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밥을 주옵소서 (마6:9-13,막8:1-10)

본문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크게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하늘을 향한 기도요 또 하나는 땅을 향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밥을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이 기도문은 큰 전환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처음의 세 가지 기도 즉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 하는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에, 하나님의 일에 참가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인간사회, 인간의 일에 관여해 달라는 기도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밥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유혹이 많습니다. 유혹을 이기게 해주옵소서' '이 세상에 악이 너무 많아 나도 모르게 악에 빠져들어 갑니다 . 악에서 건져 주십시오.' 첫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내고 두번째 부분은 인간의 관심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짧은 주기도문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수직적인 관심과 인간에대한 수평적인 관심이 조화를 이루고 공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또한 주기도문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 사건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육신의 몸이 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와 물질 세계를 중요시한다고 하는 귀한 뜻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 네번째 기도는 '하나님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밥을 주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배고픈 자에게 밥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밥 없이는 우리의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옛말에 '금강산도 식후경'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 '사흘을 굶고 도적질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잇습니다. 괴테는 말하기를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물질적인 하부구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이 아무리 고상하고 아무리 형이상학적이라 하더라도, 인간존재라고 하는 것은 한 덩어리의 밥과 한 그릇에 물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생명은 밥 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도 한 덩어리의 밥 없이는 그 생명이 지탱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천국의 메세지를 증거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늘나라의 메세지를 듣는 중에 배가 고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셨습니다. 또 백성들이 사흘동안 주리고 굶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7개와 물고기 2마리로 4천명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밥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밥을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을 올리는 기도는 마땅히 드려야 할 기도인 것입니다. 또한 이 땅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는 밥을 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얼마전에 청소부 세 사람이 쓰레기 장에서 쓰레기를 치우다가 거기에 떨어져 있는 달걀을 깨어 먹고는 두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중태에 빠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던 대학생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반은 굶고 반은 라면으로 때를 이었는데 대학을 다 마치기 전에 그의 위장을 다 잘라내게 된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월남 난민이 바다를 표류하던 중에 너무너무 배가 고파 그들중에 제일 힘이 없는 약한 사람을 잡아서 사람고기를 먹고 그들이 지탱해 왔다는 것입니다. 미국 이민국에서 그들을 미국에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느냐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을 잡아먹은 살인자라는 것과 그들이 너무 굶주려서 사람을 잡아먹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 이민국이 갈등을 느꼈다는 것이 기사에 났었습니다. 이 땅 위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수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한 제목으로 밥을 달라고 제일 먼저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일을 염두에 두시고 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양식이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매일 아침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 들에 나가서 식구수대로 그날 먹을 양식만 거두어 들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욕심이 생겨서 며칠 먹을 양식을 한꺼번에 거두어 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먹고 남은 양식은 그대로 남아 있지 않고 벌레가 일고 냄새가 나고 썩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 진노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말씀중에 '오늘' 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두번째는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가 아닌 사회적인 기도입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살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먹을 양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일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고 염려하는 자는 믿음이 적은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날을 창조하시고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날과 시간을 위한 양식도 만드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이 기도는 너무나 많이 쌓아 놓고 많이 소유하고 있으면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자들을 향한 경종입니다. 오늘 먹을 양식이 있으나 내일 먹을 양식이 없다고 해서 탄식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떤 집에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손님들을 많이 초청했습니다.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산해진미가 상에 가득차 있는데 가장 연장자가 식사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이러한 산해진미를 많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와같은 양식을 날마다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이와같은 기도가 아닌지 모릅니다. "너희 지갑을 풀 준비가 되어있지 않거든 주기도문을 외우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은총의 기도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나의 밥만 달라고 기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 하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밥은 나의 밥이 아니라 우리의 밥인 것입니다. 복음은 타인의 필요를 무시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밥' 은 하나님의 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리때 우리에게는 큰 책임과 의무가 따르게 됩니다. 평생 먹어도 다 먹지 못할 양식을 쌓아 놓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만큼 더 위선적인 기도는 없습니다. 저는 농촌에서 자랐습니다. 잘먹고 살지는 못했지만 절대적인 가난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아침은 밥을 먹고 점심은 감자를 먹고 저녁은 국수를 먹고 살았습니다만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집을 보고 상대적이긴 하지만 부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부자에 대한 컴플렉스가 없습니다. 부자에 대해서 한이 맺힌 사람도 아닙니다. 잘 사는 사람을 이유없이 미워해야 할 어떤 것도 저에게는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원하시는대로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고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뜻으로 세가지 좌우명을 제 책상앞에 적어 놓았습니다. 청빈과 정결과 순명입니다. 좀 가난하게 살고 정결하게 살며 하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좌우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속에도 끊임없는 소유하고 싶은 욕망, 누리고 싶은 욕망, 쌓아놓고 싶은 욕망이 꿈틀 거린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성자에게나 평범한 사람에게나 인간의 마음속에 순간순간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저의 주머니에 돈이 몇푼 들어 있으면 든든하고 웬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하고 주머니에 돈이 별로 없으면 웬지 불안하고 사람을 만나기 싫어집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소유를 누리고 쌓아 놓은 사람을 향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했으니 더 큰 창고를 짓고 더 많이 쌓아놓고 더 많이 먹고 마시고 즐기라" 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잘사는 사람에게 복음이 무었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것이 복음입니다. 부유한 자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이 말씀을 듣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이야기하면서도끼가 나무뿌리에 지금 박혀 있으니 회개하라고 소리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서 "무엇을 하리까" 라고 물었을 때 그들을 향하여 세례 요한이 맨먼저 한 말이 "옷 여러벌 있는자는 옷을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쌓아놓은 자는 그것을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자기의 재산을 정당하고 선하게 벌었다고 해도 그 재산을 이기적으로 쌓아둘 권리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서 이러한 죄를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우리의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은 자선도 아니고 선심도 아니며 동정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정의이고 공의인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배고픈 사람이 무엇을 달라고 하면 언제나 주라. 그 사람이 남의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달라는 것이다" 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기보면 부자가 특별히 악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부자가 되는데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노력하고 절약하고 쌓아서 부자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마지막에 보면 부자는 지옥에 가는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밥을 같이 나누어 먹지 아니함으로 불의를 행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심판자로 나타나셔서 양과 염소를 가를 때에 심판자이신 예수님이 물은 질문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느냐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느냐 내가 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느냐 내가 병들었을 때에 간호해 주었느냐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보았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자를 동일시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요. 그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4세기의 성자였던 바질은 말하기를 "너의 집에 썩어가고 있는 양식은 굶주린 자의 것이다. 너의 침상 밑에서 곰팡이가 슬고 있는 신발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의 것이다. 너의 옷장 속에 쌓여있는 의복은 헐벗은 자의 것이다. 너의 금고에 쌓여있는 돈은 가난한 자의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환난을 당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위로하고 고난을 당하는 자와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부탁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서는 쌓아 놓은 양식을 나누어 주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땅의 전 인류가 밥을 굶지 않도록 이 땅을 창조하실 때에 이미 다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날의 양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평생 먹을 양식, 몇대를 먹을 양식을 독점하고 쌓아 놓기에 지금도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굶주려 죽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오늘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내일은 내일의 양식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여 그것으로 살려고 하는 믿음으로 산다면 이 세상에는 지금의 인구의 세배 네배가 되어도 굶주리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5:1 이하에 보면 '들어라 부유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웃을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라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욕심이 생겨 한꺼번에 많은 만나를 끌어 들였을때 그 만나는 썩고 곰팡이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쌓아놓는 재물과 물질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이 썩고 우리의 후손들이 병들지 않습니까 지난번 장학생 수련회 때에 어느 장로님이 오셔서 간증을 해주셨습니다. 그 장로님이 한번은 저축을 장려하는 강연을 부탁받았다고 합니다. 장로님이 강연하러 나가시기 전에 어떤 사람이 먼저 저축에 대한 강연을 했는데 그 사람은 진주 부자에 대한 예를 들어 말을 하더랍니다. 진주 부자가 된 데에는 자린고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모아서 진주의 들을 하나하나 사기 시작해서 마침내는 진주의 모든 땅을 다 사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근검절약하여 그렇게 잘살아야 되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그 연사가 강단을 내려왔습니다. 그 뒤를 이어 그 장로님이 강단에 올라 가셔서 앞에 말한 사람의 말을 뒤집어 버리셨다고 합니다. 진주부자는 안 먹고 안 쓰고 해서 돈을 모아 진주 들을 다 사들여 부자가 되었지만 이 부자가 진주의 땅을 다 사버림으로 진주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소작농이 되고 부자의 종이 되었는데 이것이 정의냐고 반문하셨다고 합니다. 가난 가운데는 거룩한 가난이 있습니다. 거룩한 가난은 남을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내 스스로 가난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지 못하고 안 먹고 안 쓰고 해서 땅 한평 사고 또 사고, 집 한채 사고 두채 사고 세채 사면 그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이 집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리도 후서 8:9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스스로 가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이유는 가난하고 헐벗은 우리 인간들을 건져 주셔서 부요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 직전에 있을 때 예언자 이사야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채찍질하고 경종을 울렸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한다고 재를 덮어쓰고 울고 금식을 했습니다. 이사야 58:5 이하의 말씀을 보면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덮어 쓰는 것이 어찌 금식이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한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 금식이라는 말씀입니다. 한국의 경제가 많이 성장했습니다. 경제성장의 배후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분배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의 이 작은 땅 덩어리를 몇몇 소수의 사람이 다 소유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신문 지상에 보면 땅의 공개념문제가 나옵니다. 땅이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고 땅은 모두의 것이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따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높은 산은 깎여지고 골짜기는 메워져서 평균케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어떻게 이루어질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로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는 놀라운 기도인 것입니다. 돈을 많이 소유하고도 돈에 의지하지 않았던 사람이 역사에 몇 명이나 됩니까 재산을 많이 소유하고도 교만해지지 않았던 사람이 역사에 몇 명이나 됩니까 많은 재물을 쌓아놓고 돈이 우상이 되지 않았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잠언30:8-9에 한 지혜자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 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과 같습니다. 행함이 없는 기도는 행함이 없는 신앙과 같이 죽은 것입니다 . 기도 할 때는 "하나님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의지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이 땅에서 행동하고 생활할 때는 우리의 노력과 협력과 결단없이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는 그 배후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첫째는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땀을 흘려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흘리는 땀은 이 세상의 어떤 행위보다도 성스럽고 신선한 것입니다. 노동은 기도보다도 더 거룩한 것입니다. 한국사람들의 소원은 놀고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 파출부로 가서 일하거나 노동판에서 일하는 것을 저주받는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리에게 먹을 것이 많으니 놀고 먹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4:28에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오늘의 양식이 있다 할지라도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두번째 가진자의 결단이 없이는 하나님도 가난한 자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일을 통해서 평균케 하시고자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1년중 어느 한 주일을 유언주일로 정해서 아직도 유언을 하지 못한 사람이 유언을 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유언하지 않고 죽으면 자식들 간에 싸움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분수에 알맞게 살고 남는 것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있어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원의 길로 수입의 1/10을 하나님께 바쳐서 유업이 없는 자와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이 배려해 주신 놀라운 배려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사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밥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진정한 기도를 드림으로 이 땅의 가난한 자들이 적어지는 기적을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하는 겸손하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우리의 기도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868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