서 어머니와 생이별을 했고,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결혼 첫날부터 신부가 뒤바뀌는 일이 생기고 그 후에 본이 아니게 아내를 네사람이나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처가살이를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야곱은 얼마나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취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니내었나이다"라고 창31:40에서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처가살이를 끝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장 사랑했던 아내인 라헬이 두번째 아이 를 낳고 죽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동딸 디나가 세겜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로인해 야곱의 세 아들이 살인을 함으로 야곱을 근심케 했고, 장자 루우벤이 야곱의 첩 중에서 가장 나이어린 빌하와 분륜의 관 계를 맺어서 집안이 온통 뒤집이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하루 아침에 행방불명이되어 버리는 사건이 터졌 습니다. 이때 야곱이 받은 충격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할 정도로 야곱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년 후에 밀어닥친 7년 대 기근으로 비참한 재앙이 임할 때 요셉이 살아 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요셉을 만나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서 낯선 애굽 땅으로 이민을 떠나는 그 였지만 야곱의 생애는 실로 파란만장한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 중에서 아무리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야곱과 같이 온갖 험한 꼴을 골고로루 보면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하나님께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이 만난 인생의 풍랑 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우리 인생의 바다에도 풍 랑은 자주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 16:33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하셨지 왜 우리가 환 난을 당한다고 그 원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전에서 주무시는 주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함께하시는 주님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않된다는 것 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이상 그 배는 절대로 풍랑에 침물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인생의 푹풍을 주관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그 풍랑을 잔 잔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에게 불어 닥치는 풍랑이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되었고 그리고 왜 부러오는지 또한 지금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몰라도 됩니다. 다만 주님이 나에게 어떠한 분이신가를 바라만 보세요. 그리하면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이 됩니다. 두번째 인생의 바다에서 고난과 풍랑이 내게 임하면 주님을 불 러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무서워하며 비명을 지르 며 살아남기 위해 정신없이 물을 퍼냈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풍랑은 그 칠줄을 몰랐습니다. 결국 풍랑과 싸워 지쳐버린 제자들은 할 수 없이 배 안에서 주무시는 주님을 불러 깨웠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향해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주님 을 불렀습니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의 부름을 듣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 습니다. 믿음의 성도, 믿음의 가정, 또한 교회도 환난의 풍랑이 불어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풍랑 속에서 남을 원망하고 형제를 원 망하며 부모를 원망하면서 탄식하고 환경을 원망하며 절망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탄식하며 절망할 것이 아니라 환난날에 하나님을 불러 야 합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날에 당신을 부르라고 했습니다. 환난의 풍랑은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 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 중에는 노련한 갈릴리 바 다의 어부 출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풍랑을 만나자 그들은 전에 하던대로 풍랑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으로는 불가능했 습니다. 결국 지쳐버린 제자들은 주님을 부른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바다에서 환난의 풍랑을 만나면 주님을 먼저 부르기 보다는 그것을 내 힘으로 해결해 볼려고 애쓰며 노력하며 밤잠을 못자면서까지 고민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제자들이 풍랑을 멈추게 할 수 없듯이 우리에게 닥치는 인생의 풍랑도 우리가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 들처럼 환난날에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의 풍랑을 만 났을 때에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은 환난의 풍랑 속에서 건저 주신다고 약속하셧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난의 풍파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면 이는 곧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인생의 바다에서 고난과 환난의 풍랑이 내게 임하면 믿음을 잃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적은 믿음을 가진 제자들을 꾸중하셨지만 그러나 그 적 은 믿음을 축복해 주시고 풍랑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폭풍을 만났을 때에 자기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볼려고 했 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한계점에 도달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곤히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일 어나셔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 하는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책망으로만 끝나는 말씀이 아닙니다. 즉 적 은 믿음이라는 말은 제자들의 믿음이 적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그치지 아 니하고 더 나아가서 적은 믿음이나마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시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금과 같습니다. 벧전01:0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 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양이 적든 많든 금은 금인 것처럼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로서 크고 적음에 상관 없이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은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적은 믿음이 우리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어떤 면에서는 불순한 믿음 처럼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이라도 주님은 절대로 과소평가 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 생의 바다에서, 환란의 풍랑 앞에서, 누구든 온전한 산 믿음의 행위를 나 타내 보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의 눈에 비 친 우리의 모든 믿음은 적은 믿음이지 큰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적은 믿음이라도 제자들이 가졌기에 환난날에 주님을 깨울 수가 있었 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적은 믿음은 우리의 인생 항로에서 기도하게 만 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환난의 풍랑을 만났을 때 이 적은 믿음이 있으면 주님을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이 적은 믿음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사용하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큰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작지만 그 믿음이 진실한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라고 말씀 하셨읍니다. 겨자씨는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겨자씨가 땅에 떨어저 싹이 나고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와서 집을 짖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천국을 소망하고 있는데, 믿음이 우리의 그 기대를 충족시켜 줄 만한 실체를 준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권리증서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경치좋은 별장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영업사원이 여러분들에게 "나는 그곳에 많은 별장들이 있는데 천만원을 내신다면 이 증서를 드리겠소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돈을 내고 권리증서를 받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여러분 들은 그 별장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수 년 동안 그곳에 가볼 기회가 없 다 하더라도 권리증서가 모든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는 한 여러분들은 그것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로부터 여러분들은 그것을 누릴 권 한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즉,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의 권리 증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세계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고 그 것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즉 믿음은 크고 작은 것 에 상관 없이 바라는대로 실상처럼 이루워 집니다. 여러분 ! 주님은 작은 믿음도 절대로 과소평가 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 하고 담대한 큰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적은 믿음을 소유 한 제자들은 환난날에 주님을 깨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믿음 은 우리의 인생 항로에서 기도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환난 의 풍랑을 만났을 때 적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주님을 부르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이 적은 믿음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사용하는냐에 달려 있읍니다. 주님은 큰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작지만 그 믿음이 진실한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비유로 말씀하신 겨자씨는 사람의 눈으로 식별하기 어 려울 정도로 매우 작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 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 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겨자씨는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겨자씨 가 땅에 떨어저 싹이 나고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와서 집을 짖 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지만 그러나 이 작은 믿음이 나의 인생 길에서 불어 닥치는 환난의 풍랑을 잔잔 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내게 있는 이 작은 믿음을 가지고 먼저는 주님을 바라보시고 그리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확신하면 주님을 부르세요. 그리하면 주님은 우리 인 생의 길에서 일어나는 모든 풍파를 잔잔케 해 주십니다. 절대로 예수 믿는 내 가 왜 고난을 당해야만 합니까 라고 묻지도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 지도 맙십니다. 오직 지금 나에게 밀어닥친 이 고난의 풍랑을 어떻게하면 잔 잔하게 할 수 있는가 라는 방법만을 믿음 안에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조금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양이 적든 많든 금은 금인 것처럼 믿음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크고 적음에 상관 없이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은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믿음이라는 것 입니다. 그언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 작은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부르짖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바람과 파도를 잔 잔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 심령속에는 살아 있는 작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난날에 주님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바다 에서 고난과 환난의 풍랑이 내게 임하면 믿음이 크던 작던 잃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주님은 제자들의 적은 믿음을 축복해 주시고 풍 랑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역시 환난날에 주님께 부르짖 으면 주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고난과 환난의 풍랑을 멈추게 하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인생의 풍 랑"이라는 말씀의 제목을 걸어놓고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분주하고 피곤한 하루를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들을 떠나 다른 지방으로 가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예상치 못한 풍량이 갑자기 일어나 큰 위기를 직면하 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서워하며 비명을 지르며 살아남기 위하여 정신 없이 물을 퍼냈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풍랑은 그칠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랑곳 하시지 아니하시고 평온하게 주무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풍랑과 싸우다 지쳐버린 제자들 은 할 수 없이 풍랑 속에서도 배안에서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그 때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무 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면서 풍랑을 멈추게 하셨 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서 일어난 갈릴리 바다의 풍랑의 사건은 막연히 그들이 풍랑 속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잘 건너 갔다는 이야기를 우리 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 풍랑의 사건은 우리 에게 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인생은 고해 와 같다고 말들을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인생이란 풍랑이 언제 어느때 갑자기 불어 닥칠지 알 수 없는 바다와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평안하던 가정이 내일 갑자기 불행이 닥치고 오늘 건강하던 사람이 내일은 이 세상 사람이 않인 일들이 우리의 삶에서 흔히들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도 마치 바다라는 망망 대해를 향 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 났을 때의 한 장면은 우리 신앙생활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일종의 신비스러운 바다입니다. 더욱이 수면은 지중해 바다보다 200미터 가량 낮은 바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곳 기후는 온하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계곡을 타고 찬바람이 불면 지금까지 고요하던 수면이 갑자기 노한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푹풍이 불어 닥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바다이기 때문에 신비의 바다 이상한 바다입니다. 이 바다는 이러한 현상 때문에 마치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 인생들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이 갈릴리 바다처럼 언제 어느때 고난의 풍퐁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의 생활이 편하고 걱정이 별로 없어도 마음 한 구석에는 형통한 것이 오히려 불안의 요소 가 되기도 합니다. 즉 때로는 우리의 인생이 마치 유리 같이 맑은 바닷 길을 순풍에 돛을 달고 힘차게 달려가면서도 마음 한 쪽에는 불안과 공 포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 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는데도 불구하고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을 모시고 건너가면 오히려 일어났던 풍랑도 잔잔해져야 하는데 왜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길에 폭풍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겨 야 했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즉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불행했던 삶이 행복해지고 또 인생의 고통 이 평안으로 바뀌어 지는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종종 어려운 일이 생기는 경우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신앙 생활을 하면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러나 우리가 살다보 면 예수 믿는 사람도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가정은 집안이 파산되고, 어떤 성도는 사업에 실패하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이가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큰 슬품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삶의 비극을 당하게되면 아무리 믿음을 가진 신앙인도 어쩔 수 없이 절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극의 풍 랑 앞에서 아무리 몸부림을 치며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을 바 꾸어 주시기 커녕 오히려 어두운 절망의 골짝기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 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로 구약에 보면 우수 땅에 사는 욥이라는 분이 그렇습니다.
욥은 성경에서 말하기를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 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축복 을 밭아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인 욥 에게 큰 불행의 풍랑이 불어 닥쳤습니다. 욥의 열 자녀들이 어느날 그 맏형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에 들에서 거친 태풍이 불 어와 집 네 모통이를 치는 바람에 집이 무너지므로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도독때들이 와서 욥의 종들을 죽이고 재산을 모두 끌어 갔습니다. 그리고 욥은 발 정수리에서부터 머리 까지 악성 종기가 나서 심한 아품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의인이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엄청난 비극의 풍랑을 만났습니다. 욥은 악 을 밭갈고 독을 뿌렸기 때문에 재앙을 거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의인이 당하는 불행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떤 불행을 당할 때마다 인간적인 설명으로 불행에 따르는 해답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경솔한 짓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사람이 설명 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신비는 하나님 만이 아십니다. 시편73편에 보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만 선을 행하시는 분인데 그러나 내가 보니 의인보다 악인이 더 형통하여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으며 죽을 때 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남을 능육하고 악하게 압제를 해도 오히려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의인은 종일 재앙을 당하며 책벌을 받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하고 재물이 더하고 건강하게 지내면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잘 되지 않고 어려움을 당하고 건강을 잃어 버리게 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또는 징계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해야만 합니까 하는 이 문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내가 왜 이런 고난의 풍 랑을 만나야만 하는가 그리고 나에게 불어오는 고난의 풍랑을 처음부터 막을 수는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 보다는 지금 나에게 밀어닥친 이 고난의 풍랑을 어떻게하면 잔잔하게 할 수 있는가 라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은 나와 우리 집은 잔잔한 바다위에 순풍에 돛을 달고 목적 지를 향해 가지만 언젠가는 나에게도 틀림 없이 인생의 풍랑이 닥치게되 면 어떤 준비를 할 것이가를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핵심적인 교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 니라 폭풍을 만난 그들에게 예수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갈릴리 바다에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음에 도 불구하고 풍랑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인생의 고해와 같은 항로에서도 어 려움과 고통과 슬품을 당해도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지 않고 그 풍 랑 속에서 침목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라는 분이 그 풍랑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동행하신 분이 주님이시라면 역시 우리 인 생의 항로에도 주님이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이 인생의 풍랑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세상에 유일 한 소망의 빛이십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 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도에게 환난의 풍랑이 임하면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그 풍랑 속에서도 평온하게 조용히 주무시고 계셨 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인생의 환난의 풍랑 속에서 거이 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은 야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130년을 살 고난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창47:9에서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어마어마한 축복을 주셨는데 어찌하여 그는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을 했을까요 그러나 그의 고백은 과장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고해와 같은 세상에서 130년을 살아 오면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의 일생을 간단히 살표보면 그는 젊어서 어머니와 생이별을 했고,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결혼 첫날부터 신부가 뒤바뀌는 일이 생기고 그 후에 본이 아니게 아내를 네사람이나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처가살이를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야곱은 얼마나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취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니내었나이다"라고 창31:40에서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처가살이를 끝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장 사랑했던 아내인 라헬이 두번째 아이 를 낳고 죽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동딸 디나가 세겜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로인해 야곱의 세 아들이 살인을 함으로 야곱을 근심케 했고, 장자 루우벤이 야곱의 첩 중에서 가장 나이어린 빌하와 분륜의 관 계를 맺어서 집안이 온통 뒤집이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하루 아침에 행방불명이되어 버리는 사건이 터졌 습니다. 이때 야곱이 받은 충격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할 정도로 야곱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년 후에 밀어닥친 7년 대 기근으로 비참한 재앙이 임할 때 요셉이 살아 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요셉을 만나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서 낯선 애굽 땅으로 이민을 떠나는 그 였지만 야곱의 생애는 실로 파란만장한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 중에서 아무리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야곱과 같이 온갖 험한 꼴을 골고로루 보면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하나님께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이 만난 인생의 풍랑 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우리 인생의 바다에도 풍 랑은 자주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 16:33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하셨지 왜 우리가 환 난을 당한다고 그 원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전에서 주무시는 주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함께하시는 주님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않된다는 것 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이상 그 배는 절대로 풍랑에 침물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인생의 푹풍을 주관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그 풍랑을 잔 잔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에게 불어 닥치는 풍랑이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되었고 그리고 왜 부러오는지 또한 지금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몰라도 됩니다. 다만 주님이 나에게 어떠한 분이신가를 바라만 보세요. 그리하면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이 됩니다. 두번째 인생의 바다에서 고난과 풍랑이 내게 임하면 주님을 불 러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무서워하며 비명을 지르 며 살아남기 위해 정신없이 물을 퍼냈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풍랑은 그 칠줄을 몰랐습니다. 결국 풍랑과 싸워 지쳐버린 제자들은 할 수 없이 배 안에서 주무시는 주님을 불러 깨웠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향해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주님 을 불렀습니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의 부름을 듣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 습니다. 믿음의 성도, 믿음의 가정, 또한 교회도 환난의 풍랑이 불어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풍랑 속에서 남을 원망하고 형제를 원 망하며 부모를 원망하면서 탄식하고 환경을 원망하며 절망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탄식하며 절망할 것이 아니라 환난날에 하나님을 불러 야 합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날에 당신을 부르라고 했습니다. 환난의 풍랑은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 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 중에는 노련한 갈릴리 바 다의 어부 출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풍랑을 만나자 그들은 전에 하던대로 풍랑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으로는 불가능했 습니다. 결국 지쳐버린 제자들은 주님을 부른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바다에서 환난의 풍랑을 만나면 주님을 먼저 부르기 보다는 그것을 내 힘으로 해결해 볼려고 애쓰며 노력하며 밤잠을 못자면서까지 고민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제자들이 풍랑을 멈추게 할 수 없듯이 우리에게 닥치는 인생의 풍랑도 우리가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 들처럼 환난날에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의 풍랑을 만 났을 때에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은 환난의 풍랑 속에서 건저 주신다고 약속하셧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난의 풍파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면 이는 곧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인생의 바다에서 고난과 환난의 풍랑이 내게 임하면 믿음을 잃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적은 믿음을 가진 제자들을 꾸중하셨지만 그러나 그 적 은 믿음을 축복해 주시고 풍랑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폭풍을 만났을 때에 자기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볼려고 했 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한계점에 도달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곤히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일 어나셔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 하는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책망으로만 끝나는 말씀이 아닙니다. 즉 적 은 믿음이라는 말은 제자들의 믿음이 적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그치지 아 니하고 더 나아가서 적은 믿음이나마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시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금과 같습니다. 벧전01:0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 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양이 적든 많든 금은 금인 것처럼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로서 크고 적음에 상관 없이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은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적은 믿음이 우리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어떤 면에서는 불순한 믿음 처럼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이라도 주님은 절대로 과소평가 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 생의 바다에서, 환란의 풍랑 앞에서, 누구든 온전한 산 믿음의 행위를 나 타내 보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의 눈에 비 친 우리의 모든 믿음은 적은 믿음이지 큰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적은 믿음이라도 제자들이 가졌기에 환난날에 주님을 깨울 수가 있었 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적은 믿음은 우리의 인생 항로에서 기도하게 만 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환난의 풍랑을 만났을 때 이 적은 믿음이 있으면 주님을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이 적은 믿음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사용하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큰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작지만 그 믿음이 진실한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라고 말씀 하셨읍니다. 겨자씨는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겨자씨가 땅에 떨어저 싹이 나고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와서 집을 짖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천국을 소망하고 있는데, 믿음이 우리의 그 기대를 충족시켜 줄 만한 실체를 준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권리증서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경치좋은 별장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영업사원이 여러분들에게 "나는 그곳에 많은 별장들이 있는데 천만원을 내신다면 이 증서를 드리겠소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돈을 내고 권리증서를 받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여러분 들은 그 별장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수 년 동안 그곳에 가볼 기회가 없 다 하더라도 권리증서가 모든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는 한 여러분들은 그것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로부터 여러분들은 그것을 누릴 권 한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즉,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의 권리 증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세계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고 그 것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즉 믿음은 크고 작은 것 에 상관 없이 바라는대로 실상처럼 이루워 집니다. 여러분 ! 주님은 작은 믿음도 절대로 과소평가 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 하고 담대한 큰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적은 믿음을 소유 한 제자들은 환난날에 주님을 깨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믿음 은 우리의 인생 항로에서 기도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환난 의 풍랑을 만났을 때 적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주님을 부르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이 적은 믿음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사용하는냐에 달려 있읍니다. 주님은 큰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작지만 그 믿음이 진실한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비유로 말씀하신 겨자씨는 사람의 눈으로 식별하기 어 려울 정도로 매우 작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 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 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겨자씨는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겨자씨 가 땅에 떨어저 싹이 나고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와서 집을 짖 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지만 그러나 이 작은 믿음이 나의 인생 길에서 불어 닥치는 환난의 풍랑을 잔잔 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내게 있는 이 작은 믿음을 가지고 먼저는 주님을 바라보시고 그리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확신하면 주님을 부르세요. 그리하면 주님은 우리 인 생의 길에서 일어나는 모든 풍파를 잔잔케 해 주십니다. 절대로 예수 믿는 내 가 왜 고난을 당해야만 합니까 라고 묻지도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 지도 맙십니다. 오직 지금 나에게 밀어닥친 이 고난의 풍랑을 어떻게하면 잔 잔하게 할 수 있는가 라는 방법만을 믿음 안에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조금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양이 적든 많든 금은 금인 것처럼 믿음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크고 적음에 상관 없이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은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믿음이라는 것 입니다. 그언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 작은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부르짖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바람과 파도를 잔 잔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 심령속에는 살아 있는 작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난날에 주님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바다 에서 고난과 환난의 풍랑이 내게 임하면 믿음이 크던 작던 잃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주님은 제자들의 적은 믿음을 축복해 주시고 풍 랑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역시 환난날에 주님께 부르짖 으면 주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고난과 환난의 풍랑을 멈추게 하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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