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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기도 (마6:7-13)

본문

지난 주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자기 마음을 주어서 자기의 일에 참여하게 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을 구약의 기도들을 통해서 확인해 보았습니다. 기도로서 묻기도 하고 요구도 하고 항의도 하며 자기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가 이런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문제는 기도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뜻과 욕심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기도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런 것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지금쯤 갓바위는 수능시험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도 수능을 위해서 특별 기도한다고 야단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것은 기도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봅시다. 7절에 "또 기도 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을 생각하느니라"고 합니다. 중언부언이란 말은 '말을 더듬다, 같은 것을 반복하다, 지루하게 재잘거린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말을 더듬어 본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더듬을 때 하고자 하는 말은 빨리 나오지 않지만 똑 같은 헛소리를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저는 자랄 때 이웃에 말 더듬는 친구가 있었는데 하도 심하게 똑 같은 헛소리를 반복해도 말이 안나와 나중에는 무릎을 탁 쳐야 비로소 하고자 하는 말이 한 마디 툭 튀어 나왔습니다. 하도 우스워서 흉내를 좀 내었더니 어느 새 나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친다고 애를 먹은 경험을 했습니다. 참으로 쉽게 따라가는 것이 말 더듬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도 말더듬이가 반복하듯이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다가 보니 지루하게 재잘거리는 상황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옛날 엘리야 시대에 바알의 제사장들이 '바알이여'를 하루 종일 반복했던 것을 연상해보십시오. 이런 식으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중언부언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신 앞에 얼마나 많이 중언부언합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절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1천 번 또는 3천 번을 절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 모두가 중언부언 형태입니다. 왜 이렇게 하게 됩니까 응답이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들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셔서 들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한 두 마디만 이야기해도 됩니다. 그러니 길게 기도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의식주 문제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입고 먹고사는 것을 위해서 중언부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것들은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도 기르시며 들의 백합화도 돌보시는 하나님이 이런 것들보다 귀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르시지 않으시겠느냐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알아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에 대하여서는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이제 이 기도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뜻이 있을까요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나타내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아버지로 표현된 것이 15번 정도며 간접적으로 아버지로 표현된 것이 13번 정도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복음서에만도 170번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개인이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인 반면, 구약에서는 단 한 번도 개인이 직접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이렇게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연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친 것은 예수님 자신의 사역을 근거해서 결정적인 전기가 마련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일을 통하여 결정적인 근거가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1:27에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아들은 아버지를 계시하는 모든 권세를 위임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알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아들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이 아버지를 아는 것은 아들이 받은 계시를 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것도 인간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소원을 하셔야만 가능합니다. 아들 예수님은 이러한 일을 십자가의 부활로서 완수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후 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아버지는 죄사함과 새로운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통해서 죄 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도를 가르치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신 것은 이런 뜻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하신 일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주기도의 내용은 이 아버지 중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가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소서",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등등. 고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 구원역사는 주님이 이루셨고 또 이루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하는 사람은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고 계시며 또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가를 되새기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면서 33-34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땅에서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날마다 알아서 살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하고 힘 쓸 것은 그 나라와 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추구할 것은 세상에서 어떻게 잘 살 것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주님의 백성으로서 사느냐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신자가 기도하고 구하도록 하는 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내용과 방향을 제시하신 셈입니다. 주님은 죽으실 때까지 기도한 것이 바로 이것을 위해서였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중보자적인 기도가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그리고 부활 후에도 이런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34절에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기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백성들이 세상 세력과 싸우면서 드리는 간구가 나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24-31에는 핍박이 시작되자 투쟁 중에 있는 성도들의 기도와 응답을 볼 수 있습니다.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님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륢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님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7장에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는 스데반의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난 당하는 성도의 간구를 계시록에서는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6:10)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기도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세상에 좋은 것 없다. 주님만을 기다릴 뿐이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대부분의 서신을 쓴 바울의 기도들을 그의 서신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 1:16이하에는 이런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1:9절 이하에는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약의 기도의 형태들을 훑어보았습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신자는 기도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으며 복음을 따라서 가는 데에 기도하지 않는 신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찬양과 감사와 기쁨의 표현도 있지만 고난 속에서 투쟁하며 죽어가며 부르짖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기도 하지만 또 남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것을 서로서로 권장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복음 전함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권면하고 있고 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믿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탄식과 부르짖음이 없을 수 없으며 그런 중에서도 감사와 찬양과 소망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도하는 속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신자는 기도하는 생명체입니다. 만약 이러한 생명현상이 없다면 그것은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이거나 죽은 믿음일 것입니다. 신자는 땅의 것을 위하여 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때문에 구할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또 그렇게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땅의 것은 아예 잊고 주님만을 소원하며 구하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 붙잡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붙잡힌 사람은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천국의 생명을 호흡하는 양상입니다. 여러분도 이 생명이 있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저는 요즈음 교회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생각 중에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염려가 되는 것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생명이 있는 가라는 점입니다. 생명이 있어야 믿는 자지요. 그렇다고 생명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도 곤란한 것 같습니다. 주님이 없는 교회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있다면 주님이 일하실 것이고 주님이 일하신다면 또한 생명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이 생명의 삶을 살도록 할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말씀이 있고 그것을 화합하여 받아들이는 자가 있다면 생명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자가 누구인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자신이 주님 앞에서 생명을 호흡하면서 사는 자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도하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기도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기도가 없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때문에 기도하는 자는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것이고 하지 않는 자는 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라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기도하는 자를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여전히 기도 속에서 살 것이고 또 자기의 기도가 세속적이고 불신앙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때면 고쳐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가 여러분에게 자신을 찾아주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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