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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이웃의 양식을 위하여 (마6:9-13)

본문

주기도문에 나타나 있는 여섯가지 간구(청원)은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위한 구체적인 필요”로서 앞의 세가지 간구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자신의 삶의 목표와 의지”를 나타냅니다. 나머지 세 가지 간구는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유지되는 신앙표시이며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삶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상호관심에 대한 권면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기도문의
둘째 부분에 나타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기원은 배고픈 돼지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꿀꿀거림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이 보존되는 것과 모든 필요의 충족의 아버지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진정한 의미 “일용할 양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이 번역되면서부터 이 말의 진정한 의미가 여러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역본들은 번역가들의 진지한 노력과 묵상에 의하여 본래의 뜻을 서로 어긋남 없이 조금씩 드러냈으며 결국 이 부분의 가장 논란의 대상이었던 “일용할”(헬라어,에피우시온)의 의미가 정당하게 밝혀져 이 기원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1.일용할(Daily)의 의미 이 말의 헬라어 원어는 에피우시오스(epiousios)이며 본문에서는 목적격인 에피우시온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 전체와 헬라 문학을 통틀어서 여기 주기도문에만 사용되고 있는데 아마도 이 단어는 마태복음의 기록자인 마태에 의해 두 단어가 하나로 합성된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에피우시오스”는 “1을 위하여”라는 뜻의 ‘에피’(epi)와 “다가올”(to come)의 여성현제분사형태인 ‘이우사(iousa)가 결합되어 ’에피우사‘ 곧 ’올‘(coming)의 뜻이 된 것입니다. 결국 에피우시오스가 coming(오는, 올, 다가올)의 뜻이라면 “일용할 양식”의 의미는 계속되는 모든 날의 양식(Bread for the coming day)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 아침에 기원을 하면 그것은 오늘(그날)의 양식을 위한 기원이 되고 저녁에 이 기도를 드리면 ’오는 날‘ 곧 내일의 양식을 위한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william.B)
2.양식(Bread)의 의미
1카토릭(Roman Catholic Church)에서는 성체 곧 주님의 최후 만찬 석상에서의 빵(주님의 몸을 상징)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성찬예식은 매일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주기도문의 이 기원은 ’매일 거행되고 받아야 할 성찬을 위한 기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매일 성찬예식을 거행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이것만이 옳다고 고집부리지는 않았습니다.
2여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공급받아야 하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이 기원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이 공급되어 영혼이 굶주리지 않고 살찌우게 될 것을 기원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3또한 이 기원은 “내가 곧 생명의 떡(bread)이니”(요6:35)라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매일의 필요한 능력과 도움과 힘을 공급받지 못하면 하루도 살아 갈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4위의 세가지 의미와 더불어 일용할 양식의 진정한 의미는 문자 그대로 매일 다가오는 삶에 있어서 우리의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그 날(그 때)의 양식을 구하는 기원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순간 순간 아주 단순한 일상적인 필요까지도 하나님께 맡기고 의탁함으로써 자신의 모든 필요가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된다는 신앙을 표현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어마어마하고 굉장한 일들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불쌍하고 가련한 한 이웃의 가장 근본 문제인 “빵”의 필요를 아시고 그것까지도 충족해 주시는 “적은 것에까지도 관심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이 기원 속에 들어 있습니다. 5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의미는 앞날의 미리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삶에서 벗어나 현재의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믿음)으로 사는 것을 선언하는 고백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창조질서와 섭리 속에서(마6:34)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매일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자연의 웅장함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을고백하며 살아간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랴! 네번째 기원의 총체적 의미의 교훈
1.이 기도 속에는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옵소서 하는 이 기도는 자신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잘못된 특징은 이기주의와 자기 중심적인 사고인데 이것들은 상호무관심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네번째 기도의 의미를 진정으로 생각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이웃의 굶주림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배부름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며 이웃의 궁핍을 보고도 혼자만의 부요함을 즐길 수 없는 자세로부터 이탈하지 않으려는 신앙의 의지가 이 기원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기도는 자신의 이기적 요구 충족을 위한 간청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이웃에게 해를 주지 않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이웃에게 관심을 주며 이웃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삶은 되지 못할지언정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이웃의 재물이나 행복을 탐내는 것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2.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것은 자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위한 기원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사치나 쾌락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거부가 되었다는 이삭의 축복을 기억하면서(창26:12-18) 자신도 모르게 거부가 되기를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웃을 생각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더 많이 채웠다는 결론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잠언30장에 나타나 있는 “아굴”의 기도를 보십시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니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도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 우리 마음 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소유를 위한 탐욕 탐욕이 아니라 단지 필요한 먹을 양식만을 하나님께 구하는 겸손한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멋있는 삶을 창조해 나가는 원동력입니다. “꼭 필요한 것들 외에 고 관심을 가지지 마십시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음은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하게 최고 결국 우리의 삶은 그릇된 길로 나아가고 말 것입니다(gregory) 우리는 우리의 이웃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욕심을 부리고 사치와 허영을 꾀할 때 범죄하게 됩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에 다른 어떤 이웃이나 대상이 울게 되고 슬픔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식탁에 몇 가지의 반찬을 감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식탁에 진수성찬 산해진미를 올려 놓기 위해 다른 사람의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한다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이웃 사랑을 모독하는 무서운 불신앙적 범죄 행위로서 주님은 그러한 대상들을 용서치 않으십니다.
3.주옵소서의 기원은 우리가 정당하게 노력한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채워지기를 기쁘게 여기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만약 “주옵소서”라고 말한 후 팔짱을 끼고 음식이 입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모두 다 굶어 죽고 말것입니다. 하나님은 음식을 만들어서 기도하는 사람의 입에 억지로 넣어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어떤 일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룩할 수 있는 주문이나 알라딘의 요술램프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기원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떠나서는(하나님 없이는) 어떤 양식도 얻을 수 없을을 깨우쳐 주려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모든 필요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된다는 사실을 가르텨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 능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삶으로부터 성도는 결코 이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양식을 위해 하나님께 구하면서 수고하고 힘써 땀 흘리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열매를 거둔다는 사람과 자신의 노력을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열매를 공급해 주신다고 믿는 생활 속에서 일하는 자의 즐거움은 비교될 수 없습니다. 결론 주기도문의 네번째 기원은 하나님께 대한 의지와 신뢰의 표현인 동시에 우리 이웃을 위하여 더 많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내려지도록 수고와 땀을 흘리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한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주실 것을 구하는 동시에 우리 이웃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힘쓰고 수고할 것을 다짐하는 기원입니다.
자신의 모든 필요에 대하여 하나님만이 공급원이 되시므로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살겠다는 고백과 이웃에게 무관심하지 않고 항상 이웃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수고하겠다는 다짐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합당한 삶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권면해 주시는 주기도문의 네번재 간구는 기도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행복은 부자가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되시며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아래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받으면서 이웃의 행복을 위해 힘쓰고 애쓰는 삶으로부터 출발되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힘찬 고백과 더불어 이웃을 위해 수고하기로 어떤 계획이나 목표를 갖고 매일을 살아가십니까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한 진정한 삶의 계획과 목표가 없다면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의 의미없는 삶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와 이웃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기도에 합당하게 매일 매일을 하나님 나라와 이웃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살게 하옵시고 이웃의 행복 속에서만 진정한 나의 행복을 맛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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