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삶 (마6:9-13)
본문
주기도문의 세번째 기원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간구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창조된 세상(헬, 코스모스=질서)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인간의 범죄와 더불어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질서와 목적에 어긋나있음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파괴되지 않은 영적 질서의 완전한 통치가 하늘(하나님 나라)에서 “현제”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 이후 죄 아래 파괴된 질서와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행복이 구원의 은총 속에서 나타나기를 희망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삶의 모습을 통해 이 땅에서도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 주기도문의 세번째 간구입니다. 따라서 이 기원은 자신의 욕구와 이기적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기를”(give me) 요청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살리시고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베푸신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여 이제는 보답하는 생애가 되기를 소원하는 차원에서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 나타나는 일에 자신을 도구로써 마음대로 사용해 주시기를 기쁘게 청원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선택권을 자신을 살리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삼으신 아버지께 드림으로써 자신을 사용할 권리와 자유가 아버지께 속했음을 고백하고 선언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의 세번째 간구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
1.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의 뜻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의 기원은 주기도문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원은 구원받은 모든 자녀들의 삶의 목표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으로서(요5:30, 6:38, 39)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모든 말씀과 삶을 통해 적나라하게 나타났습니다. 특히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또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라고 기도했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속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할 때,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뜻이 나타난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능력(감당할 힘)을 주실 것을 비는 애절한 기도의 모습은 제자들의 눈에 흘리는 땀방울이 핏방울로 보였습니다. 완전한 신(God)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주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무의미한 기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간절한 기도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께서는 그 후의 갖은 모욕과 고통과 억울함과 침뱉음과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난 아버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믿는 죄인들이 구원을 얻는것”이며 동시에 먼저 부르심을 입은 성도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자녀들이 이 땅에서의 삶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하여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여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뜻을 이루는 일에 그릇(도구;딤후2:20,21)으로 사용될 경우에만 참된 기쁨과 만족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이 악한 세대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생애 최고의 삶의 목표를 성취하게 됩니다.
2.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자세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구원의 하나님)으로 알지 못했던 스토아 철학자들도 “모든 일이 신의 뜻이라면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곧 인간의 행복과 자유를 의미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세네카의 “행복한 삶에 관하여”라는 그의 저서 소위행복론에도 “신의 뜻에 순종하는 길만이 곧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역설되어 있습니다. 또한 “운명은,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의 길을 인도한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는 질질 끌려간다”라고 고백한 시인(크레안데스)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지 못한 이교도들도 이러한 고백을 함으로써 행복과 자유를 얻었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야 얼마나 더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생애를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가 네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William barclay의 주석에서).
첫째,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 이외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대한 분노와 반항을 느끼면서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종이나 고백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진정한 아버지의 영광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하나님 자녀들의 모습이 아니라 불신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제법 똑똑하고 지혜있다고 자처하는 운명론자들이나 숙명론자들이 자신의 무능함 속에서의 불만의 고백일 뿐입니다.
둘째,심한 분노를 느끼지는 않지만 체념 속에서 자신의 패배를 억지로 신인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의 표시라면 그것은 마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복종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와는 거리가 먼 삶의 모습입니다.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하고 주일을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날로 선포한 사람은 콘스탄틴 황제입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의 결정을 무효화시키고 로마의 옛 신들과 황제자신의 숭배 신앙을 환원시키려던 로마의 쥴리안 황제는 동방 정복의 전투 도중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죽어갈 때 그는 자신의 피를 한 줌 뿌리면서 “여보시오, 갈리리 사람(예수)! 당신이 이겼소”라고 고백하면서 죽어갔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했습니다.
셋째,자기 스스로는 아무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지하려는 자세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으며 또한 인간은 그 뜻을 거역할 수 없기에 그 뜻에 순종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차원에서의 순종은 “좌절은 경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얻는 기쁨이나 희열이나 감사는 맛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구원의 하나님이요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아버지께 대한 깊은 신뢰(Trust)와 사랑(애정) 그리고 그의 뜻을 행하려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임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자녀의 아버지를 향한 순종”입니다. 즉 “아버지께서는 그의 자녀를 사랑하시며, 결코 이유없는 고난과 슬픔을 겪게 하시지는 않는다는 확신”속에서 주님의 뜻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유익(비록 그것이 욥에 임한 고난과 같은 것일지라도)이 되며 정의로우시며 부당한 일을 하실 수 없는 참되신 하나님으로 믿는 철저한 신뢰가 순종의 의지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때때로 자신의(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자신의(우리의) 욕구를 관철시키려는 공격적인 자세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기도는 기도를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뜻 아래 자신의 욕구나 의지가 굴복당하기를 기쁘게 허락하는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를 통해 자신의 요구나 이기적인 욕망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영육간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성도의 삶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원수는 우리의 교만입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원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통채로 삼켜버림으로써 자신이 하나님보다 한 걸음 앞서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맙니다. 이처럼 자신의 마음 속에 교만과 고집이 들어있는 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과 주장과 결정이 더 옳은 것 같고 또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한,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선하신 뜻은 자신의 삶 속에서 언제나 냉대를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1)자신의 삶은 먼저 하나님의 “지혜”를 반드시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됨을 나타냅니다. 기독교가 확립되기 전부터 스토아 철학자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은 없다고 믿었으며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진행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네카는 “나는 신에게 단순히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 뜻에 따르기 때문에 신께 복종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영원 속에서 인간과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유익(구원과 구원을 통해 수반되는 모든 행복)과 합치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뜻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순종하기 위해 그의 무한하신 지혜를 믿어야 합니다.
2)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확실하게 믿을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생애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무분별하고 무차별하게 함부로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입니다. 불의의 교통사고, KAL기 공중폭발사건, 불치의 병으로 신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 천재지변 등으로 재난을 당해 낙심 중에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범한 죄의 결과이며 피해자자 가해자 모두가 인류 사회의 제도, 이념의 죄로 인한 그 결과들로서 인간들이 책임져야 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해야 할 요소일 뿐입니다. 인간의 불행이나 비참한 사건들의 모든 원인은 죄의 결과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만 용서받고 위로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들”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비참함이나 불행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것은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시킴으로써 자신은 죄가 없다고 고집하는 교만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중상모략이며 모독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원은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교만과 이기심의 극대화 속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극복하여 그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강건해져서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을 이전보다 더욱 잘 보살피면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기회로 삼게 해달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즉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까지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일에 도구로 사용되기를 기뻐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억울함의 신원해 주심과 유익하게 해주실 것으로 믿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주기도문의 세번째 간구 속에 담겨 있는 삶의 원리입니다.
3)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의 고백은 어떤 문제 해결의 차원을 넘어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유와 권리가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간구하는 청원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의 기도는 십자가의 잔이 지나가기를 구하는 문제 해결의 차원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자신이 인류를 대신하여 당해야 할 그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내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구하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선한 뜻 아래서 친구나 이웃이나 교회나 국가나 이념이나 제도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즉 세상을 살아갈 때 당하는 고통이나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려움과 고통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들어가 죽는 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하나냐), 메삭(미사엘), 야벳느고(아사랴)를 보십시오(단3:17, 18). 자신 앞에 놓여있는 위험과 역경을 벗어나 도망치지 않고 과감히 맞붙어 싸우는 용기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의심없는 애정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었던 그들의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삶”은 바로 이 시대의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내야 할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결론 우리의 삶의 원리는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쳐 버렸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참된 투쟁의 삶이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기쁨과 행복은 포기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가장 중심에 모시고 그 분의 겸손과 순종을 배울 경우에만 주님의 기도처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실질적인 삶을 기쁨과 평안과 행복 속에서 영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자신의 힘찬 신앙고백의 순간, 자신의 이기적인 뜻이나 요구가 산산조각이 나 버림으로써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파괴하려는 사단의 계략이 벌거벗은 몸처럼 드러나는 통쾌한 승리를 “이미” 맛보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파괴되지 않은 영적 질서의 완전한 통치가 하늘(하나님 나라)에서 “현제”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 이후 죄 아래 파괴된 질서와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행복이 구원의 은총 속에서 나타나기를 희망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삶의 모습을 통해 이 땅에서도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 주기도문의 세번째 간구입니다. 따라서 이 기원은 자신의 욕구와 이기적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기를”(give me) 요청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살리시고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베푸신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여 이제는 보답하는 생애가 되기를 소원하는 차원에서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 나타나는 일에 자신을 도구로써 마음대로 사용해 주시기를 기쁘게 청원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선택권을 자신을 살리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삼으신 아버지께 드림으로써 자신을 사용할 권리와 자유가 아버지께 속했음을 고백하고 선언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의 세번째 간구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
1.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의 뜻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의 기원은 주기도문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원은 구원받은 모든 자녀들의 삶의 목표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으로서(요5:30, 6:38, 39)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모든 말씀과 삶을 통해 적나라하게 나타났습니다. 특히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또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라고 기도했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속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할 때,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뜻이 나타난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능력(감당할 힘)을 주실 것을 비는 애절한 기도의 모습은 제자들의 눈에 흘리는 땀방울이 핏방울로 보였습니다. 완전한 신(God)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주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무의미한 기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간절한 기도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께서는 그 후의 갖은 모욕과 고통과 억울함과 침뱉음과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난 아버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믿는 죄인들이 구원을 얻는것”이며 동시에 먼저 부르심을 입은 성도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자녀들이 이 땅에서의 삶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하여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여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뜻을 이루는 일에 그릇(도구;딤후2:20,21)으로 사용될 경우에만 참된 기쁨과 만족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이 악한 세대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생애 최고의 삶의 목표를 성취하게 됩니다.
2.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자세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구원의 하나님)으로 알지 못했던 스토아 철학자들도 “모든 일이 신의 뜻이라면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곧 인간의 행복과 자유를 의미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세네카의 “행복한 삶에 관하여”라는 그의 저서 소위행복론에도 “신의 뜻에 순종하는 길만이 곧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역설되어 있습니다. 또한 “운명은,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의 길을 인도한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는 질질 끌려간다”라고 고백한 시인(크레안데스)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지 못한 이교도들도 이러한 고백을 함으로써 행복과 자유를 얻었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야 얼마나 더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생애를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가 네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William barclay의 주석에서).
첫째,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 이외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대한 분노와 반항을 느끼면서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종이나 고백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진정한 아버지의 영광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하나님 자녀들의 모습이 아니라 불신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제법 똑똑하고 지혜있다고 자처하는 운명론자들이나 숙명론자들이 자신의 무능함 속에서의 불만의 고백일 뿐입니다.
둘째,심한 분노를 느끼지는 않지만 체념 속에서 자신의 패배를 억지로 신인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의 표시라면 그것은 마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복종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와는 거리가 먼 삶의 모습입니다.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하고 주일을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날로 선포한 사람은 콘스탄틴 황제입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의 결정을 무효화시키고 로마의 옛 신들과 황제자신의 숭배 신앙을 환원시키려던 로마의 쥴리안 황제는 동방 정복의 전투 도중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죽어갈 때 그는 자신의 피를 한 줌 뿌리면서 “여보시오, 갈리리 사람(예수)! 당신이 이겼소”라고 고백하면서 죽어갔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했습니다.
셋째,자기 스스로는 아무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지하려는 자세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으며 또한 인간은 그 뜻을 거역할 수 없기에 그 뜻에 순종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차원에서의 순종은 “좌절은 경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얻는 기쁨이나 희열이나 감사는 맛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구원의 하나님이요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아버지께 대한 깊은 신뢰(Trust)와 사랑(애정) 그리고 그의 뜻을 행하려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임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자녀의 아버지를 향한 순종”입니다. 즉 “아버지께서는 그의 자녀를 사랑하시며, 결코 이유없는 고난과 슬픔을 겪게 하시지는 않는다는 확신”속에서 주님의 뜻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유익(비록 그것이 욥에 임한 고난과 같은 것일지라도)이 되며 정의로우시며 부당한 일을 하실 수 없는 참되신 하나님으로 믿는 철저한 신뢰가 순종의 의지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때때로 자신의(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자신의(우리의) 욕구를 관철시키려는 공격적인 자세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기도는 기도를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뜻 아래 자신의 욕구나 의지가 굴복당하기를 기쁘게 허락하는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를 통해 자신의 요구나 이기적인 욕망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영육간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성도의 삶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원수는 우리의 교만입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원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통채로 삼켜버림으로써 자신이 하나님보다 한 걸음 앞서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맙니다. 이처럼 자신의 마음 속에 교만과 고집이 들어있는 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과 주장과 결정이 더 옳은 것 같고 또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한,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선하신 뜻은 자신의 삶 속에서 언제나 냉대를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1)자신의 삶은 먼저 하나님의 “지혜”를 반드시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됨을 나타냅니다. 기독교가 확립되기 전부터 스토아 철학자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은 없다고 믿었으며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진행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네카는 “나는 신에게 단순히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 뜻에 따르기 때문에 신께 복종하는 것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영원 속에서 인간과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유익(구원과 구원을 통해 수반되는 모든 행복)과 합치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뜻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순종하기 위해 그의 무한하신 지혜를 믿어야 합니다.
2)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확실하게 믿을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생애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무분별하고 무차별하게 함부로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입니다. 불의의 교통사고, KAL기 공중폭발사건, 불치의 병으로 신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 천재지변 등으로 재난을 당해 낙심 중에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범한 죄의 결과이며 피해자자 가해자 모두가 인류 사회의 제도, 이념의 죄로 인한 그 결과들로서 인간들이 책임져야 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해야 할 요소일 뿐입니다. 인간의 불행이나 비참한 사건들의 모든 원인은 죄의 결과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만 용서받고 위로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들”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비참함이나 불행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것은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시킴으로써 자신은 죄가 없다고 고집하는 교만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중상모략이며 모독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원은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교만과 이기심의 극대화 속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극복하여 그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강건해져서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을 이전보다 더욱 잘 보살피면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기회로 삼게 해달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즉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까지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일에 도구로 사용되기를 기뻐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억울함의 신원해 주심과 유익하게 해주실 것으로 믿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주기도문의 세번째 간구 속에 담겨 있는 삶의 원리입니다.
3)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의 고백은 어떤 문제 해결의 차원을 넘어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유와 권리가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간구하는 청원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의 기도는 십자가의 잔이 지나가기를 구하는 문제 해결의 차원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자신이 인류를 대신하여 당해야 할 그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내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구하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선한 뜻 아래서 친구나 이웃이나 교회나 국가나 이념이나 제도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즉 세상을 살아갈 때 당하는 고통이나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려움과 고통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들어가 죽는 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하나냐), 메삭(미사엘), 야벳느고(아사랴)를 보십시오(단3:17, 18). 자신 앞에 놓여있는 위험과 역경을 벗어나 도망치지 않고 과감히 맞붙어 싸우는 용기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의심없는 애정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었던 그들의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삶”은 바로 이 시대의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내야 할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결론 우리의 삶의 원리는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쳐 버렸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참된 투쟁의 삶이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기쁨과 행복은 포기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가장 중심에 모시고 그 분의 겸손과 순종을 배울 경우에만 주님의 기도처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실질적인 삶을 기쁨과 평안과 행복 속에서 영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자신의 힘찬 신앙고백의 순간, 자신의 이기적인 뜻이나 요구가 산산조각이 나 버림으로써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파괴하려는 사단의 계략이 벌거벗은 몸처럼 드러나는 통쾌한 승리를 “이미” 맛보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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