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도는 (마6:33)
본문
오늘 우리는 기도에 관하여 배우려고 합니다. 이 기도에 대하여서는 저 자신도 바르게 기도하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점점 우리의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도 잘못되었고,신앙생활도 바르게 하지 못하고,너무나 잘못된 것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특권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일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라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기도에 관하여 함께 배우고자 합니다. 기도는 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부딪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찾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권이 그렇게 쉽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희생의 댓가로 얻게 된 것입니다. 구원얻은 후에 우리 믿는 자들이 받은 가장 큰 선물들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 응답을 기대하고 기도 하지마는 많은 경우에 응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도생활의 어떤 부분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기도에 관하여 살펴 보고자 합니다.
1. 기도는 지겨운 노동이나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우리에게 특권으로 선물로 주셨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기도를 무슨 의무나 지겨운 노동으로 생각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즐거운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상담이나, 하나님께 대한 의무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에 대하여 부담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함에 있어서 다른 부수적인 것에 생각을 뺏겨 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천국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헤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다만 주님을 만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데 무슨 옷을 입어야 할까,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 따위를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기도회를 갖는다 하면 다른 집회 보다 훨씬 출석률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자세와 기도에 대한 관념을 고치면, 밤을 새워 기도하는데도 익숙해 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이야기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할까, 왜 이리 시간이 안깔까 생각하면서 자꾸 시계를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함께 있는 시간을 연장할 것입니다. 뭐 굳이 입을 열어 이야기 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그것으로 즐겁고,흐뭇합니다. 우리가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괴로운 형벌의 시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하면 잘못한 죄의 질에 따라 기도시간을 정해 줍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시간을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기도에 할애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많은 시간을 기도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어여삐 보시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그 시간을 즐겁고 기쁜 시간으로 여기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를 노동가치로 환산하여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도를 드리면, 많은 복을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어떤 이득을 보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우리들은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고 찬송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뜻없이 부르는 노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도는 여러분의 마음을 안정 시키는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하나님께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게 있는것이 좋아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지루해서 시계를 보는 것처럼, 하나님도 시계를 보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그 시간을 귀히 여긴다면 더 이상 시계를 보지 않게 될 것이고,기도 제목이 없어서 기도시간에 도망치는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2. 우리가 기도 하였는데 어째서 응답을 받지 못합니까 야고보서 4;3을 다같이 읽으십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이것은 우리의 요구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응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엄청난 좌절감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응답은 하나님 편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있으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활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믿는자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호흡을 일로 생각하면 정말 진땀나는 일입니다. 24시간을 계속해서 노동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가혹한 분일까요 24시간 계속해서 노동해라 그렇게 말씀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곧 성령님안에서의 삶을 말합니다. 그같은 삶을 가진 사람은 응답을 기대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늘 주님을 모시고 다닌다면, 말을 바꾸어 평범한 일상에도 주님의 내주하심을 의식하면서 언제나 대화를 나누는 자세로 살아간다면 참으로 넘치는 희열을 경험할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으로 형통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할 때 늘 주님과 대화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의견을 구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쉬지않고 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질문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가 그런 것이라면 왜 이렇게 특별히 기도 시간을 정하여 기도회를 갖습니까 그것은 마치 여러분 내외가 특별한 의논을 할 때,집 밖으로 나가거나 여행을 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늘 이야기 하는 상대입니다. 친구 사이에서도 늘 이야기 하지마는, 더 은밀한 이야기를 위하여 자리를 옮겨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과 같습니다. 늘 모든 것을 이야기 하지마는 이러한 시간을 통하여 더 내밀한 이야기를 서로가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경우가 잘 적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그 시간만 나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 드리거니와 기도는 절대로 그런것이 아닙니다. 기도란 대화입니다. 대화는 말하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듣기도 있습니다. 오히려 듣기를 잘하는 친구가 더 성숙한 것처럼, 우리가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도 해야합니다. 우리가 주님 음성듣기를 더 좋아한다면, 우리는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도회 시간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 시간에 무언가 엄청난 것을 말씀 하실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하나님이 정말 그런 분이라면 늘 우리는 충격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반응을 요구 하십니다. 정직한 순종을 요구 하시는 것입니다.
3.기도는 무어라 생각 하는가 우리는 기도가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잘못 을 범합니다. 기도는 활동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저 멀리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기도의 확신을 가로막는 요인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건물(교회)안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한다면, 음행의 문제나,다른 도덕적인 모든 문제에 대하여 잘못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때 예수님이 이땅에 계셨을 때 라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신앙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전에 신학교 시절 사경회를 할 때에 주기도문을 강의하기로 한 강사가 제 시간에 오지 않아서, 오래 동안 기다리다가 학생회에서 기도 좀 많이 하는 학생을 앞에 세워 통성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주여 삼창을 한 후에,저마다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어 목이 쉬도록 큰 소리로 기도를 했습니다. 한 30분 쯤 후에 강사가 도착하여 그 광경을 보고, 노발대발하여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이 귀머거리인 줄 아느냐 그리고 기도란 그런것이 아니라고 훈계조로 나머지 시간을 채우고 간 적이 있습니다. 물론 통성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귀머거리가 아닌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입으로 소리를 내어서 하는 것은 회중기도에 주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시는 주님에게 말하는데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소리를 내서 기도한다는 것은 다만 사탄의 방해를 받지 않 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소리없이 기도하면 졸거나 다른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주여! 주여! 고함지르고 기도하지 않으면 은혜가 없어서 그런 줄 압니다. 울부짖고, 목청을 돋우어 기도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지만,하나님 은 그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소리내 기도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 후련하라고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트레스가 해소되니까 기도응답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입니다. 이미 그렇게 기도한 것으로 모든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는 매일 같은 기도를 반복합니다. 정말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는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는 기도응답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기도 가 중요한 것이고, 간절한 기도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했다면 그것이 벌써 이루어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기도를 반복하는 것이 사람에게 심리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우리는 마이아에게 하이퍼 둘리아를 드리는 천주교신자가 아닙니다. 반복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 합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구하는 자가 받을것이 아니라, 믿고 구하는 자가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신과 아세라신의 제사장들은 반복해서 저들의 기도 를 드렸지만 엘리야는 단 한번 '여호와여, 이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나님인 것과 내가 당신의 조인것을 보여 주소서'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6:7을 봅시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 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구하기 이전에 다 아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야기 하는 즐거움 에 관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배때에 대표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사람을 위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들면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 마음에 들면 은혜스러운 기도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곧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일 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도를 요청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종교를 원합니까 아니면 관계를 원합니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는 요청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비교종교학에서 학문상의 분류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본래 부터 관계가 있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의 바른 관계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 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과 친구가 되고 동업자가 된다면,우리의 동업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돌봐 주시겠습니까 저도 심방을 가서 가정마다 복을 빌어 줍니다만,그것은 우리 성도 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이지 좀더 신앙적으로 성숙한다면 그보다는 주님과 동업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4.기도는 간구나 요청이 아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열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 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열심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아무리 돈을 추구해 보았자 여러분 을 위하여 득이 되지 못합니다. 일시적으로 돈을 모을런지는 모릅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사업목표를 바꾸어야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한다고 믿고, 실제로 그런 자세로 사업을 하면 성공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주님께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문제를 아뢸 뿐이지 해결방법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마리아는 단지 포도주가 없다고 했을 뿐이지 어떻게 하라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순히 문제를 주님께 아뢰었을 뿐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왔을 뿐입니다. 우리가 베드로 전서 5:7의 말씀을 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 이라' 생명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같은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와서 그 문제를 주님께 맡기면 그 때 부터는 그 문제가 나의 것이 아니라, 문제는 주님의 것이 됩니다. 그 문제는 주님이 푸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같은 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농담입니다만 사람들이 저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면 저는 은혜살이 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저는 예수 똑바로 믿고 살이 쪘습니다. 물론 살찐 이유는 운동부족이지만,키182cm에 69kg 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기린이었습니다. 목만 쭉 빠지고, 휘청거리면서 다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몸무게를 mg으로 환산합니다만, 이런 기린은 없겠지요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저의 성격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조바심이었지만, 이제는 염려를 안합니다. 살찐 이유에 +요인일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살이지요.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평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변호인에게 사건을 의로하면 그가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것이 심리적인 효과만을 위한 것입니까 그가 사건을 해결하여 우리의 근심거리를 제거해 줍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그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란 얼마나 위력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주님께 맡기세요.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께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 종이고, 누가 주인입니까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의 요구를 강요한다면,하나님은 참 곤란 합니다. 더 좋은 해결책이 있는데,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해결책을 들어 주어야 하는 경우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좀더 성숙한 태도를 가지고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부르셨는데, 우리는 이렇게만 기도합니다. '주여,주님께로 인도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어린아이라면 아이가 아버지에게 조르듯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언제까지든지 어린아이로 남아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바른 기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5. 믿음의 기도를 드립시다. 믿음의 기도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롸 신뢰는 성령님으로 부터 와야 합니다. 기도의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주도권이 주님께 있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인정한 다면, 성령님을 부려 먹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달라고만 합니다. 많이 달라고 하면 그것으로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달라고 요청하기 보다 오히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오히려 받기를 준비 하십시요. 우리가 기도할 때에 목적을 점검하고, 주님이 나로 하여금 하기를 원하시는 그것을 헌신적으로 행함으로 기도가 요청이 아니라 삶이라고 하는 것을 삶 가운데서 확인 하십시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우리 몸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돈도 재능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 번 주기도문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외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우리는 그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아들로서의 특권입니다. 기도는 삶을 전제로 드리는 것이며,공동체의 삶을 훈련받는 것이며 이타적인 존재로 탈바꿈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교육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여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 께 기쁨을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가 오히려 우리가 지엽적인 것을 구하는 것 보다 더 한차원 높은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모든것을 베푸시는 아버지께, 내 정욕으로 쓰려고, 무엇을 달라 달라 달라 하는 것은 성숙한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게 계획을 맡기고, 과정을 맡기고, 결과를 맡길 때에 그 모든 것을 주님이 해결 하십니다. 우리는 오히려 기도라는 최고의 특권을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 응답을 기대하고 기도 하지마는 많은 경우에 응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도생활의 어떤 부분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기도에 관하여 살펴 보고자 합니다.
1. 기도는 지겨운 노동이나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우리에게 특권으로 선물로 주셨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기도를 무슨 의무나 지겨운 노동으로 생각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즐거운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상담이나, 하나님께 대한 의무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에 대하여 부담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함에 있어서 다른 부수적인 것에 생각을 뺏겨 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천국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헤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다만 주님을 만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데 무슨 옷을 입어야 할까,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 따위를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기도회를 갖는다 하면 다른 집회 보다 훨씬 출석률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자세와 기도에 대한 관념을 고치면, 밤을 새워 기도하는데도 익숙해 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이야기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할까, 왜 이리 시간이 안깔까 생각하면서 자꾸 시계를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함께 있는 시간을 연장할 것입니다. 뭐 굳이 입을 열어 이야기 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그것으로 즐겁고,흐뭇합니다. 우리가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괴로운 형벌의 시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하면 잘못한 죄의 질에 따라 기도시간을 정해 줍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시간을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기도에 할애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많은 시간을 기도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어여삐 보시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그 시간을 즐겁고 기쁜 시간으로 여기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를 노동가치로 환산하여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도를 드리면, 많은 복을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어떤 이득을 보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우리들은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고 찬송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뜻없이 부르는 노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도는 여러분의 마음을 안정 시키는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하나님께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게 있는것이 좋아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지루해서 시계를 보는 것처럼, 하나님도 시계를 보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그 시간을 귀히 여긴다면 더 이상 시계를 보지 않게 될 것이고,기도 제목이 없어서 기도시간에 도망치는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2. 우리가 기도 하였는데 어째서 응답을 받지 못합니까 야고보서 4;3을 다같이 읽으십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이것은 우리의 요구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응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엄청난 좌절감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응답은 하나님 편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있으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활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믿는자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호흡을 일로 생각하면 정말 진땀나는 일입니다. 24시간을 계속해서 노동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가혹한 분일까요 24시간 계속해서 노동해라 그렇게 말씀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곧 성령님안에서의 삶을 말합니다. 그같은 삶을 가진 사람은 응답을 기대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늘 주님을 모시고 다닌다면, 말을 바꾸어 평범한 일상에도 주님의 내주하심을 의식하면서 언제나 대화를 나누는 자세로 살아간다면 참으로 넘치는 희열을 경험할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으로 형통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할 때 늘 주님과 대화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의견을 구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쉬지않고 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질문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가 그런 것이라면 왜 이렇게 특별히 기도 시간을 정하여 기도회를 갖습니까 그것은 마치 여러분 내외가 특별한 의논을 할 때,집 밖으로 나가거나 여행을 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늘 이야기 하는 상대입니다. 친구 사이에서도 늘 이야기 하지마는, 더 은밀한 이야기를 위하여 자리를 옮겨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과 같습니다. 늘 모든 것을 이야기 하지마는 이러한 시간을 통하여 더 내밀한 이야기를 서로가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경우가 잘 적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그 시간만 나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 드리거니와 기도는 절대로 그런것이 아닙니다. 기도란 대화입니다. 대화는 말하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듣기도 있습니다. 오히려 듣기를 잘하는 친구가 더 성숙한 것처럼, 우리가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도 해야합니다. 우리가 주님 음성듣기를 더 좋아한다면, 우리는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도회 시간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 시간에 무언가 엄청난 것을 말씀 하실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하나님이 정말 그런 분이라면 늘 우리는 충격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반응을 요구 하십니다. 정직한 순종을 요구 하시는 것입니다.
3.기도는 무어라 생각 하는가 우리는 기도가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잘못 을 범합니다. 기도는 활동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저 멀리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기도의 확신을 가로막는 요인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건물(교회)안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한다면, 음행의 문제나,다른 도덕적인 모든 문제에 대하여 잘못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때 예수님이 이땅에 계셨을 때 라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신앙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전에 신학교 시절 사경회를 할 때에 주기도문을 강의하기로 한 강사가 제 시간에 오지 않아서, 오래 동안 기다리다가 학생회에서 기도 좀 많이 하는 학생을 앞에 세워 통성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주여 삼창을 한 후에,저마다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어 목이 쉬도록 큰 소리로 기도를 했습니다. 한 30분 쯤 후에 강사가 도착하여 그 광경을 보고, 노발대발하여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이 귀머거리인 줄 아느냐 그리고 기도란 그런것이 아니라고 훈계조로 나머지 시간을 채우고 간 적이 있습니다. 물론 통성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귀머거리가 아닌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입으로 소리를 내어서 하는 것은 회중기도에 주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시는 주님에게 말하는데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소리를 내서 기도한다는 것은 다만 사탄의 방해를 받지 않 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소리없이 기도하면 졸거나 다른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주여! 주여! 고함지르고 기도하지 않으면 은혜가 없어서 그런 줄 압니다. 울부짖고, 목청을 돋우어 기도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지만,하나님 은 그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소리내 기도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 후련하라고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트레스가 해소되니까 기도응답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입니다. 이미 그렇게 기도한 것으로 모든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는 매일 같은 기도를 반복합니다. 정말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는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는 기도응답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기도 가 중요한 것이고, 간절한 기도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했다면 그것이 벌써 이루어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기도를 반복하는 것이 사람에게 심리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우리는 마이아에게 하이퍼 둘리아를 드리는 천주교신자가 아닙니다. 반복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 합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구하는 자가 받을것이 아니라, 믿고 구하는 자가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신과 아세라신의 제사장들은 반복해서 저들의 기도 를 드렸지만 엘리야는 단 한번 '여호와여, 이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나님인 것과 내가 당신의 조인것을 보여 주소서'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6:7을 봅시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 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구하기 이전에 다 아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야기 하는 즐거움 에 관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배때에 대표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사람을 위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들면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 마음에 들면 은혜스러운 기도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곧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일 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도를 요청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종교를 원합니까 아니면 관계를 원합니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는 요청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비교종교학에서 학문상의 분류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본래 부터 관계가 있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의 바른 관계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 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과 친구가 되고 동업자가 된다면,우리의 동업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돌봐 주시겠습니까 저도 심방을 가서 가정마다 복을 빌어 줍니다만,그것은 우리 성도 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이지 좀더 신앙적으로 성숙한다면 그보다는 주님과 동업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4.기도는 간구나 요청이 아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열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 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열심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아무리 돈을 추구해 보았자 여러분 을 위하여 득이 되지 못합니다. 일시적으로 돈을 모을런지는 모릅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사업목표를 바꾸어야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한다고 믿고, 실제로 그런 자세로 사업을 하면 성공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주님께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문제를 아뢸 뿐이지 해결방법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마리아는 단지 포도주가 없다고 했을 뿐이지 어떻게 하라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순히 문제를 주님께 아뢰었을 뿐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왔을 뿐입니다. 우리가 베드로 전서 5:7의 말씀을 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 이라' 생명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같은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와서 그 문제를 주님께 맡기면 그 때 부터는 그 문제가 나의 것이 아니라, 문제는 주님의 것이 됩니다. 그 문제는 주님이 푸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같은 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농담입니다만 사람들이 저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면 저는 은혜살이 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저는 예수 똑바로 믿고 살이 쪘습니다. 물론 살찐 이유는 운동부족이지만,키182cm에 69kg 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기린이었습니다. 목만 쭉 빠지고, 휘청거리면서 다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몸무게를 mg으로 환산합니다만, 이런 기린은 없겠지요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저의 성격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조바심이었지만, 이제는 염려를 안합니다. 살찐 이유에 +요인일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살이지요.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평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변호인에게 사건을 의로하면 그가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것이 심리적인 효과만을 위한 것입니까 그가 사건을 해결하여 우리의 근심거리를 제거해 줍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그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란 얼마나 위력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주님께 맡기세요.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께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 종이고, 누가 주인입니까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의 요구를 강요한다면,하나님은 참 곤란 합니다. 더 좋은 해결책이 있는데,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해결책을 들어 주어야 하는 경우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좀더 성숙한 태도를 가지고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부르셨는데, 우리는 이렇게만 기도합니다. '주여,주님께로 인도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어린아이라면 아이가 아버지에게 조르듯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언제까지든지 어린아이로 남아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바른 기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5. 믿음의 기도를 드립시다. 믿음의 기도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롸 신뢰는 성령님으로 부터 와야 합니다. 기도의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주도권이 주님께 있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인정한 다면, 성령님을 부려 먹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달라고만 합니다. 많이 달라고 하면 그것으로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달라고 요청하기 보다 오히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오히려 받기를 준비 하십시요. 우리가 기도할 때에 목적을 점검하고, 주님이 나로 하여금 하기를 원하시는 그것을 헌신적으로 행함으로 기도가 요청이 아니라 삶이라고 하는 것을 삶 가운데서 확인 하십시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우리 몸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돈도 재능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 번 주기도문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외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우리는 그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아들로서의 특권입니다. 기도는 삶을 전제로 드리는 것이며,공동체의 삶을 훈련받는 것이며 이타적인 존재로 탈바꿈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교육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여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 께 기쁨을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가 오히려 우리가 지엽적인 것을 구하는 것 보다 더 한차원 높은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모든것을 베푸시는 아버지께, 내 정욕으로 쓰려고, 무엇을 달라 달라 달라 하는 것은 성숙한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게 계획을 맡기고, 과정을 맡기고, 결과를 맡길 때에 그 모든 것을 주님이 해결 하십니다. 우리는 오히려 기도라는 최고의 특권을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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