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함께 하시는 평안 (마8:23-27)
본문
우리는 평안한가:오늘 읽은 본문에서 중심되는 주제어를 찾으라면 '평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이상, 우리는 평안을 누림이 마땅한데, 그 평안은 다른 것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풍랑이 이는 바닷가에서 목숨이 위기에 처한 제자들의 모습과 아울러 풍랑을 잠잠케 하신 주님을 통해 인생의 풍랑과 주님의 구원하심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시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에 대해서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주가 함께 하시는 평안
1.본문의 개요 큰 파도를 잠재우신 이 사건은 마가복음(4:35-41)과 누가복음(8:22-25)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사건이 독립된 기적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는 '제자직에 대한 설교'와 곧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1) 이 사건의 시작인 23절은 '제자들이 좇았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좇았다'는 말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아콜루데오'(ακολουθεω)입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서 '제자됨'을 특징짓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2) 마태복음에는 '다른 배들도 함께 있었다든지', '예수님이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든지'하는 내용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즉, 제자직의 교훈과 관련이 없는 내용은 생략하고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단순히 기적의 사건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격이 필요한가'하는 관점과 '제자가 된 자들이 누리게 되는 평안' 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8:23-27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8:18-22절의 말씀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1)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8:19-20에는 한 서기관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여기서 서기관은 예수님을 좇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여우'는 헤롯과 헤롯당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는 로마 당국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에 팔레스틴을 다스리는 세상 권력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분봉왕 헤롯이요, 다른 하나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 권력자는 왕궁을 소유하고 있었고, 온갖 부와 권세를 누렸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인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가장 우선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8:21-22에는 한 제자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거기서 제자는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도 그랬듯이 이 말씀은 유대인의 일상적인 어법을 알아야지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여행을 함께 가자고 청할 때에, 유대인들은 '내가 부친을 장사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그의 부친이 위독하거나 이미 사망해서 장례식을 치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친을 봉양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뜻입니다. 부친이 살아 계실 때까지는 자식된 도리를 다 하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부친을 장사기내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지, 몇 십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제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뒤로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먼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부친을 봉양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우선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무엇보다 주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다른 것보다 삶의 우선순위를 제자가 되는 것에 두어야합니다.
3) 좇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고, 그의 제자가 되는 일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삼는 사람은 그를 좇아야 합니다. 23절은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타시자, 제자들도 그 배에 함께 탔던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의 삶은 현재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탔고, 그 배가 떠 있는 곳은 갈릴리 바다였습니다. 갈릴리는 남북의 길이가 21킬로미터고, 동서의 길이가 13킬로미터로서, 호수치고는 크기가 작습니다. 기압의 차이에 의해서 공기가 움직이는 현상을 우리는 '바람'이라고 부릅니다. 기압의 차이가 심할수록 바람의 크기는 더 세어집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의 주위에는 크고 작은 계곡이 있습니다. 반면에 호수의 수면은 바다보다 200미터가 더 낮습니다. 이 때문에 산과 호수의 기압의 차이가 큽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수는 갑작스럽고도 큰 바람이 곧잘 불곤 합니다. 그때에도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24절은 '바다에 큰 놀이 일어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놀'에서 '놀'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세이스모스'(σεισμο)입니다. 이 '세이스모스'라는 말은 '폭풍'이라는 뜻입니다. ⇒ '세이스모스'(σεισμο)는 원래 '지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다에 폭풍이 일면, 파고의 위와 아래가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때는 배가 양쪽의 높은 파도 사이에 깊숙히 끼여 있는 것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지진이 일어나서 집이 갈라진 땅 사이로 떨어져 버린 것과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에는 엄청난 바람과, 큰 파도가 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를 뒤흔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여기저기서 몰아치고, 배에는 물이 들이차서,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았습니다.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하도 거세어서, 배의 방향을 전혀 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살기 위해서 안깐힘을 다 했습니다. 인간이란 대 자연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입니까
그런데다 바다에서의 상황은 더 무썹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삶과 죽음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파도와 거센 바람이 갈릴리 바다를 덮쳤습니다. 배에 탄 제자들은 삽시간에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2.위기의 때에 만나게 되는 주님과 주가 함께하시는 평안 하지만 이 요란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 때 비로소 제자들은 주께서 함께하시는 평안을 누릴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위기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믿음이 적음을 꾸짖으시고, 그 다음에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고난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 오는 불청객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37은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계신 배에도 풍랑이 일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배에도 물이 가득찼다면, 우리 인생에도 고난과 시련의 물결이 밀려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이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서, 이 세상의 고난과 시련에서 결코 제외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아니 제자의 길은 반드시 인생의 거센 풍랑과 위협적인 파도를 견뎌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고난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고난을 이길 넉넉한 힘을 주십니다.
2) 주님의 침묵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우왕좌왕할 때 예수님은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이 주무셨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침묵을 말합니다. 극도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침묵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침묵하는 주님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결코 침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3) 주님의 책망. 제자들은 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기 속에서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예수님은 파도를 먼저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먼저 꾸짖으셨습니다. 두려움은 바로 큰 파도 때문이 아니라, 적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나약한 믿음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람도 사라졌고,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그때에 아마도 제자들은 이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아! 우리가 몸부림치며, 우왕좌왕하고 있는 바로 이곳에 주님이 계시구나!' 여러분들은 도대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길래 염려합니까 여러분이 염려하고 절망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에 주님이 잠들어 계신 한, 여러분의 어떤 문제도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주를 향해 두 팔들고 기도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어떠한 염려와 위기와 절망에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결론:우리 속에서 잠이 드신 주님을 깨우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혹시라도 염려하며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에 염려하시거나 절망가운데 빠져 있으시다면 우리의 마음 속에 전능하신 주님이 계신 것을 믿고, 오직 우리 주님께서 나의 모든 어려움이나 소원하는 것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시기에 우리의 모든 간구하는 것을 들어주시는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염려하고 걱정하기에 앞서서 먼저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간구로써,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에 잠자고 있는 주님을 깨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모든 염려와 위기와 절망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며, 참된 평안을 누리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본문의 개요 큰 파도를 잠재우신 이 사건은 마가복음(4:35-41)과 누가복음(8:22-25)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사건이 독립된 기적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는 '제자직에 대한 설교'와 곧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1) 이 사건의 시작인 23절은 '제자들이 좇았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좇았다'는 말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아콜루데오'(ακολουθεω)입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서 '제자됨'을 특징짓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2) 마태복음에는 '다른 배들도 함께 있었다든지', '예수님이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든지'하는 내용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즉, 제자직의 교훈과 관련이 없는 내용은 생략하고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단순히 기적의 사건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격이 필요한가'하는 관점과 '제자가 된 자들이 누리게 되는 평안' 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8:23-27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8:18-22절의 말씀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1)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8:19-20에는 한 서기관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여기서 서기관은 예수님을 좇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여우'는 헤롯과 헤롯당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는 로마 당국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에 팔레스틴을 다스리는 세상 권력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분봉왕 헤롯이요, 다른 하나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 권력자는 왕궁을 소유하고 있었고, 온갖 부와 권세를 누렸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인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가장 우선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8:21-22에는 한 제자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거기서 제자는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도 그랬듯이 이 말씀은 유대인의 일상적인 어법을 알아야지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여행을 함께 가자고 청할 때에, 유대인들은 '내가 부친을 장사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그의 부친이 위독하거나 이미 사망해서 장례식을 치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친을 봉양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뜻입니다. 부친이 살아 계실 때까지는 자식된 도리를 다 하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부친을 장사기내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지, 몇 십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제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뒤로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먼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부친을 봉양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우선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무엇보다 주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다른 것보다 삶의 우선순위를 제자가 되는 것에 두어야합니다.
3) 좇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고, 그의 제자가 되는 일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삼는 사람은 그를 좇아야 합니다. 23절은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타시자, 제자들도 그 배에 함께 탔던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의 삶은 현재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탔고, 그 배가 떠 있는 곳은 갈릴리 바다였습니다. 갈릴리는 남북의 길이가 21킬로미터고, 동서의 길이가 13킬로미터로서, 호수치고는 크기가 작습니다. 기압의 차이에 의해서 공기가 움직이는 현상을 우리는 '바람'이라고 부릅니다. 기압의 차이가 심할수록 바람의 크기는 더 세어집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의 주위에는 크고 작은 계곡이 있습니다. 반면에 호수의 수면은 바다보다 200미터가 더 낮습니다. 이 때문에 산과 호수의 기압의 차이가 큽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수는 갑작스럽고도 큰 바람이 곧잘 불곤 합니다. 그때에도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24절은 '바다에 큰 놀이 일어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놀'에서 '놀'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세이스모스'(σεισμο)입니다. 이 '세이스모스'라는 말은 '폭풍'이라는 뜻입니다. ⇒ '세이스모스'(σεισμο)는 원래 '지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다에 폭풍이 일면, 파고의 위와 아래가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때는 배가 양쪽의 높은 파도 사이에 깊숙히 끼여 있는 것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지진이 일어나서 집이 갈라진 땅 사이로 떨어져 버린 것과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에는 엄청난 바람과, 큰 파도가 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를 뒤흔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여기저기서 몰아치고, 배에는 물이 들이차서,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았습니다.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하도 거세어서, 배의 방향을 전혀 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살기 위해서 안깐힘을 다 했습니다. 인간이란 대 자연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입니까
그런데다 바다에서의 상황은 더 무썹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삶과 죽음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파도와 거센 바람이 갈릴리 바다를 덮쳤습니다. 배에 탄 제자들은 삽시간에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2.위기의 때에 만나게 되는 주님과 주가 함께하시는 평안 하지만 이 요란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 때 비로소 제자들은 주께서 함께하시는 평안을 누릴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위기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믿음이 적음을 꾸짖으시고, 그 다음에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고난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 오는 불청객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37은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계신 배에도 풍랑이 일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배에도 물이 가득찼다면, 우리 인생에도 고난과 시련의 물결이 밀려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이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서, 이 세상의 고난과 시련에서 결코 제외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아니 제자의 길은 반드시 인생의 거센 풍랑과 위협적인 파도를 견뎌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고난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고난을 이길 넉넉한 힘을 주십니다.
2) 주님의 침묵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우왕좌왕할 때 예수님은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이 주무셨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침묵을 말합니다. 극도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침묵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침묵하는 주님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결코 침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3) 주님의 책망. 제자들은 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기 속에서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예수님은 파도를 먼저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먼저 꾸짖으셨습니다. 두려움은 바로 큰 파도 때문이 아니라, 적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나약한 믿음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람도 사라졌고,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그때에 아마도 제자들은 이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아! 우리가 몸부림치며, 우왕좌왕하고 있는 바로 이곳에 주님이 계시구나!' 여러분들은 도대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길래 염려합니까 여러분이 염려하고 절망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에 주님이 잠들어 계신 한, 여러분의 어떤 문제도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주를 향해 두 팔들고 기도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어떠한 염려와 위기와 절망에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결론:우리 속에서 잠이 드신 주님을 깨우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혹시라도 염려하며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에 염려하시거나 절망가운데 빠져 있으시다면 우리의 마음 속에 전능하신 주님이 계신 것을 믿고, 오직 우리 주님께서 나의 모든 어려움이나 소원하는 것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시기에 우리의 모든 간구하는 것을 들어주시는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염려하고 걱정하기에 앞서서 먼저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간구로써,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에 잠자고 있는 주님을 깨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모든 염려와 위기와 절망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며, 참된 평안을 누리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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