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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초를 반석 위에 놓으라 (마7: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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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교회 근처에 살고 있는 이 모씨가 제게 전화했습니다. "목사님,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금 저는 그간 35년 동안 사용했던 부적이며 우상숭배하던 기구들을 몽땅 들고 나와 교회 근처 공터에서 불태워버리고 전화드립니다." 그가 제게 들려 준 얘기는 이렇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행하는 축호전 도를 받고 지난 주일에 우리 교회를 찾아왔는데 차마 예배드리는 시간에 출석은 하지 못하고 다만 그 예배시간에 2층 계단에 앉아있었는데 지금 까지 느끼지 못했던 기쁨과 평안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 신의 지금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 신앙생활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4살 때 어느 서커스단에 끌려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35년 동안 몸의 유연성을 위해 식초를 마셔왔는데 이제 더 이상 서커스를 할 수 없 을 정도로 몸이 엉망진창이 되어 이틀에 한번씩 병원에 가서 링거주사를 맞지 아니하면 도저히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도 없고 뼈 전체에 이상에 생겨 주사액을 투입하지 않 으면 걷는 것조차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손등이 90도 이상 휘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지난 35년 동안의 삶은 오직 서커스단을 위해 너무나 비참한 생활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무 너져 내린 39년의 처참한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도 축호전도를 통해 한 인생이 예수를 영접하고 이제는 영원히 무 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지어 가는 아름답고 희망찬 삶의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함께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 엇보다 먼저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 선지자 들을 분별하는 방법은 그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15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이 이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 화과를 따겠느냐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 라." 나무는 그 체질과 성품에 반대되는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속에 자리잡고 있는 거짓은 그 행위를 통해서 반드시 드러나는 법입니다. 즉 아무리 말과 행동을 조심한다 할지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정체를 여실히 폭로시키고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거짓 선지자는 그의 인격, 품성으로 그 진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격과 품성 중에 최고의 인격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은사 중 에 최고의 은사도 사랑의 은사입니다. 품성을 나타내는 성령님의 열매 중에 최고의 열매도 사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의 사랑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이타 주의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이리떼와 같이 오직 자기 배를 채우 겠다는 탐욕과 이기주의가 그의 본성입니다. 참된 목자는 양떼를 자기 생 명보다 더 귀중하게 돌봅니다. 성령님으로 예언한다면서 선지자의 대접을 요구하거나 돈과 필요한 물건을 요구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가르치는 일도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행합니다. 종교란 의식(儀式)이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종교를 의식화해서 그들의 돈벌이 내지는 권세 보존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만일 사람이 손씻는 규례를 바르게 잘 지키고, 안식일에 무화과 두 개 이상의 무게가 되는 것은 운반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에 규정된 거리 이상을 걷지 아니하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고 채소밭의 소산까지 도 그렇게 한다면, 그리고 부정한 음식, 예를 들어 돼지고기나 메기, 미꾸 라지 등을 먹지 않는다면 그는 선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종교와 종교 의 식을 쉽게 혼동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에 출석하는 것, 주일을 지키는 것, 교회에 대한 재정적인 의무를 감당하는 것, 성서를 읽는 것, 지금도 구약처럼 돼지고기 등을 먹지 않는 것 등이 종교라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모든 것을 실행한다고 해도 그는 참 종교인 참 신자가 되지 않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믿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를 통해 인류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류를 섬김으로 구원 코자 하시는 그의 겸손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 600여 가지를 제아무리 다 지킨다해도 예수 믿고 예수의 마음을 품어 예수의 인격, 곧 성령님의 열매를 맺지 아니한다면 그는 참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 기독교인은 그 열매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지금부터는 당신은 영화관에 가지 마시오, 지금부터는 춤도 추지 마시고 노래방같은데도 출입을 금하시오, 지금 부터는 담배를 피우거나 화장을 하지 마시오, 지금부터는 연애소설이나 선데 이 서울같은 것을 읽지 마시오, 팝송이나 흘러간 노래를 부르지 마시오" 라고 한다면 그런 기독교나 종교는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에 이러한 것들을 삼가함으로써 만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면 기독교는 실제 그 자체보다 훨씬 더 믿기 쉬운 종교가 될 것이며, 종교라기 보다는 오히려 도덕 윤리에 불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온전한 본질을 말한다면 행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나님 의 사랑과 섬김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소극적인 기독교인은 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현실을 도피하는 종교가 아 니라 미움과 증오, 부정과 부패, 음란과 타락, 혼돈과 공허가 난무하는 세상에 더욱 더 깊숙히 들어가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예수님처럼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인류를 사랑으로 섬기는 표상입니다. 십자가는 참된 생활이며 아름다운 삶의 열매입니다. 생활 과 동떨어진 종교나 교훈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거짓된 것입니다. 수도승 들과 은둔자들이 저지른 오류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자로 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사막이나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되며 유혹많은 세속의 생활로부터 떠나서 세속의 삶을 중단하지 아니하면 참된 크리스 찬의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 을 위해 기도할 때 말하기를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 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 다"(요 17:15)고 했습니다. 유명한 영화 '사운드 어브 뮤직'에 보면, 폰 트랩 대령 가정에 한 수녀가 가정교사를 들어갔다가 아내가 없는 그 대 령과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 수녀(줄리 앤드류 분)는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기로 서원했기 때문에 남녀간의 사랑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말도 없이 그 집을 뛰쳐나와 수녀원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수녀원 원장이 이를 알고 그 수녀를 불러 책망합니다. 수녀원은 세상에서 살다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를 피하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녀원에 기어 들어오는 것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 라 현실에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많더라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펴나가 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랑하며 섬기는 생활입니다. 종종 오만해서 배타적인 종교집단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협소한 종파에 몰아넣고는 그 외의 세계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가르 치는 무리들입니다. 자신들만이 의롭고 참되며 자신의 종교 집단에 들어 오지 아니하면 모두가 죄인이며 심판을 면할 길이 없으며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무리들은 모두가 다 한결같이 거짓된 종교입니다. 종교의 기능 은 양쪽의 가운데다 장벽을 세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헐어버리는 일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인류와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 으셨습니다. 예수는 유대인과 그들이 원수처럼 여겼던 이방인들과 화목하 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에베소서 2:13-18'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 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 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 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님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포스틱(Fosdick)은 다음과 같은 엉터리 시 네 줄을 인용해서 배타적인 종교집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선택된 소수의 무리, 그 외 모든 인간들은 저주를 받고 있다. 천국에는 너를 위한 장소는 없다. 천국이 만원되어선 곤난하다." 종교는 사람들을 서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대립하는 클럽을 만드는 것 이 아니라 한 가족으로 모아들이는 것입니다. 특정한 교회 또는 교파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하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분리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연합시 키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모두가 다 하 나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되는 비결이 바로 예수의 마음을 지니고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입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 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치 않는 자들은 어리석은 건 축자와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집의 기초를 모래나 흙 위에 세운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 지혜로운 사람이 집을 세울 기초는 무엇인 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이를 분명히 말씀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0,11절'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 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집이 무 너지듯 그 신앙이 무너지고 말게 됩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 물질이나 부귀공명이 무너지지 않는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주초,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사상에 집을 지었던 나라나 인생들이 처참하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민족주의나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 무너지지 않는 주초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시대에도 어떠한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터'는 "주께서 아시는 백성"(디모데 후서 2:19)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백성이 되기 원하신다면 그래서 인생 의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인도의 썬다씽은 "인도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까 기독교의 하나님 이 참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을 모른다면 내가 살 의미가 없습니다. 내일 새벽까지 나에게 당신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나는 차라리 죽겠습니다." 하고 생명을 걸고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구도자였습니다. 그러한 썬 다씽에게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나타나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라고 했기 때문에 그날부터 그는 주를 위해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를 찾기 위하여,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그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 가 예수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모르고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를 모르고서 사랑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아 주시는 것입니다. "(고전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성도 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 나 마땅히 알아야 할 그 무엇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작 알아 야 할 하나님의 사랑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사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별별 은사나 능력을 받았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것 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두 아들이 있습니다. 맏아들은 효자요,
둘째 아들은 부모에게 불효한 이른바 방탕아입니다. 그래서 형은 언제나 그 동생을 구박하고 멸시합니다. 이유는 부모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맏 아들은 자기가 부모의 뜻을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런 탕자는 없 어지던가, 나가 죽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 즉 그 부모가 그 못난 자식도 똑같이 사랑하고 있 다는 사실, 아니 자기에 대해서보다도 오히려 그 동생에게 더 큰 연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는 부모를 모 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부모를 잘 안다는 대 전제 에서 자기와는 다른 그의 동생을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와 똑같은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만이 하나님의 법을 잘 알고 있고, 받은 바 은사를 통해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 사랑과 섬김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구하되 사랑을 따라 구 하라는 것입니다. 은사의 목적이 자기증명이나 자기 신앙의 우월성, 하나님과의 남다른 관계를 증명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은사나 능력의 목적 은 자신에게 덕을 세우며, 교회에도 덕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덕목 중에 가장 큰 덕목을 말한다면 무엇보다도 사랑과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열매 중에
첫째는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가정과 교회, 더 나아가 나라 민족을 하나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이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3:10-1
5'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 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 구든지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 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 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 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어떠한 어려움과 환난이 있어도 말씀대로 살 며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나무나 풀이나 짚"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는 믿지만 유명무실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화하지 못하는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무너지지 않 은 인생의 집을 지으려면 무엇보다 그 마음이 무너지지 않아야 합니다. 사업에 실패해도, 어떠한 역경과 환난이 불어 닥친다해도 그 마음만 무너 지지 않는다면 재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기 원하 신다면 예수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인류를 사랑으로 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의 조롱과 비난과 멸시 천대를 받으면서도, 아니 급기 야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지라도 무너지지 않으셨습니다. 무너지지 아니 하는 견고한 터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이 자신의 집을 견고하게 세울 터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무너지 지 않은 견고하고 지혜로운 인생의 집을 짓고자 한다면 예수 믿으시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대로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의 열 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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