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추석나기 (마6:25-34)
본문
가을은 감사의 계절입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고 말씀하고 있지만, 우리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감사하는 마음보다 원망과 짜증,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 보람된 일과 선한 마음으로 감사를 느끼기도 하지만, 불평과 욕심이 더 많은 우리 자신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특히 신앙인들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게 됩니다. 바로 추수 감사절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깨닫고 이웃의 고마 움을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가을에는 풍성한 결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이 아닌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이 웃과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는 계절 속에 우리는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11,6)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감사를 우리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는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큰 곳간에 가득 저장을 하고 기 쁜 노래를 불렀지만,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 칭하고 그이 영혼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부자는 많은 수확을 거두어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보낼 여생을 생각하면서 이웃의 어려움 을 외면하고 더 큰 욕심과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는 교만이 가득찼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즉 감사하는 마음이 바를 구멍만큼도 없었던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국 참된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감사는 겸손에서 드려지는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비 유는 바로 이러한 부자를 놓고 말씀하신 것이리라. 감사만큼 아름답고 좋은 말이 없습니다. 또한 감사하는 사람만큼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자꾸만 넓어져서 그 좁은 마음에 온 세상을 다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자꾸만 좁아져서 나중에는 바늘이 들어갈 만한 틈도 없이 불평과 교만과 욕망으로 가득 차 버리고 맙니다. 이제 추석을 앞두고 우리 성도들은 진정한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삶을 실천으로 옮 기는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석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늘에 드리던 추수감사축제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의 구체적인 유래는 성서에 나와있질 않습니다. 구약시대에 지켜졌던 맥추절과 장막절에서 그 정신적 기원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근대적 의 미의 추수감사절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신대륙을 찾아간 청교도들이 고생 끝에 첫 수확을 거두어 하나님께 예배와 축제를 드렸던 것이 발전하여 오늘날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 땅에서도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유럽에서도 세시풍속으로 지켜져 오던 관습인데,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가 처음으로 추수한 곡식에 칠면조를 놓고,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하나님에게 감사기도를 들인 것이 정착하여 전 기독교 국가에 전파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789년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국가 기념일로 공포되었고, 카나다에서는 보통 10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에 기념하는데 추수가 일정하지 않아 그 날자도 다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셋째 일요일을 보통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데 1904년부터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인 선교사가 처음으로 이 땅을 입국한 날을 기념하여 매년 11월 셋째주에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은 계절과 민족 정서에 맞질 않아 요즈음 일부 교단과 교회에서는 추석 을 전후하여 추석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민족도 삼한 시대부터 내려오는 아주 훌륭한 추수감사제가 있습니다. 시월상달, 무천, 영고 등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신라의 통일로 추석이 정착되어 지금까지 민족 최대의 명절로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교회에서 우리 장단과 우리 가락에 맞추어 찬양과 예배의식을 가지고 추석을 정점으로 해서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는 것은 민족의 정서가 메말라 가고 있는 우리 실 정에 교회가 민족과 사회에 기여하는 아주 좋은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교회는 11월에 추수감사예배를 드리지만, 이제 추석을 앞두고 한해동안 걸어온 날들을 돌아보며 겸손한 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 으로 모든 일에 감사하는 신앙인이 되길 기원합니다.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는 것을 귀성(歸省)이라고 합니다. 고향의 부모를 찾아가 그 은혜에 감사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가 가문을 생각하며 자신의 뿌리와 위치를 확인하게 한다. 한 자로 귀성의 귀(歸)는 돌아가다, 돌아오다의 뜻이 있는데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돌아가다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省)은 살피다, 보다의 뜻으로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 책임을 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귀성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는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21세기를 앞두고 더욱 사회는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회의 기초인 가정이 무너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번 추석의 귀성은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며 하나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 입니다. 부모와 조상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 주를 주관하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인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죽었을 때의 표현은 '열조에게 돌아갔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에게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이 마땅히 돌아가서 살 필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 께로 나아가서 한해의 삶을 결산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모든 것 이 풍요로워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즐겁게 가족과 이웃과 하나되는 날 이 아니라 미움과 질투와 분쟁의 날이 되기도 합니다. 남과 비교하고 더 갖지 못한 욕심으 로 신앙과 정서가 궁핍해지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놀이 문화에서 비롯됩니다. 즐겁고 화목한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싸 움과 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건전하게 보내질 못하고 세상 문화에 휩쓸려 몸도 마음도 신 앙도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알맞는 건전한 놀이가 개발되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여유가 있는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라곤 화투가 고작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바 로 이러한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질이 달라지게 됩니다. 교회와 직 장과 가정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질 않지만 세상 문화와 접하는 순간 유혹에 빠져 시 험에 들어 하나님과 멀어져가고 식구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고스톱을 치는 것이 일상화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따서 불 안하고, 잃어서 기분 상하고 그러다가 가족 공동체에 균열이 생겨 등을 돌리게 되는 경우도 발생하여 차라리 명절이 없는 것이 좋습니다. 윷놀이 정도가 건전하지만 젊은 층들에게는 호응이 없습니다. 조금 좋게 보이는 것이 노 래방에 가는 경우입니다. 남녀노소 흥겹게 보낼 수는 있지만 찬송가를 부를 수도 없고, 그나 마 몇 곡있는 복음 성가도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 않아 노래를 못 부르거나 세상 노래를 알 지 못하면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젊은 층들은 당구장, 볼링장에 가기도 하지만 온 가족이 함께 갈 수가 없어 나이 드신 분 들을 소외시키게 됩니다. 또 술에 몸을 저당 잡혀 건강까지 상하게 합니다.
평소 좋았던 신앙의 모습이 일순간에 무너지어 덕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번 추석은 우리 성도는 어떤 생활을 하며 연휴를 보내야 하겠습니까 이번 추석은 식구들이 하나될 수 있는 놀이를 찾아서 새로운 명절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생각해 낸 것이 식구들이 함께하는 오락입니다. 미리 게임을 준비하여 식 구들을 모이게 한 후 가족별, 세대별로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미리 상금을 거두어서 골고루 돌아가게 하는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옅 본 적이 있습니다. 식구들이 성묘를 갔다가 나무 그늘에 모여 여러 가지 게임을 준비하여 대결을 벌인 적이 있는데 가족들의 호응이 컸습니다. 예를 들면 시부 모, 장인 장모의 생일, 혹은 결혼기념일, 이름, 가족 관계등을 퀴즈 문제를 풀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하는 사치기 차치기 사뽀뽀, 독특한 소지품을 검사하는 방법(손톱깍기, 몇 년도 동전, 만년필, 명함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검사하여 시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편을 갈라 물건 잇기를 했는데 심지어 양말, 시계등을 연결하여 각축전을 벌 이는데 모든 식구들이 즐겁고 유익한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것 말고도 연구하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준비를 하여 크리스챤 가정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모쪼록 평소와 다른 명절을 보내는 이번 추석이 되길 기대합니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어떤 우화가 생각이 납니다. 내용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지만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나무 밑에서 잠을 자던 토끼가 과일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지구가 무너지는 것으로 착각 하고 급히 도망을 갑니다. 이것을 본 다른 동물들도 지구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리에 토끼를 따라 급히 아 갑니다. 결국 사자에 의해 한째의 소동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이 우화가 주는 교훈은 여러 가지입니다. 영국의 과학자 뉴우튼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습니다. 17세기 중엽, 학 교가 전염병으로 폐쇄되자 고향으로 돌아 온 뉴우튼은 사색과 실험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 내다가 이런 놀라운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일반적인 자연현상으로 생각할 수가 있겠지만, 단순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뉴우튼은 근대과학의 아버지 답게 아무도 생각치 못했던 자연법칙을 깨닫고 이것을 체계화 시켰습니다. 저는 이것을 한순간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 지 않습니다. 그가 오랜 사색을 통하여 얻게 된 영감이라고 여기고 싶습니다. 만유인력은 모든 물체 사이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이런 비유를 적어봅니다. 지구는 둥글고 자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구 반대쪽 사람들은 어떻게 있나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떨 어지지 않기 위하여 매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유인력을 이해하면 이런 궁금증은 풀릴 수가 있습니다. 지구에는 중력이라는 것 이 있어 모든 사물을 끌어 당기기에 이쪽에서나 반대편에서나 서로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들에게도 뉴우튼과 같은 안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졸 다가 놀라서 잠이 깬 토끼처럼 가볍게 행동하지 말고, 우리 생활에서 놀라운 삶의 지혜를 발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것에 불과한 것 같지만 그안에 신비와 은혜가 담겨져 있는 신앙의 안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뉴우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뉴우튼이 되었습니다. 뉴우튼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 후에, 평소 먹던 사과를 더 맛있게 먹었으리라 추측을 해봅니다. 저는 사과를 별로 좋아하질 않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한 두 조각만 먹으면 더 이상 손이 가질 않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사과가 맛있 게 느껴지고 한 개는 거뜬히 먹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유인력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사과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를 오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요동치는지 모 르겠습니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떠가고 들판에 벼이삭은 황금물결을 이루어 풍요롭고 넉 넉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경북지방이 사과산지이기도 하지만, 산자락 과수원에 알알이 박 혀있는 탐스런 사과는 저의 마음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늘에 박혀있는 사과에 모든 우주의 신비가 다 들어있던 것입니다. 자연속에서 사과는 그렇게 익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농부의 땀흘림에서, 다른 자연과의 조화속에서 사과나무는 하늘을 떠받치고 사과알들은 여유와 너그럼 속에서 제 마음에 차곡 차곡 쌓여갔던 것입니다. 모든 신비와 경이가 뿜어져 나오는 자연의 섭리를 보면서 그야말로 삶의 지혜와 방식을 발견하는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이 환희는 뉴우튼이 체험했던 기쁨보다 더 감격적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이 사실을 저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지나친 과장이라 여기며 그냥 넘겨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이 주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서 마태복음 6장 25절에서 34절을 통해 자연에서 오는 심오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 하시기 바랍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의 본문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의 의를 추구할 때에 모든 환난과 걱정에서 벗어나 감사할 수 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게 됨 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지켜주시고 복음의 빚진 나라에서 갚는 나라로 만복을 내려주신 은혜에 감사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추석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입니다. 오랜 관습과 전통에 젖어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국민들도 깨달아서 진정한 감사의 절기가 되도록 우리 성도 들이 세상 문화를 이끌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어느 목사님의 시를 한편 낭송하며 오늘의 말씀을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가을 기도 주님 오시는 계절이 가까웠다 합니다. 그럴수록, 세상은 더욱 더 어두워집니다. 주님 오시는 계절이 봄이라도 좋습니다. 여름이라도 좋습니다. 가을이면 더 좋습니다. 그러나, 겨울이면 어찌할까요 가난한 이들은 배고파 떨고 집없는 이들은 설움으로 헤매이다 주님 오실 때 꽁꽁 언 두 손에 눈물을 모아 드리면 주님은 세상에 사랑없음을 마음 아파하시겠지요.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주님이 점점 가까이 오시는 계절의 한 모퉁이에서 이 가을에 영그는 성령님의 열매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소서 _ 김대응 (전 여의도침례교회 부목사) 기도문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 민족에게 허락하신 추석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명절을 통하여 조상과 이웃, 자연의 고마움을 깨닫게 하시고 기쁜 마음으로 온 민족이 하나되게 하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바른 백성이 되어 경배와 찬양을 남과 북이 한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통일의 명절을 하루 속히 이루어 주시길 원합니다. 아울러 그늘진 구석에서 소외당하고 눈물 흘리고 있는 어려운 이웃을 서로 돌아보고 보살필 수 있는 이 땅의 모든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 사랑과 평화의 식구들이 함께 모여 삶의 보람과 감사를 깨닫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모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신앙도 더욱 성숙하여 각자의 색깔에 알맞는 옷을 입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내 것을 채우기 위한 욕심과 남을 멸시하는 교만이 사라지게 하시고 구원받은 순결한 삶으로써 복음의 씨앗이 온누리에 퍼져가게 하옵소서. 환절기 건강을 지켜주시길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추석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늘에 드리던 추수감사축제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의 구체적인 유래는 성서에 나와있질 않습니다. 구약시대에 지켜졌던 맥추절과 장막절에서 그 정신적 기원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근대적 의 미의 추수감사절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신대륙을 찾아간 청교도들이 고생 끝에 첫 수확을 거두어 하나님께 예배와 축제를 드렸던 것이 발전하여 오늘날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 땅에서도 지켜지게 된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유럽에서도 세시풍속으로 지켜져 오던 관습인데,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가 처음으로 추수한 곡식에 칠면조를 놓고,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하나님에게 감사기도를 들인 것이 정착하여 전 기독교 국가에 전파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789년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국가 기념일로 공포되었고, 카나다에서는 보통 10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에 기념하는데 추수가 일정하지 않아 그 날자도 다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셋째 일요일을 보통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데 1904년부터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인 선교사가 처음으로 이 땅을 입국한 날을 기념하여 매년 11월 셋째주에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은 계절과 민족 정서에 맞질 않아 요즈음 일부 교단과 교회에서는 추석 을 전후하여 추석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민족도 삼한 시대부터 내려오는 아주 훌륭한 추수감사제가 있습니다. 시월상달, 무천, 영고 등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신라의 통일로 추석이 정착되어 지금까지 민족 최대의 명절로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교회에서 우리 장단과 우리 가락에 맞추어 찬양과 예배의식을 가지고 추석을 정점으로 해서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는 것은 민족의 정서가 메말라 가고 있는 우리 실 정에 교회가 민족과 사회에 기여하는 아주 좋은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교회는 11월에 추수감사예배를 드리지만, 이제 추석을 앞두고 한해동안 걸어온 날들을 돌아보며 겸손한 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 으로 모든 일에 감사하는 신앙인이 되길 기원합니다.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는 것을 귀성(歸省)이라고 합니다. 고향의 부모를 찾아가 그 은혜에 감사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가 가문을 생각하며 자신의 뿌리와 위치를 확인하게 한다. 한 자로 귀성의 귀(歸)는 돌아가다, 돌아오다의 뜻이 있는데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돌아가다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省)은 살피다, 보다의 뜻으로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 책임을 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귀성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는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21세기를 앞두고 더욱 사회는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회의 기초인 가정이 무너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번 추석의 귀성은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며 하나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 입니다. 부모와 조상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 주를 주관하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인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죽었을 때의 표현은 '열조에게 돌아갔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에게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이 마땅히 돌아가서 살 필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 께로 나아가서 한해의 삶을 결산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모든 것 이 풍요로워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즐겁게 가족과 이웃과 하나되는 날 이 아니라 미움과 질투와 분쟁의 날이 되기도 합니다. 남과 비교하고 더 갖지 못한 욕심으 로 신앙과 정서가 궁핍해지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놀이 문화에서 비롯됩니다. 즐겁고 화목한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싸 움과 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건전하게 보내질 못하고 세상 문화에 휩쓸려 몸도 마음도 신 앙도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알맞는 건전한 놀이가 개발되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여유가 있는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라곤 화투가 고작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바 로 이러한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질이 달라지게 됩니다. 교회와 직 장과 가정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질 않지만 세상 문화와 접하는 순간 유혹에 빠져 시 험에 들어 하나님과 멀어져가고 식구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고스톱을 치는 것이 일상화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따서 불 안하고, 잃어서 기분 상하고 그러다가 가족 공동체에 균열이 생겨 등을 돌리게 되는 경우도 발생하여 차라리 명절이 없는 것이 좋습니다. 윷놀이 정도가 건전하지만 젊은 층들에게는 호응이 없습니다. 조금 좋게 보이는 것이 노 래방에 가는 경우입니다. 남녀노소 흥겹게 보낼 수는 있지만 찬송가를 부를 수도 없고, 그나 마 몇 곡있는 복음 성가도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 않아 노래를 못 부르거나 세상 노래를 알 지 못하면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젊은 층들은 당구장, 볼링장에 가기도 하지만 온 가족이 함께 갈 수가 없어 나이 드신 분 들을 소외시키게 됩니다. 또 술에 몸을 저당 잡혀 건강까지 상하게 합니다.
평소 좋았던 신앙의 모습이 일순간에 무너지어 덕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번 추석은 우리 성도는 어떤 생활을 하며 연휴를 보내야 하겠습니까 이번 추석은 식구들이 하나될 수 있는 놀이를 찾아서 새로운 명절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생각해 낸 것이 식구들이 함께하는 오락입니다. 미리 게임을 준비하여 식 구들을 모이게 한 후 가족별, 세대별로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미리 상금을 거두어서 골고루 돌아가게 하는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옅 본 적이 있습니다. 식구들이 성묘를 갔다가 나무 그늘에 모여 여러 가지 게임을 준비하여 대결을 벌인 적이 있는데 가족들의 호응이 컸습니다. 예를 들면 시부 모, 장인 장모의 생일, 혹은 결혼기념일, 이름, 가족 관계등을 퀴즈 문제를 풀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하는 사치기 차치기 사뽀뽀, 독특한 소지품을 검사하는 방법(손톱깍기, 몇 년도 동전, 만년필, 명함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검사하여 시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편을 갈라 물건 잇기를 했는데 심지어 양말, 시계등을 연결하여 각축전을 벌 이는데 모든 식구들이 즐겁고 유익한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것 말고도 연구하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준비를 하여 크리스챤 가정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모쪼록 평소와 다른 명절을 보내는 이번 추석이 되길 기대합니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어떤 우화가 생각이 납니다. 내용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지만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나무 밑에서 잠을 자던 토끼가 과일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지구가 무너지는 것으로 착각 하고 급히 도망을 갑니다. 이것을 본 다른 동물들도 지구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리에 토끼를 따라 급히 아 갑니다. 결국 사자에 의해 한째의 소동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이 우화가 주는 교훈은 여러 가지입니다. 영국의 과학자 뉴우튼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습니다. 17세기 중엽, 학 교가 전염병으로 폐쇄되자 고향으로 돌아 온 뉴우튼은 사색과 실험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 내다가 이런 놀라운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일반적인 자연현상으로 생각할 수가 있겠지만, 단순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뉴우튼은 근대과학의 아버지 답게 아무도 생각치 못했던 자연법칙을 깨닫고 이것을 체계화 시켰습니다. 저는 이것을 한순간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 지 않습니다. 그가 오랜 사색을 통하여 얻게 된 영감이라고 여기고 싶습니다. 만유인력은 모든 물체 사이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이런 비유를 적어봅니다. 지구는 둥글고 자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구 반대쪽 사람들은 어떻게 있나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떨 어지지 않기 위하여 매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유인력을 이해하면 이런 궁금증은 풀릴 수가 있습니다. 지구에는 중력이라는 것 이 있어 모든 사물을 끌어 당기기에 이쪽에서나 반대편에서나 서로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들에게도 뉴우튼과 같은 안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졸 다가 놀라서 잠이 깬 토끼처럼 가볍게 행동하지 말고, 우리 생활에서 놀라운 삶의 지혜를 발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것에 불과한 것 같지만 그안에 신비와 은혜가 담겨져 있는 신앙의 안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뉴우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뉴우튼이 되었습니다. 뉴우튼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 후에, 평소 먹던 사과를 더 맛있게 먹었으리라 추측을 해봅니다. 저는 사과를 별로 좋아하질 않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한 두 조각만 먹으면 더 이상 손이 가질 않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사과가 맛있 게 느껴지고 한 개는 거뜬히 먹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유인력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사과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를 오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요동치는지 모 르겠습니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떠가고 들판에 벼이삭은 황금물결을 이루어 풍요롭고 넉 넉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경북지방이 사과산지이기도 하지만, 산자락 과수원에 알알이 박 혀있는 탐스런 사과는 저의 마음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늘에 박혀있는 사과에 모든 우주의 신비가 다 들어있던 것입니다. 자연속에서 사과는 그렇게 익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농부의 땀흘림에서, 다른 자연과의 조화속에서 사과나무는 하늘을 떠받치고 사과알들은 여유와 너그럼 속에서 제 마음에 차곡 차곡 쌓여갔던 것입니다. 모든 신비와 경이가 뿜어져 나오는 자연의 섭리를 보면서 그야말로 삶의 지혜와 방식을 발견하는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이 환희는 뉴우튼이 체험했던 기쁨보다 더 감격적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이 사실을 저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지나친 과장이라 여기며 그냥 넘겨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이 주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서 마태복음 6장 25절에서 34절을 통해 자연에서 오는 심오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 하시기 바랍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의 본문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의 의를 추구할 때에 모든 환난과 걱정에서 벗어나 감사할 수 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게 됨 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지켜주시고 복음의 빚진 나라에서 갚는 나라로 만복을 내려주신 은혜에 감사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추석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입니다. 오랜 관습과 전통에 젖어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국민들도 깨달아서 진정한 감사의 절기가 되도록 우리 성도 들이 세상 문화를 이끌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어느 목사님의 시를 한편 낭송하며 오늘의 말씀을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가을 기도 주님 오시는 계절이 가까웠다 합니다. 그럴수록, 세상은 더욱 더 어두워집니다. 주님 오시는 계절이 봄이라도 좋습니다. 여름이라도 좋습니다. 가을이면 더 좋습니다. 그러나, 겨울이면 어찌할까요 가난한 이들은 배고파 떨고 집없는 이들은 설움으로 헤매이다 주님 오실 때 꽁꽁 언 두 손에 눈물을 모아 드리면 주님은 세상에 사랑없음을 마음 아파하시겠지요.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주님이 점점 가까이 오시는 계절의 한 모퉁이에서 이 가을에 영그는 성령님의 열매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소서 _ 김대응 (전 여의도침례교회 부목사) 기도문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 민족에게 허락하신 추석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명절을 통하여 조상과 이웃, 자연의 고마움을 깨닫게 하시고 기쁜 마음으로 온 민족이 하나되게 하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바른 백성이 되어 경배와 찬양을 남과 북이 한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통일의 명절을 하루 속히 이루어 주시길 원합니다. 아울러 그늘진 구석에서 소외당하고 눈물 흘리고 있는 어려운 이웃을 서로 돌아보고 보살필 수 있는 이 땅의 모든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 사랑과 평화의 식구들이 함께 모여 삶의 보람과 감사를 깨닫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모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신앙도 더욱 성숙하여 각자의 색깔에 알맞는 옷을 입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내 것을 채우기 위한 욕심과 남을 멸시하는 교만이 사라지게 하시고 구원받은 순결한 삶으로써 복음의 씨앗이 온누리에 퍼져가게 하옵소서. 환절기 건강을 지켜주시길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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