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생활 (마6:1-18)
본문
앞에서는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새명을 누리는 삶, 하나님 백성으로 서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굶주린 영혼이 하나님의 긍휼로 배부름을 얻은 후에 이웃의 굶주림과 가난을 불쌍히 여겨 채워주는 긍휼의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의를 성실한 영적 파산자가 하나님의 값없는 의로 배부름을 얻은 후에 의로운 삶을 사는 삶, 남을 긍휼히 여기며 그 안과 밖이 그 마음 과 행위가 온전히 성결한 삶을 살며, 나를 핍박하는 원수까지, 도저히 사랑 할 수 없는 원수까지 사랑하고 그극 위해 기도하며, 그의 어그러진 것들을 사랑으로 바로잡아 온전케 하는 화평의 삶을 살되 이와같은 삶 가운데 끊임 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긍휼과 생명의 교통을 누리는 것, 그리고 우리는 미워하고 핍박하는 세상 가운데서 오히려 세상을 위하는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며, 하나님 자녀의 의로운 삶의 빛을 비춤으로써 성결과 긍휼과 사랑과 화 평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온 세계에 증거함으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케 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 이것 이 곧 영생의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복된 영생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대개 세상 사람의 표준에 보면 이것은 손해보는 삶이요,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것이 복된 삶이요, 이것이 행복한 삶이 요, 이것이 생명의 삶입니다. 남을 착취하고 짓밟으면서까지 돈벌고, 권리, 명예 차지해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참 복된 것일까요 아니면 나 자신을 허비하면서까지 죽어가는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스스로의 삶을 망쳐버린 그 사람들을 다시 온전케하는 그 삶이 복된 삶일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삶, 그것이 참 생명의 삶이요, 복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의로운 삶을 살 때, 여기서 의로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의로운 삶을 살 때 당연히 취해야 할 삶의 근본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대원칙 으로 6장 1절에 나타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 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사는 의로운 삶, 영생의 삶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사랑 을 얻은대로, 성령님께서 힘주시는대로 이웃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며, 또한 우리의 성결한 사랑의 삶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을 증거하 려는 하나님 영광을 위한 삶이요, 이러한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생의 삶은 그 동기에서부터, 그 출발점에서부터 과정과 목적과 능력, 그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 근원을 두고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더럽고 추악한 자를 생명의 은혜로 간구하게 살려는 동기가 되며, 출발점 이 되며, 먼저 나를 불쌍히 여겨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동기가 되며, 더 나아가서 오직 성령님께서 그 능력으로 이런 삶을 살게 하시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신다면 자연 히 그리고 당연하게 우리의 시선은 늘 하나님을 향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삶의 근본 자세를 본문 말씀이 거듭거듭 확인하면서 하나의 고정 된 형식으로 표현하되, 사람 앞에 보이려고 뭐 어떤 것을 하지 말고 오직 은 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만을 향해서 하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 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 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 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 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원칙 즉,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오직 하나님만을 의 식하고 행해야 한다고 하는 이 원칙을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구제라고 하는 구체적 행위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구제라고 하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서 긍휼을 베푸는 행위인 만큼 이웃 사랑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기에, 구제라는 한 가 지 행위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 사랑의 행위에 다 적용되는 원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구제할 때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 때, 도움을 베풀 때 뭇 사람의 주위를 끌기 위해 나팔을 불지 말라 그랬습니다. 사람들의 시 선을 끌기 위해서 나의 선행을 보아주었으면 하고 즉, 사람들로부터 갈채와 칭찬을 듣기 위해서 회당이나 골목 어귀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선을 행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참된 믿음에서 행하는 이웃 사랑의 동기와 출발점이 어디에 있습니 까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출발점과 동기는 언제나 하나님 께서 나를 사랑하사 긍휼히 여기셨으니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사 긍휼 히 여기셨다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이웃 사랑의 출발점과 동기입니다. 이처 럼 하나님에게서 출발한 이웃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해주면 저 사람이 어떻게 해 주겠지'라는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었으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남을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새 생명이 시키는대로 내 이웃에게 베푸는 이 조그마한 사랑의 행위, 이 일을 통해서, 이 미천한 것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로 기뻐하시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 주었으니까 저 사람이 어떻게 해주겠지, 칭찬하리라'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이웃 사랑의 동기와 출발점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 라고 하였습니다만, 사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 을 사랑하거나 긍휼히 여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긍휼을 느끼 지 못하는 것은 그가 죄인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망할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니 하나님의 긍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호된 시어머니 밑에서 자란 며느리치고 호된 시어머니가 안된 다는 법이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가 사랑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도 선행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을 도와주는 경우도 있고, 좋은 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긍휼을 베푸신 체험이 없는 사람의 선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동기와 출발점이 항상 자기에게 있고 자기 자랑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가지 좋은 일을 하면 남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나팔을 불지 않고서는 좀이 쑤셔서 못견딥니다. 어떤 사람은 행하기 전 부터 이런 일을 하겠다고 먼저 외고 다닙니다. 때로는 마음 속에서 은밀하게 다른 사람이 나의 선행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갈채를 보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다른 사람이 칭찬해 주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섭섭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교만한 바리새인 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선행과 경건을 자랑까지 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 이런 것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교회를 섬기지 않았습 니까' 이런 사람은 자기의 선행을 알아주지 않으면 삐뚤어지고 불평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만일 의로운 삶을 산다고 합시다.
선을 행하는 삶을 산다고 합시다. 그러나 신자가 사는 의로운 삶이 과연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의로운 삶 자체가 은혜로 주 어진 것 아닙니까 더러운 생활하던 자가, 죄를 물 마시듯하는 더러운 죄인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삶을 살게된 자체가 복된 생명의 삶이요, 그 것도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힘 주심으로 살게 되어 있으니 오 직 감사할 수 있음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서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것처럼 하면서 실속은 자기 영광과 자랑을 위해, 좀더 노골적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의를 행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오 직 성경 말씀 처럼 위선자라고 불려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하는 의, 우리가 사는 의로운 삶이라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당연히 살 아야 할 삶이요, 당연히 살아야 할 삶도 내 힘으로 살 수 없어서 하나님의 힘으로 산 것이니, 어떻게 그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또한 만일 사람의 칭찬과 갈채를 바라고 사람 앞에서 행한, 사람을 의식하 고 선을 행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사람의 영광과 칭찬을 바라 고 행했으니, 그리고 그가 기대했던 사람의 영광과 갈채를 이미 받았으니 그 가 받을 것을 다 받은 셈이요, 하나님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 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 사람의 칭찬과 갈채를 바라고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자랑하기 위해 행한 모든 선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오른손이 행하는 선행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하는 선행, 이것은 결코 사람을 의식한, 그들 이 보아주기를 바라고 행한 선행은 아닐 것입니다. 너희는 선을 행하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오직 하나님만 을 위해서 행하라. 사람은 몰라도 은밀한 중에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너희 삶에, 풍성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리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 말씀에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이웃관 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있어서도 그 동기와 목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이 하나님을 의식한,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끼리나 그저 너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내 이웃을 대할 때 하나님을 통해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 고 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면 결코 원수를 사랑 할 수 없고, 내가 손해를 보아가면서까지 남에게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물론 충동적으로 동정심이 생겨서 적선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사람 사람끼리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사람을 위해 희생해야 하며, 나를 핍박하 고 미워하는 저 사람을 내가 왜 사랑해야 하나 그런 의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오직 동기와 목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이루어질 때,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셨으니'에서 시작하여 '이 미 천한 것으로 성도의 성결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하셨으니 감사할 뿐이라,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하옵나이다'라고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긍휼과 사랑을 베풀 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 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내 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 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앞에서는 이웃과의 관게에서 이루어지는 의로운 삶에 대해 말씀했습니다마는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물론, 우리 모든 삶이 하나님과의 관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마는 좀더 직접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해 즉,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가장 직접적인 관계에서 이 루어지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에 있어서는 더더욱 앞에서 말한 원칙,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행하는 행동이어야 한다고 하는 그 원칙이 적용되 어져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람 사람끼리의 일어나는 일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식하고 행동해야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에 있어서는 더더욱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에 있어서까지 사람을 의식한 기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회당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큰 길 모퉁이에 서서 큰 소리로 자기 기도 잘하는 것 자랑해 가면서, 자기 경건을 자랑해 가면서 하는 기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만 저 자신도 때때로 많 이 범하는 죄입니다. 사람은 외식하는 기도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도 골라서 하고, 말을 골라서 한다는 것 자체가 죄일 수는 없으나 하여 튼 사람을 생각하고 아름다운 말을 쓰려고 하고,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 하는 기도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통성기도하자 하면 제일 큰 소리 를 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중심이 뜨거워서 그렇게 기도한다 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마는, 참으로 자신의 경건과 기도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 하면, 자기의 경건을 자랑하려는 마음 이 섞여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니고 사람을 향한 기도가 되니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가장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에 대한 이 말씀을 논의하기 전에 우선 '왜' 하나님과의 관게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삶의 대표적 예로서 기도를 말하였을까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이 사실 은 한 마디로 신자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근본 자세는 기도하는 자세임을 암 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는 살아게신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하나님과의 사귐, 하나님과의 교통의 한 형식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가장 절실하게 체험하는 사귐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을 전제하지 않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나무나 돌이나 비인격적 물건에 대고 또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사람,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일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가리 켜 정신나간 사람, 미친 사람이라고 합니다. 기도한다는 자체는 인격의 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내가 말한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 행위에 있어서 인격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가장 깊이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한다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통 치하시는 전능자로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신 분 이요,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필요를 채우시리라는 믿음과 신뢰와 사랑을 고백하는 행위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의 모든 존재와 삶이 주께 달려 있음을, 주께 달려 의존되어 있음을 믿고, '주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간구하오니'라고 하는 자세가 기도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살아계신 것과 즉, 살 아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인격으로 우리와 만나 우리 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요,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즉, 하나님 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오는 자에게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 고,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임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무릇 자기에게 힘이 없음을, 도움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자만이 남에게 무엇을 구한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자기가 다 할 수 있 으면 무엇 때문에 남에게 구차하게 이렇게 달라고 구하겠습니까 무얼 구한 다고 하는 자체가 나는 힘이 없고 연약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필요를 채워 줄 것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우기 우리가 간구하는 바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한 다고 하는 사실은, 결국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 속에 역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과 귀함이 얼마나 큰지 말 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 신자의 경우 참된 생명의 삶,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순종의 삶을 스스로 힘으로 살 수 없는 만큼, 오직 성령님의 힘으로 살 수 있는 만큼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전에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냐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은 내어 맡기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만 좀더 구체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는 자세에 대해서 말한다면 바로 기도하는 것, 기도하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자세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을 우리는 기도하는 것에서 발 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라는 것은 나의 힘없음과 연약함을 고 백하고 하나님의 능력 입기를 간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매 순간을 모든 행동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그 뜻을 물으며 힘주 실 것을 간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정해놓고, 장소를 정 해놓고 기도하는 것은 귀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거기서만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삶의 매 순간 순간마다 모든 행동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며, 힘주실 것을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자기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요, 따라서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이요, 성령님을 의지하는 사람 이 아닙니다. 또한 기도의 본질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드 리는 기도 속에 우리의 마음의 소원과 희망이, 내가 바라는 것들이 적나라하 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들 즉, 나의 소원과 희망은 더 근본적 으로 그 저변에 깔린 나의 삶의 자세와 삶의 목표를 반영합니다. 따라서 누 가 어떤 기도를 하는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가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 지,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목표로 하고 사는 사람인지, 그 사람의 신앙의 성격을 대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가 이처럼 귀하고 중요한 것 이니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하는 것에 더 깊이 있는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대개 세상 사람의 표준에 보면 이것은 손해보는 삶이요,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것이 복된 삶이요, 이것이 행복한 삶이 요, 이것이 생명의 삶입니다. 남을 착취하고 짓밟으면서까지 돈벌고, 권리, 명예 차지해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참 복된 것일까요 아니면 나 자신을 허비하면서까지 죽어가는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스스로의 삶을 망쳐버린 그 사람들을 다시 온전케하는 그 삶이 복된 삶일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삶, 그것이 참 생명의 삶이요, 복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의로운 삶을 살 때, 여기서 의로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의로운 삶을 살 때 당연히 취해야 할 삶의 근본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대원칙 으로 6장 1절에 나타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 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사는 의로운 삶, 영생의 삶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사랑 을 얻은대로, 성령님께서 힘주시는대로 이웃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며, 또한 우리의 성결한 사랑의 삶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을 증거하 려는 하나님 영광을 위한 삶이요, 이러한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생의 삶은 그 동기에서부터, 그 출발점에서부터 과정과 목적과 능력, 그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 근원을 두고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더럽고 추악한 자를 생명의 은혜로 간구하게 살려는 동기가 되며, 출발점 이 되며, 먼저 나를 불쌍히 여겨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동기가 되며, 더 나아가서 오직 성령님께서 그 능력으로 이런 삶을 살게 하시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신다면 자연 히 그리고 당연하게 우리의 시선은 늘 하나님을 향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삶의 근본 자세를 본문 말씀이 거듭거듭 확인하면서 하나의 고정 된 형식으로 표현하되, 사람 앞에 보이려고 뭐 어떤 것을 하지 말고 오직 은 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만을 향해서 하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 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 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 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 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원칙 즉,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오직 하나님만을 의 식하고 행해야 한다고 하는 이 원칙을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구제라고 하는 구체적 행위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구제라고 하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서 긍휼을 베푸는 행위인 만큼 이웃 사랑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기에, 구제라는 한 가 지 행위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 사랑의 행위에 다 적용되는 원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구제할 때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 때, 도움을 베풀 때 뭇 사람의 주위를 끌기 위해 나팔을 불지 말라 그랬습니다. 사람들의 시 선을 끌기 위해서 나의 선행을 보아주었으면 하고 즉, 사람들로부터 갈채와 칭찬을 듣기 위해서 회당이나 골목 어귀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선을 행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참된 믿음에서 행하는 이웃 사랑의 동기와 출발점이 어디에 있습니 까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출발점과 동기는 언제나 하나님 께서 나를 사랑하사 긍휼히 여기셨으니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사 긍휼 히 여기셨다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이웃 사랑의 출발점과 동기입니다. 이처 럼 하나님에게서 출발한 이웃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해주면 저 사람이 어떻게 해 주겠지'라는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었으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남을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새 생명이 시키는대로 내 이웃에게 베푸는 이 조그마한 사랑의 행위, 이 일을 통해서, 이 미천한 것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로 기뻐하시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 주었으니까 저 사람이 어떻게 해주겠지, 칭찬하리라'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이웃 사랑의 동기와 출발점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 라고 하였습니다만, 사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 을 사랑하거나 긍휼히 여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긍휼을 느끼 지 못하는 것은 그가 죄인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망할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니 하나님의 긍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호된 시어머니 밑에서 자란 며느리치고 호된 시어머니가 안된 다는 법이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가 사랑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도 선행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을 도와주는 경우도 있고, 좋은 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긍휼을 베푸신 체험이 없는 사람의 선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동기와 출발점이 항상 자기에게 있고 자기 자랑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가지 좋은 일을 하면 남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나팔을 불지 않고서는 좀이 쑤셔서 못견딥니다. 어떤 사람은 행하기 전 부터 이런 일을 하겠다고 먼저 외고 다닙니다. 때로는 마음 속에서 은밀하게 다른 사람이 나의 선행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갈채를 보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다른 사람이 칭찬해 주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섭섭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교만한 바리새인 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선행과 경건을 자랑까지 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 이런 것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교회를 섬기지 않았습 니까' 이런 사람은 자기의 선행을 알아주지 않으면 삐뚤어지고 불평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만일 의로운 삶을 산다고 합시다.
선을 행하는 삶을 산다고 합시다. 그러나 신자가 사는 의로운 삶이 과연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의로운 삶 자체가 은혜로 주 어진 것 아닙니까 더러운 생활하던 자가, 죄를 물 마시듯하는 더러운 죄인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삶을 살게된 자체가 복된 생명의 삶이요, 그 것도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힘 주심으로 살게 되어 있으니 오 직 감사할 수 있음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서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것처럼 하면서 실속은 자기 영광과 자랑을 위해, 좀더 노골적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의를 행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오 직 성경 말씀 처럼 위선자라고 불려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하는 의, 우리가 사는 의로운 삶이라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당연히 살 아야 할 삶이요, 당연히 살아야 할 삶도 내 힘으로 살 수 없어서 하나님의 힘으로 산 것이니, 어떻게 그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또한 만일 사람의 칭찬과 갈채를 바라고 사람 앞에서 행한, 사람을 의식하 고 선을 행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사람의 영광과 칭찬을 바라 고 행했으니, 그리고 그가 기대했던 사람의 영광과 갈채를 이미 받았으니 그 가 받을 것을 다 받은 셈이요, 하나님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 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 사람의 칭찬과 갈채를 바라고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자랑하기 위해 행한 모든 선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오른손이 행하는 선행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하는 선행, 이것은 결코 사람을 의식한, 그들 이 보아주기를 바라고 행한 선행은 아닐 것입니다. 너희는 선을 행하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오직 하나님만 을 위해서 행하라. 사람은 몰라도 은밀한 중에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너희 삶에, 풍성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리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 말씀에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이웃관 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있어서도 그 동기와 목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이 하나님을 의식한,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끼리나 그저 너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내 이웃을 대할 때 하나님을 통해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 고 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면 결코 원수를 사랑 할 수 없고, 내가 손해를 보아가면서까지 남에게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물론 충동적으로 동정심이 생겨서 적선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사람 사람끼리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사람을 위해 희생해야 하며, 나를 핍박하 고 미워하는 저 사람을 내가 왜 사랑해야 하나 그런 의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오직 동기와 목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이루어질 때,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셨으니'에서 시작하여 '이 미 천한 것으로 성도의 성결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하셨으니 감사할 뿐이라,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하옵나이다'라고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긍휼과 사랑을 베풀 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 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내 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 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앞에서는 이웃과의 관게에서 이루어지는 의로운 삶에 대해 말씀했습니다마는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물론, 우리 모든 삶이 하나님과의 관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마는 좀더 직접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해 즉,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가장 직접적인 관계에서 이 루어지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에 있어서는 더더욱 앞에서 말한 원칙,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행하는 행동이어야 한다고 하는 그 원칙이 적용되 어져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람 사람끼리의 일어나는 일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식하고 행동해야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에 있어서는 더더욱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에 있어서까지 사람을 의식한 기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회당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큰 길 모퉁이에 서서 큰 소리로 자기 기도 잘하는 것 자랑해 가면서, 자기 경건을 자랑해 가면서 하는 기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만 저 자신도 때때로 많 이 범하는 죄입니다. 사람은 외식하는 기도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도 골라서 하고, 말을 골라서 한다는 것 자체가 죄일 수는 없으나 하여 튼 사람을 생각하고 아름다운 말을 쓰려고 하고,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 하는 기도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통성기도하자 하면 제일 큰 소리 를 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중심이 뜨거워서 그렇게 기도한다 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마는, 참으로 자신의 경건과 기도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 하면, 자기의 경건을 자랑하려는 마음 이 섞여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니고 사람을 향한 기도가 되니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가장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에 대한 이 말씀을 논의하기 전에 우선 '왜' 하나님과의 관게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삶의 대표적 예로서 기도를 말하였을까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이 사실 은 한 마디로 신자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근본 자세는 기도하는 자세임을 암 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는 살아게신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하나님과의 사귐, 하나님과의 교통의 한 형식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가장 절실하게 체험하는 사귐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을 전제하지 않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나무나 돌이나 비인격적 물건에 대고 또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사람,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일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가리 켜 정신나간 사람, 미친 사람이라고 합니다. 기도한다는 자체는 인격의 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내가 말한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 행위에 있어서 인격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가장 깊이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한다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통 치하시는 전능자로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신 분 이요,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필요를 채우시리라는 믿음과 신뢰와 사랑을 고백하는 행위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의 모든 존재와 삶이 주께 달려 있음을, 주께 달려 의존되어 있음을 믿고, '주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간구하오니'라고 하는 자세가 기도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살아계신 것과 즉, 살 아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인격으로 우리와 만나 우리 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요,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즉, 하나님 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오는 자에게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 고,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임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무릇 자기에게 힘이 없음을, 도움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자만이 남에게 무엇을 구한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자기가 다 할 수 있 으면 무엇 때문에 남에게 구차하게 이렇게 달라고 구하겠습니까 무얼 구한 다고 하는 자체가 나는 힘이 없고 연약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필요를 채워 줄 것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우기 우리가 간구하는 바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한 다고 하는 사실은, 결국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 속에 역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과 귀함이 얼마나 큰지 말 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 신자의 경우 참된 생명의 삶,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순종의 삶을 스스로 힘으로 살 수 없는 만큼, 오직 성령님의 힘으로 살 수 있는 만큼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전에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냐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은 내어 맡기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만 좀더 구체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는 자세에 대해서 말한다면 바로 기도하는 것, 기도하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자세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을 우리는 기도하는 것에서 발 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라는 것은 나의 힘없음과 연약함을 고 백하고 하나님의 능력 입기를 간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매 순간을 모든 행동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그 뜻을 물으며 힘주 실 것을 간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정해놓고, 장소를 정 해놓고 기도하는 것은 귀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거기서만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삶의 매 순간 순간마다 모든 행동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며, 힘주실 것을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자기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요, 따라서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이요, 성령님을 의지하는 사람 이 아닙니다. 또한 기도의 본질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드 리는 기도 속에 우리의 마음의 소원과 희망이, 내가 바라는 것들이 적나라하 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들 즉, 나의 소원과 희망은 더 근본적 으로 그 저변에 깔린 나의 삶의 자세와 삶의 목표를 반영합니다. 따라서 누 가 어떤 기도를 하는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가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 지,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목표로 하고 사는 사람인지, 그 사람의 신앙의 성격을 대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가 이처럼 귀하고 중요한 것 이니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하는 것에 더 깊이 있는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댓글목록 0