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 (마6:9-10,롬2:17-29)
본문
우리가 착하고 훌륭한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을 보면 "저 학생이 누구집 아들이냐 하고 대부분 묻게 됩니다. 또한 행실이 나쁘고 고약한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저놈 뉘집 자식이냐" 하고 묻게 됩니다. 제가 어릴 때는 아무 산에나 들어가서 눈을 피하여 나무를 베어오기만하면 자기 것 이었습니다.철 모르고 산에 가서 나무를 베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자기의 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들은 산 간수를 두어서 산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어느날 친구들과 같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유독 산간수가 있는 그 산에는 빨갛고 큰 나무가 많습니다. 그런 나무는 도끼로 패면 잘 쪼개어지고 불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날 간수가 있는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서 막 얹으려 하는데 산 간수가 나타났습니다. 산 간수가 "이놈들아!" 하고 소리를 칠 때 지게 위의 나무는 내던져 버리고 지게와 톱만 가지고 도망을 했습니다. 내 뒤를 친구들이 따라 오는데 그 산 간수의 눈이 얼마나 밝은지 "제일 앞에 도망가는 놈 너 교회 김장로 아들 아닌가 어디까지 가나 네가 대국까지 갈꺼가"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소리 한마디에 제 온몸이 굳어져 버렸습니다. 내 자신이 욕을 얻어 먹는 것은 괜찮은데 거기에다가 교회이름, 장로이름, 아버지 이름까지 들먹이며 욕을 얻어 먹게 된 견디기 어려운 경험을 했습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가 부하들이 야영하는 막사를 방문했습니다. 다들 조용히 잘 지내고 있는데 어느 막사 앞을 지나다보니 그 막사안에서 시끄럽게 떠드느 소리가 났습니다. 그들이 떠드는 내용은 "보나파르트 그놈은 사깃군이며 나쁜놈이며 죽일놈이라" 고 하면서 나폴레옹 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화가 나서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이놈들 내가 없는 자리라고 해서 나를 그렇게 욕할 수 있느냐" 당황한 부하들이 하나같이 말하기를 "폐하, 저희가 언제 폐하를 욕했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너희들이 조금전에 나를 사깃꾼, 나쁜놈, 죽일놈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했더니 부하들이 말하기를 "절대 우리는 폐하를 욕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소대에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라는 질이 나쁜 병사가 있는데 우리가 그를 욕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 사실을 확인해보니 자기 이름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병사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병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를 준엄하게 꾸짖고는 명령하기를 "네 이름을 고치든지 아니면 네 행실을 고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아름답게 살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습니다.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으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모든 일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행적 뒤에 언제나 따라 다니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행하심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더라' 입니다. 우리가 잘 믿거나 못 믿거나 관계없이 세상에 나가면 "예수믿는 사람교회에 다니는 사람예수꾼예수쟁이" 라는 이름이 우리 앞에 따라 다니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3:2에는 우리 믿는 사람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편지는 뜻과 사상 그리고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편지는 보아서그 편지를 보낸 사람의 마음을 압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직접 예수님을 보지를 못합니다. 먼저 믿는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저들 나름대로 판단합니다. 우리가 엉터리로 신앙생활을 하고 엉터리로 살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엉터리로 봅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살면 예수님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저희들 눈에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습니까 조롱을 받습니까 우리가 다니는 직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높임을 받습니까 조롱을 받습니까 우리의 가정생활로 인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습니까 조롱을 받습니까 우리의 자녀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습니까 조롱을 받습니까 여러분의 사업과 세상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았습니까 조롱을 받았습니까 오늘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나폴레옹의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우리의 이름을 고치든지, 아니면 우리의 행실과 믿음의 생활을, 인생을 신앙인다운 삶으로 고치든지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2:17 이하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은 자칭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한다'고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 민족이라고 자랑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요 그리고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자랑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도적질하지 마라, 간음하지 말라, 우상숭배하지 말라 하면서 자기들은 도적질하고 간음하여 우상숭배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성도님들! 오늘 하나님의 이름이 누구 때문에 모욕을 당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세상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조롱하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는 우리 때문에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더 욕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표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인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 이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 참 할례받은 사람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겉모습으로 신앙인이라 해서 참 신앙인이 아니라 우리의내면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되고 우리의 마음이 세례를 받아 씻음을 받고 새 존재를 힘입고 살아갈 때에 참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은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면 우리의 어떤 삶의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 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해서 우리의 삶이 더 거룩하고 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하기는 커녕 사람과 원수만 맺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이 지저분하고 우리의 인생을 더럽게 살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평화의 하나님, 여호와 샬롬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언제나 평화가 없고 이마를 찡그려 붙이고 아침 굶은 시어머니같이 불만에 쌓여 있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닛시, 승리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패배감과 좌절감 속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례의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면 낙심하거나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뭔가 준비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이례의 하나님이라고 말은 하면서 근심과 걱정의 전문가가 되어서 한숨 뿐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공이라고 고백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에 모욕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변화시키고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을 치료하시는 분이라고 고백 하면서 20년 전에 예수믿을 때나 15년 전 믿을 때나 그 행실, 성격, 마음, 그때의 가치관, 인생관을 그대로 가지고 오늘을 산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이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인들 중에서 모욕을 받게 하는 그러한 생활을 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9편 10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 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바로 알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삶이 됩니다. 시편 20편 7절 말씀에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요,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신성이, 그 성품이 그 사람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골리앗은 창을 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면서 전장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돌멩이 5개를 들고 나아 가면서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에게 나오지만 나는 네가 모독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나아 간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그 큰 골리앗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 제일 먼저 드려야 할 기도의 제목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첫번째 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개 숙이고 제일 먼저 기도드리는 그 기도의 제목이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이 제일 먼저 드리는 기도의 제목이 무었입니까 "나 건강하게 해주십시요. 내 자식들 출세하게 해주십시요. 내 사업 잘 되게 해 주십시요. 내 가정 축복받게 해 주십시요" 라고 기도합니까 이러한 기도 제목으로 날마다 기도한다면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밖에 되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기도외에 그 이상 넘어가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인간욕망의 연장선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 우리 아빠'라고 고백한 후에 '아버지 나로 하여금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가 본래 거룩하십니다. 이 기도의 뜻은 하나님의 이름이 본래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할때 우리 자신이 거룩해지고 우리가 거룩한 일을 할 때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는 까닭에 이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알렉산드리아에 '씨뿌리앙'이라는 사람은 이 기도의 뜻은 그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여지게 하여 달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거룩하게 받을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11:6 말씀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과 그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신가를 아는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자기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로 생각합니다. 인간의 취약성을 메꾸어 주는 임시변통의 수단으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곤궁에 처해 있거나 유아기적인 욕구가 좌절될 때에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꼭두각시 노릇하시는 분으로 착각하고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요구하는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여줘야 그 하나님을 좋은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오늘의 성도들의 마음을 휩쓸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침해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욕구의 대상으로 간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이해득실 차원에서 믿고 있다면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 중심주의의 악순환을 끊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극히 불가능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밀폐된 교리속에 묶어 놓고 자신은 그 교리 몇 개를 지켰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안전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몇 가지의 규칙에 묶어 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종교의식 속에다 한정시켜 놓고, 주일에 종교의식 하나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해야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도님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고나 감정을 따라 행동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두 가지 교리나 종교의식에 매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자시요 우리의 좋으신 아빠이시지만 그 동시에 크나 큰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그 손에 품고 계시는 신비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작이 되시면 큰 의미가 되시면 만유의 참된 미래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가까우면서도 먼 분이시요, 인간의 이해에 따라 조정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인간에게 당신을 계시 하면서도 때로는 인간의 눈에서 당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끊임없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 하시도록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지도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고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광 돌리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이름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인격이 변화되고 순결과 성결의 생활로 날마다 새로와지고 더 부지런하고 더 봉사하고 더 희생하며 거룩한 삶을 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믿는 사람은 실수를 하고 죄를 저지르면 그 개인의 책임으로 끝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실수를 하고 죄를 저지르고 못된 일을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모독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31 에서 사도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하려고 하면 정의에 목이 마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개인적인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사회적인 것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실은 사회적인 차원입니다. 현실의 사회적인 측면은 개인주의적인 측면으로만 이해 되어질 수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 아버지가 가장 크게 분노하시는 것은 우리 한 사람이 실수하고 범죄하는 것보다도 사회적인 차원을 보시고 더 분노하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 모독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불의와 지나친 불균등으로 가득 차고, 착취가 있고, 폭력이 있고, 고문이 있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없어지게 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개개인이 성결하고 거룩하게 살 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와 더 복된 사회가 되기위하여 불의에 대항하고 착취와 폭력과 고문에 대항하고 세상의 갖가지 약한 정치권력과 대항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욕을 먹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함께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 또 하나는 이웃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는 이방인들 사회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 떠서 주는 것도 그 상을 잃지 아니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의 말로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고 우리의 지식과 기술이 복의 근원이 되어 많은 사람을 복되게 할 때에 우리는 수 많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나 감사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힘도 없고 넉넉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매주일 이웃을 위하여 써 달라고 내는 선교헌금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지극한 사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여러분! 돈이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할 수 있습니다. 말 부조라도 잘하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부조는 말 부조입니다. 말로 위로해 주고 힘이 되는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혜, 기술, 건강과 그외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웃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관심을 보임으로 이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언어에서, 행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이 기도의 통제를 받지 않는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요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이기적인 기도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개 숙이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후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는 '하나님이시여 나로 하여금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입니다. 이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삶을 살아서 우리로 인하여 세상의 이방인 사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받들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신앙생활로 통해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날 간수가 있는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서 막 얹으려 하는데 산 간수가 나타났습니다. 산 간수가 "이놈들아!" 하고 소리를 칠 때 지게 위의 나무는 내던져 버리고 지게와 톱만 가지고 도망을 했습니다. 내 뒤를 친구들이 따라 오는데 그 산 간수의 눈이 얼마나 밝은지 "제일 앞에 도망가는 놈 너 교회 김장로 아들 아닌가 어디까지 가나 네가 대국까지 갈꺼가"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소리 한마디에 제 온몸이 굳어져 버렸습니다. 내 자신이 욕을 얻어 먹는 것은 괜찮은데 거기에다가 교회이름, 장로이름, 아버지 이름까지 들먹이며 욕을 얻어 먹게 된 견디기 어려운 경험을 했습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가 부하들이 야영하는 막사를 방문했습니다. 다들 조용히 잘 지내고 있는데 어느 막사 앞을 지나다보니 그 막사안에서 시끄럽게 떠드느 소리가 났습니다. 그들이 떠드는 내용은 "보나파르트 그놈은 사깃군이며 나쁜놈이며 죽일놈이라" 고 하면서 나폴레옹 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화가 나서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이놈들 내가 없는 자리라고 해서 나를 그렇게 욕할 수 있느냐" 당황한 부하들이 하나같이 말하기를 "폐하, 저희가 언제 폐하를 욕했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너희들이 조금전에 나를 사깃꾼, 나쁜놈, 죽일놈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했더니 부하들이 말하기를 "절대 우리는 폐하를 욕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소대에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라는 질이 나쁜 병사가 있는데 우리가 그를 욕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 사실을 확인해보니 자기 이름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병사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병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를 준엄하게 꾸짖고는 명령하기를 "네 이름을 고치든지 아니면 네 행실을 고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아름답게 살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습니다.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으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모든 일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행적 뒤에 언제나 따라 다니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행하심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더라' 입니다. 우리가 잘 믿거나 못 믿거나 관계없이 세상에 나가면 "예수믿는 사람교회에 다니는 사람예수꾼예수쟁이" 라는 이름이 우리 앞에 따라 다니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3:2에는 우리 믿는 사람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편지는 뜻과 사상 그리고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편지는 보아서그 편지를 보낸 사람의 마음을 압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직접 예수님을 보지를 못합니다. 먼저 믿는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저들 나름대로 판단합니다. 우리가 엉터리로 신앙생활을 하고 엉터리로 살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엉터리로 봅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살면 예수님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저희들 눈에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습니까 조롱을 받습니까 우리가 다니는 직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높임을 받습니까 조롱을 받습니까 우리의 가정생활로 인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습니까 조롱을 받습니까 우리의 자녀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습니까 조롱을 받습니까 여러분의 사업과 세상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았습니까 조롱을 받았습니까 오늘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나폴레옹의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우리의 이름을 고치든지, 아니면 우리의 행실과 믿음의 생활을, 인생을 신앙인다운 삶으로 고치든지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2:17 이하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은 자칭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한다'고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 민족이라고 자랑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요 그리고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자랑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도적질하지 마라, 간음하지 말라, 우상숭배하지 말라 하면서 자기들은 도적질하고 간음하여 우상숭배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성도님들! 오늘 하나님의 이름이 누구 때문에 모욕을 당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세상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조롱하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는 우리 때문에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더 욕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표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인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 이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 참 할례받은 사람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겉모습으로 신앙인이라 해서 참 신앙인이 아니라 우리의내면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되고 우리의 마음이 세례를 받아 씻음을 받고 새 존재를 힘입고 살아갈 때에 참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은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면 우리의 어떤 삶의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 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해서 우리의 삶이 더 거룩하고 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하기는 커녕 사람과 원수만 맺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이 지저분하고 우리의 인생을 더럽게 살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평화의 하나님, 여호와 샬롬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언제나 평화가 없고 이마를 찡그려 붙이고 아침 굶은 시어머니같이 불만에 쌓여 있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닛시, 승리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패배감과 좌절감 속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례의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면 낙심하거나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뭔가 준비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이례의 하나님이라고 말은 하면서 근심과 걱정의 전문가가 되어서 한숨 뿐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공이라고 고백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에 모욕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변화시키고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을 치료하시는 분이라고 고백 하면서 20년 전에 예수믿을 때나 15년 전 믿을 때나 그 행실, 성격, 마음, 그때의 가치관, 인생관을 그대로 가지고 오늘을 산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이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인들 중에서 모욕을 받게 하는 그러한 생활을 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9편 10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 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바로 알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삶이 됩니다. 시편 20편 7절 말씀에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요,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신성이, 그 성품이 그 사람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골리앗은 창을 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면서 전장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돌멩이 5개를 들고 나아 가면서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에게 나오지만 나는 네가 모독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나아 간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그 큰 골리앗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 제일 먼저 드려야 할 기도의 제목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첫번째 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개 숙이고 제일 먼저 기도드리는 그 기도의 제목이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이 제일 먼저 드리는 기도의 제목이 무었입니까 "나 건강하게 해주십시요. 내 자식들 출세하게 해주십시요. 내 사업 잘 되게 해 주십시요. 내 가정 축복받게 해 주십시요" 라고 기도합니까 이러한 기도 제목으로 날마다 기도한다면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밖에 되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기도외에 그 이상 넘어가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인간욕망의 연장선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 우리 아빠'라고 고백한 후에 '아버지 나로 하여금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가 본래 거룩하십니다. 이 기도의 뜻은 하나님의 이름이 본래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할때 우리 자신이 거룩해지고 우리가 거룩한 일을 할 때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는 까닭에 이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알렉산드리아에 '씨뿌리앙'이라는 사람은 이 기도의 뜻은 그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여지게 하여 달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거룩하게 받을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11:6 말씀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과 그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신가를 아는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자기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로 생각합니다. 인간의 취약성을 메꾸어 주는 임시변통의 수단으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곤궁에 처해 있거나 유아기적인 욕구가 좌절될 때에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꼭두각시 노릇하시는 분으로 착각하고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요구하는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여줘야 그 하나님을 좋은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오늘의 성도들의 마음을 휩쓸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침해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욕구의 대상으로 간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이해득실 차원에서 믿고 있다면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 중심주의의 악순환을 끊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극히 불가능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밀폐된 교리속에 묶어 놓고 자신은 그 교리 몇 개를 지켰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안전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몇 가지의 규칙에 묶어 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종교의식 속에다 한정시켜 놓고, 주일에 종교의식 하나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해야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도님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고나 감정을 따라 행동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두 가지 교리나 종교의식에 매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자시요 우리의 좋으신 아빠이시지만 그 동시에 크나 큰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그 손에 품고 계시는 신비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작이 되시면 큰 의미가 되시면 만유의 참된 미래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가까우면서도 먼 분이시요, 인간의 이해에 따라 조정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인간에게 당신을 계시 하면서도 때로는 인간의 눈에서 당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끊임없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 하시도록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하나님의 지도와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고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광 돌리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이름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인격이 변화되고 순결과 성결의 생활로 날마다 새로와지고 더 부지런하고 더 봉사하고 더 희생하며 거룩한 삶을 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믿는 사람은 실수를 하고 죄를 저지르면 그 개인의 책임으로 끝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실수를 하고 죄를 저지르고 못된 일을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모독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31 에서 사도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하려고 하면 정의에 목이 마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개인적인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사회적인 것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실은 사회적인 차원입니다. 현실의 사회적인 측면은 개인주의적인 측면으로만 이해 되어질 수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 아버지가 가장 크게 분노하시는 것은 우리 한 사람이 실수하고 범죄하는 것보다도 사회적인 차원을 보시고 더 분노하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 모독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불의와 지나친 불균등으로 가득 차고, 착취가 있고, 폭력이 있고, 고문이 있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없어지게 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개개인이 성결하고 거룩하게 살 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와 더 복된 사회가 되기위하여 불의에 대항하고 착취와 폭력과 고문에 대항하고 세상의 갖가지 약한 정치권력과 대항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욕을 먹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함께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 또 하나는 이웃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는 이방인들 사회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 떠서 주는 것도 그 상을 잃지 아니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의 말로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고 우리의 지식과 기술이 복의 근원이 되어 많은 사람을 복되게 할 때에 우리는 수 많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나 감사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힘도 없고 넉넉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매주일 이웃을 위하여 써 달라고 내는 선교헌금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지극한 사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여러분! 돈이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할 수 있습니다. 말 부조라도 잘하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부조는 말 부조입니다. 말로 위로해 주고 힘이 되는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혜, 기술, 건강과 그외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웃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관심을 보임으로 이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언어에서, 행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이 기도의 통제를 받지 않는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요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이기적인 기도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개 숙이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후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는 '하나님이시여 나로 하여금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입니다. 이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삶을 살아서 우리로 인하여 세상의 이방인 사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받들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신앙생활로 통해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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